수로보니게 여인 (7)

에바다: 열려라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연속 설교 첫 시간에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꼬투리 잡아서 시비를 거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막 7:1-23).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보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부정하다는 말씀과 동시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7:6)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다윗의 자손, 메시아임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훼방과 간섭을 피해서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에 올라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쉼을 갖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막7:24-30).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과 비교되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불렀는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달리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신분이나 겉모습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이방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췄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꼬투리를 잡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개라고 불려도 좋다는 겸손과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가복음 7장 마지막 세 번째 본문에 의하면(막7:31-37), 수로와 시돈을 떠난 예수님께서 역시 이방 땅 데가볼리를 거쳐서 갈릴리 호숫가에 가셨습니다. 그때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셔서 양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향해서 탄식하신 후에 “에바다(열려라)”외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입술이 풀렸습니다.

 

앞에서 등장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말도 잘하고 듣기도 잘했지만, 신앙적으로 귀가 막히고 올바로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는 눈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큰 믿음이라 칭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고백하는 입을 갖기 원합니다. 에바다 – 열어 주시는 우리 주님의 손길을 구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닮기 원합니다. -河-

상 아래 개들도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동안 주일 예배에서 살펴보았던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말씀에 “개(dog)”가 등장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개 취급하셔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도와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개”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자녀”에 반대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험한 표현입니다.

 

물론, 본문의 개는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라기보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작은 개)에 가깝습니다.
주인의 식탁 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강아지를 떠올리면 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자녀)의 잃은 양을 위해서 오신 것을 인정합니다.
대신, 식탁에서 개에게 던져주는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15:28)고 말씀하시니
그 시각에 험한 귀신에 들려 있던 딸이 회복되었습니다.

 

2.
개는 인류와 아주 오래전부터 친숙한 동물입니다.
사냥은 물론 운송 수단, 양몰이를 비롯한 경비견으로 사용되었고,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의 역사도 제법 깁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개를 신의 형상으로 사용하고
주인이 죽었을 때 함께 무덤에 묻을 정도로 거룩하고 친숙한 동물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가족처럼 대우받는 최고의 애완동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개를 귀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우선, 식습관에 대한 구약의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을 개에게 던지라고 하니
개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동물이고 개 자체가 부정합니다(출 22:31)

 

엘리야 시대의 가장 악랄했던 왕 아합과 그의 왕비 시돈 출신 이세벨이 죽었을 때
개들이 그들의 시체와 피를 핥아먹을 것이라고 했으니
죽은 것을 접촉하는 개 역시 부정합니다(왕상21:23-24).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도
구약과 같은 맥락입니다. 부정한 이방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개를 비교적 좋게 묘사한 것은 경비견인데
그것도 짖지 못하는 경비견이라고 했고(사56:10)
욥기에는 양을 지키는 개라는 표현이 나오는 정도입니다(욥 30:1)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의 정신을 흐리고 교회를 헤치는 사람들을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에 비유했습니다(빌3:2).

 

요한계시록에서도 개들은
점술가, 음행하는 자, 살인하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러니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심하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여인의 신분, 자존심, 가능성을 모두 망가뜨린 말씀입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을 개에 대입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으니
예수님도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다급했고, 그 정도로 예수님을 신뢰했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한길만 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닮고 싶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가짐과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끝까지 예수님을 쫓기 원합니다.

 

다급한 기도 제목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참빛 식구들에게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참빛 식구들이길 기도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 15:28)

 

하나님,
저희도 큰 믿음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3 이-메일 목회 서신)

수로보니게 여인 (6)

– 네 믿음이 크도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임을 강조하면서 “가나안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자를 쫓아 보내시라고 요청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 생각해서 선수를 친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입을 여셨는데,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로보니게 즉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외된다는 완곡한 거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만 가라고 말씀하신 바 있으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렸을 것입니다(마10:5-6).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절망적인 말씀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절까지 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울부짖습니다. 거절의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더욱더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는 여인의 믿음이 돋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대답하십니다. 자녀(유대인들)의 떡을 개들(이방인)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는 유대교 전통에서 부정한 동물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포함한 이방인을 가리키는 거친 표현입니다. 그러자 여인이 분위기를 바꾸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개 취급받아도 상관없으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말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고 말씀하시면서 딸을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왜 그토록 차갑게 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셨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테스트를 멋지게 통과해서 딸도 고쳤고 큰 믿음이라는 칭찬까지 받았습니다.

 
다른 의견은, 예수님은 여인을 수로보니게 출신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시고 처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가 여인이 끝까지 예수님을 구하는 것에 마음이 움직여서 딸의 병을 고쳐 주시고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이 본문의 흐름에 더욱 적합해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예수님의 냉정한 태도와 더불어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여인의 큰 믿음을 닮고 싶습니다!-河-

한 끗 차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사무엘상을 마치고 사무엘하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첫 번째 지도자 엘리와 사울이 무너지고
그다음에 세워진 사무엘과 다윗이 하나님께 쓰인 받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후반부는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왜 사울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다윗은 흥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2.
사울의 외모는 출중했습니다.
그의 외모와 달리
사울이 처음 왕으로 세워질 때는 수줍고 소심했습니다.
그가 훗날 교만하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왕으로 변질된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사울의 영적 멘토는 사무엘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었고,
이스라엘 첫 번째 왕 사울을 차근차근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고 조언했습니다.
사울 역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사무엘 선지자와 동역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이라는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적대국을 물리치고
연거푸 전쟁에 승리하면서 사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무시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납니다.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이고 안하무인이 됩니다.
다윗이 장차 왕이 될 것을 알면서도
다윗을 제거하고 사울 왕국을 세우려 합니다.

 

마지막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는
자신이 쫓아냈던 신접한 여인(당시의 무속인)까지 찾아갔습니다.
처음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3.
다윗은 베들레헴 목동 출신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베들레헴을 찾아왔을 때,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으십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왕궁에서 사울에게 임한 악령을 쫓아내지만,
왕이라는 직책에 미련을 갖기보다
순간순간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서
광야 생활을 할 때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아비멜렉이라는 제사장을 곁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씩 있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울을 제거하지 않고 그 힘든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자기 사람들(군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로
장차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질 때를 착실하게 준비했습니다.

 

4.
사울과 다윗을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외모는 사울이 다윗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하지만 사울과 다윗의 인생,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지위와 명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시작되었을까요?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지에 있었습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신실(信實)함이 두 사람의 큰 차이였습니다.
어찌 보면 한 끗 차이입니다.

 

세상에서는 격차가 심하고, 매우 다양한 인생이 펼쳐지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한 끗 차이로 성패가 갈림을 보입니다.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끝까지
그리고 변함없이 주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하나님,
처음과 끝이 같은 신실함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16 이-메일 목회 서신)

 

수로보니게 여인 (5)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께서 갈릴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페니키아 문명의 중심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 올라가신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강조하면서 가나안 여인으로 부름)은 나사렛 출신 예수님과 전혀 다른 태생과 신분이었습니다. 그의 딸이 귀신에 사로잡혀서 고생하는 것 외에는 부족함이 없는 대도시 출신 여인입니다.

 

하지만 완벽한 인생은 없고, 부족하고 아픈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셨다는 소식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복음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수소문을 했기에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오는 모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마지막 기회였기에 울부짖으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보아도 예수님의 침묵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제자들이 여인을 돌려보내라고 독촉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과 같은 맥락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을 들어 주실 수 없다는 일종의 거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익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동네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마1:5-7)고 부탁하신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대부분 이스라엘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앞으로 제자들과 장차 부르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쯤 해서 포기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갈 만도 한데, 더욱더 예수님께 달려듭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절을 하면서 간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25절). “주여”라는 호칭이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자신을 도와 달라는 것은 자기 딸과 자신을 동일시한 표현입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의 침묵과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가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부러울 정도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진정한 구도자의 믿음과 태도를 배웁니다.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렵고 실망스러울수록 예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河-

산불

 

 1.
작년에 이어서
캘리포니아에 산불이 다시 극성입니다.

 

7월 중순에 시작된 딕시(Dixie) 산불은
샌프란 면적의 30배에 달하는 90만여 에이커를 태웠습니다.
아직도 60%정도만 진화된 상태라니 엄청난 규모입니다.

 

8월 중순에는 스탁턴 동쪽에 위치한 산악 지대에서
산불이 나서 20만여 에이커를 태웠고 절반 정도 진화된 상태입니다.

 

올해 북가주에서 발생한 산불을 대충 계산해 보니
130만 에이커에 달합니다.
이것은 샌프란시스코 전체 면적의 44배에 해당합니다.

 

북가주의 산불은
작년부터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여름철 가뭄이 심해지고
리노 북쪽의 산악지대에 눈이 일찍 녹으면서
마른 나무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워낙 커다란 면적에 산불이 났기에
비가 오는 것을 기다릴 뿐
인간의 힘으로 진화하는 것도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집을 빠져나와서 대피하고
마을 전체가 타서 없어지는 등
산불이 난 지역의 주민들이 겪는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2.
산불은 산의 생태계 유지에 필요한 면도 있습니다.
번개를 비롯한 자연의 현상으로 발생한 산불을 뜻합니다.

 

요즘 발생하는 산불은 인재에 가깝습니다.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가 가속되면서
기후 변화(climate change)가 생겼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자동차나 화석 연료에서 발생하는 온실 가스로
지구 온도가 올라는 것이고,
기후 변화는 지구 온난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이상 기온 등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악순환입니다.
기후 변화로 서부지역에 가뭄이 찾아오니 산불이 잦아지고
산불은 산소를 만들어내는 산림을 태우는 것은 물론
화석 연료가 타는 것에 버금가는 온실가스를 증가시킵니다.
그러면 이상 기온이 나타나면서 악순환의 고리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최초 명령을
자칫 자연을 지배하고 개발하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서구 문명 속에 이 같은 인간 위주의 관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연을 친화적인 동료가 아니라 개발과 정복의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정복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오해한 소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연을 관리하고 유지할 책임을 주셨습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에덴동산, 낙원을 만들라는 것이지
인간이 우두머리가 되고 나머지 자연은 착취해도 된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자연을 유린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기후 온난화와 기후 변화라는 난제가 닥쳤습니다.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서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막아내야 합니다.
어떻든지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지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결단과 추진력을 요청합니다.
우리 자리에서 지구를 살리는 일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복을 올바로 사용하기 원합니다.

 

“주님, 지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하나님,
우리 지역에 단비를 흡족히 내려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9 이-메일 목회 서신)

 

 

 

 

수로보니게 여인 (4)

대답하지 아니 하시니 (1)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시간을 보내실 예정이셨는데, 한 여인이 찾아와서 예수님의 쉼을 방해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사회적 신분을 강조해서 당시의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고 이스라엘보다 부유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로보니게 태생의 여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가나안 여인이라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 던질 수 없다는 말씀으로 곧바로 이어지는데, 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이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행간을 채워줍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가나안 여인이지만, 예수님을 향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15:22)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 여인이 크게 외치면서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5:23).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딴판입니다. 두로라는 이방 지역이어서 여인의 외침을 외면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맞은편 데가볼리 지역 거라사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사람을 불러내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니 예수님의 속마음을 헤아릴 생각도 없이 소리치는 여인을 쫓아 보내자고 섣불리 제안합니다. 제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도 간절히 외치며 하나님을 쫓았지만, 아무 대답을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끝까지 기다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래 참음에서 결판나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힘이 빠집니다. 그때 곁에서 제자들처럼 함부로 말하고 판단하는 이웃이 있다면, 더 쉽게 자책하게 되고 신앙도 흔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속마음을 점검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단순히 귀신들린 딸이 병이 낫기를 원하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을 향한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과 그녀의 진심이 일치하는지 알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또한, 이방 여인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냉정하게 대하신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속마음을 파악하고 끝까지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큰 믿음의 비결임을 배웁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