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3)

– 베들레헴을 향해서

 

룻기 같은 이야기체 성경 본문을 네러티브(narrative)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절반 이상이 이야기체 본문입니다. 네러티브에는 등장 인물이 나오고 이들의 행동과 대화를 통해서 사건들이 일어나고, 사건들이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합니다. 그러니 네러티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등장 인물과 이들의 대화와 행동입니다.

 
네러티브는 구약성경의 신명기나 신약성경의 바울서신처럼 직접적인 교훈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등장인물과 이들의 행동, 변화, 등장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보면서 독자인 우리가 교훈을 얻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네러티브 본문은 읽는 우리 자신의 입장과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과 교훈이 가능합니다. 때로는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이야기 속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성경 본문에 몰입하게 됩니다. 전형적인 성경의 네러티브인 룻기를 읽으면서 성경의 이야기체 본문 즉 네러티브의 힘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룻기의 서론에 해당하는 1장 1-5절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면서 모압으로 내려간 나오미는 그곳에서 10년을 살면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간 곳이 죽음의 땅이 된 것입니다. 모압에서 얻은 두 며느리가 있었지만, 나오미는 홀로 되어서 모압 땅에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룻기 1장 6-18절은 베들레헴의 가뭄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가 모압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본문은 네러티브의 특징대로 나오미와 두 며느리 간의 대화가 주를 이룹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남편을 잃은 세 여성이 함께 떠나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시어머니 나오미가 발길을 멈추더니 두 며느리에게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합니다. 모압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나오미는 타향살이의 힘듦을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향해서 왜 모압에 남아야 하는지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나오미의 설명을 들은 며느리 오르바는 모압에 남기로 합니다. 그런데 다른 며느리 룻은 나오미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답니다.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 가겠답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남편을 잃은 세 여인이 함께 동고동락하려는 마음이 귀합니다. 무엇보다 나오미에게 붙어서 함께하겠다는 룻에게서 합리적인 이유를 넘어서 끝까지 신앙의 길을 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갈보리 십자가까지 동행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

성도

좋은 아침입니다.

 

1.

몇 주전,

아침마다 큐티를 전송하시는

어떤 목사님의 유튜브를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다음 하나님께 가시면

자신의 묘소에 “OOO 성도”라는 묘비를

자녀들에게 부탁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백성)에 해당하는

영어식 표현은saints입니다.

성자를 The Saint라고 하는데,

우리 일반 그리스도인들도 saints라고 부릅니다.

 

헬라어 <하기오스>역시

거룩하다는 단어에서 파생된 <성도>라는 뜻입니다.

 

2.

교회에서는 “성도”라는 말을

집사나 권사가 아닌 일반 교인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성도라는 말을 쓰거나 듣는 것은

초신자 같은 느낌이거나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직분을 갖지 못한 분을 부를 때입니다.

 

말 그대로 ‘거룩한’표현인 성도가

직분을 가리키는데 쓰이는 것은 유감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성도”로 불리기를

기대하고 소원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다음 하나님께 가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와 같은

이 세상의 직분은 아무 소용이 없고

우리 모두 “성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테니까요.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19:8)

 

 

3.

기독교와 교회가 세상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요즘이기에

“성도”라는 말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성도”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지 교회에서 직분이 없는 분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성자”의 반열에 걸맞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하고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마5:16).

 

그 어떤 호칭보다

“성도”라고 불리길 바랍니다.

얼마나 근사하고 고귀한 말인지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모두 거룩한 성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기 원합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19:8)

 

 

하나님,

주님 백성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성도로 세상과 주님 앞에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18 이-메일 목회 서신

룻기 (2)

– 모압 땅으로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구약성경의 룻기는 사사시대가 배경입니다:”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1:1). 수요예배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옳은 대로 행하던 때입니다. 무엇보다 지도자격인 장로들, 레위인, 심지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들까지 자기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누구 하나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룻기는 4장으로 구성된 매우 짧은 말씀입니다. 작게 보면 한 가족의 이야기인데, 멀리 보면 이스라엘에 다윗이라는 최고의 왕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다윗은 곧 예수님의 조상이 되니 룻기가 성경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작지 않습니다. 그런데 룻은 이스라엘 출신이 아닌 이방 족속 모압 여인입니다. 모압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긴 하지만, 정통 이스라엘 여인이 아닌데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특별합니다. 룻은 마태복음 첫 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룻기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 사는 엘리멜렉(“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과 나오미 (“나의 기쁨”) 가족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베들레헴에 기근이 닥쳤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 기근은 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재난이었습니다. 엘리멜렉 부부는 두 아들 말론(“병약함”)과 기룐(“끝남”)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피난갑니다. 물이 있는 모압 땅에서 잠시 거주하다가 돌아올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모압에서 살아가는 엘리멜렉 가족의 체류신분은 “나그네(게르 ger)”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엘리멜렉처럼 기근이 찾아왔을 때 외국으로 피난간 경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에 왔지만, 기근이 닥치면서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기근이 닥치자 그랄이라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방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아내 사라와 리브가를 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으면, 큰 일 날 뻔했습니다. 야곱도 기근이 들어서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기근을 피해서 모압으로 내려간 엘리멜렉 가족에게 힘든 일이 연거푸 닥칩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어머니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습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룻과 결혼시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십년이 지났을 때 두 아들마저 죽습니다. 살기위해서 모압 땅으로 피난을 왔는데 그만 나오미만 홀로 남았습니다. 룻기는 이렇게 슬픈 나오미의 가족사로 시작합니다.

 

세상 일이나 인생사가 마음먹은 대로 펼쳐지지 않습니다. 설명이 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 지 룻기를 통해서 발견하기 원합니다. -河-

싱어게인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번 독서 모임 후기에서

한국의 한 TV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싱 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그동안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가수로 활동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무명 가수들이

이름도 없이 1번 2번 30번 등 번호표를 달고 나와서

심사위원들 앞에서 경연을 펼칩니다.

 

독서 모임에서

<싱 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이 화제가 된 이유는

출연자 중에 유명하신 목사님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모나 성품이 매우 점잖으신 목사님이신데

자세히 보면 목사님을 닮았고

자유분방한 것 같으면서도 질서가 있는 성품에

예사롭지 않았던 무명가수가 목사님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분이 부른 노래만 유튜브로 들었는데

기사를 보니 마지막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꽤 독창적인 노래를 부른 개성 있는 가수였답니다.

 

자신은 애매한 장르를 노래했고

방에서나 가수로 활동할 정도로 무명이었는데

프로그램을 통해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경연 프로그램이 자신을 세상과 맺어준 소개팅 자리였다고 했습니다.

 

2.

<싱 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 명칭 가운데

“어게인/again”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경연에 출연한 수십 명의 가수들은

자칫 노래를 접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무명 가수로 있다 보면

자신감도 잃고, 노래를 계속할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다시 노래할 기회가 찾아왔으니 얼마나 설렜을까요!

 

물론, 이번에도 주어진 기회를 잡지 못하고

다시 무명가수로 돌아간 분들도 있을 겁니다.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분들도 “어게인”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다시/again”라는 말은 꽤 매력적입니다.

 

잘못했거나 실수한 것을

다시 만회할 기회가 생긴다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은

다시 반복하면서 완전히 마스터할 수 있습니다.

 

인생길을 걷다 보면,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집니다.

그 기회를 잡는 것이 성경에서 말한 “세월을 아끼는 인생”일 것입니다.

 

2021년도 한 달 이상 지났습니다.

새해 첫날에 결심했던 것이 작심삼일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시작해 봅시다.

미국에 처음 올 때 가졌던 마음가짐도 해이해졌을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 마음, 초심(初心)으로 돌아갑시다.

 

신앙에도 “다시”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기본을 잊어버리고,

기독교인 답게 살지 않고 세상을 쫓아간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안에 붙어있지 않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집니다.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악한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게인” – 그때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다시’ 되새기고 ‘다시’ 신앙의 기본을 다지기 원합니다.

 

“다시/ again”라는 말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 주신 새날을 시작합시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장 23-24)

 

 

하나님,

다시’ 시작하면서

우리의 삶을 정돈하고 온전한 하나님 백성으로 나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11 이-메일 목회 서신)

룻기 (1)

– 사사시대

 

팬데믹 가운데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 모두에게 힘과 위로, 그리고 소망이 되는 말씀이길 원했던 시편 91편을 지난주에 마쳤습니다. 오늘부터 구약성경 룻기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룻기의 역사적 배경은 그동안 수요예배에서 공부했던 사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후, 40년 동안 광야 생활 끝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야 할 덕목을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조목조목 알려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결단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곳의 토착신이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 것을 구체적으로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눈에 보이는 가나안 신들을 쫓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있을 때는 하나님 말씀을 지켰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으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사(judges)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이방 민족의 통치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외손잡이 사사 에훗, 여성 드보라, 기드온, 입다가 대표적인 사사들입니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힘들면 다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때마다 사사를 세우셨지만, 나중에는 사사들도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등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나실인 삼손이 이방 여인들의 품에 쌓여서 사사답지 않게 생활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사기 마지막 4장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인 레위인들이 앞장서서 잇속을 챙기고, 도덕성을 상실하는 등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에 닥친 재난입니다.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여서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내분입니다.

 

이처럼 사사 시대는 어지러운 세상이었습니다. 룻기는 바로 이런 사사시대가 배경입니다. 앞으로 룻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선한 하나님 백성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우리가 가야 할 바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河-

생쥐와 인간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 독서 모임에서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을 읽었습니다.

 

<생쥐와 인간>은 살리나스 출신인 존 스타인벡이

1937년에 발표한 중편 소설입니다.

 

<생쥐와 인간>이라는 책 제목은

로버트 번스의 “생쥐에게”라는 시에서 왔습니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일이 제멋대로 어그러져,

고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 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 하잖아!

 

스타인벡의 소설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이 배경입니다.

 

“조지”와 “레니”라는 목장 노동자 청년이 주인공입니다.

조지는 체격이 작지만 당찬 청년이고

레니는 큰 체격을 갖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약간 떨어져서

조지가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둘은 누가 봐도 단짝입니다.

 

이들이 취직한 목장에는

당시 자본가를 대표하는 목장 주인의 아들이 있습니다.

작은 키를 숨기기 위해서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체격이 좋은 사람에게 시비를 걸곤 합니다.

 

조지와 레니를 비롯한 목장의 노동자들은

행여나 해고될까 두려워 주인의 눈치를 봅니다.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감옥 같은 벙커가 작품의 배경입니다.

그곳에 있는 노동자들은 모두 외롭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서로를 경계하고 어디나 그렇듯이 크고 작은 갈등이 생깁니다.

 

2.

레니는 부드러운 물체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꼭 쥐는 습관이 있습니다.

주머니 속의 생쥐와 작은 강아지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소설 속의 복선이어서

레니가 주인의 아내 머릿결을 만졌다가 목을 조여 죽인

사건이 소설의 절정입니다.

 

소설은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주인과 목장 사람들이 레니를 잡아서 복수할 것을 알고 있는

친구 조지가 총으로 레니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려우니 친구 간의 우정도 유지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느 노동자들처럼 조지와 레니도

열심히 돈을 모아서 자신들만의 농장을 갖고, 레니가 좋아하는 토끼도 키우고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같은 자신들만의 공간을 꿈꾸지만,

언불생심 거친 세상은 이들의 꿈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3.

위에 소개한 번즈의 시구처럼

아무리 사람이 계획을 세워도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은 꽤 힘듭니다.

 

구조적인 악이 존재하고

개인의 습관, 이기적인 본성, 거기서 파생하는 또 다른 비극까지

소설 속에서 스타인벡이 그리는 세상과 인물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하루하루 거친 현실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과 같은 세상을 마주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끊임없이 악한 본성이 살아납니다.

우리 마음이 타락한 세상의 축소판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4.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비극으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너무 힘들 때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숨는 것도

그리스도인만이 누리는 은혜요 특권입니다.

 

공동체 가족끼리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서로를 세워주고 함께 걷는 신앙의 동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정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조지와 레니가 꿈꾸던 낙원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열매를 보기 원합니다.

 

p.s. 행여나, 대공황과 같은 팬데믹 기간에 세상의 악한 구조에 눌려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힘없는 노동자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4)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Ps 23:4)

 

하나님,

우리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

신앙의 동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4 이-메일 목회 서신)

시편 91편 (5)

내가 그와 함께 하여

 

매년 첫째 달에는 그해의 표어를 갖고 주일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올해는 작년과 똑같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표어로 살기로 했기에, 팬데믹 가운데 새해를 맞는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시편 91편 말씀을 다섯 번에 걸쳐서 나눴습니다.

 
연속 설교 중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시편 91편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이상적입니다.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말씀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작동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시편 91편 말씀이 있는 그대로 분명히 이뤄질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을 조심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시편 91편을 붙잡고 살았는데, 말씀대로 삶이 펼쳐지지 않았다고 실망할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나누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바로 지금, 말씀을 통해서 힘과 용기를 얻고 다시금 믿음의 자리로 나왔다면, 시편 91편 읽기를 잘한 것입니다.

 
혹시 나중에 말씀대로 삶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도, 그 순간 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시편 91편을 읽으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읽고 대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때마다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건지시고 높이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91편은 88편부터 이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지난 두 주 동안 살펴본 시편 91편 14-16절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 보이시는 에피파니의 순간입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뒤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고, 어려운 중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체험한 자신의 백성들을 건지시고 높이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간구할 때, 얼씨구나 응답하십니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15절).

 
하나님 백성이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결국에는 건지셔서 영화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랫동안 장수하는 것은 위험이 많았던 옛날에는 최고의 복입니다. 장수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 즉 구원까지 연결됩니다.

 
새해 첫 달에 함께 나눈 시편 91편 말씀이 2021년 우리 인생길에 토대가 되고 푯대가 되길 바랍니다. 참빛 식구들이 걷는 인생길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천사들을 보내서 보호해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