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3)

서로 사랑하라

 

교회에 들어온 또는 밖에서 교회를 흔드는 그릇된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한 요한일서 4장은 7절로 오면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판을 치고 교회를 흔들어도 하나님께 속한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세력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일수록 교회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고 교회 안에 침투한 악한 세력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을 강조하는 커다란 이유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답게 요한일서 전반부에서도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을 밝히는 빛인데, 형제를 사랑하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면 어둠에 행하는 것입니다(요일2:9-11). 또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기를 부탁하면서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갖고 신앙은 물론 형제와의 관계와 세상의 삶을 풀어나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지향성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결정됩니다.

 

사랑에는 진실함과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성이 없는 사랑은 아무 힘이 없고 위선적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진실한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최고의 사랑을 직접 실천하신 것입니다 (요15:13).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사랑 그 자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요일4:8). 하나님께서 사랑의 근원이고 시작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만, 우리 안에서 생기는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나눠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전파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을 모르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먼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느끼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河-

소중한 하루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번 사도 요한을 소개하면서

100세 가까이 장수하면서

요한복음, 세 권의 요한 서신,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노년의 사도 요한은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100세 시대가 되었다지만

단지 100세를 사는 것보다

100년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웃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감사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꽉 채워진 100세를 산다면

그야말로 사도 요한에 버금가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비록 100세를 채우지 못하시고

9월 30일에 하나님께 가셨지만,

94년의 성상을 멋지게 사신 선배 그리스도인이 계십니다.

 

경기도 남양주 매그너스 요양병원에서

대한민국 현역 최고령 의사로 일하셨던 한원주 원장님이십니다.

실제 직책은 과장이지만, 사람들은 “원장님”으로 불렀답니다.

 

한 원장님은

구한말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전형적인 기독교 집안 출신입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의사가 되었고,

물리학을 전공한 남편과 함께 유학 길에 올라서

내과 전문의가 된 후에 미국에서 10년 동안 의사 생활을 하다가

1968년에 귀국해서 병원을 개업하셨습니다.

당시는 유학을 다녀온 의사가 드물어서 돈을 많이 버셨답니다.

 

그런데

병원을 개원한 지 10년 만인 1978년,

남편이 먼저 하나님께 가면서

한원주 원장님의 인생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하늘처럼 의지하던 남편이 없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그때 한 원장님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남편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십니다.

 

“뭘 그렇게 울고불고하느냐, 넌 누구보다도 부요하게 살아왔다.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았고,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미국 구경도 많이 했고

병원이 잘 돼서 돈도 많이 벌지 않았느냐.

너는 네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냐?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 차려라.” -신앙세계, 2019-

 

한 원장님은 월수입이 백여만 원밖에 안 되는

<우리들 의원>을 개원하고 의료선교를 시작해서

20년 동안 어려운 이웃을 치료하셨습니다.

 

82세로 우리들 의원에서 은퇴하신 후에도

의료 봉사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가시기 직전까지

남양주 요양병원에서 치매 환자를 돌보신 것입니다.

 

운동이 필요하다며

2시간 반 동안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고,

환자들의 병상을 몸소 방문하시고, 함께 걸으시면서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의사로 활동하셨습니다.

 

한원주 원장님께서 하나님께 가시면서

가족들과 직원들에게 다음의 세 마디를 남기셨답니다: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은

‘단 한 번”입니다.

 

매일 맞이하는

우리 인생의 한 날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입니다.

 

94세를 멋지게 사신 한원주 원장님의 삶도

하루하루가 모여서 94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안에서 멋지고, 근사하게 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도움이시라 (시편 46:1)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Ps 46:1)

 

하나님,

오늘 하루, 우리 모든 참빛 식구들께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을 살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8이-메일 목회 서신)

요한일서 (2)

사랑하는 자들아

 

앞으로 살펴볼 요한일서 마지막 두 장에는 우리가 믿는 신앙과 삶에 대해서 세심하게 알려줍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도 요한의 사려 깊은 마음을 느끼고 그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깊이 들어오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될 당시에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릇된 정보를 전하면서 교회를 혼란케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고, 영적인 것만을 중요시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보다 자신들의 신앙과 교리를 우선적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있으니 교회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4:1-6)에서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첫 구절에서 요한의 마음을 느낍니다.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사도 요한이 사랑으로 성도를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교훈과 권면에는 사랑과 온유함 그리고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전하는 말씀이 진정성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다른 영(spirit)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시험 test)해야 합니다. 요한은 분별하는 두 가지 기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른 영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거나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고 영만 강조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에 속한 영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이 이미 세상에 와서 교회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속한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거짓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은 세상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진리의 영을 쫓아 삽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따라서 거짓과 참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세상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에도 다양한 신앙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출세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을 반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정확한 신앙), 실제 삶에서 예수님을 쫓아서 사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정확한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과 삶이 되길 바랍니다.

 

매사에 참과 거짓을 옳게 분별하고 하나님께 속한 참빛 식구들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河-

거룩의 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겁게 느껴지는 말이 “거룩(Holiness)” 입니다.

거룩의 길을 가는 것을 더 어려운 말로

“성화(sanctification)” 라고 부릅니다.

 

용어도 어렵지만

거룩과 거룩의 길을 가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4)고 하셨고,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고 했습니다.

 

2.

알다시피 거룩은

“구별됨(separation)”입니다.

 

섞여 있거나 혼란스러운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창조 이전의 세상은 혼돈(chaos)과 공허(emptiness)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물과 육지를 나누시고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구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하나님 백성인 우리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구별되고, 삶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 백성의 구별됨이 겉까지 드러나야 합니다.

 

물론, 혼란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도

하나님 백성이 가야 할 거룩의 길입니다.

 

 

3.

유진 피터슨은 거룩한 삶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거룩한 삶은 우리 언행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현존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거룩한 삶의 저변에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설사 그것이 아무리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행동과 연계되어 있다는 확신이 깔려 있다.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거룩함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에게 임해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셀폰에 WIFI가 연결되지 않으면

셀폰 자체는 그냥 기계에 불과함과 같습니다.

 

이처럼 거룩함도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통해서 성취됩니다.

 

4.

흩어진 각자의 자리에서

새달 10월을 맞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원합니다.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더라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과 연결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저절로’ 거룩한 길을 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present y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 (Rom 12:1)

 

하나님,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고

거룩의 길을 가는 참빛 식구들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1이-메일 목회 서신)

요한일서 (1)

사도 요한

 

매년 가을에는 신약성경 가운데 한 권을 정해서 읽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도 신약성경 뒷부분에 위치한 공동 서신 요한 일서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요한 일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복음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자신의 배를 갖고 있었고, 훗날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요한의 청탁으로 베드로와 함께 집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으니 요한은 갈릴리는 물론 예루살렘에서도 통하는 괜찮은 가문 출신 같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는 특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실 때도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던 전 날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비록 잠은 들었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끝까지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를 특별히 훈련시키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의 형으로 불리는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박해가 닥치면서 일찍 순교했습니다(행12:1-2).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야고보의 순교는 초대 교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동생 또 다른 야고보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는 물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행8:14)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를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사도 요한은 서머나 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에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고,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을 기록해서 자신이 목격하고 체험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노년에 밧모섬에 귀양갔을 때 계시를 받고, 신약 성경의 마지막 말씀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100세 가까이 장수하면서 차분하게 신앙의 길을 간 인물이어서 사도 요한 또는 장로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부탁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고 살았을 것입니다(요19:27). 오랫동안 장수하면서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을 세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신실한 주의 일꾼으로 교회를 세웠고 결국 순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가장 적합하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요한일서 4장과 5장에서 알 수 있듯이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사랑을 강조했고, 초대교회 당시 교회에 침투했던 이단에 맞서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앞으로 요한일서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은 물론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요한처럼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河-

레갑 족속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아침 묵상에서

예레미야 35장의 레갑 족속을 만났습니다.

 

레갑 족속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레갑은 모세의 장인이 속했던 겐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지만, 가나안 땅에 거주했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여호나답)이 성경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왕 아합 가문을 심판하도록

예후를 기름 부어 세웠는데

예후가 레갑의 아들 요나답을 동역자로 불렀습니다(왕하10:15-17).

 

요나답은

예후의 초대에 기꺼이 응합니다.

 

2.

예레미야 35장에 의하면

레갑 족속은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이 침입하자

예루살렘에 옮겨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조상 요나답의 명령대로

200여년 동안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소유하지 않고

집도 짓지 않고 평생을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유목민으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 잠시 이주해서 살고있는

레갑 족속을 성전으로 초대해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대로 했더니

레갑 사람들이 자신들은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따라서

절대로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는다고 강력히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내동댕이친 이스라엘 백성을

따끔하게 교훈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레갑 족속은

조상의 명령도 목숨 걸고 지키는데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냐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3.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동부와 중서부에 많이 있는 아미쉬들이 대표적입니다.

전기는 물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채

자신들 만의 생활방식을 고수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활동했던 라르쉬(방주the ark) 공동체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삶은 물론 물질과 재능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부루더호프 공동체도 있습니다.

 

오래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현대판 레갑 족속인 셈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통해서

혹시 세속에 물들어 있는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인들이 도전을 받습니다.

 

4.

우리에게도 레갑의 전통이 필요합니다.

 

우리 참빛교회만 갖고 있는 전통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킬 전통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축복입니다.

 

가정 별로도 레갑의 전통을 세워가는 겁니다.

자신의 가정만이 간직하는 레갑의 전통입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과 삶에도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끝까지 간직하려는 자신만의 레갑 전통을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근사한 기독교인이 될 것입니다.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레갑의 신앙을 꼭 만들기 원합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앞에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예레 35:19)

Jonadab the son of Rechab shall never lack a man to stand before me.(Jer 35:19)

 

하나님,

우리 교회, 우리 가정, 개인마다

시대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레갑의 전통을 세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9. 24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 우리 예수님 (9)

불쌍히 여기시니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마지막 아홉 번째 기적은 귀신들려서 말을 못 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다시 갈릴리 선교를 위해서 집을 떠나셨습니다. 맹인들은 비밀로 하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파했기에 예수님의 명성은 갈릴리 전체로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누군가 귀신들려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께 올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렸지만,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친구가 있었듯이 이 사람에게도 가족이든 친구이든 돕는 손길이 있었기에 예수님 앞에 나왔을 것입니다.

 

말을 못 한다고 모두 귀신이 들린 것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귀신의 영향으로 말을 못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옛날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의료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이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놀라워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귀신을 쫓아낸 것은 사실이니 부인할 수 없고, 대신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의 왕을 의지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에게 나오는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의 연장선에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8장과 9장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모여있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더불어 행함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난받고 힘없이 살아가는 것을 한없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이들을 지도하고 인도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신앙과 삶이 허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그것을 거둘 일꾼이 적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 세상에서 기쁜 소식을 전할 일꾼을 찾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그 일꾼이 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