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좋은 아침입니다.

 

1.

3월 중순부터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우리는 집에서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넉 달 가까이 지났고

예전의 일상으로의 회복이 멀기만 하니 조바심이 납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집에서 지내다가

다른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날 것 같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초기에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그것을 듣고 보면서 웃으며 견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루하고,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아마, 사람들의 분노(스트레스)지수를 측정하면

꽤 높을 것 같습니다.

 

2.

우리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늦어도

6월에는 예배로 모일 줄 알았는데

8월 야외 예배는 물론 참빛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마음껏 찬양하고, 친교실에서 점심을 함께할 날이

과연 찾아올지 막연합니다.

 

엊그제 임원회에서

새로운 일상을 기정사실화하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을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교회가 모이지 못하면 반쪽짜리 사역이 되기 쉽습니다.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맞닥뜨린 상황을 선용하고 이것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기 원합니다.

 

3.

우리 교회 기도 시간은 밤 10시입니다.

 

초저녁잠이 많으신 권사님들은 8시나 9시에

그렇지 않으시면 10시를 구별하고 기도하십니다.

그 힘으로 우리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월요일 10시에

Zoom으로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10시에 <zoom 기도실>에 입장해서 채팅창에 띄운 기도 제목과

개인 기도 제목을 갖고 15분 기도하고

짧게 <센터링 침묵기도>를 갖는 식입니다.

 

30분 남짓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힘이 났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집에 있으면서도 기도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 시간이 줄어드니

삶의 호흡이 가빠지고, 영적으로 답답함을 느낍니다.

 

팬데믹으로 힘겨운 일상을 뚫고 나가는 힘은 기도라고 믿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갑시다. 다시 기본(베이직)을 챙깁시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고, 골방을 확보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 상황을 헤쳐 나갑시다.

 

기도에 힘이 있음을 경험하는 이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5:14)

This is the confidence that we have toward him,

that if we ask anything according to his will he hears us.(1John 5:1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각자의 소리로 기도할 때 꼭 들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7. 16이-메일 목회 서신)

 

 

 

 

 

 

성령 하나님 (8)

성령의 탄식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 <라함>에는 어머니가 열 달 동안 아기를 품고 있는 아기집(자궁)이라는 뜻이 있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신약성경의 아가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라함>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compass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애틋하게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 <라함>을 잘 알려주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되신 성부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를 함께 보여주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사랑이 성령 하나님 안에 통합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심정을 잘 표현한 단어가 오늘 본문 속에서 “탄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낙모스>입니다. 앞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까지 있어서 우리를 향하신 성령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실제로 힘이 없고 염려와 근심은 물론 두려움을 달고 삽니다. 몸과 마음만 약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도 연약합니다. 지난 세 시간에 걸쳐서 배운 성령의 열매를 맺기에 부족한 심성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 자신을 숨기고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여야 하는데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가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기적이고 욕심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칫 우리 기도 대부분이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 두려울 뿐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는 말씀이 마음 깊이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망설임, 염려와 근심, 신앙의 방황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게다가 성령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알고 계시니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6절).

 

성령의 탄식은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이 악한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고 후회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을 등지려는 인간의 속성은 변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 안에도 연약한 본성이 그대로 있지만, 보혜사 성령께서 하나님의 근심을 탄식으로 바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 가운데 보혜사 성령 속에 하나님의 사랑 <라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를 감싸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복음성가 가사 대로 “따스한” 성령 하나님을 깊이 느끼기 원합니다.-河-

피난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아침에 읽은 시편 142편이

계속 입술과 마음에서 맴돕니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시편이라는

표제어 때문입니다.

 

다윗은 10년 넘게

사울을 피해서 광야를 헤맸습니다.

자신이 죽인 골리앗 장수의 나라 블레셋까지 가서

침을 흘리고 미친 척하면서 살아남았습니다.

 

들로 산으로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 동굴이 다윗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2.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편 142:1:1).

 

“내가 소리 내어”라는 표현이

큰 소리로 다가옵니다.

다윗의 기도 소리가 동굴을 꽉- 채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팬데믹을 맞아서

집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렇게 거주와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할 줄 누가 알았을까요!

 

큰 소리 내서 기도하고

마음껏 찬양한 지가 까마득합니다.

주일 예배가 그리운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록 예배로 모이지 못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양하시면 어떨까요: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 도다.

 

3.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5절).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에게

동굴 만한 피난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굴은 피난처이자

자칫 적들에게 들킨다면 꼼짝없이 잡히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진정한 피난처임을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새로운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심을 믿습니다.

 

앞길이 불안한 상황 속에서

우리 마음이 심히 상합니다.

그때도 주님께서 우리의 위로가 되심을 믿습니다.

 

힘들수록 주님께 외쳐 기도하고

지칠수록 주님을 피난처 삼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 앞에서

마음껏 외쳐 기도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꼭 가집시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시편 142:6)

Attend to my cry,

for I am brought very low!  (Psalms 142:6)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을 주님 품에 안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7. 9 이-메일 목회 서신)

성령 하나님 (7)

– 성령의 열매 (3)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으로 충성, 온유, 절제를 공부하겠습니다.

 

먼저, 충성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은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헛되지 않고 반드시 보상이 있을 것을 믿고 걷는 신앙의 길입니다(히11:6).

 

충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티스>는 신실함(faithfulness)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니 우리도 신실해야 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맡은 일을 완수하는 것이 신실입니다. 세상 속에서 믿을만하다는 평판을 얻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25장)에서 각각 맡은 달란트를 갖고 열심히 장사해서 갑절의 이익을 남긴 종들은 주인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았습니다. 착한 것은 지난 시간에 배운 “양선”입니다. 선한 동기를 갖고 맡겨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성령의 열매 온유야말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온유와 겸손이 함께 갑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의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온유는 순종으로 연결됩니다.

 

이웃을 향해서도 온유해야 합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끝까지 참아주는 것이 온유입니다. 신사적입니다.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온유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엡4;2)라는 말씀대로 온유와 겸손, 오래 참음과 사랑은 이웃사랑에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는 절제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욕심과 이기적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크라테이아> 역시 “어떤 영역에 머무는 것”이라는 뜻이니 경계를 넘지 않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절제입니다.

 

바울은 절제가 아닌 것을 자세히 알려줍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는 것은 절제가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입니다(딤후3;2-5).

 

그동안 살펴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참빛 식구들에게 충만히 임해서 근사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삶을 갖추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양선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을 살펴보았습니다.

 

양선(goodness)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그것을 선한 일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양선은 친절(kindness)로 번역할 수 있는 자비와

서로 사촌지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비와 양선은 이웃을 향하기에

세상에서 빛이 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한 주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은밀하게 양선을 실천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만 아는 선행입니다.

 

이 다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사연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 손을 잡고 춤을 출 수 있는 선행이길 바랬습니다.

 

2.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믿을지 고민할 때,

죄, 구속, 은혜, 화목 등등 교리적인 것들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 신앙을 튼튼하게 만드는 교리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교리적인 영역보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예수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고

이웃들에게 양선을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이 다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춤을 출 것을 꿈꾸는 삶입니다.

상상만 해도 신이 납니다.

 

이처럼 신나게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3.

2020년도 반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팬데믹으로 3개월 이상을 집에서 지낸 특별한 일상이었습니다.

 

여전히 남은 반년의 세상과 삶이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일상 속에서

먼 훗날 하나님과 더불어 나눌 이야기 보따리를

풍성하게 채우기 원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풀어놓을 <양선> 주머니가

차고 넘치는 참빛 식구들의 인생길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The LORD your God is in your midst, a mighty one who will sa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gladness; he will quiet you by his love;

he will exult over you with loud singing.(Zephania 3:17)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출 때를 상상하면서

오늘 하루도 양선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7.2 이-메일 목회 서신)

성령 하나님 (6)

성령의 열매 (2)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가늠하는 지표가 바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맺도록 도와주시는 결실이기에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인간적인 성품과 구별됩니다. 베드로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을 언급했는데(벧후2:4),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하나님의 성품에 가장 근접할 것 같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성령의 열매 세 가지는 오래 참음, 자비, 양선입니다. 먼저, 오래 참음은 말 그대로 오래 참는 인내를 가리킵니다. 일상적인 인내도 포함할 수 있지만, 본문의 오래 참음은 환난과 핍박으로 어려웠던 초대 교회 당시의 상황을 반영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어려움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바울은 환난이 닥치면 인내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인내가 연단(단단한 신앙 인격)을, 연단은 소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롬5:3-4).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두고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시103:8)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리석은 제자들과 3년을 함께 하시면서 참고 참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모든 고통과 조롱도 참으셨으니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임이 틀림없습니다.

 

둘째는 자비입니다. 새번역은 “친절(kindnes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친절한 마음 또는 관대함을 뜻합니다. 트렌치라는 분은 자비를 “은혜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말, 상냥함,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는 배려”라고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비로 대하십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06:1)는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성경에서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은 고통 당하는 사람들(나훔1:7), 가난하고 따돌림 당하는 사람들(시68:10),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주의  백성들(시34:8)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셋째는 양선입니다. 양선은 자비와 사촌지간으로 “선함(goodness)”이라는 뜻입니다. 친절한 마음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 양선, 즉 어질고 착한 행동입니다. 양선의 반대말을 생각하면, 성령의 열매 양선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흘기는 눈, 악한 행실, 인색함, 욕심 많음”등은 선한 행동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었다면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엡5:9)의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는데 착함이 바로 양선입니다.

 

신앙생활은 물론 사람과 상황을 잘 참고 견디며, 자비를 선한 행실로 옮겨서 우리는 삶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신명기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신명기 읽기를 마쳤습니다.

 

신명기의 주제는 어떤 면에서 매우 단순하고 단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면

모든 일에 형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면

예비된 복이 저주로 뒤바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지체 없이 곧바로 이뤄지니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은 시원하지만,

실제 생활로 돌아오면 말씀과 실제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현실과 삶이

신명기 법칙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명기 말씀은

약속의 땅에서 새롭게 시작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100% 완전한 기대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야훼 종교와 달리

황금으로 만든 황소를 섬기고

도덕을 떠나서 쾌락을 즐기도록 허락하고

철저하게 신전을 찾는 손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세의 애끓는 부탁을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가나안 신앙, 제국의 신앙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2.

팬데믹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불확실성이 드리워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백신 개발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그만큼 백신 개발이 중요합니다.

 

반면, 교회는

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힘이 되거나

빛을 비추는 등대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팬데믹의 온상지라는 오명을 쓰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비롯한 신앙이 해야 할 기능이 분명히 있을텐데

그것을 찾아보기 힘드니 아쉽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생각과 삶은 어떠해야 할지요?

 

3.

다시 신명기 말씀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마음과 삶 한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팬데믹의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며

기쁨의 환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면 더 없이 감사한 일입니다.

 

불확실한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과 소망으로 이어진다는 말씀(롬5:4)을 붙잡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신명기 말씀처럼 그 효력이 곧바로 나타나지 않아도

조바심 내지 말고

끈기를 갖고 세상에 임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모세가 전해준 신명기 신앙을 마음에 품고

아무도 가지 않는 <뉴-노멀>을 사는 것입니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오늘의 일상을 살기 원합니다.

 

힘냅시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마음을 힘써 지키라 (신명기 4:9)

 

 

하나님 아버지

힘들수록

참빛 식구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6. 25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