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으로 임하는 축복

좋은 아침입니다.

1.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것이 연일
한국신문의 톱기사를 장식합니다.

엊그제는 동행한 인사가운데
말도 안 되는 몰염치한 행동을 했다는
어이없는 기사도 있었지요.ㅠㅠ

양국 대통령의 오찬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서로의 이름을 갖고 말문을 연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름에 “혜(惠)”자가 은혜/축복을 뜻하는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버락”도
스와힐리어로 “축복받은(blessed)”이란 뜻임을 언급해서
오바마 대통령이 V자로 화답했답니다.

영화 라이언 킹의 유명한 대사 “하쿠나 마타타!’도
스와힐리어로
“근심하지 마, 걱정근심 다 떨쳐버려”라는 뜻이었지요.

스와힐리어는 케냐와 우간다 등
5천만 명이 쓰는 언어라고 하니
케냐에 뿌리를 둔 오바마 대통령의 이름 앞에
버락이 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2.
축복받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라크”입니다.

히브리어는 대개 세 개의 자음으로 구성이 되어서
그것들이 모음을 만나면서
동사가 되기도 하고, 명사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세 개의 자음들이 각기 다른 파생어를 만들어냅니다.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스와힐리어 버락과 히브리어 바라크가
서로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바라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성경에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바라크에는
축복받다는 뜻 외에
“무릎 꿇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무릎 꿇어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말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가는 것입니다.
항복하는 표시로 두 손을 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함을
바라크라는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릎 꿇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크 – 은혜와 축복을 겸해서 주실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6)

Oh come, let us worship and bow down; let us kneel[바라크] before the LORD, our Maker! (Psa 95:6 ESV)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무릎 꿇고 주님께 나가는
참빛교회 식구들을 한없이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5.9 이-메일 목회서신)

복음의 능력 5 : 소망

“음식 없이 40일을 살 수 있고, 물 없이 8일을 살 수 있다. 공기 없이 4분을 견딜 수 있다. 그런데 소망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 표현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말처럼 꿈이 없으면 거친 인생의 파도를 견뎌내기 쉽지 않습니다. 꿈과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꿈을 꿉니다. 마음에 소원을 갖고 삽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도 소망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아름답고 선하게 에덴동산을 관리하길 꿈꾸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영역인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의 꿈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꿈을 꾸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꿈을 이루시길 기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란 듯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꿈을 깨우쳐주시지만 세상유혹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꿈은 이렇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비장의 무기를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꿈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복음에 깃든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손수 꿈을 이루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 안에 임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죽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환난과 유혹을 견뎌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는 절망과 낙심은 사라지고 오직 소망만 있을 뿐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임하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지난 3시간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음의 능력 세 가지 덕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원, 기쁨과 평강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복음의 능력이 바로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고, 예수님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흘러넘치도록 풍성한 소망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넘어서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누리는 소망입니다. 할렐루야!

복음의 능력이라는 주제의 연속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살펴본 로마서 본문을 갖고 참빛 교회 식구들을 축복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河-

여호와는 나의 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5월이 되었습니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릅니다.
봄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나무들은 청록색으로 변합니다.
(우리 동네는 5월이 되면 산이 갈색으로 변하지만)

날씨도 화창해서
몸과 마음이 환해지고
움직임이 활발해 집니다.

이처럼 5월은
고향 뒷동산에 활짝 핀 진달래처럼
봄기운이 만발한 계절입니다.

캘리포니아의 5월도
만만치 않게 아름답습니다.

이제 9월까지
화창한 날들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즈음에 바닷가라도 나가보면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의 조화 앞에서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마음까지 확- 트이게 해줍니다.

주말이면 바닷가에 떠 있는
하얀 요트들까지
우리 동네 최고의 경관이 펼쳐지는 계절입니다.

2.
그렇지만 마냥 5월을
즐길 수만은 없습니다.

학생들은 5월이 잔인한 달입니다.
한 해 학업을 마무리하는 학기말 시험들이
5월에 몰려 있기에
정신 없이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르신들은
어느덧 올해도 반이 지나간다는
세월의 빠름에 한숨이 절로 나오실 겁니다.

이처럼 5월은
올 해의 반환점을 향해서
올라가는 언덕 베기처럼 느껴집니다.

힘에 겹습니다.
등줄기로 땀이 쭉- 흘러 내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5월이 되니
올해 성경 일독이 어느덧 욥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성경일독을 포기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 때가 이릅니다.

새해를 열심히 살았지만
그리 변화된 것이나
아직 열매로 드러나는 것들이 적습니다.
힘이 빠져서
저절로 손을 내려뜨리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제 각각입니다.
엇박자 입니다.

3.
5월을
힘차게 맞이하기 원합니다.

구원의 은혜, 기쁨과 평강의 복음의 능력이
5월의 신록처럼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임하길 원합니다.

더욱 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마지막 고백이
우리의 기도요 고백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9)

GOD, the Lord, is my strength; he makes my feet like the deer’s; he makes me tread on my high places. (Hab 3:19 ESV)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꿋꿋하고 멋지게 5월 한 달을 살아내시길
새벽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발걸음이
사슴 발처럼 높고 험한 곳을 다니면서도
피곤치 않게 하옵소서.
복음의 능력이 신앙과 삶 속에 그대로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5.2 이-메일 목회서신)

뿌리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새벽기도회 성경읽기는
로마서까지 왔습니다.
매우 조촐한 인원이 기도회를 갖지만
말씀의 은혜는 동일하게 임합니다.
새벽을 깨우는 신앙의 기쁨도 있습니다.

로마서 9장부터
오늘 읽은 11장 속에는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비탄(파토스)이 서려있습니다.

선택된 민족이지만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들로부터
배신자라고 낙인찍혀서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형제와 골육 친척인 유대민족이
예수님의 복음 속으로 들어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뒤숭숭한 시대에
두고 온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미국을 가슴에 품고
바울의 심정으로 기도해야겠습니다.

2.
로마서 11장 18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Do not be arrogant toward the branches. If you are, remember it is not you who support the root, but the root that supports you.  (Rom 11:18 ESV)

여기서 뿌리는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구원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오신 성부 하나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성자 예수님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구원을 이루도록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가지는 유대인들이 믿던
율법과 그들의 신앙 전통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인데
유대인들은 가지를 갖고 자랑을 하다가
그만 뿌리에서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가지는
하나님께 접붙여져서
양자된 우리들 각각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가지는 밖에 있어서
잎도 나고 예쁜 꽃도 피우지만
정령 가지를 보전하는 것은 뿌리입니다.

뿌리는 땅 속에 있어서 쉽게 눈에 띠지 않아도
수분을 흡수하고
가지에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가지 신앙은 겉으로 화려해 보일 수 있지만
금방 시들고, 쉽게 꺾입니다.

반면에 뿌리신앙,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에 기초한 신앙은
흔들리지 않고 곧게 자라갈 수 있습니다.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8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를 보전해 주시고
굳게 붙잡아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뿌리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꼭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4.25 이-메일 목회서신)

진주 (眞珠)

진주는 유사이래 귀한 보석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주는 아픔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딱딱하고 커다란 이물질이 몸 속으로 파고들면 조개는 체액을 동원해서 그것을 감싸 안습니다. 자기 안에 침입한 이물질을 밀어내지 못했을 때 마지막으로 발휘되는 조개의 생존본능이 진주라는 귀한 보석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진주는 귀한 보석이면서도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풍깁니다. 그러다 보니 진주를 소재로 삼은 문학작품이나 노래가 꽤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살리너스 태생이면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존 스타인벡의 <진주>라는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는 키노와 주애너라는 가난한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멕시코 만의 작은 마을에서 조개잡이를 하면서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사랑의 결실인 아기가 전갈에 쏘입니다. 온몸이 퉁퉁 붓고 고열에 시달리는 아기를 둘러엎고 의사를 찾아가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키노와 주애너는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진주조개잡이를 떠납니다. 아내 주애너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이라도 된 듯이 바로 그날 갈매기 알 만한 진주를 발견합니다. 횡재를 한 것입니다. 이제는 의사가 집에 찾아와서 아기를 고쳐줄 것입니다. 진주를 팔면 돈이 없어서 미뤄두었던 결혼식을 올릴 참입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학교에 보내서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게 되었다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착하고 순진한 부부를 세상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진주를 따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집에 도둑이 듭니다. 집을 통째로 불태워버리기도 합니다. 남편 키노는 온 몸이 피범벅이 되면서 진주를 지켜냅니다. 진주를 팔기 위해서 중개상들을 찾아 가지만 헐값에 구입하기로 단합이 끝난 뒤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편 키노의 성격이 점점 포학해집니다. 눈에 살기가 돕니다. 진주를 지키기 위해서 총도 준비합니다. 가족들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예전의 행복은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집안에 가득합니다. 아내 주애너가 차라리 진주를 다시 바다에 던져버리자고 제안했지만 이미 진주에 마음을 빼앗긴 남편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대도시로 가서 진주를 팔 작정을 하고 밤중에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진주를 노리는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습니다. 남편 키노가 이들과 마지막으로 격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적들이 쏜 총에 그만 아들이 죽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남편이 제정신이 듭니다. 가족을 위해서 진주에 집착했건만 그것은 아들을 잃는 비극으로 끝이 났습니다. 죽은 아들을 메고 고향마을로 돌아온 키노와 주애너는 바닷가로 가서 진주를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작가 스타인벡은 그 대목에서 진주를 놓고 “흉측했고 어두침침했으며 악성 종양 같았다”고 묘사합니다. 행운을 가져올 줄 알았던 진주, 팔자를 고쳐주길 바랬던 진주, 아니 진주를 팔아서 아들에게는 공부를 시키고 뭔가 근사한 인생을 살게 해주고 싶었던 젊은 부부의 꿈은 이렇게 도루묵이 되었습니다.

작가 스타인벡이 자신의 작품을 우화(偶話)라고 불렀듯이 그의 소설 속에서 인생의 단면을 발견합니다. 우리들도 진주를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삶을 역전시켜주고,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멋지게 복수할 수 있는 진주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서 진주를 찾아 동분서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놓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진주를 찾고 보면 자신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진주를 지키려다가 자신도 망가지고 아들까지 잃어버린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우리들도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생길 중간 중간에 잠시 멈춰서 자신이 현재 추구하는 것, 애지중지 하면서 간직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점검해야 합니다. 손에 진주를 들고 있어도 그것이 행복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얼른 바닷가에 던져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값비싼 보석이라도 자신의 초심을 무너뜨리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주 자체에 관심을 쏟으며 살다 보면 구약성경 전도서 기자가 이미 간파했듯이 허무한 인생이 되기 십상입니다. 진주보다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의 아픔을 본받기 원합니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인생의 고난을 끝까지 견뎌내면서 값지고 고귀한 진주를 내면 깊은 곳에서 빚어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2013년 4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복음의 능력 4 : 평강 (2)

히브리어 샬롬은 평강이라는 뜻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은 물론 마음과 영 그리고 삶 전반에 평강이 임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온 세상까지 퍼져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평화는 기쁨과 더불어 대표적인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가 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시기와 다툼, 증오와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들입니다. 그때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의 평화가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망가진 평화를 회복시켜주셨지만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세상은 그렇다 쳐도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글쎄요. 세상의 평화가 미움과 분쟁으로 인해서 망가졌다면, 우리 삶의 평화는 염려와 근심 때문에 망가집니다. 염려는 우리의 존재자체를 흔드는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염려가 우리들 삶 어느 곳에든지 슬며시 들어와서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질병에 대한 염려, 마음속에 찾아오는 갖가지 근심들, 삶의 불안함, 심지어 신앙의 회의까지 대부분 염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염려는 몰아내야 합니다. 염려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삶이 망가집니다. 염려를 몰아내는 방법으로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염려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지난 일의 아쉬움을 감사로 바꾸고, 현재의 어려움도 감사로 대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지 범사에 감사하기로 작정한 마음에 염려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둘째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간구는 기도에 포함됩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는 소통이라면, 간구는 기도 가운데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간청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염려는 접근하지 못합니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슬그머니 나갈 것입니다. 염려가 불가피한 우리의 인생길이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염려와 근심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과 기도를 통해서 염려를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염려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수가 많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평강입니다.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강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그래서 평강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염려가 아닌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복음의 능력 3 : 평강 (1)

지난주에 살펴본“기쁨”정도는 아니지만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평강(peace)”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도와주시면 평화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평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샬롬(shalom)입니다. 샬롬은 달콤한 발음 이상으로 깊고 넓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샬롬은 단순히 평화로운 상태를 넘어서 모든 것이 온전한 상태를 뜻합니다. 육체의 건강, 마음의 평안,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임했습니다. 세상의 분쟁, 다툼, 갈등이 사라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세상 속에도 임합니다. 그런 점에서 평강은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세 가지 속성을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롬14:17). 세 가지 속성 한 가운데 평강이 들어있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음과 삶이 평온하고 얽힌 모든 관계에 화평이 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을 빌리면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지냅니다.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안전합니다.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이처럼 평강은 현재 우리 안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자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천군천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눅 2:1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주기위해서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다툼과 갈등으로 인해서 분열된 세상에 평화를, 질병으로 아파하는 육신에 평화를,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평화를 전하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평안하뇨” 또는 “평안할지어다”라고 인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 복음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안을 전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후에 가장 먼저 체험하는 것이 평안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할 때 마음속에 임하는 평안은 참된 예배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빼앗지 못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14:27).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기쁨을 두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는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빌 4:7,9).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안이 임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마음과 삶 깊은 곳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평강이 참빛 교회 성도님들의 삶 속에 잔잔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河-

날마다 짐을 지시는 주

좋은 아침입니다.

1.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교회 홈페이지 <성경 Q&A>에
레위기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변한 것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날짜를 보니 작년 3월입니다.
벌써 1년이 지났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작년 이 맘 때는
8년 만에 한국을 다녀왔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만났던 그리운 분들과
한국의 변화된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아내가 아팠었기에 더욱 선명하게 기억이 되지요)
그런데 눈깜짝할 사이에 1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올 해도 지나갈 것 같습니다.

2.
4월도 중순입니다.
한 해의 삶이 지치기 시작할 때입니다.

어르신들은
벌써 넉 달이 지났다는 사실만 갖고도
마음이 우울해 지십니다.

학생들은
한 학기를 마무리할 시점이고
졸업을 앞둔 청년들은 다음 단계를 계획할 시기이기에
마음이 분주합니다.

사업을 하시든지, 직장생활 또는 연구를 하시든지
4월은 쉽게 넘어가는 달이 아닙니다.
미국 전체로 보면
세금보고를 하는 달이어서 경제까지 가라앉습니다.

게다가
엊그제 터진 보스턴 테러사건으로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전쟁보다 무섭고 잔인한 것이 테러입니다.
예고도 없이, 그것도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심각한 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개인이나 특정단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시민들을 볼모로 잡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3.
이렇게 힘겨운 4월의 한가운데를 보내면서
저도 오늘 새벽 무거운 마음으로
강단에 무릎 꿇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갔습니다.

샘물처럼 제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말씀을 만났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68:19)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us up; God is our salvation.  (Psa 68:19 ESV)

본문을 히브리어 어순 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을 송축합시다.
그분은 날마다(day by day) 우리의 짐을 져 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되십니다.

주님을 송축하고 찬양할 이유가
차례로 열거되었습니다.

한참을 묵상했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음도
하나님께서 날마다 제 짐을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제 짐을 지고 가실 겁니다.
저의 하늘 아버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의 짐꾼(porter)이십니다.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렇지만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 주 하나님께서
참빛 교회 식구들의 짐도 몽땅 져주시고
순간순간 구원자로 임해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4.18 이-메일 목회서신)

복음의 능력 2 : 기쁨

복음을 다른 말로“기쁜 소식(good news)”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부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걷게 하셨으니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복음 속에는”기쁨”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했을 때 자연스레 기쁨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여러 번 약속하셨습니다.:“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마음에도 기쁨이 임했습니다. 성전 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걷게 됩니다. 그는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르면서 걷고 뛰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성경에는 기쁨과 관련된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기쁨이 얼마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임하고 동시에 우리가 누리는 기쁨의 풍성함을 잘 보여줍니다. 기쁨은 대부분 마음에 임하는 감정을 뜻합니다. 기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이 겉으로 표현됩니다. 표정과 행동으로 기쁨이 드러나고, 삶속에 기쁨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순간적인 기쁨이 아니라 환경과 마음의 상태에 상관없이 임하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시편기자는 주님께서 자신 안에 두신 기쁨은 포도주 농사가 잘 될 때 느끼는 기쁨보다 더 크다고 고백합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는 자신의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춤을 추듯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라고 선포합니다(시30:11).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 자체를 기뻐합니다. 성령의 열매에도 희락(기쁨)이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어려움이 닥치면 도리어 기뻐하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기쁨은 하나님 백성의 표지(marks)입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감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잘 간수했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모범적으로 자라갔습니다. 이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지만 도리어 기쁨으로 환난을 감당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성령의 기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임했음을 뜻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쁨의 영을 부어주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게 해 주심을 가르쳐줍니다.

기쁨은 마음속에 임하고 겉으로 표현된 복음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 우리들에게 기쁨은 필수적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기 원합니다. 기쁨으로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기 원합니다. 성령의 기쁨이 우리 안에 넘치길 간절히 원합니다.-河-

부활절 그 이후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우리 동네 날씨가 참 좋습니다.
베이 지역에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신 분들은
하나같이 이곳 날씨를 가장 그리워하십니다.

늘 말씀 드리듯이
베이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팔레스타인 지역과 매우 비슷합니다.

요즘은
겨울철 우기가 끝나고
여름철 건기로 접어드는 경계점에 있는데
팔레스타인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2.
성경대로 하면
지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던 기간에 해당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행1:3).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잡던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도
바로 이 즈음입니다 (요21장).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던
제자들을 위해서 조반을 차려주시고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네가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똑같이 물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봄 날씨 속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부활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낙심가운데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데
날씨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요?

3.
베이 지역의 화창한 봄을 맞으면서
2천년 전 갈릴리 호숫가를 거니셨던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합니다.

이른 봄날 아침,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예수님께서
베이 지역의 화창한 봄날을 즐기고 있는
우리를 찾아 오셔서 같은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푸르고 높은 하늘을 향해서 두 팔을 벌리고
우리의 사랑을 힘차게 외치며 고백하기 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1)
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Psa 18:1 ESV)

하나님 아버지
부활하신 주님과 지속적으로
사랑의 교제를 하게 하옵소서.
부활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능력 안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4.11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