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거하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요한복음을 한 장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16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말씀의 대상은 순전히 제자들입니다.
제자들만 세상에 두고 가시면서 주신
마지막 부탁의 말씀인 셈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를 비유하시면서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거하다”는 표현을 두고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에서 이탈하지 않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믿음 안에서 거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생기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끈임 없이/매사에 예수님을 대입하는 신앙입니다.

셋째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삶에서 예수님을 맨 위에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가장 위에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바람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행하는 것이지요.

2.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
If you abide in me, and my words abide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done for you. (Joh 15:7 ESV)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매사에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께 우선순위를 둔다면
당연히 구하는 것을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러모로 힘들었던 4월이 지나고
새달 5월을 맞았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5월 한 달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곳곳에서 안타까운 일들이 자꾸만 일어납니다.

이럴 때일수록
예수님 안에 거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 원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고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새 달을 맞읍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
Abide in me, and I in you. (Joh 15:4 ESV)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거함의 기쁨과 거함의 열매를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4.30 이-메일 목회서신)

쑥과 담즙

1.

구약 성경의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부른
슬픔의 노래입니다.

예레미야는
500여년 동안 이어졌던
다윗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바벨론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짓밟히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황량하고 적막한 예루살렘과
폐허가 된 성전터
말 그대로 땅의 사람들인 힘없는 백성들뿐입니다.

이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탄식하면서 애가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애3:19)

2.
오늘이 4월 16일이네요.

지난 한 해 동안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쑥을 먹는 것 같이
달콤한 음료수를 마셔도 담즙을 마시는 것 같이
한 해를 살아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가슴에 묻고 길고 긴 한 해를 지내신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이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모든 분들께
깊이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들의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3.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초와 재난 한 가운데서
소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쑥과 담즙과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결같이 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애3:20-22)

우리들 인생 여정이
마쉬멜로우처럼 달콤하고
산봉우리를 뛰어다니는 사슴 발처럼 가볍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솔직히 인생길 여기저기
아니 때로는 대부분이
쑥과 담즙의 여정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묵상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진멸되지 않고 다시 일어남을 믿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소망의 빛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내가 낙심이 되오나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됩니다.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Lam 3:21 ESV)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애3;24)
“The LORD is my portion,” says my soul,
“therefore I will hope in him.” (Lam 3:24 ESV)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잃고
여전히 쑥과 담즙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을 꼭 안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4.16 이-메일 목회서신)

사각의 링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 시간으로 5월 2일에
세기의 복싱 대결이 펼쳐집니다.

필리핀 출신의 파퀴아오와
미국 메이웨더의 세계 웰터급 통합 챔피언전입니다.

체중을 20킬로그램이나 올리면서
8체급을 제패한 파퀴아오는
필리핀을 넘어서 이미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저돌적인 복싱 스타일에 전 세계 복싱 팬들이 열광합니다.
지금까지 64번 싸워서 5번 패했습니다.

반면 메이웨더는 복싱집안에서 태어나서
일찌감치 복싱에 입문했습니다.
47번 싸워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파퀴아오와 달리
밖으로 돌면서 상대방의 펀치를 어깨 위로 흘려 보낸 후에
맞받아치는 복싱 스타일입니다.

두 사람의 대결을 일찌감치 성사시키려고 했지만
양쪽이 은근히 꺼렸습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위험부담이 있는 경기였답니다.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메이웨더의 부담감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각각 37세와 38세가 된 2015년 5월 2일
운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대진료가 2억달러를 넘고
티켓값은 최고 만 불에 이를 정도입니다.

이제 다음 주 토요일,
지상 최고의 권투선수 둘이
피할 수 없는 사각의 링에서 시합을 펼칩니다.

권투팬인 저로서는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2.
인생을 사각의 링에 비유하곤 합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이
상대방과 또는 주어진 상황과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칙을 하면 안됩니다.
주어진 규칙에 따라서,
정정당당하게 인생의 링에 올라가서 싸워야 합니다.

등을 보이면 지는 것입니다.
주저앉아도 집니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상대방을 제압해야 챔피언이 될 수 있습니다.

권투 선수가 경기에 이기기 위해서
체중 조절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이 매우 힘들다고 하지요.

혹독한 연습은 말 그대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홀로 링 위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12라운드의 경기를 위해서
한계상황에 이를 정도로 연습합니다.
반사적으로 펀치가 나오고
스텝을 밟으면서 링에서 공격하고 수비합니다.
모든 것이 훈련의 결과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허리띠를 조여 매는 것은
전쟁이나 인생의 큰 사건을 대면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준비한 것만큼 경기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지요.

우리들 역시
매일같이 인생의 사각 링에 올라갑니다.
위기와 기회에 반사적으로 대처할 정도로 훈련하면
후회 없는 시합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각자에게 펼쳐지는
인생의 사각 링에 올라가실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준비한 것을
사각의 링에서 충분히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겁니다.

힘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벧전1:13)
Therefore, preparing your minds for action[lit. having girded up the loins of your mind], and being sober-minded, set your hope fully on the grace that will be brought to you at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1Pe 1:13 ESV)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참빛 식구들이
각자의 인생을 맞닥뜨릴 때
주님의 강한 팔로 저들을 보호하시고 힘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4.23 이-메일 목회서신)

부활절 그 이후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 주보에는
주일예배순서에
교회력을 표시해 줍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 세례와 공생애(public life),
사순절과 부활절
그리고 성령 강림절을 따라서
한 해를 살도록 안내합니다.

지난 주에 부활절을 보낸 우리는
이제 부활절 둘째 주일을 맞게 됩니다.

부활절기는
5월의 성령 강림절까지 계속되고
강단 색깔은 부활을 상징하는 흰색입니다.

2.
부활절은 말 그대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기독교는 물론
우리들 신앙의 뿌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기에
교회의 가장 큰 절기가 됩니다.

사도바울은 부활 장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고전15:58)
Therefore, my beloved brothers, be steadfast, immovable,
always abounding in the work of the Lord,
knowing that in the Lord your labor is not in vain. (1Co 15:58 ESV)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우리들로 하여금
부활절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줍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견실하여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Be steadfast, immovable)

견실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은
사시사철 한결같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상록수를 생각하면 됩니다.

비바람이 치거나 눈보라가 쳐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킵니다.
게다가 사시사철 푸르른 상록수의 위용을 갖추고 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우리는
소나무처럼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폭풍우가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2주 동안 나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육체 가운데 살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그것은 “동참(partnership)”의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예수님과 함께 부활합니다.

그렇기에 부활 그 이후의 삶은
더욱더 주님의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아무도 다시 살아나실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약속하신 대로
사흘 후에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힘쓴 것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기대를 갖고
부활절 그 이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은혜와 능력이
참빛 교회 식구들의 신앙과 삶 속에
생명으로
항상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활절 그 이후의 삶이
더욱 힘차고 확신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4.9 이-메일 목회서신)

어머니

오늘은 9년 전에 하나님께 가신 어머니의 기일(忌日)입니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던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주일예배를 가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매우 화창했습니다. 어머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영주권 절차 때문에 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바로 전날 통화할 때 어머니 목소리에 힘이 남아 있어서 그래도 안심이 되던 차였습니다. 그날 따라 언덕 베기에 피어있는 갈대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머님의 영혼을 꼭 붙들어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집에 왔는데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머님께서 하나님께 가셨다는 것입니다. 막내가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을 알았기에 “시용이 오라고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가셨답니다. 끝까지 막내를 배려하신 것입니다.그날 저는 태평양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마흔 셋에 나셨습니다. 요즘은 결혼들을 늦게 해서 40대 이후에 아기를 갖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어머니께서 저를 낳으시던 60년대 초만 해도 꽤 노산(老産)이셨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무명 천으로 된 한복을 입고 머리에는 쪽을 찌고 계셨습니다. 친구들 가운데 어머니가 가장 연로해서, 어머니보다 큰 누님이 학교에 오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머리를 커트하고 파마도 하시면서 멋쟁이 신여성으로 변하셨지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다고 하지만 저 역시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늘 제 편이셨습니다. 학창시절 시험을 못 봐서 시무룩해 있으면 “그까짓 시험 못 보면 어떠냐?”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30대 후반에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여든이 되신 어머니가 사랑하는 막내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 발걸음도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출국하는 날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사내가 울면 안 된다. 어서 가서 공부하고 와라”며 한 치의 떨림도 없이 또박또박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희 가족이 떠난 후에 창문을 바라보면서 서럽게 우셨답니다. 그래도 전화를 걸 때마다 “타지에서 애들 데리고 밥 굶으면 안 된다. 쌀은 떨어지지 않았냐? 여긴 걱정하지 말아라”고 하시면서 저희를 염려하셨습니다. 정말 최고의 어머니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께 가신 어머니가 잊혀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워집니다. 어머니께서 베풀어주신 사랑들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어머니에 대한 감동적인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들에게 두 눈을 주셨지만 여섯 가지 기능을 탑재해 주셨답니다. 두 개의 눈은 “너 거기서 뭐하고 있니?”라고 물으면서 자식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눈입니다. 다른 두 개는 못난 자식들을 보면 한없이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자식을 가슴에 품은 채 무릎 꿇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나머지 두 개는 자식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을 때도 “엄마는 너를 이해해. 엄마가 너 사랑하는 것 알지?”라고 말하며 아이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물론 어머니들에게는 자식이 배가 아프다고 떼굴떼굴 구르면 무릎에 눕혀놓고 “엄마 손은 약손”하면서 배를 문질러 주는 기적 같은 손도 보너스로 장착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를 만드는 것을 지켜보던 천사가 물었답니다. “하나님 그런데 실패작이에요. 얼굴에서 물이 새고 있어요.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어서 새잖아요. 이제 어떡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그건 물은 물인데 특별히‘눈-물’이라는 거야. 엄마들이 낙심되거나 속이 상할 때, 종종 외로울 때 나오는 거란다. 참-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울 때도 나오는데 그때는 왜 나오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허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분은 어머니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엄마”라고 부를 때입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을 응원합니다. 특히 작년 이 맘 때 세월호 사고로 자식을 잃고 일 년 동안 눈물로 사신 어머니들께 주님의 위로와 힘이 임하길 바랍니다. 세상 어머니들의 눈에서 기쁨과 감격의 눈물만 나오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어머니 기일인 오늘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엄마”하고 불러봐야겠습니다. 어머니, 참 많이 그립습니다. (2015년 4월 30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은혜로 사는 삶 (3) : 나인성 과부

은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은혜’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의지)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없습니다. 은혜는 경험하고 느끼는 정(情)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동하고 감격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은혜를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 단순하게 느끼고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 속에 들어가고, 은혜 속에 거하고,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과거의 사건부터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모든 삶에 은혜가 요청됩니다. 날마다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 종일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이 은혜임을 확신하고 은혜를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했지만 결국에는 유다(“찬송”)를 낳고 하나님을 찬송했듯이 말입니다. 은혜로 사는 삶에 힘이 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삶에 용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모험도 감수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고 은혜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은혜로 사는 삶 속에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 주님과 동행합니다.

은혜로 사는 삶에 치유와 회복도 있습니다. 앞에서 은혜는 느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진다고 고백합니다.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질 때, 마음속에 있는 상처와 쓴 뿌리가 치유되고 새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경험하기 원합니다. 온 교회가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주일 이후의 6일 동안 가정과 세상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간증하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이 나인성에 들어가실 때 장례행렬을 만나셨습니다. 나인성에 사는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장례를 지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그 과부를 보셨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울지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관에 손을 대시고 아이를 살려내셨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본문 속에서 나인성 과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일하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측은히 여기시면서 찾아가셨고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河-

은혜로 사는 삶 (2) : 레아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라고 불리는 은혜 받는 방법을 소개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기도를 강조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골방기도부터 회중이 함께 드리는 통성기도까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을 것을 부탁했습니다. 셋째는 성만찬에 참석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금식과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은총의 수단이지만 이것들을 형식적으로 행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진정한 마음으로 즉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대하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금식과 성도의 교제를 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은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은총의 수단에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면 그것은 마른 잎사귀요 그림자입니다. 또 내가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업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하나님의 영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아무 공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일지라도 당신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영혼에 은혜를 전달하지 못합니다.”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비로소 충만한 은혜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구하는 열심히 요청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온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속으로 들어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고 은혜 받을 일을 하지 않은 사라의 여종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 살길이 열렸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전적인 은혜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입니다. 레아라는 이름에는 “지침(weary)” “둔함(dull)” 또는 ”들소(Wild cow)”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레아는 그의 이름 그대로 뭔가 조금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레아 역시 하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 라반에 의해서 야곱에게 시집갔습니다. 야곱은 처음부터 라헬을 사랑했기에 레아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야곱의 첫째 부인이 되었지만 레아의 결혼생활을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레아를 돌아보셨습니다.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여섯 명을 낳았고 딸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인 유다와 훗날 이스라엘의 제사장 지파가 되는 레위까지 레아의 아들입니다. 야곱은 레아에게 눈길을 두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눈길은 레아를 향했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아들인 스불론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후한 선물을 주셨다고 찬양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받지 못해서 외롭고, 누군가의 위로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 풍성히 임합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