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마무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새벽 기도회에서

마가복음 14장 말씀을 읽었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는

매우 조촐하게 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동일하게 역사함을 봅니다.

마가복음 14장 35절에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Abba, Father, all things are possible for you. Remove this cup from me.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Mar 14:36 ESV)

“아바”라는 친근한 표현을 쓰시면서 기도하심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셨음을 뜻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전합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답니다(눅22:44).

우리들의 기도와 많이 비교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타락 이래 예수님 당시까지

그리고 앞으로 있을 세상의 모든 죄 짐을

홀로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실 때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그 짐을 지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심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그러나”와 함께

확- 바뀝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절박한 순간,

예수님의 기도 마무리가 마음에 깊이 와 닿습니다.

2.

우리들의 삶이 늘 장밋빛 융단처럼

화려하고 형통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 골라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길입니다.

어떤 때는

내게 닥친 이 일만은 피해 주시길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도 합니다.

저절로 그런 기도가 나올 정도로 힘든 순간이 있지요.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우린들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들의 기도가 예수님처럼 마무리되기 원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마무리가 얼만큼 중요한지

다시금 뒤 새겨 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 삶은 물론

하나님 나라에 가장 선하고 귀한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여러 가지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지만

“주님의 뜻대로” 되길 원하는

기도로 꼬-옥 마무리하게 하옵소서.  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1.29 이-메일 목회서신)

감사의 마음

성경을 읽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자꾸만 잠이 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도 무척 많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흥미진진한 말씀도 많아서 때때로 성경 속에 푹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글을 깨쳐야 책을 읽을 수 있듯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는데도 성경에 대한 눈이 떠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 은혜 속에 들어갔을 때 성경이 비로소 하나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성경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도 필요합니다. 성경 속에는 시를 비롯해서 편지글, 예언서 그리고 이야기체 본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 장르가 들어 있어서 각각의 특성에 맞게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 파노라마> 성경공부에서 배웠듯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 각 권의 특색과 핵심 메시지를 알고 있으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연애편지, 성경이 신앙은 물론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성경 가운데 흥미진진하면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 요즘 큐티 본문인 욥기입니다. 욥기는 처음 두 장과 마지막 장만 읽으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끼인 30여장에 이르는 말씀은 우리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성경 지식과 대치되는 듯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질병이 찾아오면 죄를 지은 대가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회개의 자리로 나오기도 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복을 받고 형통하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행한 보상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우쭐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벌을 받고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욥기는 흠이 없는 의인도 고난을 받을 수 있음을 욥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반대로 욥의 친구들은 의인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욥기의 처음 두 장은 욥기 전체를 이해하는 서론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자녀들도 출세했고 당대에 소문난 부자였습니다. 자녀의 복과 물질의 복을 겸해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고난이 닥칩니다. 자녀들이 죽고, 하루아침에 재산도 모두 사라집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온 몸에 병이 생깁니다. 아내가 저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신앙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보증한 인물이 욥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단이 주는 시험이 고난으로 임했습니다.

욥기 처음 두 장에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식들과 재산이 없어졌을 때“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질병이 닥쳤을 때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는 감사를 훈련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생긴 신앙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욥이 의로운 것은 단지 그의 신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감사와 찬양으로 훈련되었음을 가리켜 줍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임을 욥을 통해서 배웁니다. -河-

블랙 프라이데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추수감사절 다음날,
사람들은 오늘을
블랙 프라이데이

위키피디아에서 블랙 프라이데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원래 블랙 프라이데이는
필라델피아에서 추수감사절 다음 날
사람과 차로 거리가 복잡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답니다.
한국에서 추석 다음 날 귀경길의 암담한 교통체증과
비슷한 뉘앙스로 들립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이 말이 필라델피아를 넘어서
두루 사용되었고
추수 감사절 다음 날의 쇼핑을 지칭하기 시작했답니다.

사람들이 추수감사절 다음 날 쇼핑을 많이 하면서
상점들이 손익분기점에서 적자(in red)를 면하고
흑자(in black)를 기록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블랙 프라이데이는 상점들이 이익을 내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은 6시에 문을 열었는데
2000년대 후반부터 4-5시에 문을 열고 파격적인 세일을 시작했습니다.
작년에는 12시에 문을 여는 midnight sale까지 나왔고
올해 Wal-Mart는 추수감사절 날 8시부터 세일을 한다고 광고를 하더군요.

이 밖에도 블랙 프라이데이는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랍니다.

블랙 프라이데이를 잘 활용하면
필요한 상품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추수감사절까지
상업화되는 듯 한 느낌이 들어서 씁쓸합니다.

2.
추수감사절은
교회가 지키는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특별히 추수감사주간에는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하면서 지냅니다.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교회력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대강절에는 주일마다 강단에 촛불을 하나씩 밝히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생명과 의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깜깜한 세상을 밝히시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not walk in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복잡하고 깜깜한 금요일,
단숨에 이익을 내려고 세일을 외치는 금요일,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샤핑 시즌
– 세상에서 말하는 블랙 프라이데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예수님,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에 거하길 다짐하는
블랙 프라이데이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행여나 우리들 안에 어두움이 있다면
생명의 빛으로 밝혀 주옵소서.
감사가 기쁨과 찬양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1.22 이-메일 목회서신)

속깊은 감사

추수감사절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추수감사라는 용어는 농경사회에 적합해 보입니다. 우리처럼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추수감사라는 말보다 댕스기빙(thanksgiving)이라는 영어표현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과 주변의 친지들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는 가을에 포도농사를 마친 후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천막을 짓고 살던 것을 되새겨 보려는 초막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1월 네 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전통은 1620년 11월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그리고 66일간의 항해 끝에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생소한 곳에서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부의 혹독한 겨울을 지내면서 절반 가량이 목숨을 잃었습니다.신앙의 자유와 신대륙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보려는 부푼 꿈을 갖고 왔지만 밀어닥친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때 이들을 도와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인디언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옥수수를 심는 법부터,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법, 산에 자라는 독초들을 구분하는 법까지 원주민들로부터 실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청교도들은 그 해 가을 첫 번째 수확을 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원주민들을 잔치에 초대했습니다. 원주민들이 청교도들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초월해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원주민들과 함께 감사의 축제를 즐긴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전통에는 이처럼 자신의 종교와 생각을 넘어서 도움을 주고 받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함께 어울려 즐기는 속 깊은 감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첫번째 추수감사절을 지키던 청교도들의 마음이 한없이 기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같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동료들 가운데 절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대륙에 와서 첫 번째 수확을 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청교도들의 마음 한 켠에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아쉽고 허전한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갖는 미안함입니다. 곧이어 닥치게 될 겨울에 대한 불안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겨울을 나면서 동료들을 더 잃게 되면 큰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든 아쉬움과 허전함 그리고 불안함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역시 속 깊은 감사입니다.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유카리스테오”입니다. “행복하다” 또는 “기쁘다”는 뜻을 갖고 있는 접두어 “유”와 “은혜”라는 의미의 “카리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받은 은혜를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첫 번째요 그 다음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은혜에 신앙을 초월해서 기쁨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보냈던 청교도들이 아쉬움과 불안함 가운데 감사예배를 드렸듯이 우리네 삶 속에도 기쁘고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기쁜 일보다 속상한 일이 훨씬 많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생각처럼 세상일이 펼쳐지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우울한 마음에 휩싸여서 감사보다 불평과 원망이 앞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 깊은 감사는 마음의 상처, 실패, 슬픔과 아쉬움까지 감사로 변환시키는 능력입니다.
요즘은 추수감사절보다 블랙 금요일 쇼핑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감사는 주는 것인데 많은 것을 값싸게 취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침 일찍 줄을 서며 쇼핑을 즐기는 분주한 발길들을 보면서 추수감사절의 본뜻이 많이 퇴색되었음을 느낍니다. 추수감사절 주간을 마무리하면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임했던 감사를 다시금 헤아려보기 원합니다. 스쳐 지나가면 잊혀질 일들도 잠시 멈춰 서서 그 안에 깃든 은혜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그때 속 깊은 곳에서 감사가 우러나올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은은한 기쁨이 샘솟고 소망의 빛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가 환해 지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해피 댕스기빙!

(2012년 11월 22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감사의 발걸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요즘은 문둥병자라는 말 대신에 한센씨병이라고합니다. 한센은 노르웨이의 의사로서 나병환자의 치료제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통상 문둥병자라고 하겠습니다. 문둥병자라면 마을에서 격리되어서 따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염이 강했기에 구약시대부터 엄격하게 관리해 오던 질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서“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너희들의 문둥병이 나을 것이니 구약의 율법에 있는 대로 제사장에게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고 정상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그들의 병이 낫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병이 나아서 정상생활을 해도 된다는 판정을 받고 세상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님을 다시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그 사람은 유대인들이 천시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다시 와서 감사하는 것을 본 예수님께서도 조금 당황하신 것 같습니다. 아홉 명은 어디로 가고 한 명만 왔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한 명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온 그 사람은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이 비슷합니다. 좋지 않은 것은 오래 기억하지만 좋은 일이나 남에게 받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할 때는 “예수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막상 병이 나으니 예수님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잘나서 병이 나은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래도 한 명이 예수님께 왔으니 그 나마 다행입니다. 그 마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세어 보아야 합니다. 감사는 잠시 멈춰 서서 기억해 내야 합니다. 섭섭한 일이나 좋지 않은 일들은 저절로 마음에 새겨져있는데 감사는 잊혀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감사는 더 쉽게 잊혀지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마련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사가 우리 삶의 여정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한 가지씩 세어보고, 마음에 담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왔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열 가지 은혜 가운데 한 가지 정도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잊어버린 아홉 가지의 감사를 찾아내고 그것을 갖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감사를 빠짐없이 기억해내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들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길 원합니다. 할렐루야! -河

첫번쨰 유월절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돌아 보셨습니다.

삶이 괴로웠습니다.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노예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출1:14)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예비해 놓으시고
자그마치 80년 동안 훈련시키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서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섭니다.
바로와 대면하면서
열 가지 재앙을 차례로 보여줍니다.

마음이 완악해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열 번째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열 번째 재앙은
이집트 사람들은 물론 가축에 이르기까지
장자/맞이들이 죽는 엄청난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들이 피가 묻혀진 문설주를
보고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넘어가다(pass over)는 뜻의 유월절이 나왔습니다.

2.
저와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형제가 보내준

메일에서 힌트를 얻은 말씀입니다.
그 형제가 보내준 영어 메일의 일부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목사님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출애굽기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는 마지막 재앙이 시작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초조했고, 근심했고, 어린양의 피가 실제로 자신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 지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공포가 생겼지만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던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아침,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해 주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명령이라고 해도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묻혀 놓으면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갈 것이라는 말씀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들이 죽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를 보고 지나갈까를
반신반의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아침,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400년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3.
어느덧 2012년도 45일 정도 남았습니다.
그 동안 320일을 무엇으로 살았는지 돌아옵니다.
내 힘으로, 내 지혜와 능력으로
바로와 같은 세상과 대면하지는 않았는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묻혀 놓았을 때
생명의 아침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해 주시고
살려주신 것입니다.

올해의 남은 기간 동안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 은혜를 실제로 체험하기 원합니다.

때때로
근심과 염려가 밀려오고
하나님을 따르면 정말 살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인생의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순종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살려주심을
우리들도 체험할 것입니다.
생명과 자유함의 아침을 맞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

밤이 지나고 유월절 아침의 생명과 해방을
맞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1.15 이-메일 목회서신)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는 우선 하나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 즉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 그 다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나온 성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결과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거듭남(born-again)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성화, 곧 거룩함의 길이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의 삶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삶의 주인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고백하듯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에 속에 갈등이 생깁니다. 옛본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거듭 태어난 그리스도의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옛성품을 예수님 앞에 완전히 굴복시키면 이런 갈등이 없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순간순간 갈등하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갈등의 과정을 말씀과 기도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입니다. 그 과정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임하는 은혜를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쉽지 않지만 이 길이 영생으로 통하는 것임을 알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최선의 길임을 알기에 감사와 기쁨 가운데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을 지은 마태입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레위가 살던 가버나움에는 큰 세무서가 있었고, 레위는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동족의 재산을 포탈하는 행동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소외된 인생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혼자서 번민하는 인생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그대로 꼼짝없이 앉아 있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보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서 좇았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뒤로 한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동안 세금을 포탈하면서 돈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쫓는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서 잔치를 베풉니다. 죄인들과 자신과 같은 세리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먹고 마시면서 친구로 지내셨습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죄인들과 함께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부르십니다. 믿음의 자리로 부르시고, 작은 예수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기 원합니다. 친구로 맞아주시고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좇기 원합니다.-河-

세상을 위해서 기도할 때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너 커서 뭐 되고 싶니?”였습니다.

그 질문에 가장 좋은 답은
“대통령”이었습니다.

왜 그때 그 시절 아이들은
커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엊그제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되었습니다.

선거에서 이긴 후에
대통령 가족이 단상에 올라왔습니다.
두 딸이 4년 전보다 많이 컸습니다.
둘째 딸은
단상에 올라오자 마자 뒤를 살짝 쳐다보더니
아버지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뭔가 말합니다.
“아빠, 뒤에도 사람들이 축하하고 있어요”라고 한 것 같았습니다.
딸의 귀띔에 대통령이 뒤로 돌아서 손을 흔들어 줍니다.
보기 좋았습니다. 그렇게 뒤까지 살피는 대통령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단상에 올라선 대통령의 가족들 가운데
4년 전에 비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 자신이었습니다.
짧은 머리였지만 흰머리카락이 보입니다.
얼굴도 4년 전에 비해서 주름이 많이 생겼습니다.

승리의 순간이야 행복하겠지만
동년배로서 (오바마 대통령은 저보다 한 살 위인 1961년생임)
그에게 맡겨진 막중한 짐을 생각하니
안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2.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60여 개 국에서 대통령, 수상, 또는 내각을
새로 선출하는 해였습니다.

우리나라도 한 달여 지나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것입니다.
개별 국가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매주 중요한 시기에
지도자로 선출되는 분들입니다.

2008년의 경제위기로
지구촌이 불황의 늪을 지나고 있습니다.
뉴욕에 불어 닥친 태풍 샌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곳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자연재해가 터집니다.
환경문제는 지구촌 전체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이 모든 문제를 관리하고 극복하는데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도 그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딤전 2:1-2)
First of all, then, I urge that entreaties [and] prayers, petitions [ and] thanksgivings, be made on behalf of all men, for kings and all who are in authority, in order that we may lead a tranquil and quiet life in all godliness and dignity.(1Tim 2:1-2)

소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튼튼해야
세상의 평화가 유지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안정될 수 있습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아주 경건하고 품위 있는 삶과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번역)

미국 대통령이 선출되자 마자
다우지수가 떨어졌고
“재정절벽(fiscal cliff)”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올해로 끝나는 각종 세금정책에 공화/민주 양당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미국,
대통령 선거를 한 달여 앞둔 한국과
지구촌의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계가 경제불황과
환경문제로 인한 재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세상을 이끌어갈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를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1.8 이-메일 목회서신)

쉼표와 숨표

좋은 아침입니다.

1.

2007년 8월,
한국일보 종교란에 실었던 컬럼입니다.
어느덧 그 이후로 5년이 지났고,
2012년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정신 없이 달려온 올 한 해였습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두 달을 어떻게 마무리할 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표와 숨표

저는 노래를 부를 때 박자를 잘 못 맞춥니다. 쉽게 말해서 “박자 치’인 셈입니다. 한번은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웅장한 음악과 감미로운 선율도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심벌즈 연주자의 동작에 제 눈이 고정되었습니다. 저처럼 박자를 못 맞추는 사람에게는 한 참을 쉬고 있다가 이따금씩 박자에 맞춰서 심벌즈를 울리는 모습이 참 신기했습니다. 저는 찬양을 하면서 손뼉을 쳐도 조금만 지나면 옆에 분들과 박자가 맞지 않아서 어색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노래를 부르면서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쉼표 때문입니다. 음정은 비교적 잘 잡습니다. 음표의 길이도 적당히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쉼표가 나오면 속수무책입니다. 속으로 ‘하나, 둘’을 세어도 번번이 들어가는 박자를 놓칩니다. 못 갖춘 마디로 시작하면 여지없이 두 번째 가사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노래하다가 쉼표가 나오면 편안히 쉬지 못하고, 피아노 반주자나 옆 사람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노래에서 쉼표뿐만 아니라 숨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숨표에 따라서 숨을 쉬어야 노래의 가사가 제대로 전달된답니다. 합창을 할 때는 함께 숨을 쉬어야지, 숨표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숨을 쉬면 다른 사람과 호흡이 맞지 않습니다. 그때도 호흡이 짧은 저는 틈틈이 숨을 쉽니다. 그러다 보면 박자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음악뿐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에도 “쉼표와 숨표”를 지켜야 합니다. 쉴 때 쉬지 않으면 나중에 피곤이 몰려와서 집중력을 잃기 쉽습니다. 인생길의 쉼표를 지키지 않고 일만하다가 중한 병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숨쉴 틈도 없이 바쁘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리 바빠도 숨은 쉬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심호흡을 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 집니다. 숨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산다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쉼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함으로 “쉼”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의 “안식”은 세상일의 중단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집안의 종들까지 일손을 멈춰야 합니다. 세상일을 접고 온전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은 세상일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모드 전환입니다.

현대인들이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루를 쉰다고 해도 그 동안 밀린 일들을 해야 합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이민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직장과 사업 그리고 복잡한 인간관계에 쫓겨서 살아갑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쉬는 법을 터득할 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이제부터 조금 쉬어갑시다. 인생의 쉼표와 숨표를 지키면서 살아봅시다. 하루를 온전히 쉬지 못한다면, 일주일에 단 몇 시간 또는 몇 분이라도 세상 일을 내려놓고 숨 고르기를 하면서 하늘나라의 삶을 연습해 봅시다. 그래야 인생의 엇박자를 막을 수 있습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8.23)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 늘 바쁜 일로 쫓기며 살지만
주님 안에서
쉼표와 숨표를 지키는 여유를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1.1 이-메일 목회서신)

공중나는 새를 보라 8 : 기뻐함

인간과 새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성대를 사용해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필요할 때마다 소리를 내지만 새들은 끊임없이 재잘거립니다. 그러다보니 새들의 소리가 노래로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울음소리로 들립니다. 그동안 살펴본 까마귀, 올빼미 그리고 지난주의 비둘기는 노래한다기 보다 운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음산한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른 아침 전깃줄에 앉아서 노래하는 참새도 있습니다. 울새라고 하는 손가락보다 작은 새도 수풀 속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립니다.

새들의 노래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새는 종달새입니다. 종달새는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노래만은 일등입니다. 창공에 날아올라서 마음껏 노래하는 종달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유명한 시인들이 종달새를 노래하는 시를 쓰곤했습니다.그 가운데 대표적인 시가 영국의 시인 셸리가 쓴 “종달새에게 바친 송시”입니다.: “반가워라. 너 명랑한 영이여! 너는 결코 새는 아니었으리라. 하늘과 그 주변에서 가슴에 넘쳐흐르는 감정을 타고난 솜씨의 노랫가락으로 쏟아내는 너는!” 이처럼 종달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밝아집니다.

종달새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성가대가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주듯이 우리들은 다양한 음정과 박자에 맞춰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받으실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구약의 시편 말씀은 찬양과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탄식하면서, 외쳐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가 임하면 자연스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할렐루야”라는 말 자체가 주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넘칩니다. 감사와 기쁨을 찬양으로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온전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종달새가 하늘 높이 올라가서 노래하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높이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을 믿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임하는 은혜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95편 1-2절에서는 모든 백성들을 찬양의 자리로 초대합니다.:“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온 백성의 찬양소리가 우렁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늘 어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찬양했습니다. 시로 찬양하고, 새 노래로 찬양하고 소리 높여 찬양하고, 여러 가지 악기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구원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이 찬양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