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4

그리스도인들은 기쁜 소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어쩌면 이 기쁜 소식이 너무 크고 존엄해서 피조물인 우리가 실감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의 풍조와 세상이 주는 기쁨에 도취되어서 복음을 간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기쁜 소식을 체험한 사람은 그 귀함과 위대함을 압니다. 그리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감사의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듯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문은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로마서 3장 22절에서“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2절에서도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쓰일 당시에는 인종이나 신분 간에 차별이 심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임한다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차별 없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임합니다. 전에는 악한 행실과 하나님을 외면하고 적대시하던 우리들이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내시고 화평케하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들 자신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지위의 변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까지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죄로 인해서 더럽혀진 우리들이 거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정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보다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백성의 삶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방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이 안전하고 세상의 풍파에도 요동치 않습니다. 둘째는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서있다는 말씀은 매사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고 준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셋째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의 영이시고 능력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 절대로 낙심하거나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모두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기쁜 소식입니다. 할렐루야!

보혈을 지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사순절 한 가운데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사순절은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일년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시간입니다.

사순절을 맞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연속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다섯 번의 설교에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말씀도 나누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입니다.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과 교회 안에 깊이 임하는 것도

어쩌면 목사의 꿈일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설교 제목만 생각해도

은혜가 되고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여러 가지 이론들과 행사들이 난무하는 요즘 교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복음을

참빛 교회 식구들과 나눌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할 뿐입니다.

2.

지난 주일날은 보혈을 지나라는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보혈 (寶血) – 한자 뜻 그대로 보화처럼 귀한 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흘려 주셨기에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혈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신 것은

우리 때문에 그 생명을 버리신 것을 뜻합니다.

그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또한 구약시대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짐승의 피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피의 제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필수적인 절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처럼 구약성경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 한 번으로

죄사함의 은혜가 영원히 [영단번/once and for all]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참 크고 귀합니다.

때로는 너무 커서,

아니 이 은혜가 실제 우리들 세상살이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 같아서

무심코 지나가기 쉽습니다.

보혈을 지나서

아버지 품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순절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깊이 묵상하고 맛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지난 주에 불렀던 찬양 보혈을 지나를 부르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하시면 어떠실까요?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 한 가운데 자리잡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8 메일 목회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째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참빛 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은 물러갔고 타락한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죄인됨을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을 때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이만큼 넓고 깊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로 큰 사랑을 입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복을 받은 셈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인생의 갈보리 언덕도 기쁨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신 것이 기쁜 소식임을 살펴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성령이 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대신에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성령님께서 오실 것이랍니다.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그 이후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들어와 거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든지 어디에나 동시에 임하십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임하시고 교회들안에도 임하십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내주(內住)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거룩하신 영이기에 죄와 더불어 거하실 수 없습니다.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 순간순간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충분한 마음과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회개는 필수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결하고 거룩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마음껏 일하실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보혜사 즉 우리를 돕는 분입니다. 진리의 영이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맞춰 살도록 가르쳐주시고 직접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와 격려의 영이시기에 우리의 마음을 만져 주십니다.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근사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릏 더해 주십니다. 자만, 아집, 욕심, 추하고 죄악된 행실을 벗어버릴 때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들 안에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변호해 주십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해 주시는 분도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우리와 친숙한 분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서 바른 길을 알려주시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말 그대로 도우미(helper)가 되십니다. 우리는 매사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감사와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친밀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이 곧 복음입니다. -河

“강영우 박사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수요일과 목요일은 정신 없이 바빴습니다.

어제는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그냥 잠자리에 들어서 이제 목요서신을 보냅니다.

제 30년 지기 친구인 국민일보 이태형 기자가

엊그제 강영우 박사님에 대한 글을 썼기에

오늘은 그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님이야 뭐- 말이 필요 없으신 대단하신 분이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이 더욱 아름답고 존경스러워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저런 신앙의 선배가 계시기에

구원의 기쁨과 하늘의 소망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고

이 아침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또 다시 새 달을 맞이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신앙과 삶이

더욱 깊어 지고 높아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목사 올림

강영우 박사 이야기

강영우 박사가 췌장암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해 말, 익명의 한 분으로부터 내게 전화가 왔다. “저, 강 박사님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아니, 왜 그러시죠?” “강 박사님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부족하지만 강 박사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요.” “어떤 방법이지요? 임상경험이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 한번도 써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차피 시한부라면 이 방법이라도 해 보면 좋을듯 해서요….”

그 분에게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강 박사가 힘겨운 상태지만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방법을시도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났다. 지난 23일 그 분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자신이 교장이라고 밝히면서 강 박사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청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다음날 연락드리겠다고약속했다. 24일 오전, 강 박사 소천 소식이 뉴스를 통해 흘러 나왔다.

나는 강 박사가 췌장암 진단 받기 한 달여 전 그와 부인 석은옥 여사를 서울 모 호텔에서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로서는 강 박사와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였다. 강 박사는 키는 작았지만 맑고깨끗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병색은 하나도 없었다. 속으로 ‘어떻게 하면 저렇게 곱게 늙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강 박사의 췌장암 발병과 연이은 소천 소식은 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유고집을 준비 중인 두란노 관계자에 따르면 강 박사 발병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강 박사를 살리기위해서 여러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 박사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집에서 마지막 인생 마무리를했다. 강 박사는 절대 긍정의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도 긍정으로 만든 긍정의 연금술사 였다. 그는 내게말했다. “실패의 순간이 인생 최대 행운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저는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난 장미꽃 이었습니다. 기적이지요. 인생에는 분명 무수한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 긍정의 사람, 강 박사가 어찌 췌장암의 공격은 그대로 순응하면서 받았을까? 그것이 나로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다. 불사조처럼 일어나서 다시 “우리에게 분명 기적이 있습니다. 저를 보세요!”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강 박사의 지난 인생과 걸맞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내 강 박사가 저항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가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충만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 안에서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기에 췌장암이 다가 왔을 때, “그래, 여기까지”라면서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음 너머의 더 좋은 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삶의 태도리라.

그와 만났을 때,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끝을 맺었다.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와 은혜의 사람 강영우 박사. 68년, 잠시 살았던 이 땅의 옷을 벗고 지금 주님과 함께 거하리라.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은 세 가지 시간대를 갖고 살아갑니다. 하나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입니다. 또 하나는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을 바라면서 사는 미래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지금 이 순간입니다. 초대교부 어거스틴은 서구사상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시간적 존재로 규정하면서, 현재만이 의미가 있을 뿐, 과거는 현재 속에 기억으로 미래는 현재 속에 기대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현재도 우리가 쉽게 포착할 수 없습니다. 단지 직관(intuition)을 통해서 현재를 느끼고 현재를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현재를 사는 직관에 대한 좋은 예를 톨스토이의 “세가지 물음”이라는 단편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옛날에 어떤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만 찾을 수 있다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세 가지 물음은 ‘일을 언제 시작해야 할까’, ‘누구와 함께 일을 해야 할까’, 그리고 ‘어떤 일이 가장 중요할까’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자문을 구했지만 사람들 마다 의견이 제 각각이었습니다. 흡족한 해답을 얻지 못한 황제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자신의 은사를 찾아갑니다. 황제의 은사는 산 속에서 도랑을 파고 있었습니다. 은사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세가지 물음을 말씀 드리고 그 해답을 구했지만 은사는 도랑만 파고 있을 뿐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그만 돌아가려는데 연로하신 은사님이 도랑을 파고 계시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은사의 도랑 파는 일을 돕게 됩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청년이 피범벅이 되어서 뛰어왔습니다. 은사와 황제는 그 청년을 정성껏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청년은 황제가 산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황제를 죽이기 위해서 중간에 매복해 있던 적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황제의 경호원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경호원들이 쏜 화살에 상처를 입고 피신해 온 것입니다. 청년은 자신을 치료해준 사람이 황제인 것을 알고는 백배 사죄하면서 용서를 빌고 서로 화해합니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려던 황제는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은사께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합니다. 그때 은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자네가 나를 돕지 않고 일찍 돌아갔으면 저 청년에게 살해를 당했을 것이니 도랑을 파고 있을 때가 가장 좋은 때였고, 자네가 나를 도운 것을 보니 그 순간에 내가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저 청년을 치료해 주지 않았으면 청년도 죽고 자네와 화해도 하지 못했을 테니 저 청년을 치료해 준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

톨스토이의 단편이 주는 교훈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고, 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지혜입니다. 톨스토이 역시 어거스틴처럼 우리는 현재만을 다룰 수 있고,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직관적으로 행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성경에도 한 어리석은 부자가 나옵니다. 그는 과거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꿈을 이룬 부자는 창고를 짓고 그곳에 곡식을 저장해 놓고 앞으로 편하게 살기 위해서 미래를 설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날 밤에 그 부자를 데려가십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한 부자의 비극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나 미래를 찬란하게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귀한 일이고 내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인물(VIP)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모이면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이 결국에는 희망찬 미래로 인도하는 디딤돌이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2012년 2월 24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2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또는 예수님을 통해서 임한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이익도 없이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두 번째야말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이고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가르쳐줍니다. 우리들은 실제로 힘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연약하다 못해 무력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연약함은 죄 가운데 빠진 상태는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의지를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빠졌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죄를 지었으니 벌을 주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죄를 지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사람은 우리들인데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연약한 것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들이 연약할 때, 죄인되었을 때, 심지어 원수되었을 때도 사랑으로 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죽으심으로 우리들은 강해졌고, 의롭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요즘 2012년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경건생활을 훈련하는 기간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에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되새기고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모든 참빛 교회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마음껏 누리고 감사하면서 사순절을 보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고난중의 소망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서신은

새벽기도회와 관련된 말씀을 많이 쓰게 되는군요.

은근히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라는 압력일까요?

(esp. 젊은이들이여 새벽을 깨웁시다!)

예레미야서를 모두 끝내고

예레미야 애가서를 이번 주에 시작했습니다.

애가(lamentation)은 “슬프다”는 말로 시작되듯이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두고 슬픔의 노래를 기록한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조가”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애가가

슬픔의 노래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애가 한 가운데인 애가서 3장에

“소망”의 말씀이 나오기때문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가 3:19-22)

Remember my affliction and my wanderings, the wormwood and the gall! My soul continually remembers it and is bowed down within me.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Lam 3:19-22)

2.

예레미야 애가 3장은

제 감신대학원 졸업논문 본문입니다.

(서른일곱 살의 늦깎이 신학생이 논문상을 받고 졸업했었네요^^)

새벽기도회를 준비하면서

그때 논문 파일을 열어 보았습니다.

긴 논문이었지만 그 중의 한 문단을 옮겨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희망과 절망의 양극단으로 놓고 우리의 삶을 저울질 한다면 대부분 절망과 고통으로 기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대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의 경륜이나 환경을 막론하고 아픔이 있고 탄식이 있다. 아니 고통이 없는 인생은 마치 진공 속의 삶과 같아서 어떤 가치도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고통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요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형극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 고통의 문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민족도 국가도 그들이 어떤 역사를 갖고 있든지 고난이 없는 공동체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현실은 고통과 더불어 살면서 고통 저 너머의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 아닐까? –하시용, 감신대 석사학위논문(1998), “예레미야 애가 3장의 해석학적 재고찰”에서-

그렇습니다.

고통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임하시는

주님의 성실하심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그대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고통 저 너머에 숨겨진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23 이-메일 목회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1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인생길이 어렵고 힘겹습니다. 인생이 잘 풀려도 내심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돈 많이 벌고 권력까지 얻어서 큰소리치면서 살고 싶은 생각에 열심히 일합니다. 큰 야망이 없다면, 남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만큼만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지만 뭔가 허전하고 아쉬운 것이 우리네 인생길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까만 속이 보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추한 것들을 성경이 정리해 놓았는데 어찌 그리도 잘 맞는지요! “악한생각,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막7:21-23)-13가지 우리 마음에 담긴 그릇된 모습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잡초처럼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생겨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시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하나님을 미워함,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거역, 우매, 배신, 무정, 무자비”(롬1:29-31)- 21가지 악한 모습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듯해서 등골이 오싹합니다. 우리들은 이처럼 내적인 부조화, 부도덕한 심성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자기 스스로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추한 모습들이 우리가 사는 사회로 그대로 전이되어서 세상도 우리 마음 이상으로 왜곡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들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생긴 죄의 결과라고 가르쳐줍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서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우리들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까지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우리들 안에서는 위에 나열한 죄의 모습들 외에도 불안함과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만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들이 실망으로 끝나기 일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 경쟁과 갈등, 그리고 거짓과 악행이 난무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습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춥고 배고팠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모였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와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사람취급 받지 못하던 여인들과 천민들도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회개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임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풀 수 없는 죽음, 고통, 불안, 죄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河-

바룩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에서는

예레미야서를 한 장씩 읽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예언서이다 보니

지루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렇지만 중간 중간에

반짝 반짝 빛나는 주옥 같은 말씀과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2주 전에 소개했던

에벳멜렉도 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다섯 구절 밖에 되지 않는 예레미야 45장에

또 한 명의 귀한 인물이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 적었던

바룩이라는 사람입니다.

바룩의 이름 뜻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일찌감치

고난에 휩싸였습니다.

어려움에 슬픔까지 더했습니다.

나름대로 추측해보면,

바룩의 아버지는 그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는데

어느 날 홀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났다면

그것은 바룩에서 고통을 넘어선 커다란 슬픔입니다.

제가 예를 들었지만 성경이 암시하는 것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고난과 슬픔입니다.

그래서 바룩은 탄식했고, 평안을 잃어버렸고

결국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룩의 초년 고생이요 슬픔이었습니다.

바룩은 생활력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역한 백성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기에

바룩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예레미야 45:5)

And do you seek great things for yourself? Seek them not, for behold, I am bringing disaster upon all flesh.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바룩의 삶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바룩만을 위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너 만은 내가 보호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목숨만은 건져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45:5)

But I will give you your life as a prize of war in all places to which you may go.

2.

우리들의 인생길이 생각처럼

힘차게 펼쳐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룩처럼 축복을 받을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인생길이 고난에 슬픔이 더해서

지치고 힘겨울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이 순간순간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온 세상이 죄를 지어서 멸망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룩을 구해내십니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의 가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께서 바룩의 구원자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룩에게 임하신

하나님 구원의 은혜가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참빛 교회 식구들의 가는 모든 길 위에

주님의 생명이 임하길 바랍니다.

하나님,

어려운 세상 길을 걸어가는

주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생명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16 이-메일 목회서신)

축복하는 교회 (5) : 시편 118편 4

시편 118편 말씀을 함께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시편 118편은 어려움을 겪었던 백성들과 지도자(왕 또는 제사장)가 성전에 나와서 지나온 어려움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겪은 어려움은 최악이었습니다.“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17절)라고 말할 정도로 죽음에 근접한 어려움이었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와서 에워쌓습니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져서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끊어내고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권능이 이들에게 임함으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나와서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한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감사의 찬양으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118편의 피날레입니다. 이보다 더 즐겁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의 찬양을 아무리 많이 올려드려도 부족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놓으셨고 드디어 그 날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선하신 뜻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들은 한 마음으로 또 한 번 주님께 기도합니다.:“이제 구원하소서. 이제 형통케 하옵소서.”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찬양이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면 그 길은 아무리 어려워도 형통한 길입니다. 여기서 형통함은 성공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번성케 되고 인생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광활한 곳에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길을 활짝 열어주시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은 이들이 성전에서 서로 축복하는 장면입니다.“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마태복음 21장 9절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향해서 백성들이 찬양했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와 같은 표현입니다. 26절의 후반부는 성전에 모여서 서로 축복하는 모습입니다. 비록 구약의 말씀이지만, 오늘 본문 속에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축제의 시간을 갖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찬양이 27절 이하에도 계속됩니다.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얼굴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어두움이 물러나고 밝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세력과 얽어매고 있던 모든 것들이 끊어지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백성들은 희생제물을 제단 뿔에 묶어놓고 다 함께 행진하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8-29절).

시편 118편을 끝부분에서 백성들이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모두가 합창할 찬양일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과 그 오른손의 능력을 체험한 우리들이 성전에 모여서 함께 노래할 찬양이기도 합니다. 그 찬양이 세상으로 흘러넘칠 때 우리 교회가 축복하는 교회가 되고 우리 각자는 축복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