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숨결

6월 한 달은 대한민국 월드컵 축구국가대표팀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우리 나라가 처음으로 원정 16강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일궈냈고, 비록 8강에 오르지 못했지만 우리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저 역시 워낙 운동경기를 좋아하기에 가족들과 함께 우리나라 경기를 모두 지켜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예선 마지막 경기인 나이지리아와의 경기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선수들의 실수로 실점할 때는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두 번이나 골 네트를 흔들 때는 정말 짜릿했습니다. 마지막 5분여를 남겨놓고는 하도 긴장이 되어서 앉아서 보지 못하고 일어서서 손을 꼭 쥐고 지켜보았습니다. 마지막 휘슬이 울리기까지 추가시간이 왜 그리 길던지요? 드디어 원정 첫 번째 16강이 확정되는 순간 우리 가족은 서로 껴안고 소리를 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아마 이웃집에서 깜짝 놀랐을 겁니다.

그때 그 순간의 스릴과 긴장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서,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기를 인터넷을 통해서 재방송으로 시청했습니다. 이기고 있다가 한 선수가 실수를 해서 승부차기로 동점이 됩니다. 나머지 시간 동안 적어도 무승부를 기록해야 합니다. 생방송을 볼 때는 그 순간이 얼마나 긴장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재방송을 보니까 재미가 없었습니다. 생방송을 볼 때의 스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선수들이 실수하는 장면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경기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생방송으로 봐야 그 순간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지, 녹화방송은 밋밋할 뿐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고 노트북을 접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읽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들은 녹화방송을 보듯이 성경을 읽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풀 맷돌 다섯 개로 구 척 장수 골리앗을 이기는 말씀을 읽으면서 긴장하거나 통쾌한 마음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지”라고 미리 결론을 내리고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이 무척 지루하고 녹화방송처럼 밋밋할 뿐입니다. 대신에 생방송을 보듯이 성경말씀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면 얼마나 재미있고 다음 장면이 기대가 되는지 모릅니다. 성경이 전해주는 말씀들이 생생하게 마음 속에 전해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재방송이 아니라 생방송처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연애편지 읽듯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연애편지를 대충 읽는 연인들은 없습니다. 연애편지를 수면제 대용으로 읽는 연인들도 없습니다. 연애편지를 받으면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행간(行間)까기 헤아려가면서 자세히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예전에 받았던 연애편지와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연애편지라고 생각하면, 한 구절도 대충 넘어가지 않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애를 쓰게 마련입니다.

실제로 성경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다고 하였는데(딤후3:16),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오푸뉴스토스”는 “하나님의 숨결”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연애편지처럼 달콤하고 그윽하게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따라 읽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시는 생생한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말씀이 정금보다 더 사랑스럽고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는 시편기자의 고백(시19:10)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SF 한국일보 2010년 7월 2일 종교칼럼)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지난주에 이어서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는 표적을 살펴봅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았다는 사실은 그의 절망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숫자적으로 표현해줍니다. 병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주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지금은 병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물이 동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설령 물이 동해도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이 사람은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처럼 38년 된 병자의 상황은 절망, 외로움, 막연한 기대, 고통으로 요약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들이 가지 않는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많은 병자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가엾어 보이는 38년된 병자를 보셨고, 그의 상황을 아셨고, 그에게“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38년 동안 이 사람을 괴롭혔던 병이 나았다고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38년 병자가 한 일이라고는 자신의 상황을 두고 예수님께 불평한 것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때 38년 된 병자는 오랫동안 괴롭히던 병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일어난 표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이 병자는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서 병이 사라졌고, 일어나졌고, 예수님 말씀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자리를 들고”라는 말은 환자가 누워있던 천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남겨두고 가도 좋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은혜로 병이 나았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자리를 들고 집에 갔을 때,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를 보면서 지난 38년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아픈 과거이지만, 과거를 잊지 않고 자신의 병이 나은 것과 병을 낫게 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과거를 잊기보다 생각해 내면서 감사하고 어려운 과거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이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병이 나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죄를 짓지 말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라는 부탁이십니다. 병이 낫는 것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의인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세상에서 간증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오랫동안 괴롭히던 병이 낫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병보다 훨씬 괴로운 죄로부터 해방되고 예수 안에서 새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을 누리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河-

담대함 그리고 귀중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주일에 주시는 말씀이나

수요예배에서 공부하는 스가랴 말씀

게다가 구역속회에서 공부하는 말씀까지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들 속에 빠져들어가면

말씀이 의미가 깊고 풍성함을 체험합니다.

어제

수요예배에서 함께 공부한 스가랴 4장은

3장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정결케 하신 하나님께서

당시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을 회복시키시고 세워주시는 말씀입니다.

스가랴 4장을 공부하면서

두 가지 수사적인 질문을 살펴보았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7)

스룹바벨 당시에 성전의 건축을 방해하던 사람들과 상황을 두고

아무리 큰 산이 앞을 가로막아도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때에

산이 변해서 평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도 요즘 개인적으로 큰 산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을 만나서 많은 요구사항에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방금 전 건강을 조심하라면서 염려해주시는 이메일을 읽으면서 힘도 얻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은 세상이나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때 앞을 가로막는 큰 산이 무너지는 체험도 할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이 나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10)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의 지휘하에

건축하고 있는 성전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학개 2:3절에서

보잘 것 없다라는 표현을 썼겠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성전을 짓고 있는데

그 겉모습이 초라합니다.

내 세울 것도 없고, 스스로 보기에도 창피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깨우쳐 주십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성전이라도

하나님께서 빛으로 임재하신다면 귀한 성전이 될 것임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초라할 수도 있습니다.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하나님께서 빛으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면

우리도 겉모습과 상관없이 가장 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올해도 절반이 지나고

7월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경기가 계속되면서

왠지 모르게 우리들의 삶이 자꾸만 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큰 산이 여러분 앞을 막아서더라도

산을 바라보지 마시고

산을 부셔서 평지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작은 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가장 귀중한 일이 될 수 있음을 믿고

현재의 모습과 삶에 자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 앞에 높은 산이 평지가 되고

작은 일이 가장 귀중한 일임을

믿음 안에서 체험하고 깨닫게 하옵소서.

서머나 식구들이

주님 손 굳게 잡고

담대하게 새달을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71일 이-메일 목회서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동안 살펴본 두 번의 표적들은 모두 가나에서 일어났습니다.”가나“는 히브리어로“갈대마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대처럼 연약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말씀으로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들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 표적 가운데 오늘은 세 번째 표적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나는 ..이다”(예:“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또한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과 당당하게 논쟁을 벌이십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속의 예수님은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전능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자꾸만 부딪치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안식일 규정을 어기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등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두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마12:8).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으니 예수님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지키실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는, 안식일이라도 죽어가는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살리는 일들은 해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얽매여서 사람을 살리는 일까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산자의 하나님/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오늘 표적도 안식일에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곳에 행각 다섯 개가 있었고 행각 아래 병자들이 연못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연못의 물이 동(動)할 때가 있는데, 그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서 몸을 담그면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전설처럼 전해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다가가서 물으십니다.:“네가 낫고자 하느냐?”예수님은 이 병자가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진심에서 물어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병자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물이 동해도 자신을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병이 나을 수 없답니다. 자신의 병이 낫기를 바라지만 이 병자에게는 병이 나을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행각에 누워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린다면 이 병자는 요행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절망 가운데 단지 그곳에 누워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예수님의 말씀에 38년 된 병이 순식간에 나았습니다.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오늘 표적도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고,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들 역시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아멘 -河-

거룩한 침묵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에 일어나서[하나님]을 부르시고

하루에 꼭 5분 정도 하나님 앞에서 침묵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신앙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매 주일 주보를 통해서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침묵으로 기도하는 시간”

현대인들은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요즘은 셀폰이 나와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할 정도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눕니다.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어활동에도 정기적인 “쉼”이 필요합니다.

하루에 일정시간을 정해놓고

또는 가장 한가로운 시간에

반대로 가장 분주한 시간에

“침묵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생길 때까지 훈련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침묵”이라고 부릅니다.

–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는 시간,

– 세상과 구별된(거룩=구별/separation) 시간,

– 수많은 세상의 언어와 구별된 시간

– 자신과도 구별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말씀가운데 생각나는 것,

아침에 읽은 성경말씀 가운데 마음에 남아 있는 것,

평소에 자신이 아끼고 외우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하나를 택해서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고요한 침묵의 시간!

오늘은 꼭 5분 이상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침묵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 마음 속에 샘솟는 하늘의 평안과

여러분 영에 임하는 하늘의 기쁨을 맛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세상의 소리들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침묵으로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의 하늘의 소리로 가득 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년 6월 24일 이-메일 목회서신)

“네 아들이 살았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께서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표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일들을 단순히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속에 들어있는 심오한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표적(sign)”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가나에서 첫 번째 표적을 보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십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이 은연중에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아직 자신의 때가 되지 않았기에 다시 갈릴리로 내려오십니다. 갈릴리에 와 보니,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다녀온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모두 알려놓았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과 더불어 예수님은 이미 이 지역에서 유명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일으키신 가나를 다시 방문하셨을 때, 왕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 사람에게 아들이 한명 있었는데 죽을병에 걸렸답니다. 16마일쯤 떨어진 자신의 집까지 오셔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초청에 선뜻 응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메시야로 세상에 오셨지 모든 병을 고치는 의사로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고쳐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은 표적을 베푸신 것이지 단순히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왕의 신하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가지 않으십니다. 대신에“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만하십니다. 왕의 하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갑니다. 집에 도착할 즈음 하인들이 나와서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전해 줍니다. 알아보니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시던 시간과 아들이 나은 시간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지 않으셔도 말씀으로 하인의 아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체험한 왕의 신하는 온 가족과 더불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단지 아들이 살아난 기적만 체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번째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하인의 아들을 살리신 표적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살았다(생명)”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네 아들이 살았다”(50절),“아이가 살았다”(51절),“네 아들이 살았다”(53절).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을 때(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아들이 낫는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신하의 집에 가지 않으셔도 먼 거리에서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표적이나 기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는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더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河-

능히 도우시리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월드컵 시즌이라고 할 만큼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도 축구얘기 일색입니다.

어제는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에

커다란 점수차로 패했습니다.

발로 하는 운동인데도

그 정도로 실력 차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오늘은 경기를 져서 그런지

만나는 분들 마다 기분이 약간 다운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쉽게 무너진 한국 축구만큼이나

우리들의 마음도 무너져 내린 듯 합니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서 생각하면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응원해서

한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한다 해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몫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특정 선수를 응원하지만

그 선수가 우리를 알아주지도 않고

평생 동안 그 선수와 악수 한번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좋아하는 팀이나, 국가대표들에게 마음을 줍니다.

그들이 승리하면 좋아하고,

경기에 지면 한없이 안타까워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감정이입(empathy)”라고 합니다.

국가대표 축구팀의 입장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그들과 더불어 승리를 즐기려는 마음입니다.

감정이입을 잘 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랑이 많습니다.

남들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이 크고 깊습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감정적인 변화가 클 수도 있습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마음을 쏟다 보면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2.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감정이입과 비교가 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처럼 아파하시고, 피곤해하시고, 고통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2 18절에서 잘 가르쳐줍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를 능히 도우시느니라.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하셨습니다.

감정이입을 넘어서

우리의 삶을 실제로 체험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십니다.

우리를 가장 잘 도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도우실 충분한 능력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 앞에 제 삶을 내려놓습니다.

저의 모든 목회와 인생의 짐을 내려놓습니다.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미래도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십자가 아래 무릎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활짝 펴면

세상 욕심도, 집착도, 미련도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때가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많이 바쁘고 힘드십니까?

십자가 밑에서 쉼을 누리시고

모든 인생의 짐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가장 아시는 예수님께서

능히 도우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서머나 식구들께서 겪으시는

인생의 희로애락에 함께 하시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능히 도우실 줄 믿습니다.

눈동자처럼 서머나 식구들을 보호하시고 사랑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617일 이-메이 목회서신)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다

서머나 성도님들과 더불어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가장 기쁘고 동시에 떨리기도 합니다. 목사로서 하나님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성도님들과 교회가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성도님들과 더불어 나누고, 그 말씀으로 교회와 성도님들이 변화되는 것을 목도할 때는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지난 4주에 걸쳐서 스바냐 3장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보면서 춤을 추실 정도로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남은 자의 신앙,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부터 축제의 삶을 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제 앞으로 7주에 걸쳐서 요한복음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한 두 본문은 예전에 설교했었는데, 이번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에 대한 본문들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기적(miracle)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표적(signs)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세이메이온”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기적(“두나미스” 권능)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사건을 보여주셨을 때 지칭하는 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병을 고치시거나,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거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지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이심을 보여주셨기에 표적(싸인)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의 전반부 (1-12장)에는 특별히 7가지 표적이 나옵니다. 표적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표적 뒤에는 꼭 예수님의 설교가 나와서, 표적이 설교를 위한 도입부처럼 생각될 정도입니다. 표적보다 그 이면에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과 함께 가나라는 동네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종들에게 손을 씻는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물을 갖다가 손님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고,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를 맛본 손님들은 하나 같이 기뻐했습니다.

결혼식은 축제의 자리입니다. 여섯 개의 항아리는 불완전한 세상을 상징하고 율법에 얽매인 유대교를 가리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유대교의 역할이 끝났다는 표시입니다. 그곳에 가득 채워진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늘나라의 복음이 구태의연한 유대교의 율법을 대신 할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를 먹고 기뻐하는 손님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천국잔치에 참여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속의 결혼 잔치와 스바냐 3장의 천국잔치가 일맥상통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표적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河-

산자의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오후에 TV에서

“Alive”라는 영화를 우연히 보았습니다.

마지막 30분만 보았는데

눈이 쌓인 산에 추락한 비행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실화라는 자막이 올라가길래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1973년 우루과이 럭비팀과 가족을 실은 비행기가

안데스 산맥에서 추락한 사건을 토대로 만든 영화였습니다.

한 겨울 눈 덮인 산맥에 추락한 비행기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16(?)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무전기를 고쳐보려는 시도,

안테나를 만들어서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고

서로 생일 파티를 해 주면서 격려하고

나중에는 죽은 동료의 인육까지 먹으면서 생명을 지탱합니다.

안데스 산맥에 봄이 찾아왔을 때

두 명의 젊은이가 험난한 산을 넘고 넘어서

그들의 생존을 세상에 알리고

구조대가 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잠깐 동안이지만

영화를 보면서 생존본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분명하게 대비되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살아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2.

살아 있다는 것!

예삿일이 아닙니다.

병이 나면 건강의 중요성을 알듯이

생명이 위태로우면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문지방을 넘는 것만큼 낮습니다.

삶과 죽음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넘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이 세상의 삶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생을 더욱 사모합니다.

그렇다고 주어진 삶을 소홀히 하거나

절망가운데 자신의 삶을 소비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하루,

살아있는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요!

어느덧 6월도 중순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올해의 절반을 사시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십니까?

저 역시 새달을 맞으면서

시간을 아껴 살기고 결심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만족할 만큼 규모있게 살지 못했습니다.

분발해야겠습니다!

하루 하루가 새로운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있으면

우리들은 언제나 생명을 누립니다.

영원한 생명이지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 20:38)

하나님,

오늘 하루도

서머나 식구들께서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산 자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힘차게, 생동감 있게, 소망 가운데 지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610일 이-메일 목회서신)

기쁨의 축제

스바냐서 3장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루살렘의 패역과 더러움 그리고 포학을 지적하면서 시작된 스바냐 3장은 끝까지 신앙을 지킨 남은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집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패역과 배신을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 가운데서 끊임없이 바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이 닿는 곳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 – 이들은 가난하고 곤고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을 행치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고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신앙과 삶이 일치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고 두려움을 제하여 주십니다.(3:12-13).

지난 시간부터 살펴보는 스바냐 3장 14절 이하는 남은 자들, 즉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나팔을 불며 기뻐하고 마음에 기쁨이 샘솟는 천국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모든 형벌이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께서 구원받은 백성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구원받은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라면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손을 늘어뜨려서도 안 됩니다. 손을 늘어뜨리는 것은 절망, 실패, 낙심, 포기의 표시인데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밀려오는 두려움을 해결하였다면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17절은 끝까지 남아서 구원의 축제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고백입니다. 세상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 남은 자를 주복하시고 보호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이제 구원받은 백성들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마지막 축제의 자리에 온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십니다.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18절 이하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회복시켜주시는 치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축제가 벌어졌지만 마음이 슬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십니다. 다시는 이들이 모욕을 받지 않게 하시고, 그동안 당했던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을 약속하십니다. 흩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모으시고, 부끄러움을 겪었던 백성들이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십니다.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킨 주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의 말씀입니다.

스바냐 3장은 이렇게 전능자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구원, 자신의 백성을 향한 기쁨의 사랑고백, 그동안 신앙을 지키면서 겪었던 어려움과 부끄러움에 대한 회복과 치유, 마지막에 주의 백성들이 얻게 되는 명성과 칭찬으로 끝이 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온전히 누리게 될 구원의 기쁨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누려야 할 기쁨이요 축복이기도 합니다. 서머나 성도님들과 무엇보다 오늘 임원으로 취임하신 것을 축하받는 모든 임원들 위에 하늘의 기쁨과 구원의 축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