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옹지마(塞翁之馬)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침에 신문을 펼치면 지역 소식을 제일 먼저 읽고 본국판은 맨 나중에 봅니다. 태평양 너머의 조국소식이 더 궁금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꾸만 속상한 소식만 들려오니 일부러 외면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xml:namespace prefix = st1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가족이 한 기업인으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비리가 온 신문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왜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퇴임 후에 하나같이 검찰의 조사를 받고 본인이나 가족들이 감옥까지 다녀오는 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후에 초심을 잃고 그만 권력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권력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착각해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한 대가인지도 모릅니다.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당장에는 화로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복이 될 수도 있다는 우리네 인생사를 잘 표현해 준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가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의 이치를 잘 가르쳐줍니다. 전도서의 초반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을 히브리원어와 함께 읽으면 헛된 인생이 실감나게 발음됩니다:하벨 하발림/하벨 하발릴/하콜 하벨. 헛헛헛/하하하!발음만 놓고 보면, 우리네 인생이 하도 헛헛해서 너털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들립니다.

여기서 “헛되다“라는 히브리 원어 ”하벨“은 ”숨결(breath), 덧없음(vanity), 물거품(vapor)”이라는 뜻입니다.인생지사가 지나고 보면 “다 그렇고 그렇다 (덧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 전통에 의하면 전도서는 솔로몬 왕이 인생의 길흉화복을 모두 경험한 후인 노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천하의 솔로몬 왕도 한 평생을 돌아보니 인생이 거기서 거기였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의 교훈을 우리 나라 대통령들이 마음에 새기면 행동거지를 꽤 조심할 텐데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이런 교훈이 귀에 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목표를 세상에 두고 있으면 언제나 불안하고 숨이 막힙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갈지 모르듯이 인생도 세상풍파 속에서 표류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도서의 가르침대로 물거품과 같기 때문입니다.어차피 인생길은 이십 보 백 보요 새옹지마처럼 복과 화가 번갈아 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물거품과 같은 인생을 단지 탄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전도서의 마지막 장은 젊은이에게 주는 교훈으로 막을 내립니다; “젊을 때에 너는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 덧없는 세상을 의미 있게 사는 비결은 일찍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깨우침입니다. 헛된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눈을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오는 인생길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거기 계시면서 인생길의 기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이 들고 앞이 깜깜해도 너무 초조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면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길은 모두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렇다면 시선을 영원하신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느긋하게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이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길을 일정하게 사는 비결임을 깨닫습니다. (2009년 4월 1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즐겨 읽히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편 23편 속에는 그에 걸맞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나타나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가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듯이 우리들을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고 막대기와 지팡이로 안위해주십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우리들을 돌보십니다. 시편23편 속에서“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나타내주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즉“헤세드”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헤세드라는 히브리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실되고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들도 헤세드라는 한 단어로 모두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요즘 수요예배에서 배웠듯이 요엘서 2장 18절에 표현된 “중심이 뜨거우신 하나님의 사랑”도 바로 헤세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체험할 때입니다. 또한 신앙이 성숙해 진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헤세드를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로 하나님의 헤세드를 노래한 다윗은 5-6절에서 주인과 손님의 관계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4절이 푸른 초장에서 뛰어노는 양들의 행복함이라면, 5-6절은 잔칫집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손님의 감사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잔칫상을 차려 놓으셨습니다. 그것도 원수의 목전에서 잔칫상을 차려놓으셨으니 얼마나 뿌듯하고 한편으로 통쾌하였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높이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으로 악을 갚아주시는 짜릿한 순간입니다.

기름을 머리에 부으셨습니다. 성경에서 기름을 붓는 것은 왕이나 제사장을 위임할 때 행했던 특별한 예식이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구별됨’‘위임을 받음’‘축복’‘함께하심의 표시’등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약으로 오면 기름은 성령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특별히 임하는 은혜들입니다. 여기서 하늘나라 잔치의 주인공은 바로 다윗,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주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 모두입니다. 할렐루야!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매일같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을 따라가고 그 안에서 보호받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들을 축제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셔서 그곳에서 잔칫상을 베풀어 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고, 잔이 넘치게 축복해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오늘 주일예배에 오신 여러분들 모두에게 기름 부으심과 잔이 넘치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河-

부활절 아침에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삼일 째 되던 날. 평소에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료를 바르고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을 막고 있던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줄 알았습니다. 서둘러 베드로와 제자들을 무덤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상대로 예수님의 시체는 무덤에 없었습니다. 대신에 흰옷 입은 천사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생전에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두고 제자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같아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어찌 보면 무력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성경에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한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4절에서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함입니다. 우리들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세력을 없애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지식의 범위를 초월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체험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을 때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009년도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어렵고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기에 부활절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죽음을 너머선 완전히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으로 들어가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삶 속에 죽음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새로운 생명을 힘입어야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의 모든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묵묵히 골고다 언덕을 올랐듯이 우리 교회에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말없이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봐야합니다. 골고다 언덕 너머에 부활의 아침이 밝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우리 모두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망권세를 물리치신 예수님을 꼭 붙잡고 앞으로 나갑시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河-

고난주간 묵상 – 혼자이신 예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년 맞는 고난주간이지만

미국에 온 이래 고난주간에는 늘 이런 저런 일이 생겨서

저절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만드는 것을 봅니다.ㅠㅠ

미국에 와서 첫 번째로 맞은 고난주간에는

제 아내가 무척 아팠습니다.

갑자기 장에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밤새도록 고생하고

결국 응급실에 가서 2 3일을 입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병원비가 무서워서 의사에게 아프지 않다고 말하고

일찍 퇴원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틀 후에 모두 회복되어서

뉴욕까지 내려가서 부활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부활의 능력을 몸소 체험했던 사건이었기에

10여년이 흘렀지만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2.

이번 주간도 예사롭지는 않았습니다.

Peace-making으로 교회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었기에

이제 앞으로만 나가면 될 것이라고 믿고 준비하고 있는데

상대편 교회에서 신문광고를 내면서

전화도 여럿 받고

이런 저런 얘기도 들려오고

솔직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예사로운 약속도 아닌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증인들(Christian mediators) 앞에서

한 약속은 분명히 지켜야 온당한데 말입니다.

Christian Peace-making이라는 용어에 합당한

성숙함이 요청됩니다.

그래도 우리는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고 거기에 다시 걸려 넘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든지

우리가 그 동안 꿈꿔왔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사역을 꼭 이뤄내야 합니다.

꿋꿋하게

한 마음으로

선한 뜻을 품고

3.

이번 주 큐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여정을

매일같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월요일 큐티에서 (18:1-14)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잡히셨습니다.

그 모습에 원통했던 베드로가 말고라는 군인의 귀를 자릅니다.

그때 예수님은 검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20:52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요일 큐티에서는 ( 18:15-27)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겠다던 베드로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 마음이 다 그런가요?

힘 없고 두려우면 그렇게 되는건가요?

닭이 울기 전까지는

스스로 깨우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지요?

 

잡혀가신 예수님은

혼자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받으십니다.

3년간이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떠났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던

빌라도도 군중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호산나를 부르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여겼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지르는 폭도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능력과 권세를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은

세상의 극악무도한 강도보다 못하게 대우했습니다.

조롱하고,

침을 뱉고,

상상할 수 없는 언행을 예수님께 퍼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외롭게

우리가 당할 고초와 조롱과

우리의 죄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4.

저는 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혼자이신 예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그 모진 길을 걸어가시는 모습을 마음에 새겨보니

예수님께 괜시리 송구스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죄도 없으신 분이 우리 대신 그 길을 가셨으니까요!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우리들이 홀로/외롭게 인생길을 걸어갈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실테니까요

니 우리와 함께 걸어가실테니까요.

2009년 고난주간을

외롭게 보내시는 주님의 자녀들이 계십니까?

고난주간에 걸맞게(?) 힘겹게 보내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홀로 오르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서 꿋꿋하게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아침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샬롬

하목사 올림

(200949일 이메일 목회서신)

함께 하심

고대 이스라엘에서 우기인 겨울과 봄에는 양들을 집 근처의 목초지에서 목양하였답니다. 그때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는 계절이기에 조금만 나가도 푸른 초장이 있었고 쉴만한 물가가 있어서 목자들은 양들을 그리고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건기가 시작되는 여름과 가을철에는 양들을 이끌고 고산지대를 다녀야 했습니다.

양무리를 이끌고 산악지대를 오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양들에게는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면서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 더 힘들고 위험했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기도 하고, 짐승들도 출몰했습니다. 무엇보다 동작이 둔하고 멀리 보지 못하는 양들이 골짜기를 내려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자의 인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길을 가는 양들은 목숨을 잃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자신의 양을 한 마리 한 마리 세심하게 보호하고 돌봐야했습니다.

원래 목동이었던 다윗은 이러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시편 23편 4절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인생 가운데서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겨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습니다. 신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 순간도 영적으로 그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밤중에 도주할 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다윗은 그때마다 자신이 양과 함께 거닐었던 골짜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양들을 보호해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간구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시편 23편 4절에서“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23편 4절 말씀의 다윗처럼 우리들 역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가 있습니다. 질병으로, 삶의 환난으로, 자신과 씨름을 하면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곁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또한 죽을 정도로 위태롭고 힘겨운 순간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매일같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만을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종전에 설교했듯이 우리가 가게 될 천국입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서 잠깐씩 맛보는 세상 속의 천국이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거룩한 쉼의 시간입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만나는 큐티시간이 바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역시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에 다윗처럼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위로하심을 느낄 수 있다면 그곳이 도리어 은혜의 자리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할렐루야!-河-

충성의 믿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맞으면서

책꽂이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서 다시 읽었습니다.

필립 얀시의 책인데 제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Disappointment with God)”

얼핏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해서는 안될 말처럼

불경스럽게 들립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을 읽어나가면

예수님을 믿으면서 갖고 있는 질문들에 대해서

담백하고 실제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커다란 질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선하게 살았는데 하나님의 보상이 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선하게 산 사람에게 큰 재앙이 닥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과연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과 답변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속 시원하게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고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지 않는지에 대한 논의입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시는가?

하나님께서 숨어계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고 나타나실 시간인데 하나님은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초신자의 경우,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지에 대해서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공평성, 침묵, 숨어계심은

신앙의 회의가 찾아 왔을 때

우리들도 종종 갖는 질문들입니다.

2.

위의 세가지 질문과 관련해서

필립 얀시는 구약 성경의 욥기를 갖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설명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사이의 엄연한 격차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잘 설명해 줍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믿음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기도하는 것들이 곧바로 응답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갖고 있으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구하는 편안한(?) 믿음입니다.

또 다른 믿음은,

충성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인생길에 뿌옇게 안개가 끼거나 먹구름이 껴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때에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묵묵히 따르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얀시는 충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깊은 차원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돌 사이에 피는 풀 한 포기와 같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3.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이런 저런 뉴스를 접하면서/

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닥쳐오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질문들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나님께 최고의 고백과 감사를 드리기 원합니다.

딱딱한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와서

결국에는 예쁜 꽃을 피우는 풀 한 포기와 같은

귀한 믿음을 소유하시는 서머나 식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하루 힘차고 꿋꿋하게 사시기를

샬롬

하목사 올림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맨 처음 행하신 기적이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나라는 동네의 한 혼인잔치에 참석하셨습니다. 잔치가 한창 진행 중인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물을 붓고 그것을 떠서 손님들에게 갖다 주었을 때 놀랍게도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가지 기적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변화”입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나 상식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과 포도주는 성분이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두고“변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가, 아픔이 있는 곳에 치유가,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 안에 복음이 들어오면 우리들 역시 변화를 경험합니다. 생각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삶 자체가 변화됩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 동력입니다.

시편 23편 3절에서“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씀이 바로 복음 안에서 경험하는 변화를 뜻합니다. 여기서“소생시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돌아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삶의 스타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생케된다는 것을 거듭남으로 이해하면 이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한 순간의 경험입니다.

하지만 소생케되는 것은 매일 매일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계속적인 과정입니다. 이것은 매일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돌려놓는 훈련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구주로 맞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과 삶이 소성케 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셨다면 매일같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생케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매일의 삶속에서 소생케하시는 은혜만 체험할 수 있다면 행복하실 겁니다. 자유하실 겁니다. 복음의 능력과 그 안에서 변화를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소생케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거시고 바른 길,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심에 더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면 그 삶은 하늘을 향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바른 삶일 것입니다.-河-

쉴만한 물가

염소는 자기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반면에 양은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신약성경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는데 여기서 염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인생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염소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힘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형적인 염소의 삶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 우리의 삶은 도리어 하나님께 예속되었습니다. 우리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야하듯이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로 바뀐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시편 23편 1절의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삼고 자신이 그의 양임을 인정한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때로는 염소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서는 자기 자신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뛰어봐야 벼룩인 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목자삼고 살면 삶의 범위가 하나님의 지경까지 확대됩니다. 거기서“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자족(自足)의 표현이자 가능성의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23:2절에는 여호와를 목자삼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주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은혜가 나옵니다. 첫째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푸른 초장은 양들에게 필수적인 먹을거리입니다. 둘째로, 쉴만한 물가는 마실 것을 가리킵니다. 양들은 한 번에 많은 물을 마십니다. 선한목자는 양들이 충분히 마실 수 있는 물가를 알고 있고 양들을 그곳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바로 우리가 이다음 가게 될 천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수가 넘치는 곳입니다. 푸른 초장처럼 물댄 동산과 같은 곳이 우리가 가서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 나라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천국의 모델하우스이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천국 시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하늘나라의 삶은 첫째로, 교회 안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말씀의 꼴을 공급해 주고 예배를 통해서 생명수 샘물가의 편안한 쉼을 허락합니다. 또한 가정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해야 합니다. 가정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주는 푸른 초장과 같은 곳입니다. 가정은 천국과 같은 쉼을 공급해 주는 안식처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 마음이 바로 푸른 초장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임하기 때문입니다.-河-

인생은 마라톤 경주입니다

평생 동안 스포츠 중계를 했던 아나운서가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스포츠 중계라면 안 해 본 것이 없는 아주 베테랑 방송인이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각종 스포츠 중계 가운데 마라톤 중계가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라톤 경기는 42.195킬로미터를 두 시간여에 걸쳐서 뛰기만 합니다. 선수들간에 몸싸움도 별로 없습니다. 가끔 경기 막판에 극적인 순간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다른 경기에 비하면 밋밋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마라톤 경기를 두 시간여 중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엊그제 한국의 입지전적인 마라토너 “봉달이”<?xml:namespace prefix = st2 /><?xml:namespace prefix = st1 />이봉주 선수가 마지막 은퇴경기를 가졌습니다. 비록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그의 마라톤 경력은 화려합니다.또한 연약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마라토너였습니다. 한번은 이봉주 선수의 발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발은 하도 많이 달려서 닳아 버렸다고 보일 만큼 만신창이였습니다. 게다가 이봉주 선수는 왼쪽과 오른발이 다른 짝 발을 갖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봉주 선수가 세운 기록이 가히 세계신기록 감입니다. 그는 올 해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이봉주 선수가 그의 나이와 똑 같은 40번째 마라톤 완주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단한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 동안 이봉주 선수가 달린 거리는 훈련 량을 합쳐서 지구를 두 바퀴 돈 것에 해당한다니 그야말로 온 국민의 박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신학교 시절 목회실습 시간에 선배목사님을 찾아 뵌 적이 있습니다. 은퇴를 앞두신 목사님께서 목회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목회는 마라톤이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한 번에 어떤 결실이나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건강과 가족을 챙기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10년 가까이 목회를 하면서 그 선배목사님의 조언이 더욱 귀하게 다가옵니다.

어디 목회만 그렇겠습니까? 우리네 모든 인생이 마라톤과 같습니다. 외롭고 밋밋한 것이 인생길입니다. 남들의 인생길은 극적인 순간도 있고 매우 재미있어 보입니다. 자녀들도 잘되고 모두들 금메달을 목에 주렁주렁 걸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외롭고 지리하고 마라톤 경기에서 언덕을 오르듯이 매일같이 허덕허덕입니다. 결승점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더 지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남의 떡이 커 보여서 그렇지,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면서 인생의 마라톤 경주를 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급한 마음에 빨리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멀리 보아야 합니다. 자기 속도를 지키면서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이봉주 선수가 40번의 완주를 했듯이 우리들 역시 어떤 일을 시작했으면 결승점에 이르도록 달리고 또 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먼 훗날 인생을 돌아보면서 몇 번의 완주기록을 세웠노라고 하나님과 자신 앞에서 흐뭇한 마음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달려서 마지막 결승점을 통과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2009년 3월 19일 SF 한국일보종교컬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지난주에는 신앙의 토대인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믿음에는 행함과 역사가, 사랑에는 수고가, 소망에는 인내가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우리교회 안에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의 신앙과 삶 속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교회에 와서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 지 깊이 생각했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씀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직 제가 젊고 열정이 있어서인지 교회의 부흥을 위한 말씀을 힘차게 전하고 싶었고, 새로운 곳에 왔으니 교회를 확실히 바꿔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서두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서 무리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요 욕심이었습니다. 지금은 심호흡을 하면서 잠시 쉬어갈 시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차분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앞으로 나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께 아주 따뜻한 은혜의 말씀을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성도님들의 상한 마음을 말씀으로 어루만져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말씀이 시편23편이었습니다.

시편 23편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세심하신 인도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인생의 어려움도 들어있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푸른 초장만 거닐 수 없습니다. 인생의 폭풍은 수시로 몰려옵니다. 때로는 죽음의 순간을 오갈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똑같이 인도하시고 함께하심을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고 훈련시키십니다.

실제로 양은 매우 근시안이라고 합니다. 눈 앞 1피트정도밖에 볼 수 없기에 떼를 지어 다닌답니다. 그때 맨 앞에 서서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디 양들만 그렇습니까? 우리들 역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양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들도 마음대로 인생길을 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엄한 곳에 가서 망가지고 손해를 볼 때도 많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인생길을 인도해 줄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깨우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인생길을 인도해주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역시 다윗처럼“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