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

소망의 인내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머리(head교리doctrine)-가슴(heart체험 experience)-손(hands실천 practice)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균형 잡힌 신앙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절차입니다. 그동안 기회가 되는 대로 여러 번 소개했기에 참빛 식구들이라면 세 가지 H(3 H’s)로 요약되는 신앙의 모습을 아실 것입니다. 배우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균형 있는 신앙으로 멋지게 자라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알려주는 신앙의 덕목은 우리가 그동안 배운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신앙의 세 가지 최고 덕목(spiritual top 3)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신앙에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한다고 했고 그중에 제일은 지난주에 배운 사랑이라고 강조했습니다(고전13:13).

 

여기서 믿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사역 중심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라는 독특한 표현을 통해서 믿음의 삶, 사랑의 애씀을 부연해서 설명했습니다. 믿음을 통한 행위와 삶, 사랑에서 비롯된 수고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행위)은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과 행함이 동반된 사랑이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덕목은 “소망의 인내”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는 이미 기독교인을 향한 핍박과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을 때도 유대인들이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죽이려 했으니,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가 세상에 좋은 평판을 얻으면서 핍박은 더욱 심해졌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커졌습니다. 당시 문명을 선도하는 제국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영원히 살 것이라는 부활에 관한 소망을 갖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려운 일을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해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닥치면 당황스럽습니다. 어려움이 지속되면 몸과 마음이 지칩니다. 소망에 인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소망 가운데 끝까지 견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기다림에 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믿음의 행위(삶),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꽃피우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데살로니가전서 (4)

사랑의 수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기억”은 마음에 남은 잔상입니다. 좋은 기억이 있고 나쁜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속에 어떤 기억으로 남느냐가 중요합니다. 또한 기억의 특징은 생각나게 합니다. 연상 작용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감사했으니 좋은 기억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연상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멋진 모습이기에, 우리 교회도 닮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깃든 세 가지 신앙의 덕목을 끊임없이 기억했습니다:믿음의 역사(works of faith),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 소망의 인내(perseverance of hope). 믿음의 역사는 “믿음의 행위”라는 뜻임을 지난주에 배웠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위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그런 점에서 행위는 믿음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행위가 바로 사랑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보낸 편지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믿음과 사랑은 짝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특권과 의무를 갖게 되었습니다(신6: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를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요15:13). 여기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은 물론 십자가의 핵심입니다.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남았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요일3:18). 오늘 본문에서 사랑을 ‘수고’라고 설명한 이유입니다. 손과 발을 사용해서 애쓰고 힘쓰는 행위입니다. 신약성경에 쓰인 헬라어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하는 노동과 힘씀”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에 수고가 필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사랑으로, 사랑을 수고로 실천하는 멋진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河-

 

데살로니가전서 1장 (3)

믿음의 역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감사의 글을 써 내려갑니다.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감사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그리고 끊임없이 감사했습니다(1:2;2:13).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한없이 기뻐서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습니다(3:10). 핍박을 피해서 아테네에 머물고 있는 바울에게 궁핍과 어려움이 몰아쳤습니다. 그때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위로와 힘이 임했습니다(3:7).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 소망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자랑스러운 면류관이 될 것이라고 고백할 정도입니다(2:19).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세 가지 덕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믿음과 소망 사랑은 사도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신앙의 세 가지 덕목입니다(살전5:8; 롬5:2-5; 고전113:13; 갈5:5-6;엡4:2-5; 갈1:4-5).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등장하니, 우리의 신앙을 바치는 기둥임이 틀림없습니다(히10:22-24; 벧전1:21-22).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세 가지 신앙의 덕목이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은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인간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습니다. 믿음을 더해 주셨고 그 결과 사랑과 소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개인의 신앙이 굳건해졌고 멋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덕목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믿음을 성령께서 확증해 주십니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교회 중간에서 메신저 역할을 한 사람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받고 “큰 확신”(5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각처에 소문날 정도였습니다. 말로만 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에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에는 행함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핍박과 환난을 견뎠습니다. 삶이 변했습니다. 믿음으로 서로 사랑했고, 믿음으로 소망을 갖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믿음 안에서 신실했습니다.

 

“믿음의 역사(the works of faith)”- 우리도 믿음이 신앙과 삶을 통제하도록 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河-

데살로니가전서 (2)

은혜와 평강 (2)

대부분 바울 서신의 서두에 “은혜와 평강”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도 예외가 아닙니다:“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절). 데살로니가전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갈라디아서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고 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바울이나 기독교인들만 사용하던 용어가 아니라 당시 편지를 쓸 때 자주 사용하는 관용표현이었습니다. 대신, 로마나 그리스의 신들이 은혜를 베풀어준다고 생각했고, 평강은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 황제가 주는 평화였습니다. 로마라는 세상 제국이 주는 은혜와 평강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바울은 은혜와 평강의 근원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았습니다. 세상이 주는 은혜와 평강과 구분한 것입니다.

 

은혜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족함이 없고 영원한 선물입니다. 자격이나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말 그대로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은혜에 깃든 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은혜에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가운데 으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은혜(카리스)가 헬라어 개념에 가깝다면, 오늘 배울 평강(에이레네)은 샬롬이라는 히브리어와 연결되는 구약의 개념입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범위가 무척 넓습니다. 개인적인 평안, 형통,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모두 포괄합니다. 동시에 가족은 물론 국가 공동체에 임하는 평화를 가리킵니다. 갈등이나 다툼없이 하나 된 상태입니다. 이처럼 히브리어 샬롬은 모든 상황 개인의 마음과 몸까지 완벽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모습이 곧 샬롬입니다.

 

바울이 평안으로 인사할 때는 “관계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살 때 마음의 갈등과 미움이 가득 찼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했을 때,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로마 시대 당시의 평화는 제국의 힘을 키워서 전쟁에서 이기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힘을 통한 평화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은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 행복함,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이라고 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평안입니다.-河-

데살로니가전서 (1)

은혜와 평강 (1)

 

매년 하반기에는 신약성경 가운데 한 책(冊)이나 장(章)을 선택해서 공부했습니다. 올해는 지난 8월에 아침마다 함께 읽었던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차근차근 공부할 예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 바울이 당시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에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서와 함께 신약성경 가운데 초기(주전 50년 무렵)에 쓰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선교를 마치고 로마 제국이 만든 하이웨이를 따라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국제 무역이 성행했습니다.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회당도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7:1-10).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메시아)가 바울이 전하는 나사렛 예수임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비롯한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고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온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고 전파했습니다. 바울의 전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력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시기가 시작되었고, 바울과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폭력배들을 사주해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바울 일행(데살로니가 전서 서두에 등장하는 실라와 디모데)은 몸을 피했지만, 예수님을 믿게 된 야손과 형제들을 잡아서 데살로니가를 다스리는 총독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에서 일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치 도시였습니다. 세상을 뒤흔드는(upside down)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황제 대신에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바울은 밤중에 피신해서 남쪽의 베뢰아로 떠나야 했습니다. 나중에 베뢰아에 바울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내려와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은 남쪽 아가야 지방 아테네로 몸을 피합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어려움 속에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1년 반 동안 머물렀던 고린도나 3년을 머물던 에베소에 비하면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복음의 씨앗이 확고하게 심어졌고, 그것이 매우 멋진 교회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극찬합니다. 손색이 없는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함께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깊이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든든하게 서게 하소서”라는 올해 우리 교회 표어에 맞춰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자랑스러운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배우고 우리도 멋진 교회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