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해설 (10)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585장)

 

연속 설교 중간에 나누는 찬송가 해설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 찬송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가로 유명합니다.

 

가톨릭 사제였던 마틴 루터는 당시 교황과 사제들이 성경과 달리 자기들의 잇속에 따라서 백성들을 오도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습니다. 결국 그가 대학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 성당의 정문에 “95개 조 반박문(논조)”을 게시합니다. 1517년 10월 31일이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원래 의도는 자신이 반박한 가톨릭교회의 그릇됨을 놓고 학자들과 토론회를 개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의도와 달리 당시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루터의 반박문이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종교 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마틴 루터를 사제에서 파문했습니다. 생명의 위협도 가했습니다. 프레더릭 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살면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루터의 독일어 성경 역시 당시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알려준 신앙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1521년 마틴 루터가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불려 나갑니다. 그곳에서 마틴 루터는 그릇된 교회의 교리에 순응할 수 없기에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로 끝나는 루터의 보름스 연설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자 루터의 길은 험난했습니다. 루터가 힘들었을 때, 시편 46편을 묵상하면서 찬송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이 찬송은 당시 종교 개혁가들의 군가처럼 불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이 가능하고, 세상의 그 무엇도 자신들을 이길 수 없음을 찬송을 부르면서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마틴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게시했던 비텐베르크 성당의 탑 꼭대기에 “강력한 성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A mighty fortress is our God)”는 찬송가 첫 구절이 지금도 새겨져 있습니다.

 

<웨슬리의 찬송가 부르는 자세> 1.찬송가를 많이 배우십시오. 2. 곡조대로 부르십시오. 마음대로 고쳐 부르지 마십시오. 3. 회중과 함께 부르십시오. 4. 큰소리로 용기 있게 부르십시오. 죽은 듯이 또는 반쯤 잠을 자듯이 찬송하지 마십시오. 5. 겸손하게 부르십시오.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지 말고 조화를 이루어 찬송하십시오. 6. 박자에 맞춰서 부르십시오. 너무 느리거나 빨리 부르면 안 됩니다. 7. 영으로 노래하십시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음악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河-

 

돌보시는 하나님 (7)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

 

“주가 돌보신다”는 찬양 가사에서 감동을 받고 지난 7주 동안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각자 살기도 바쁩니다. 경쟁은 치열하고 격차는 더 커지면서 공동체 의식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선 내가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틋하게 생각하시고 실제로 돌보신다는 말씀은 복음(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는 길을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몸과 건강, 염려와 불안, 두려움을 포함한 마음과 생각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정, 교회, 세상을 돌보심을 배웠고, 지난 시간에는 특별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약한 자들을 돌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돌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땅을 약속하셨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땅을 잃어버리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길 선지자들을 통해서 촉구하셨습니다. 돌아오면(회개) 모든 것을 용서하고 회복시키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만 은혜와 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길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꾸로 이해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도하시는 새로운 구원입니다. 대상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삼으셨습니다. 끝까지 돌보시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우리와 더불어 일하시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河-

 

돌보시는 하나님 (6)

약한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연속 설교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려주는 나그네, 고아, 과부로 대표되는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는 백성들입니다.

 

나그네는 정착할 곳 없이 타향에 살거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유목민이었습니다. 가나안 땅도 그들의 원래 터전은 아닙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훗날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나그네 삶의 서러움을 톡톡히 경험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빌3:20). 이 땅이 결코 고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나그네로 살아갈 뿐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야말로 나그네입니다. 미국에 터전을 잡았지만, 마음은 조국에 가 있습니다. 나그네로 살다 보니 타향살이의 설움도 느낍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미국에 왔고 그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기에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고대사회에 고아와 과부는 돌봄이 꼭 필요했습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남편이 없는 과부는 세상에서 이용당하기 쉬웠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고아나 과부의 권리는 거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와 함께 가진 것이 없는 사회적 약자도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권력의 압제 속에 살아가는 민초를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물질이 없는 가난한 자들도 돌보십니다. 또한 이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잠19:17).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돕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심판 날에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칭찬하시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약한 자들을 돌봤으니,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상대적인 약자들을 배려하고 존중하기 원합니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河-

 

돌보시는 하나님 (5)

공동체를 돌보시는 하나님

 

지난 4주 동안 몸과 마음을 돌보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되시고 우리가 가는 길을 친히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일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그 길을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잠16:9)이심을 수없이 경험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심을 더욱 신뢰합니다.

 

미국의 전문 설문 조사기관 퓨 리서치가 선진국에 해당하는 17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는 물질적 풍요, 건강, 가족이었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제일 먼저 꼽은 것은 한국이 유일했습니다. 가족을 최고로 꼽은 나라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33%가 건강이라고 답했습니다. 가정, 신앙, 돈이라고 답한 경우는 각 18%, 17%, 17%였습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신앙과 가정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물질과 건강이 합쳐서 50%를 차지한 결과입니다.

 

물질과 건강은‘집착’하기 쉽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물질과 건강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세상 가치관에 치우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물론 몸까지 돌보심을 믿습니다.

 

오늘은 공동체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공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다스리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정을 이룬 아담과 이브의 몫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정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 자녀들과 부모님, 형제자매를 섬기지만, 가정을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가정과 가족을 멋지게 세워가야 합니다.

 

가정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의 사도 바울이 가정에 대한 교훈의 끝에 교회를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교회 역시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우리가 사는 샌프란의 교회들도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돌보심을 믿습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책임지실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장차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예표입니다. 전쟁과 갈등, 갈라치기와 기후위기까지 어지러운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음을 믿고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기에 하나님의 손길과 돌보심을 간절히 구합니다. -河-

 

돌보시는 하나님 (4)

마음을 돌보시는 하나님 (2)

 

염려, 불안, 두려움 – 이 세 가지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수시로 또는 결정적인 순간에 불쑥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염려는 수시로 생깁니다. “염려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나오>는 둘로 나누어진다는 뜻입니다. 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양쪽에서 당기니 둘로 갈라집니다. 마음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염려가 생깁니다. 조바심이 납니다.

 

염려는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염려가 마음과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불안은 모습과 행동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초조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안절부절입니다.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염려와 불안의 끝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염려와 불안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라면 두려움은 최종적으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것으로 결론지은 상태입니다. 밝은 것은 사라지고 어두움만 남았습니다. 염려와 불안의 단계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자 했다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손을 놓고 멍하게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요동칩니다. 힘이 들어서 절망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자신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실존적 죽음이라고 했고 이것을 곧 죄라고 보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절망을 경험하는데, 절망 가운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절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절망으로 이어지면 절대 안 됩니다. 중간에 빠져나와야 합니다. 염려는 수시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빈도만큼 염려가 생긴다고 봐도 괜찮습니다. 염려가 생기면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염려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던져 버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찬양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안할 때 찬송을 부르거나 찬송을 들으십시오. 찬양에는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와 불안을 몰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불안이 심해지면 의약의 도움을 받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명령이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혹자는 365회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말씀을 갖고 기도하고 외치면서 두려움을 몰아내고 다스려야 합니다.

 

염려와 불안, 두려움 그리고 그 어떤 절망이 찾아와도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