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 (3)

영과 진리로 (1)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쉬고 계시던 예수님과 한낮에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찌하여 유대인 남성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성인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쏘아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물을 주는 것은 물론 예수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고 대화를 이어 가셨습니다. 구원을 뜻하는 “하나님의 선물”도 소개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합니다. 물을 길을 도구가 없는데 자기에게 물을 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여인의 말이 맞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상식을 뛰어넘는 복음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올 필요도 없고, 다시 물을 마실 필요도 없는 생수입니다. 안에서 샘솟는 영원한 샘물입니다. 여인이 깜짝 놀라서 그런 물을 달라고 달려듭니다. 드디어 여인의 마음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4:16). 뜬금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솔직히 자기 사정을 예수님께 밝힙니다. 자신에게는 남편이 없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삶 한가운데로 깊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여인의 실존을 건드리셨습니다.

 

복음은 피상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침투해서 그곳부터 변화를 일으키고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힘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유대 남성이 아니심을 직감했고 인정했습니다.

 

이번에는 사마리아 여성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조상은 이 산(그림신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니 어떤 것이 맞느냐는 신앙적인 질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신앙에 대해서 깊은 조예를 갖고 있습니다. 신앙을 놓고 질문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태도가 중요함을 알려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디서 예배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장소나 출신성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드디어 여인의 입에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4:26). 여인이 메시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河-

사마리아 여인 (2)

내가 주는 물은…

 

갈릴리로 내려가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한가운데 수가성에 가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앙금이 깊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서쪽 광야로 돌아서 갈릴리로 내려가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을 밟으신 것입니다. 700여 년 동안 이어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갈등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은 파격이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물려준 세겜 근처 수가라는 동네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쉬셨습니다. 한낮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동네로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혼자 우물가에 계실 때,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먼저 말을 거십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여성이었습니다.

 

물을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나이까”(9절)라고 약간 쏘아붙이듯이 대답합니다. 예수님께 말대답하는 사마리아 여인도 생각보다 강합니다. 물이라는 주제를 갖고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living water)를 네게 주었으리라” (10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하나님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리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생수라는 말에 관심을 갖고, 예수님께서 누구신데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길어서 줄 수 있느냐고 또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수를 말씀하셨는데, 여인은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신선한 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여인은 자기에게도 그 물을 주셔서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여인의 마음이 많이 열렸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물” “생수”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은 마법의 물(magic water)을 구할 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여기까지 마음을 열고 예수님과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굉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목적이 분명해졌습니다. -河-

사마리아 여인 (1)

물을 좀 달라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에 관한 말씀에 이어서, 앞으로 한 달여 요한복음 4장 속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남성이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거듭남에 관한 복음(기쁜 소식)을 듣고 숨은 제자로 살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니고데모와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입니다. 유대인들이 차별하는 사마리아 출신입니다. 당시에 매우 열등한 위치에 있던 여성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이 찍혔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면, 사마리아 여인도 대부분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우물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을 피해서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과 달리,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에 물을 길러 왔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납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니고데모에 비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훨씬 수동적입니다.

 

“물”이라는 주제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과 더불어 요한복음 2-4장에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를 향해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도 요한복음 3장 후반부에 나옵니다.

 

물은 정결 예식과 함께 깨끗함 즉 회개의 상징입니다. 또한 물은 생명수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했고(렘17:13). 에덴동산에도 네 개의 강이 흘렀고, 마지막에 성취될 하나님 나라에도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물을 좀 달라”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마실 물을 넘어서는 영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가에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난 것도 우물가였고, 미디안 광야로 나간 모세도 우물가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났습니다. 이처럼 우물가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우연한 만남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이렇게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과 대화가 시작됩니다. ‘물을 좀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을 복음으로 초청하는 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름도 없는 사마리아 여인을 먼저 찾으셨습니다.-河-

부활의 은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서 그가 살아났다고 헛소문을 낼 것을 염려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으로 무덤 문을 큰 돌로 막아 놓았었습니다. 병사들을 배치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겁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마28:7)는 천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인들이 땅에 엎드려서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잡고 경배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언제나 “샬롬 – 너희가 평안하냐?”고 인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말도 헛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물론 50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한꺼번에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던 시기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20여 년 후로 추정하니 사도 바울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열흘이 지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증인(마르튀스)” 이라는 헬라어에서 “순교자(martyr)”라는 영어가 나왔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목숨 걸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자신들도 부활해서 영원히 살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에 힘이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승리의 완성입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세상 속에서 부활을 삽니다. 부활의 은혜입니다.-河-

고난의 길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황제에 반기를 들었거나 세상을 어지럽힐 정도의 극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죗값을 치르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의롭게 되므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년 또는 수시로 제물을 드리던 성전 중심의 형식적인 신앙이 예수님을 믿는 내면과 삶의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성전이 되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 예수님의 여정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에 비유했습니다(사53장).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음 자체보다도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쉬운 길이 아니었기에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3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들(the servant songs)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50:1-3) 앞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마음이 완고해진 백성들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종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종은 학자의 혀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탁월한 능력입니다. 본문의 종은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수염이 뽑히고, 뺨을 맞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수치를 당해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입니다. 이사야 시대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어두운 세상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에게 빛이 임했습니다. 구원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십자가 길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이길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