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나의 하나님

세상에 가장 강한 것은 어머니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손은 못하는 것이 업을 정도로 만능입니다. 음식을 만드는 것부터 아이를 키우는 것, 밖에서 일을 하실 때도 어머니의 손놀림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빠르고 정확합니다. 어머니의 손은 배가 아픈 것도 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넓은 것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못된 자식이라도 어머니 마음에 들어가면 착한 자식으로 변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능해도 어머님 품속에서는 가장 유능하고 뛰어난 자식입니다. 자식이 범한 그 어떤 잘못도 어머니 마음은 용광로처럼 녹여 버립니다. 어머니 – 언제 불러도 정겹고 그립고 때로는 말없이 희생하시는 모습에 안쓰러움이 밀려오는 단어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사랑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네 아버지는 말없이 자신의 길을 가시면서 가족을 책임지십니다. 어머니가 속상한 것을 표현하실 때, 아버지는 큰 기침 한번 하시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거인같이 보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보니 자기보다 작아지셨습니다.:“아버지 키가 이렇게 작았던가? 아버지 팔 다리가 이렇게 얇아 지셨나?” 흰머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정수리까지 훤하게 비어갑니다. 불도저처럼 강한 줄 알았던 아버지께서 언제부터인지 몸져누우시는 횟수가 늘어갑니다. 그래도 건강하신 척, 뭔가 있으신 척 하시는 것이 더 안쓰럽습니다.

부모님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들의 뿌리요 근원입니다. 십계명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라”가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 다음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내리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님께 잘해드려도 받은 사랑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네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해내지만 이미 부모님은 우리 곁을 떠나신 경우도 많습니다. 살아생전에 잘해 드리라는 옛 성현들의 말씀을 빨리 깨닫는 것이 그나마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입니다.

육신의 부모님 말고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멀게 느껴집니다. 하나님 다음에“아버지”라는 수식어가 있기에 하나님 앞으로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아바(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롬8:15).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음이 자녀된 그리스도인의 한없는 특권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십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십니다. 젖을 먹여서 키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라함”에는 긍휼하심외에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우리를 감싸주시는 어머니같은 분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십니다.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죄를 짓고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는 세심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이 세상에서 부모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큰 사랑을 누리면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어버이날에 낳아주신 부모님께 마음을 전해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할렐루야 -河-

복음의 능력 5 : 소망

“음식 없이 40일을 살 수 있고, 물 없이 8일을 살 수 있다. 공기 없이 4분을 견딜 수 있다. 그런데 소망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 표현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말처럼 꿈이 없으면 거친 인생의 파도를 견뎌내기 쉽지 않습니다. 꿈과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꿈을 꿉니다. 마음에 소원을 갖고 삽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도 소망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아름답고 선하게 에덴동산을 관리하길 꿈꾸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영역인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의 꿈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꿈을 꾸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꿈을 이루시길 기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란 듯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꿈을 깨우쳐주시지만 세상유혹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꿈은 이렇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비장의 무기를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꿈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복음에 깃든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손수 꿈을 이루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 안에 임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죽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환난과 유혹을 견뎌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는 절망과 낙심은 사라지고 오직 소망만 있을 뿐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임하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지난 3시간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음의 능력 세 가지 덕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원, 기쁨과 평강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복음의 능력이 바로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고, 예수님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흘러넘치도록 풍성한 소망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넘어서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누리는 소망입니다. 할렐루야!

복음의 능력이라는 주제의 연속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살펴본 로마서 본문을 갖고 참빛 교회 식구들을 축복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河-

복음의 능력 4 : 평강 (2)

히브리어 샬롬은 평강이라는 뜻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은 물론 마음과 영 그리고 삶 전반에 평강이 임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온 세상까지 퍼져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평화는 기쁨과 더불어 대표적인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가 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시기와 다툼, 증오와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들입니다. 그때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의 평화가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망가진 평화를 회복시켜주셨지만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세상은 그렇다 쳐도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글쎄요. 세상의 평화가 미움과 분쟁으로 인해서 망가졌다면, 우리 삶의 평화는 염려와 근심 때문에 망가집니다. 염려는 우리의 존재자체를 흔드는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염려가 우리들 삶 어느 곳에든지 슬며시 들어와서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질병에 대한 염려, 마음속에 찾아오는 갖가지 근심들, 삶의 불안함, 심지어 신앙의 회의까지 대부분 염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염려는 몰아내야 합니다. 염려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삶이 망가집니다. 염려를 몰아내는 방법으로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염려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지난 일의 아쉬움을 감사로 바꾸고, 현재의 어려움도 감사로 대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지 범사에 감사하기로 작정한 마음에 염려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둘째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간구는 기도에 포함됩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는 소통이라면, 간구는 기도 가운데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간청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염려는 접근하지 못합니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슬그머니 나갈 것입니다. 염려가 불가피한 우리의 인생길이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염려와 근심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과 기도를 통해서 염려를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염려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수가 많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평강입니다.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강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그래서 평강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염려가 아닌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복음의 능력 3 : 평강 (1)

지난주에 살펴본“기쁨”정도는 아니지만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평강(peace)”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도와주시면 평화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평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샬롬(shalom)입니다. 샬롬은 달콤한 발음 이상으로 깊고 넓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샬롬은 단순히 평화로운 상태를 넘어서 모든 것이 온전한 상태를 뜻합니다. 육체의 건강, 마음의 평안,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임했습니다. 세상의 분쟁, 다툼, 갈등이 사라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세상 속에도 임합니다. 그런 점에서 평강은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세 가지 속성을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롬14:17). 세 가지 속성 한 가운데 평강이 들어있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음과 삶이 평온하고 얽힌 모든 관계에 화평이 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을 빌리면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지냅니다.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안전합니다.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이처럼 평강은 현재 우리 안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자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천군천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눅 2:1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주기위해서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다툼과 갈등으로 인해서 분열된 세상에 평화를, 질병으로 아파하는 육신에 평화를,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평화를 전하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평안하뇨” 또는 “평안할지어다”라고 인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 복음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안을 전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후에 가장 먼저 체험하는 것이 평안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할 때 마음속에 임하는 평안은 참된 예배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빼앗지 못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14:27).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기쁨을 두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는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빌 4:7,9).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안이 임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마음과 삶 깊은 곳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평강이 참빛 교회 성도님들의 삶 속에 잔잔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河-

복음의 능력 2 : 기쁨

복음을 다른 말로“기쁜 소식(good news)”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부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걷게 하셨으니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복음 속에는”기쁨”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했을 때 자연스레 기쁨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여러 번 약속하셨습니다.:“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마음에도 기쁨이 임했습니다. 성전 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걷게 됩니다. 그는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르면서 걷고 뛰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성경에는 기쁨과 관련된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기쁨이 얼마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임하고 동시에 우리가 누리는 기쁨의 풍성함을 잘 보여줍니다. 기쁨은 대부분 마음에 임하는 감정을 뜻합니다. 기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이 겉으로 표현됩니다. 표정과 행동으로 기쁨이 드러나고, 삶속에 기쁨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순간적인 기쁨이 아니라 환경과 마음의 상태에 상관없이 임하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시편기자는 주님께서 자신 안에 두신 기쁨은 포도주 농사가 잘 될 때 느끼는 기쁨보다 더 크다고 고백합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는 자신의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춤을 추듯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라고 선포합니다(시30:11).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 자체를 기뻐합니다. 성령의 열매에도 희락(기쁨)이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어려움이 닥치면 도리어 기뻐하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기쁨은 하나님 백성의 표지(marks)입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감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잘 간수했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모범적으로 자라갔습니다. 이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지만 도리어 기쁨으로 환난을 감당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성령의 기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임했음을 뜻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쁨의 영을 부어주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게 해 주심을 가르쳐줍니다.

기쁨은 마음속에 임하고 겉으로 표현된 복음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 우리들에게 기쁨은 필수적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기 원합니다. 기쁨으로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기 원합니다. 성령의 기쁨이 우리 안에 넘치길 간절히 원합니다.-河-

복음의 능력 1 : 구원

복음을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옛날 로마시대에는 지금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가을 새에 대한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비둘기를 비롯한 동물들이 통신수단에 동원되기도 했고, 산 위에서 연기를 지피거나 소리를 내는 것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정확한 통신수단은 역시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달리기를 잘하는 병사로 하여금 왕에게 승전보를 알립니다. 전쟁에 나갔던 병사가 전해주는 승전보가 바로 기쁜 소식,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에는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세워지면 백성들은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을 기대합니다.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메시야가 올 것을 예언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세상에 왕으로 오신다는 것이 곧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온전케 해주시고, 굶주린 사람들을 오병이어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말씀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귀한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은 최고의 복된 소식입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으니 그 어떤 승전보에 비할 것이 없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도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복음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되고 기쁜 소식 – 복음의 능력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로마서를 비롯한 사도바울이 기록한 바울서신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전할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듯이 복음은 능력입니다.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미스”는 영어의 다이나마이트를 연상시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따라 사는 우리들에게 능력이 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능력을 힘입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복음이 주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세상이 주는 능력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힘입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쁜 소식을 받고 그 소식을 누리기 원합니다.

복음이 주는 최고의 능력은(은혜는) 구원(salvation)입니다. 죄를 사함 받은 능력,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능력이 구원에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지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를 건져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 모두 위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河-

사순절에 3 : 십자가의 길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루살렘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순례길이 있답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라틴어입니다. “비아”는 길이라는 뜻이고, “돌로로사”는 고난이라는 뜻이니 합치면 “고난의 길”이 됩니다.예수님과3년 동안 함께 지냈던 제자 가룟유다가 은 삼십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 넘깁니다. 군병들에게 잡히신 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재판과 십자가형은 하룻밤 사이에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곳에서부터 시작된답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는 죄목으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갈릴리 청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인한 것은 하나뿐인 하나님을 욕되게 한 신성모독죄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황제가 세상을 통치했습니다.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에 그 어떤 통치자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소위 로마 황제를 대적하는 쿠데타를 꾀했다는 모함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군중들의 소요가 두려워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언도합니다. 비록 자신의 뜻과 다른 판결임을 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지만 2천년 교회의 역사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 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희롱 받으신 장소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일개 군병들 앞에서 조롱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도시 한 복판을 지나가십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은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 언도하는 실형이었기에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도시를 지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지치셨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기에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결국 십자가형이 집행됩니다.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선포는 세상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구원을 펼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외마디 외침이었습니다 (실제로 헬라어 본문은 “테테레스타이“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과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감람산까지 이어진답니다.

고난 주간을 맞으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것도 신앙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의 성지를 순례하지 않아도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차례로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마음 속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 잔잔하게 스며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 우리의 인생길 자체가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인생의 짐, 우리들 각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중압감에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면 눈물겹도록 고맙지요. 하지만 대부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각자의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주님도 지고 가셨으니 우리도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믿기에 묵묵히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이미 그 길을 가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을 가진 이웃들이 우리를 보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주간을 맞아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들 삶에 깊이 임하고 그 어떤 고난도 예수님과 더불어 극복해 나가는 멋진 신앙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원합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13년 3월 22일)

부활절 아침에

사순절을 보내면서 십자가의 길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세 번에 걸쳐서 나눴습니다. 이삭이 장작더미를 등에 지고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올라간 모리아길, 젖먹이 송아지를 둔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올라갔던 벧세메스의 언덕길,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에 맞고 조롱을 받으시면서 올라가신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길,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걷고 있는 인생길을 살펴보면서 부활주일을 준비했습니다.

이삭은 죽음의 순간에 살아났습니다. 벧세메스의 암소들은 희생제사로 드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이 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도 결국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사도바울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어야 합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인생은 물론 타락한 세상의 삼라만상이 죽음에서 끝을 맺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은 사라집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이 임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죄의 세력들을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신앙은 우리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능력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제자들은 한정 없이 불안했습니다. 3년 동안 따랐던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들만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이들에게 엄습했습니다. 외로웠고 절망적인 상황에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십니다. 부활은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죽음의 세력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 속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이 주는 놀라운 평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루살렘부터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이름 앞에 어떤 세력도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온 세상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인생길에서 매년 맞는 부활절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해마다 새로워야 합니다. 2013년 부활절 아침에 우리의 삶과 신앙을 돌아봅니다. 십자가위에서 자신을 못 박았는지,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고 있는지, 부활의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늘의 평안과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넘치는지, 우리 교회와 참빛 식구들 한분 한 분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지 – 부활절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들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가 새롭게 임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He is risen). 할렐루야! -河-

사순절에 2 : 벧세메스의 암소

성경 속에는 갖가지 동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땅이 말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양이나 염소 그리고 때로는 소와 비둘기가 쓰였습니다. 이 밖에도 독수리와 같은 날짐승, 사자와 같은 들짐승 그리고 고래처럼 큰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수많은 동물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벧세메스 길을 걸어갔던 두 마리의 암소입니다. 살아가면서 또는 목회를 하면서 힘겨울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깊이 묵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패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팔레스타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의 신당에서는 그들의 신 다곤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고꾸라지고 팔다리가 끊어졌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일으키고 큰 재앙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능력 있는 신임을 적지 한 가운데서 보여준 셈입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법궤를 벧세메스라는 곳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암소 두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이들에게는 아직 젖을 떼지 않은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신출내기입니다. 이 암소 두 마리에게 난생 처음으로 멍에를 메게 하고, 새로 짠 수레를 연결시킵니다. 수레 위에는 법궤를 올려놓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스스로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를 향해서 곧장 나아가면 팔레스타인에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암소가 발을 맞춰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발걸음을 주시하고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의 눈길이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멍에를 처음 메었으니 얼마나 불편하였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엄마를 찾는 송아지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울렸을 테니 어미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멍에를 떨쳐 버리고 새끼들에게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두 마리의 암소들이 울부짖으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꿋꿋하게 벧세메스를 향해서 나아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희생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자신의 몸까지 제물로 드려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 비록 동물이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마리의 암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또한 벧세메스를 향하는 암소는 삶의 고통과 아쉬움을 가슴에 품고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아니 이 시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리는 바로 당신의 모습입니다. 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속으로 울음을 삭히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꿋꿋하게 벧세메스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당신!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스도인이십니다. 힘내십시오!(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7.4.17) -河-

사순절에 1 : 결박당한 이삭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아버지 아브라함의 얼굴이 많이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종들에게 여행을 준비하랍니다. 어머니 사라와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데 어머니 얼굴이 갑자기 깜깜해 집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갈 때는 어머니께서 환하게 웃으면서 이것저것 챙겨주셨는데 이번에는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다. 뭔가 이상했지만, 저는 기분 좋게 아버지를 따라 나섰습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가는 여행이기에 기분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길입니다. 기쁠 수밖에요.

그런데 아버지 표정이 그리 밟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갈 때와 다릅니다. 중간에 종들을 놓아두고, 아버지와 저만 가는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말없이 걸으십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제물로 드릴 양이 없습니다. 말없이 한참을 걷다가 용기를 내서 물었습니다.“아버지 제물은 어디에 있어요?”“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지.”아버지께서 짤막하게 대답하십니다.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믿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드디어 제사를 드릴 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를 도와서 제단을 만드는데 오늘따라 아버지의 손놀림이 이상하리만큼 느립니다.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다. 제단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양을 올려놓을 차례입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십니다.“내 아들 이삭아! 내 나이 100살에 하나님께서 너를 갖게 하셨다. 그리고 나는 너와 더불어 아주 행복한 시간을 가졌어.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네가 필요하신가보다.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너를 나에게 주셨으니 나는 다시 하나님께 너를 돌려 드릴 수밖에 없단다. 아들아! 미안하다.”

저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아버지, 저를 제물로 드리세요. 저도 아버지와 그동안 너무 행복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 영광입니다. 얼른 저를 묶으십시오.” 아버지가 저를 묶는 것을 도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단위에 누웠습니다. 눈을 꼭 감았습니다. 차마 아버지와 눈길을 마주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아버지가 들고 있는 칼이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을 급하게 찾으십니다. 멈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아버지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가까운 풀숲에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창세기 22장 본문을 이삭의 입장에서 각색해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한 이삭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결박당한 채 제단에 제물로 올리어진 이삭의 모습은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인생 속에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나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이삭에게 있습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그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어린양을 예비해 주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는 참빛교회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