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가는 종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이틀 앞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이 주님의 종의 죽으심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맡겼습니다. 추수할 때가 되어서 주인의 몫을 가져오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다른 종들을 보냈지만 매한가지였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냅니다. 아들은 대우를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입니다. 상속인을 없애면 땅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과 행함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한 기적들을 보면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발걸음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서 53장 7-9절 말씀은 주님의 종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의 종은 그의 비천하고 볼품없는 모습 때문에 무시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마치 자신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처럼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마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찔렸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과 질고를 지고 가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말없이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와 똑같은 양이 되셔서 말없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주님의 종이 죄를 지어서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분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기까지 복종하셨고 결국 무덤에 묻히시는 죽음의 끝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은 영락없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유월절 어린양이 죽어서 그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듯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양이 우리를 대신해서 제물로 드려지듯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성전에 가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한 번에 그리고 영원히(once and for all)사해졌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강절 마지막 네 번째 주일을 보내고 성탄을 맞으면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부터 급기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말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마음 속 깊이 모시기 원합니다.-河-

고난 받는 종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 무감각에 빠진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보내는 종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볼품도 없고 힘도 없어서 사람들은 주님의 종을 무시했습니다. 철저하게 버림받았습니다. 누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우리 주님, 나사렛이라는 하찮은 동네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세상의 주목을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빌립보서 2장에서는 종의 형체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않고 무시할 수밖에요.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죽기까지 버림받으셨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무시 받고 버림받은 주님의 종에 대한 연민이 생깁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면 왠지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 53장 4-6절은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버림받은 종과 우리들을 연결시켜 줍니다. 그분이 무시 받고 버림받은 것이 우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똑같이 갖고 계셨습니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욥이 겪는 고난을 보고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결과라고 단정했듯이, 주님의 종이 겪는 질고와 슬픔 역시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가시와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벌(징계)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롭게 잘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화평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회복되었고 치유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종은 철저하게 우리를 위해서 보내지셨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겪을 고난과 질고 그리고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까지 모두 자신이 담당하셨습니다.

본문 속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은 우리를 위해서 가진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로부터 수없는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일이었다니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죄의 짐이 없어졌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53장 속의 고난 받는 종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6절은 앞 두 구절의 마무리입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해서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시력이 약한 양은 대열에서 이탈하면 금방 길을 잃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길을 고집부리면서 갑니다. 우리의 모습이 양에게서 발견됩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지면 양처럼 가야 할 길에서 이탈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지어 버리는 본능이 아담과 하와 이래 우리들 속에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양이 자기 힘으로 대열로 돌아오기 힘들듯이 우리들도 우리 힘으로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대속의 은혜입니다.

대강절 세 번째 주를 맞아서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 속 깊이 떠올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 조아리며 감사하기 원합니다.-河-

버림받은 종

구약성경의 이사야서는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기록된 책입니다. 특별히 네 개의 종의 노래들(songs of servant)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사야 7장 14절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는 말씀은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신약성경(마1:23)은 물론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믿어 왔습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메시야 예언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53장입니다. 다른 종의 노래들과 달리 이사야 53장은 전체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매우 실제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700여 년 전에 예언된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매우 정확한 기록입니다. 예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3장을 자세히 읽고 깊이 묵상할 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모습까지 자화상처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위로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공감하고 힘을 얻습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서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이 새롭게 회복됨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계절인 대강절에 이사야 53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올 해의 남은 한 달 동안 우리 교회 전체가 이사야 53장을 함께 읽고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주일 설교를 듣는 것에 그치지 마시고 평소에도 종의 노래인 이사야 53장을 틈틈이 소리 내서 읽으시고, 마음 깊이 새기시고, 각자의 삶에 대입해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손길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53장 1-3절을 살펴봅니다. 본문 속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국가는 힘이 없습니다.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 팔로 임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영적 무감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의 상황과 너무 흡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종교는 위선적인 지도자들로 인해서 오염되었고 백성들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지만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셨는데 그곳은 메시야가 태어날 동네라고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연한 가지 같았고 뿌리가 드러낸 나무처럼 별로 근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풍채도 그리 훌륭하지 못하셨음은 예수님의 외모를 언급하는 말씀이 없는 것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메시야는 무엇인가 다르고 왕처럼 외모부터 특별해야 한다고 믿었던 백성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하나님의 능력을 기적을 통해서 베풀어도 예수님을 멸시했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질고와 고난을 온 몸으로 느끼시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이나 존귀함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죄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시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무시당하셨고 철저하게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버림받는 우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이 이렇게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 사랑에 한 목소리로 그리고 한 마음으로 감사하기 원합니다.-河-

감사의 예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쫓아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예배하는 존재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는 영광이 됨을 이사야서 43장 7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줍니다.:“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성경에는 예배를 가리키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히브리어“샤하”가 대표적입니다. 샤하는 하나님은 물론 왕과 같은 지도자들 앞에 허리를 숙여서 경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 18장 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은 몸을 굽혀서(샤하) 그들을 맞았습니다(창18;2).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살려준 후에 땅에 엎드려(샤하) 절했습니다(삼상 24:8). 사울이 여전히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7장 2절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러(샤하)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밖에도 예배에 대한 히브리어로 경외심에 해당하는 “야레,” 섬김에 해당하는“아바드”와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도 예배에 해당하는 말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히브리어 샤하와 맞물리는“프로스큐네오”로서 몸을 굽혀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을 굽혀서 존경과 경외심을 표시해야 합니다.“세보마이”라는 단어는 존경과 헌신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것입니다.“라트류오”는 실제로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일에 몸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의 계심, 하나님 이름의 권위, 하나님의 성품과 하시는 일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도 필요합니다. 찬양과 감사도 예배의 필수요소들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영적 축제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늘의 위로와 치유 그리고 은혜를 체험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예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138편은 다윗이 커다란 위험 속에 있다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 드린 개인 감사시입니다. 어려움은 늘 닥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손의 능력을 구하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함을 배웁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배에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함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솔직함과 정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길 부탁하셨습니다(요4:24).

우리들도 본문의 다윗처럼 주님의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성품, 기도를 들어주시는 은혜, 환난 날에 구원해 주신 체험을 떠올리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 혼자만 감사하지 않고 다윗처럼 온 세상 사람들을 감사의 자리로 초대할 수도 있습니다. 열방이 다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신앙은 물론 삶을 온전케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주님의 보호하심과 구원하심이 임합니다.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한 명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도 감사의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욥처럼 무슨 일이 닥쳐도 입술로 죄짓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감사의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우리의 감사가 예배로 이어지길 원합니다. 감사 속에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河-

감사의 마음

성경을 읽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자꾸만 잠이 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도 무척 많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흥미진진한 말씀도 많아서 때때로 성경 속에 푹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글을 깨쳐야 책을 읽을 수 있듯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는데도 성경에 대한 눈이 떠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 은혜 속에 들어갔을 때 성경이 비로소 하나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성경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도 필요합니다. 성경 속에는 시를 비롯해서 편지글, 예언서 그리고 이야기체 본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 장르가 들어 있어서 각각의 특성에 맞게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 파노라마> 성경공부에서 배웠듯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 각 권의 특색과 핵심 메시지를 알고 있으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연애편지, 성경이 신앙은 물론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성경 가운데 흥미진진하면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 요즘 큐티 본문인 욥기입니다. 욥기는 처음 두 장과 마지막 장만 읽으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끼인 30여장에 이르는 말씀은 우리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성경 지식과 대치되는 듯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질병이 찾아오면 죄를 지은 대가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회개의 자리로 나오기도 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복을 받고 형통하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행한 보상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우쭐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벌을 받고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욥기는 흠이 없는 의인도 고난을 받을 수 있음을 욥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반대로 욥의 친구들은 의인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욥기의 처음 두 장은 욥기 전체를 이해하는 서론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자녀들도 출세했고 당대에 소문난 부자였습니다. 자녀의 복과 물질의 복을 겸해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고난이 닥칩니다. 자녀들이 죽고, 하루아침에 재산도 모두 사라집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온 몸에 병이 생깁니다. 아내가 저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신앙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보증한 인물이 욥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단이 주는 시험이 고난으로 임했습니다.

욥기 처음 두 장에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식들과 재산이 없어졌을 때“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질병이 닥쳤을 때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는 감사를 훈련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생긴 신앙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욥이 의로운 것은 단지 그의 신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감사와 찬양으로 훈련되었음을 가리켜 줍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임을 욥을 통해서 배웁니다. -河-

감사의 발걸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요즘은 문둥병자라는 말 대신에 한센씨병이라고합니다. 한센은 노르웨이의 의사로서 나병환자의 치료제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통상 문둥병자라고 하겠습니다. 문둥병자라면 마을에서 격리되어서 따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염이 강했기에 구약시대부터 엄격하게 관리해 오던 질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서“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너희들의 문둥병이 나을 것이니 구약의 율법에 있는 대로 제사장에게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고 정상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그들의 병이 낫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병이 나아서 정상생활을 해도 된다는 판정을 받고 세상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님을 다시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그 사람은 유대인들이 천시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다시 와서 감사하는 것을 본 예수님께서도 조금 당황하신 것 같습니다. 아홉 명은 어디로 가고 한 명만 왔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한 명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온 그 사람은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이 비슷합니다. 좋지 않은 것은 오래 기억하지만 좋은 일이나 남에게 받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할 때는 “예수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막상 병이 나으니 예수님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잘나서 병이 나은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래도 한 명이 예수님께 왔으니 그 나마 다행입니다. 그 마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세어 보아야 합니다. 감사는 잠시 멈춰 서서 기억해 내야 합니다. 섭섭한 일이나 좋지 않은 일들은 저절로 마음에 새겨져있는데 감사는 잊혀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감사는 더 쉽게 잊혀지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마련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사가 우리 삶의 여정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한 가지씩 세어보고, 마음에 담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왔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열 가지 은혜 가운데 한 가지 정도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잊어버린 아홉 가지의 감사를 찾아내고 그것을 갖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감사를 빠짐없이 기억해내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들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길 원합니다. 할렐루야! -河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는 우선 하나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 즉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 그 다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나온 성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결과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거듭남(born-again)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성화, 곧 거룩함의 길이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의 삶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삶의 주인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고백하듯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에 속에 갈등이 생깁니다. 옛본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거듭 태어난 그리스도의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옛성품을 예수님 앞에 완전히 굴복시키면 이런 갈등이 없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순간순간 갈등하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갈등의 과정을 말씀과 기도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입니다. 그 과정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임하는 은혜를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쉽지 않지만 이 길이 영생으로 통하는 것임을 알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최선의 길임을 알기에 감사와 기쁨 가운데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을 지은 마태입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레위가 살던 가버나움에는 큰 세무서가 있었고, 레위는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동족의 재산을 포탈하는 행동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소외된 인생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혼자서 번민하는 인생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그대로 꼼짝없이 앉아 있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보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서 좇았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뒤로 한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동안 세금을 포탈하면서 돈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쫓는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서 잔치를 베풉니다. 죄인들과 자신과 같은 세리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먹고 마시면서 친구로 지내셨습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죄인들과 함께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부르십니다. 믿음의 자리로 부르시고, 작은 예수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기 원합니다. 친구로 맞아주시고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좇기 원합니다.-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8 : 기뻐함

인간과 새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성대를 사용해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필요할 때마다 소리를 내지만 새들은 끊임없이 재잘거립니다. 그러다보니 새들의 소리가 노래로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울음소리로 들립니다. 그동안 살펴본 까마귀, 올빼미 그리고 지난주의 비둘기는 노래한다기 보다 운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음산한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른 아침 전깃줄에 앉아서 노래하는 참새도 있습니다. 울새라고 하는 손가락보다 작은 새도 수풀 속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립니다.

새들의 노래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새는 종달새입니다. 종달새는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노래만은 일등입니다. 창공에 날아올라서 마음껏 노래하는 종달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유명한 시인들이 종달새를 노래하는 시를 쓰곤했습니다.그 가운데 대표적인 시가 영국의 시인 셸리가 쓴 “종달새에게 바친 송시”입니다.: “반가워라. 너 명랑한 영이여! 너는 결코 새는 아니었으리라. 하늘과 그 주변에서 가슴에 넘쳐흐르는 감정을 타고난 솜씨의 노랫가락으로 쏟아내는 너는!” 이처럼 종달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밝아집니다.

종달새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성가대가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주듯이 우리들은 다양한 음정과 박자에 맞춰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받으실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구약의 시편 말씀은 찬양과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탄식하면서, 외쳐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가 임하면 자연스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할렐루야”라는 말 자체가 주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넘칩니다. 감사와 기쁨을 찬양으로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온전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종달새가 하늘 높이 올라가서 노래하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높이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을 믿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임하는 은혜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95편 1-2절에서는 모든 백성들을 찬양의 자리로 초대합니다.:“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온 백성의 찬양소리가 우렁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늘 어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찬양했습니다. 시로 찬양하고, 새 노래로 찬양하고 소리 높여 찬양하고, 여러 가지 악기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구원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이 찬양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7 : 순결함

성경에 등장하는 새들 가운데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을 들라면 제일 먼저 비둘기가 떠오를 것입니다.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창문에도 비둘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현장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성화에 나오는 비둘기들은 대개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비둘기가 순결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령이 순결한 비둘기처럼 내려왔음을 뜻합니다.

비둘기는 성경에 나오는 두 번째 새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새는 연속설교 처음에 살펴보았던 까마귀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 비가 그치자 노아는 제일 먼저 까마귀를 내보내서 육지가 충분히 말랐는지 확인했습니다.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을 확인한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7일이 지났을 때 다시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이번에는 감람나무 새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7일을 기다렸다가 내보냈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육지가 드러났고 식물이 자라고 있음을 충성스럽게 노아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실제로 비둘기는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의 우편배달부로 활용되었습니다. 자기가 있는 자리로 돌아오는 귀소본능이 뛰어난 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서민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바쳐지는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양이나 소를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이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에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 많을 정도였습니다. 비둘기의 순결함은 물론 비교적 온순한 성격 때문에 제물로 드려졌던 것 같습니다.

아가서에서는 솔로몬의 연인이었던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에 비유합니다. 특별히 술람미 여인의 눈이 비둘기 눈처럼 예쁘다고 묘사합니다. 공원에 가서 비둘기 눈을 관찰해 보았습니다. 작은 눈인데 무척 예뻤습니다. 순해 보였습니다. 또한 비둘기는 바위틈 절벽에 집을 짓고 살곤 합니다. 아가서에서 자신의 여인이 숨은 것을 두고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는 비둘기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성경에서 연인을 묘사할 정도로 매력 있는 새입니다.

오늘날에도 비둘기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공원에 가면 비둘기가 떼를 지어서 다닙니다.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가가도 쉽게 도망가지 않을 정도로 인간과 친숙한 새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든지 비둘기는 서식합니다. 그러다보니 비둘기가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비둘기들의 오물이 거리를 더럽히기도 하고 비둘기가 울어대는 소리가 소음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우대받는 새가 비둘기입니다. 순결함과 충성스러움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노아의 방주에서 나뭇가지를 물고 올 정도로 충성스러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렸습니다.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와 신약성경의 첫 번째 마태복음에 비둘기가 등장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세대에 비둘기처럼 순결한 기독교인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비둘기처럼 내리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비둘기처럼 온유한 성령이 포근히 내려앉기를 기도합니다.-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6 : 신중함

성경에 나오는 새들은 당연히 팔레스타인 지역에 서식하는 새들입니다. 그 가운데 특이한 새가 오늘 함께 살펴볼 올빼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올빼미 또는 부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부엉이라는 우리말에는 올빼미 과에 속하는 모든 새들을 포함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올빼미보다는 부엉이가 어감이 더 좋은 듯 합니다. 레위기 11장 17절에 먹지 말아야 할 새들의 명단에 올빼미와 부엉이가 함께 나오는데 여기서 올빼미는 작은 부엉이, 뒤의 부엉이는 큰 올빼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올빼미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눈이 매섭고 서 있는 자세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눈꺼풀을 이용해서 눈을 껌뻑이는 능력도 갖추었습니다. 올빼미는 황폐한 곳에 살아서 까마귀처럼 섬뜩한 느낌을 줍니다. 야행성이라서 쉽게 눈에 띠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요. 반면에 올빼미 또는 부엉이는 학자와 같은 느낌도 갖고 있습니다. 큰 눈에 안경을 맞춰 쓴 만화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올빼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시력과 청력입니다. 올빼미는 낙엽 속에서 움직이는 쥐와 같은 동물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올빼미의 경우 머리 부분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감시 카메라가 360도를 회전하면서 사방을 살펴보듯이 올빼미의 머리도 180도는 물론 칡부엉이의 경우 270도까지 회전할 수 있답니다. 따라서 올빼미는 앞을 보고 있으면서도 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올빼미의 감지능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에게도 영적 민감성이 요청됩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우는 사자처럼 사방에서 달려들어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합니다. 자칫 서 있다고 생각한 채 잠시잠깐 방심하면 금방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촉수를 세우고 사방에서 밀려오는 시험과 유혹에 대비해야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올빼미가 사방을 두루 감찰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신앙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만 집착하면 우울해 지거나 필요 없는 영웅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현재만 생각하고 있으면 앞길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미래만 생각하면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올빼미가 사방을 관찰하듯이 우리들 인생길을 두루 살펴보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가지에만 몰두해서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일에만 몰두하다가 가족을 소홀히 하는 것, 취미생활에 집중하다가 정작 중요한 생업을 소홀히 하는 것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신앙만 중요하다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도 균형을 잃은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사방을 향해야하고 각각의 일들이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함을 올빼미를 통해서 배웁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의 눈이 먼저 하나님을 향할 때 영적인 촉수가 작동하고,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시편기자는 자신의 처지가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았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부르짖고 탄식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익히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사방을 두루 살펴주시고 보호해 주시길 구한 것입니다. 사방을 두루 살피는 올빼미처럼 우리들도 매사를 신중하게 살피고 기도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