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우리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여긴다면 두 가지를 꼭 인정해야 합니다.

첫째는 히브리서 11장 6절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의 삶과 세상사에 간섭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번 연속 설교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참새 한 마리까지 기억하실 정도임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지요.

둘째로, 우리가 찬양하듯이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의로우신 분인데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모두 용서함 받게 되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하고 믿을 때 우리들은 비로소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은 후에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머리로 믿어도 그것이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신앙이 냉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진실된 기도가 그대로 응답된다면 그리고 이런 경험이 반복된다면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인생길에서 염려와 근심이 밀려올 때 기도해야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분산되었을 때 염려가 생기고 근심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또한 염려와 근심은 우리들이 두 마음을 품었을 때 생깁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보면 마음에 혼란이 찾아오고 그것이 깊어지면 염려와 근심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에 속한 말씀으로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부탁하십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따라나선 제자들이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들의 백합화도 공중에 나는 새들도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이신데 자신을 믿는 기독교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반어법적 교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근심이 밀려오면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염려하는 대신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먼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고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먹물처럼 올라오는 염려와 근심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이 참빛 교회 식구들 신앙과 삶 속에 임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나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God is so good)”이라고 고백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목소리로 들려주시지도 않는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또 찬양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로 좋으신 분일까요?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긴 어렵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세상에 선한 일만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커다란 세상일 말고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봐도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망설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누가복음 12장 말씀대로 하나님은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시고, 우리들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세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세심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생각해 주신다면 좋으신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끔찍이 생각합니다.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줄 아버지가 없습니다. 알을 달라고 할 때 전갈을 주는 아버지도 없습니다. 자식을 낳은 친 아버지라면 절대로 이런 일을 자식에게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 자식을 챙기는 것이 인륜지도(人倫至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를 언급하신 다음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라고 하나님을 소개하십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참새 한 마리와 머리카락을 언급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신 것과 같은 패턴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더욱 좋은 것으로 자녀된 우리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육신의 부자지간은 아버지와 아들의 친자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과 분명한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확실히 알고 믿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마음에 모셨을 때 비로소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면서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게 되는 것부터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받게 되는 모든 과정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진리의 길로 가야합니다. 생선이나 계란과 같은 육적인 필요를 넘어서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성령 하나님께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좋으신 분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자녀 삼아주셨기에 가능함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믿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부탁드립니다.-河-

참새 한마리와 하나님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그냥 일상의 삶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삶 자체가 신앙이 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감격과 감탄을 상실한 무덤담한 신앙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을 오래 믿었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믿음이 약해서 회의를 머리에 달고 살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통 좋으신 하나님이요 완벽하신 분이라고 믿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좋으신 하나님의 작품과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세상에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불공평과 불의가 판을 치는데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셔야(계시하셔야)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하기에는 우리들이 너무 부족합니다. 게다가 우리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 까지 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 가운데 한명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지 못한 채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열 한명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습니다. 훗날에 이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초대교회를 세우는 사도들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시대를 역행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수만 명이 예수님 곁에 모여들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병이 낫고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위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사리온(페니)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의 숫자도 세고 계실 정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을 따라 나선 그리스도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인 우리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고 체험했을 때 우리들의 신앙이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감격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 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河-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 (5) : 에베소 교회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에 대해서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함께 살펴본 사도행전의 교회들은 어렵게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예배하심 가운데 복음의 전진기지로 굳건하게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향하여 마음이 열린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셨고, 이들은 교회가 세워지는데 초석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역시 복음전파가 지체되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주님의 때와 능력을 기다리면서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2천 년 전, 회당에서 또는 가정에서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들이 오늘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고 공동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격스럽고 책임감도 느껴집니다.

이제 오늘은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는 처음에 살펴보았던 안디옥 교회가 있었던 소아시아에 위치에 해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서 로마에서 아시아로 오는 무역선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르곤 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5만 명에 이를 정도였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에 이어서 네 번째로 큰 로마도시에 속했습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다이애나)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에베소가 당시에 중요한 항구도시였기에 바울도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를 자주 들렸습니다. 유럽에서의 2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일행은 에베소를 거쳐서 자신들의 파송 교회인 안디옥으로 귀환합니다. 그때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났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두었는데 이들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이들을 통해서 복음의 씨앗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제일먼저 에베소를 들렸습니다. 그때 바울이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들은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지만 형식적으로 믿을 뿐 마음 깊은 곳에 확신과 능력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주니 이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때 세례를 받은 열두명의 제자들이 곧 에베소 교회를 세우는 일꾼이 됩니다.

바울은 세달 동안 회당에 가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생깁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완고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리 잡을 틈이 없었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바울을 공개적으로 비난합니다. 바울은 회당을 떠나서 두란노라는 서원에 가서 날마다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바울은 에베소에 2년 간 거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또한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동안 개척한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권면하고 격려했는데 고린도전/후서가 대표적입니다. 훗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도 에베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 훌륭하게 자라갔습니다.

어떻게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굳건하게 세워졌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에베소 교회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 위에 세워졌습니다. 셋째로 에베소 교회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처소에서 교회를 세우게 될 우리 참빛 교회 위에 무엇보다 더 크고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임하기를 기도합시다.-河-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 (4) : 고린도 교회

지난주에 살펴본 데살로니가가 마게도니아 지방의 수도였듯이, 고린도는 마게도니아 밑에 있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도 바울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셈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의 전략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파장이 당시 강대국인 로마를 거쳐서 땅 끝까지 전파되는데 대도시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인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우리 교회의 사명이 적지 않음을 다시금 느낍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었고 무역의 요충지였기에 경제적으로도 윤택했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에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음란한 행위가 합법적으로 자행되곤 했습니다. 게다가 항구에 접해 있어서 여러 사람들의 발길이 고린도를 오갔습니다. 고린도는 이처럼 소위 양반의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는 말 가운데 도덕적으로 문란한 경우를 두고 “고린도 스럽다(to act the Corinthian)”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러갑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복음은 준비된 사람에게 임했고, 그들이 교회를 세우는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귀한 동역자를 만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 살다가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인해서 고린도로 이주한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텐트와 가죽을 수선하는 사람들로 사도 바울과 직업이 같았습니다. 이처럼 공통점이 많았기에 이들은 바울과 쉽게 친해졌고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물론 그 이후에도 평생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은 전례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다시 한 번 유대인들과 부딪칩니다.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서 별도로 모임을 갖습니다. 회당 옆집에서 모임을 갖다보니 유대인의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건도 생겼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났는데 결국은 회당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이것도 기적입니다.

이렇게 고린도라는 세상적인 도시에 복음이 들어갔고 그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힘을 불어넣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것을 부탁하십니다.“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주님의 백성들이 많으니 복음 전파에 더욱 열심을 내라고 격려하십니다. 바울은 그곳에 1년 6개월 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준비되고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짐을 또 다시 배웁니다. 로마에서 추방당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고, 핍박으로 교회를 옮겼을 때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에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 바울과 교회에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축복입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더욱 헌신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함께 세계적인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멋진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봅시다. -河-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 (3) : 데살로니가 교회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들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는 항구도시로서 마게도니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로마의 시인 키케로가 데살로니가를 두고‘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말했을 정도로 경제는 물론 정치적으로 요충지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것은 빌립보에 교회를 세운 다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어렵게 교회를 세웠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는 핍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는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 가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많은 숫자의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에서 간신히 자주장사 루디아의 마음이 열리면서 복음이 전파된 것에 비하면 데살로니가의 복음 전파는 폭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상류층 부인들과 헬라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도시 전체가 복음으로 들썩인 것 같습니다.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울일행을 핍박합니다. 그들은 불량배들까지 동원해서 바울 일행을 공격합니다. 빌립보에서 바울 일행이 자주장사 루디아의 집에 머물러있었듯이,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바울을 발견할 수 없자 이들은 야손과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읍장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야손과 그의 형제들이 바울 일행 대신에 체포됩니다. 로마에는 황제가 있는데 다른 임금인 예수를 전해서 세상을 소란케 만들었다는 죄목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바울에게 거처를 제공했다가 체포된 야손과 그의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됩니다.

빌립보 교회에 비해서 쉽게 복음이 전해졌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핍박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데살로니가 1장에는 바울이 세운 교회, 야손이라는 첫 번째 교인이 체포되고 보석금을 내고 나오면서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근방에서 소문난 교회로 성장해 갔다고 전해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사랑, 소망으로 철저하게 무장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성령이 주시는 믿음의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처음에 교회를 세울 때 3주 동안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고 뜻을 풀어주면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해준 말씀위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면서 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입니다. 말씀위에 세워졌고, 성령의 능력과 확신 가운데 성장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을 잘 이겼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교회, 각 처에 소문난 교회로 자라갔습니다. 할렐루야!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우리 참빛 교회가 모델로 삼아야 할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 말씀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둘째로, 말씀의 은혜위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에 힘이 있고 확신이 생깁니다. 셋째로, 격조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는 신앙의 세 가지 덕(德)이 우리 교회 안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 교회 역시 하나님께 칭찬받고 각처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로 소문이 날 것입니다. -河-

사도행전속의 교회들 (2) : 빌립보 교회

오늘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들 가운데 두 번째로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빌립보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있는 유럽에 가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소아시아에서의 전도문을 막으시고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스와 로마와 더불어 유럽에 속했던 마게도니아 사람이“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9)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보내셨음을 믿고 유럽으로 향합니다.

바울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첫 번째로 세운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니아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기에 커다란 기대를 안고 빌립보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에서의 복음 전파는 쉽지 않았습니다. 수일을 거했지만 복음에 진보가 없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복음전파의 기회를 잡지 못한 바울은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기도처가 있는 성문 밖으로 나갑니다.

성문 밖 강가에 여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염색 산업이 발달한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였습니다. 루디아는 타지에서 가족과 함께 빌립보에 이주한 여인이었고, 옷감을 파는 상인이었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믿었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루디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때 루디아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두고“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14절)고 기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루디아를 예비해 놓으셨고,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녀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도록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은 모두 세례를 받고 빌립보 교회의 첫 번째 교인이 됩니다.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바울에게 제공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처럼 옷감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루디아의 가정에서 시작된 빌립보 교회에 어려움이 닥칩니다. 바울이 점쟁이 여종을 고쳐주었는데 그녀의 주인이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힙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갇힌 것은 복음 자체가 감옥에 갇힌 것처럼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건져내십니다. 그것을 목격한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온 가정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성경이 전하는 두 번째 빌립보 교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고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도록 일꾼들을 예비해 놓으셨습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성도님들로 인해서 세워지고 자라갑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에 영접한 성도들입니다. 바울의 거처와 모임장소로 가정을 제공할 만큼 희생할 줄 아는 성도들입니다. 나중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빌립보서입니다. 거기에 보면 빌립보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져갔음을 봅니다. 옷감 장사 루디아와 빌립보 간수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우리 참빛 교회 안에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교회가 세워지는데 쓰임 받는 성도님들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선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일꾼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河-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 (1) : 안디옥 교회

지난 3주에 걸쳐서 구약성경 시편 116편을 살펴보았습니다.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던 이름도 없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함으로 구원받고 그 은혜를 백성들 앞에서 간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평생에 기도할 것과, 세상에 살 때에 하나님 앞에서 행할 것,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서원을 갚을 것을 다짐합니다. 이처럼 지난 세 시간에 걸쳐서 살펴본 시편 116편은 구원의 하나님을 만난 한 개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앞으로 5주에 걸쳐서 사도행전 속에 나타난 교회들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개인의 신앙만큼이나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신앙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함으로 교회들이 세워지는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능력 있는 사도들로 변화됩니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로 퍼져나갔고, 이방인의 사도 바울을 통해서 로마와 땅 끝까지 전파됩니다. 이 모든 복음전파의 사역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에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은 사도바울이 세 번의 전도여행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로마의 주요도시들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앞으로 우리들은 바울이 세운 4개의 교회들(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과 바울을 파견하면서 본부 역할을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핍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들은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초대교회들이 세워지는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무엇보다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 참빛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힘과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안디옥은 오늘날 터키의 동남쪽에 위치한 도시로 로마제국의 3대 도시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등 박해가 심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서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그리고 이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 전했는데 이들이 안디옥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여러 인종들이 함께 어울려 세운 교회였습니다. 여기는 예루살렘에서 피신 온 유대인들은 물론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과 헬라인들이 한 마음으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웠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라는 선하고 성령충만한 사도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말씀에 굳게 선 교회였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실라를 선교사로 파송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등 구제와 선교에 앞장섰습니다. 무엇보다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제자들이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는 진짜 신앙인들로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밖 외국에 세워진 이민교회, 각기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인 다양성, 구제와 선교에 앞장서면서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안디옥 교회야 말로 우리 참빛 교회가 표본으로 삼아야 할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河-

서원을 갚으리로다

시편 116편에 대해서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시편 기자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꼼짝달싹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세상을 향해서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할 정도의 극심한 회의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려주세요”라는 외마디의 처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시편기자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놀라운 경험을 한 시편기자는 성전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기에“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결심합니다. 사는 날 동안 기도의 인생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체인입니다. 우리들도 시편기자와 마찬가지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시편기자는 “내가 생존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고 결심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인생길을 걷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러한 결단은 시편기자의 확실한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인생에 희망의 빛이 전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세상살이가 서럽고 힘이 들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셨습니다. 실수를 했든지 아니면 걸림돌에 걸렸든지 넘어질 때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이토록 큰 은혜를 구체적으로 체험했기에 세상사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행할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시편기자처럼 고백하기 원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같은 말씀이 오늘 본문에 두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14절과 18절). 시편기자는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잔을 드는 것이지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약속(서원)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모두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원을 갚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듯이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것을 모두 실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들은 기도할 때 여러 가지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면 그 모든 것을 잊고 자기 마음대로 살 때가 많습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하나님 앞에서 드린 약속을 지키겠다고 결심합니다. 여기서 서원을 갚는 것은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편기자는 감사의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하나님 백성의 행복한 삶입니다. 평생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사시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시편 116편에 대해서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시편기자는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났습니다. 그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사망의 줄이 그를 꽁꽁 둘러맸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마저 버림받았습니다. 그가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제 끝”이라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 시편기자에게 남아 있던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역시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는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우리가 종종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손들고 온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한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외마디 기도였습니다: “아- 주님, 살려주세요!”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우리를 모두 이해하시는 하나님께서 시편기자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때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고백을 합니다.:“내가 저를 사랑하도다.” 그리고 평생에 기도하겠다고 다짐하지요. 시편기자의 고백은 구약시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곳에 모인 예배자들에게 공개적으로 했던 간증입니다. 그의 간증을 듣고 똑같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가 새로운 생명으로 회복된 것을 보고 성전에 예배하러 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금 시편기자는 성령충만합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기에 자신을 향해서 독백처럼 명령합니다.:“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절).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세력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과거의 고통을 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을 누리자는 결심입니다.“후대하셨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아주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간증입니다.

8-9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금 회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살려주셨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사라지게 하셨고, 넘어지려는 순간 잡아주셨습니다.“아- 주님, 살려주세요”라는 외마디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평생 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서원기도를 드립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2절 말씀에서는 평생 동안 기도하겠다고 결심했는데 9절에서는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결심합니다. 

우리들도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여러 가지 길을 모색하면서 어려움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건져주십니다. 하늘의 평안으로 그를 감싸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 이 은혜에 들어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시편기자처럼 고백하기 원합니다:“내가 살아있는 동안 주님 따라 살겠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