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기도하라

지난주일 목요서신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교회력에 따르면 우리들은 지금 부활절을 지나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40여일을 함께 계시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기도하면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정도가 지나서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을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때 함께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말 그대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성령강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 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치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행전 2:1-4, 표준새번역).

이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이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 위에 임한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었습니다. 제자들이 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각 지방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 이후에 온 세상의 언어는 혼잡하게 되었고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나뉘었던 언어가 다시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온 교회와 세상을 진리 가운데 하나로 묶어주는 능력입니다.

부활절을 지낸 우리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사모하면서 앞으로 50여일을 지내야 합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함께 기도했듯이 우리 교회도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기도처가 없어서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지만, 6월 둘째 주 성령강림주간까지 온 교회가 매일 밤 10시에, 그리고 하루에 5분씩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물론 서머나 식구들의 신앙과 삶 속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기대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성도로서, 부활의 생명을 체험한 성도로서 앞으로의 인생길이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근사한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눈 야고보서 5장 말씀에서 온 교회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서로 기도할 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것임을 약속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였던 제자들처럼,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부활절 아침에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주일을 맞습니다. 한국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 부활주일에 삶은 계란에 색깔을 입혀서 나눠주곤 했습니다. 계란 속에서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은 계란 속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표시로 계란을 나눠준 것입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계란을 갖고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쁜 색깔의 계란을 가지려 아우성입니다. 그래도 집에 가서 예쁘게 색칠한 계란을 보면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부활절은 교회가 지키는 가장 큰 절기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전하는 복음도 헛것이고 우리들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고전15:14). 아니 기독교 자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믿음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기에 우리들도 육체의 죽음 너머에 계속되는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줍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하면 죽음의 세력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 못합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가면서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11:23).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난 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부활신앙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죽은 자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것은 마르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서 믿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새롭습니다. 우리들도 살아서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그 말씀이 더욱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생명을 누리고 산다면 이 말씀을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곧 생명을 품고 있는 셈입니다. 생명은 죽음의 반대말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주어진 것입니다.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계란이 생명을 품고 있듯이, 우리들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 안에 계십니다. 2011년 부활절 아침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서머나 식구들께 그대로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河-

십자가의 길

지난주에는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한 가운데 위치합니다. 처음부터 십자가가 신앙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은 물론 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반역죄나 살인 등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형틀이었고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대속의 은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구속의 은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화목의 은혜).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이렇게 형틀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그 위에 달리심으로 더 이상 형틀이 아니라 구원과 승리의 십자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은혜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생전에 예언하신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가 영광스런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 복음을 전했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이후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세상에 전했고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갈보리 언덕길을 생각하면서, 기독교인들 역시 세상 속에서 외롭고 힘든 신앙과 삶의 순례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짐을 믿기에 소망 가운데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듯이, 기독교인들도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을 몸소 실천해야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희생했을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갈 2:20).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철저한 자기부정입니다. 자존심도, 고집도,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고 온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을 때, 우리 앞에는 하나님께서 예비 놓으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은혜요, 우리들이 그 은혜 속에서 경험하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시고 그 은혜를 흠뻑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한 걸음 나가셔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의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2천 년 전에 이미 그 길을 오르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은 골고다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매일같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河

고린도전/후서 강해를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 수요예배에서는 주일예배와 구별해서 성경강해나 신앙생활에 필요한 덕목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수요예배를 회상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년 가깝게 구약의 소예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살펴 본 것입니다. 이어진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말씀은 비유 속에 깃든 예수님의 구체적인 교훈을 배우고 삶에 적용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요즘은 성경 본문을 차례로 살펴보는 것에 열심을 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단지 듣기에 좋고 재미있는 설교나 축복을 강조하는 말씀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갖고 강해를 하고, 본문과 씨름하는 성경공부는 자칫 지루하고 너무 딱딱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 위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고, 공부하고, 외우고, 묵상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웬만한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부터 고린도전/후서 강해를 시작합니다. 바울 서신가운데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를 부분적으로 강해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하기는 처음입니다. 이번 공부에 앞서서, 지난 여섯 시간에 걸쳐서 <성경 바르게 읽기>라는 주제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관찰-해석-적용으로 이어지는 귀납적 성경연구도 간단히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번 성경강해가 기대가 됩니다.

고린도전/후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였습니다. 고린도는 로마의 항구도시로 우상숭배는 물론 여러 가지 세상의 모습들이 섞여 있던 말 그대로 세속도시였습니다. 이처럼 세상 풍습이 가득 차 있던 곳에 복음이 들어갔고 교회가 세워졌지만, 고린도 교회 역시 분열, 우상숭배, 음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자신이 개척해서 세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 전/후서입니다.

저는 이번 공부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다시 한 번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고린도서를 공부해 가면서, 교회의 망가진 모습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간의 차이를 발견하고, 우리 교회에 부족한 것과 그릇된 것은 회개하면서 더욱 아름다운 교회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가 하늘나라의 모델하우스임에 분명한데, 죄인들인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은 물론 교회의 모습을 점검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안이 넘치는 교회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한된 시간에 모든 말씀을 살펴볼 수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저는 각 장에서 중요한 구절이나 사건을 깊이 공부하고 그 말씀이 주는 교훈을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는 시간이 되도록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고린도전/후서 강해에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河-

웃음 가득한 인생 10 : 브엘세바

이삭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줄 알았지만, 모든 것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고, 그의 이름 뜻 그대로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1)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거한 것,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 3) 앞서 행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이삭은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토를 달거나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훼방할 때마다 양보했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삭의 인생은 소리 없이 강했습니다. 그에게 포기나 낙심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넓은 곳 르호봇에 이르기까지 우물을 파고 또 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향 브엘세바에 돌아온 이삭을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고향에 돌아온 확인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끝까지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고 축복하실 것임을 확인한 이삭은 그 자리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또 하나의 비결이“예배하는 삶”이었음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삭은 고향땅 브엘세바에 와서도 우물을 팝니다. 그때 그를 괴롭히고 훼방했던 블레셋 그랄땅의 아비멜렉왕이 관리들을 데리고 찾아 왔습니다. 이삭은 깜짝 놀랐습니다. 블레셋 땅에서의 좋지 않은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을 것입니다. 이삭은 당황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로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그때 아비멜렉 왕이 이삭에게 평화조약을 제안합니다. 아비멜렉의 입에서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언급됩니다.:“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졌음을 세상 사람들이 증명해준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자신을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확인한 이삭은 그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서로 평화협정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떠나던 날, 우물을 찾던 종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라고 이삭에게 보고합니다. 블레셋에서 우물을 얻었던 이삭이 고향에 돌아와서도 물(생명수)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고향에서도 살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서 그 땅을“브엘세바(맹세의 우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향하신 약속을 지키셨고, 이삭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것입니다.

이삭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하셨고 그를 축복하셨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서머나 식구들 가운데 그대로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9 : 예배하는 이삭

흉년을 피해서 블레셋 땅 그랄로 피신했던 이삭은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습니다. 피난생활이 여의치 않았는지 이집트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랄 땅에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머물면 이삭과 함께 하시고 그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은 그랄땅에 머물지만 곧 이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잘못을 범합니다.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블레셋에서 농사를 지어서 백배의 결실을 맺는 축복도 받습니다.

하지만 타향살이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거부가 되면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은 쫓아다니면서 훼방했습니다.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던 이삭은 양보했고 희생했습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믈을 팠습니다. 이삭은 결국 광활한 곳,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 르호봇에 이르게 됩니다. 이삭의 피난살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 덕분에 이처럼 르호봇에 이르는 축복으로 끝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삭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브엘세바는 이삭이 있던 그랄에서 서쪽에 위치해 있었고 아버지 아브라함도 브엘세바에서 우물을 파면서 지냈습니다. 창세기 21장에 의하면 아브라함도 브엘세바에서 블레셋 아비멜렉왕과 협정을 맺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이삭도 그곳에서 아비멜렉과 평화협정을 맺게 됩니다. 이처럼 이삭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신앙을 계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아브라함처럼 이삭도 하나님을 확실히 의지하면서 약속의 자녀로 산 것입니다.

고향인 브엘세바에 돌아오던 밤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발걸음을 인도하셨고, 이삭이 가는 곳마다 미리 가셔서 그를 맞으시고 그에게 함께 하심과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2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그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도 똑같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방해합니다. 두려울 때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확실한 믿음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두려울 때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두려움에 쌓여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함께 하심과 축복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십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 약속의 말씀을 또 다시 받은 이삭은 곧바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비결은 그가 예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단을 쌓는 행위는 자신의 거처가 예배처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삭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표시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장막을 치고 종들로 하여금 우물을 파게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줄 믿고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예배하는 인생, 믿음을 삶에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음 한 주간 삶 속에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을 예배하시길 부탁드립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8 : 에섹에서 르호봇까지

이삭은 이방땅 블레셋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축복하심을 모두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목하셨고 언제나 이삭보다 앞서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삭에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이 임할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시기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생명줄인 우물을 모두 흙으로 매웁니다. 흉년이 찾아왔는데 우물까지 없으면 농사는 물론 목숨을 부지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삭에게 호의적이던 블레셋 그랄 왕 아비멜렉까지 이삭을 찾아와서 그 땅을 떠나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시기를 사게 된 것입니다.

이삭은 백배의 결실과 많은 재산을 모았던 장소를 미련 없이 떠납니다. 이삭답게 아무런 토를 달지 않습니다. 이삭이 이렇게 세상에서 얻은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창26:3)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길을 예비해 주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이삭으로 하여금 새로운 터전을 향해서 길을 떠나게 했습니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거합니다. 그곳도 예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떠난 후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놓았던 우물을 다시 파기 시작합니다. 물을 찾는 일입니다. 과거의 영광에 도취되지 않고, 현재의 모습에 낙심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우물을 모두 복원한 다음에 아버지가 불렀던 우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이삭이 이방 땅에서 아버지를 기억한 것입니다. 아니 아버지가 믿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의 신앙을 아버지의 신앙에 비추어 새롭게 하려는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물줄기가 터졌습니다. 이삭의 새로운 터전에서도 하나님은 이삭과 함께 하셨고 그를 축복하시면서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때 블레셋 그랄 땅에서 양을 치던 유목민들이 또 다시 훼방합니다. 이삭이 판 우물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겨댑니다. 이삭이 잘되기만 하면 이들이 나타납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에섹(다툼)”이라고 부릅니다. 우물로 인해서 블레셋 사람들과 다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두 번째 판 우물을 두고도 시비를 겁니다. 이번에는 그들의 훼방이 훨씬 심했던지 우물의 이름을 “싯나(대적함)”라고 부릅니다.

이삭은 다툼이 일어날 때마다 장소를 옮겨가면서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주실 것을 믿었기에 세상의 훼방과 간섭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물을 팠을 것입니다. 이삭이 그곳에서도 물을 얻었고, 더 이상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삭이 우물 이름을“르호봇(장소가 넓음)”이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창26:22). 이삭의 마지막 감사의 고백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을 굳게 믿고 다툼이 그칠 때까지 우물을 파고 또 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약속을 마음에 품고 에섹에서 르호봇까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서머나식구들 모두 믿음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예비된 르호봇에 이르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웃음 가득한 인생 7 : 신실하신 하나님 (2)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신약성경이나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보다 세상 역사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즉각 심판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축복도 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창세기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흉년을 피해서 블레셋으로 피신 간 이삭은 그곳에 머물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땅에 머뭅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넘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리브가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동생이라고 속입니다. 이방 땅에서 이삭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사이인 것을 알아내고 온 백성들에게 이삭과 리브가를 해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구해주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움직이셔서 이삭과 리브가를 구해주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블레셋 땅에 머물라고 하시면서, 이삭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창26:3).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의지해서 그랄에 머물기고 결정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삭과 함께 하셨고 아비멜렉을 통해서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블레셋 땅에 머문 이삭은 그곳에서 농사를 짓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삭이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생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은 백배의 수확을 얻게 되고 블레셋 땅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아주 큰 부자가 됩니다. 백배의 결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13절에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게 임했다는 히브리어 표현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니 온 세상이 흉년이 든 상황에서도 이삭만은 기적 같은 풍년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환경에 상관없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한없이 축복하신 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시기했습니다. 이삭의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을 텐데, 흉년을 피해서 자기 땅에 온 이삭이 부자가 된 것만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을 흙으로 메우면서 이삭을 훼방합니다. 당시는 우물이 중요했고, 흉년이 드는 경우 우물을 갖고 있는 것은 커다란 재산이었습니다. 우물을 메웠다는 것은 이삭에게 아주 치명적인 손해를 입힌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자기 땅을 떠나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삭은 그랄 평지를 떠나서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거합니다. 이삭은 이미 거부가 되어 있었고 종들도 있어서 블레셋 사람들의 요구에 힘으로 대항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아비멜렉 왕의 요청대로 그동안 일구어놓았던 삶의 터전을 떠납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하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이삭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더라도 여호와 이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6 : 신실하신 하나님 (1)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던 비결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그의 신앙과 삶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체험을 통해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삭은 튼튼한 믿음위에 4가지 S로 요약된 신앙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단둘이 교제하는 영적인 고독(spiritual solitude)을 즐겼습니다. 이삭의 삶은 단순했습니다(simple life). 이삭은 양보하며 희생했습니다(sacrifice). 겉으로 보면 부드럽고 나약해 보일 수 있었지만 이삭은 강했습니다(strong).

우리들도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이삭의 네 가지 삶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삭이 추구했던 네 가지 삶의 모습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 리브가가 아이가 없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고 쌍둥이 아들을 얻었습니다. 기도는 이삭의 삶에 힘이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였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말씀에 의하면, 이삭은 완벽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 가까이 하기 힘든 탁월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삭도 사람입니다. 그에게도 허점이 있었습니다. 이삭이 살던 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애굽으로 피난을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만류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삭의 자손들이 만민에게 복의 통로가 될 것이랍니다. 이삭과 그의 후손이 이 같은 복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삭과 그의 후손에게 그대로 지키시는 장면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지요.

하나님 말씀을 들은 이삭은 블레셋 땅 그랄에 그대로 머무릅니다. 하나님 말씀에 두말없이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삭에게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그랄 사람들이 외모가 출중했던 리브가를 탐낸 것입니다. 이삭 역시 행여나 이방 사람들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서 아내 리브가를 여동생이라고 속입니다. 아내라고 하면 리브가를 빼앗기 위해서 남편인 자신을 죽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비겁하지요. 부전자전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랄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가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둘이 부부인 것을 알아챈 아비멜렉 왕은 이삭을 불러서 사실을 확인한 후 모든 백성에게 리브가를 범하는 사람은 죽일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랄 왕 아비멜렉을 통해서 이삭의 두려움을 바로잡으시고 두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를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의 백성을 세상에서 구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은 그의 성품과 노력위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5 : 기도

지난 주 설교에서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이삭의 신앙과 인생에서 토대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첫째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창 17: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듯이 그의 아들 이삭과도 태어나기 전에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이삭 역시 하나님과의 언약 가운데 약속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약속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백성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이삭이 약속의 자녀에 걸맞은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삭의 믿음과 순종 없이는 아브라함이 그를 하나님께 바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었고 이삭이 많이 컸기에, 이삭의 협조 없이는 모리아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제단에 제물로 드려지는 모든 과정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조건 순종하는 이삭의 믿음은 그의 인생길을 웃음 가득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경험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향한 확신 때문입니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에 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 하나님께서 미리 보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다는 뜻인데,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었습니다. 실제로 이삭의 아내를 얻는 과정에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앞서 가셔서 그의 아내를 예비하셨고, 그것을 통해서 이삭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길을 지켜보고 계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약속의 자녀 이삭은 아내 리브가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리브가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어머니를 잃은 이삭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와 어머니 사라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외모가 남달리 아름다웠습니다. 훗날 이삭의 아들 야곱도 외모가 출중한 라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결국 그녀를 아내로 삼지 않습니까? 그토록 아름다웠던 리브가였지만 그녀도 시어머니 사라처럼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이삭이 60이 되었지만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약속하실 때 그의 후손과도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삭에게 자식이 없으니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삭에게 자신의 힘으로 넘기 힘든 큰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은 셈입니다. 그때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삭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음으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창25:21). 하나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던 이삭 – 그는 아내 리브가를 기다리면서 들에 나가서 묵상했습니다. 인생길이 막혀서 불가능해 보일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때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비결이 바로 기도였음을 잊지 맙시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