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돌에 새겨진 이름

진품(眞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조품 또는 위조품의 반대말입니다. 진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품의 가치는 더욱 커지고 저절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소위“짝퉁”이라고 불리는 위조품은 어딘가 어색하고 결국에는 가짜인 것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때가 되면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고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고 있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서머나 교회는 말 그대로 진품입니다. 죽도록 충성했고 비록 세상에서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첫 사랑의 감격과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초심을 잃은 신앙은 위험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변질된다면 가짜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버가모 교회 역시 안티바라고 하는 순교자를 낼 정도로 명성이 있었지만 교회 안에 가짜 교리가 침투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소개하는 것만 보아도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있던 버가모라는 도시 자체가 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곳에는 각종 신전이 있었고, 쾌락과 세상 풍습이 판을 쳤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버가모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무리들을 니골라당이라고 부릅니다.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에베소 교회에서도 잠깐 언급되었습니다.(계 2:6). 교회사에 의하면, 니골라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했던 헬라인으로 다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행 6:5). 사도행전에서 일곱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가운데 선출되었습니다. 니골라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니골라는 교회를 인도하는 집사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의 우두머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니골라당은 성경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다음에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적인 일이기에 육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답니다. 하나님은 영에만 관심을 가지실 뿐, 육체는 어떻게 살든 관여하지 않으신답니다. 그래서 니골라당은 버가모에서 유행했던 세상의 음란과 쾌락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육체로 짓는 죄는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교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쾌락과 음란 그리고 거짓을 일삼으면서 자기 편할 대로 즐길 것 다 즐기면서, 교회에 와서는 거룩한 척하면서 사람들을 포섭했기에 사단의 무리라고 부른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직접 검으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랍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회개하고 끝까지 진품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두 가지 약속이 나옵니다.:“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에 새겨진 이름”입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양식이자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가리킬 것입니다.“흰돌”에 새겨진 이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니골라당이 세상의 풍습을 따라갔지만,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은혜를 양식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니골라당이 검으로 심판을 받고 죽을 운명이지만, 진품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은 흰돌에 새겨져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흰돌에 새겨진 이름에 걸맞게 순결하고 거룩해야 함을 다시금 배웁니다. -河-

12월을 맞으며

“올 해의 마지막 달을 살고 있습니다. 한 해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요! 우리말로 나이가 드는 것을 두고 “나이를 먹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먹는 것으로 비유한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음식을 먹어 치우듯이 지나간 시간은 사라집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유익이 되고 삶 속에 열매로 남습니다. 시간도 먹으면 (나이를 먹듯이) 그것이 우리 삶에 귀한 열매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나쁜 음식을 먹으면 도리어 몸에 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옳게 사용되지 않은 시간은 우리의 삶과 인생길에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이를 먹는 것이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을 잘 선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척 부끄럽고 창피할 것입니다. [중략] 2010년 한 해 동안 336일을 먹고 이제 29일이 우리 앞에 남겨져 있습니다. 남겨진 날들 하루하루,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웃을 섬기면서 살아봅시다.“

위의 글은 지난 목요일에 보낸 이-메일 서신 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저 역시 목요일에 메일을 보내고, 올 한 해를 알차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낸다 싶으면 얼른 정신을 차립니다. 그동안 보낸 시간이 과연 하나님 앞에 기쁘게 드려졌는지 돌아보고, 제가 보낸(먹은) 시간이 어떤 열매로 나타날지 겸허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인생 통장에 365일을 꼬박꼬박 넣어주시는데 연말연시가 되어야 시간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니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남은 한 달여 열심히 살기로 결심해 봅니다.

저는 올 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큐티를 강조했습니다. 주보에 있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대로 따라 사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저와 함께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서머나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전하고,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관심입니다. 아침에 하나님 말씀을 읽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을 때 저는 춤을 출 듯이 기쁩니다. 송이꿀보다 달고,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서머나 식구들에게 임하기를 뒷전에서 정말 애절하게 기도합니다.

이제 2010년은 한 달도 남지 않았고, 다시는 2010년이라는 시계추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남은 한 달여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말씀 붙잡고 사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큐티하시고, 성경말씀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셔도,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을 곱씹으면서 하루하루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소망이 됨을 분명히 체험하실 겁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살 길입니다. 기도는 하늘과 땅을 잇는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장소가 허락한다면 연말연시에 특별기도회를 가지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로 맞추고 싶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각자의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밀하게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덧붙인다면, 사랑이 그립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수요예배에서 배운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말입니다:“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河-

첫 사랑의 회복

올해 하반기에는 줄곧 큐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동안의 큐티 본문가운데서 설교 본문을 정해서 말씀도 나누고 있습니다. 이제 12월의 큐티 본문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밧모섬에 있던 요한이 환상가운데 보고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 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서 기록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마지막 날을 기준삼아서 다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어려운 말씀이나 표현에 신경 쓰기보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하며, 마지막에 성취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에 될 일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호기심을 갖는 것보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첫 장에 의하면, 요한 계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 말씀은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해야 할지를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적같이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은 지금 이 순간에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고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앞으로 7주에 걸쳐서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곱 교회가 어떤 상황에 있었기에 하나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는지 살펴보고,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 각자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새롭게 다짐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2년여를 머물면서 특별한 애정과 열심을 갖고 세운 교회였습니다. 에베소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이기도 합니다. 에베소를 떠나서 예루살렘에 간 바울은 그곳에서 체포되고 로마로 호송되기 때문입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곧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은 이번 큐티와 주일설교에서 줄곧 나누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배운 대로 실천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사모하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옛 사람의 모습을 모두 버리고 새 사람을 입기를 지속적으로 권면합니다. 교회는 물론 가정과 사회생활에서도 빛의 열매를 맺기를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에베소 교회는 모범이 되었고, 예수님을 향한 첫사랑이 뜨거웠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 계시록 본문에서 에베소 교회를 두고 첫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합니다. 얼른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하기를 촉구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급격하게 식어진 것 같습니다. 첫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처음이 좋아도 끝이 망가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역시 처음과 나중이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를 기대하십니다. 처음보다 끝이 좋고, 아니 처음과 끝이 똑같은 서머나 식구들이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河-

새 사람을 입으라

지난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에베소서에는 예수님을 믿기 전의 모습과 예수님을 믿은 후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본 본문에서도“옛사람”과 “새사람”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은 천사들이 흠모할 만큼 매력적인 삶입니다. 요즘은 세상적인 축복에 관심을 많이 기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우리가 흔히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이 세상에서 조금 편하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쭐대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비롯한 성경에서는 “가지는 것(having)”을 크게 강조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일용할 양식 정도, 남에게 꾸지 않을 정도의 삶이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대신에 성경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being)에 관심을 갖습니다. 신앙의 정도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나, 많이 소유한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인격과 그것이 겉으로 표현된 삶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덕목들도 우리들의 인격과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관계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스타일이 180도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욕심에 따라 사는 것은 옛 모습입니다. 심령이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 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좇아 살아갑니다. 여기서 의는 바른 것입니다. 무엇 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는 거짓이 없는 참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진리를 좇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와 진리로 살면 자연스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 백성으로 구별된 모습입니다.

25-32절에는 의와 진리로 거룩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무엇보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거짓된 언행에 악한 세력이 임하고 자신과 이웃까지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분을 다스려야 합니다. 화를 낼 때도 사탄이 틈타기 때문입니다. 도적질과 같은 나쁜 습관도 고쳐야 합니다. 고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언어생활도 조심해야 합니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선한 말만 사용해야 합니다. 새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의롭고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옛 습관을 그대로 갖고 살면, 마귀가 틈을 탑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근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구원은 보장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 그 이후의 삶이 옛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꾸만 시험에 들고 성령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삶과 신앙의 성숙이 꼭 필요합니다.

마지막 31-32절은 오늘 본문의 요약입니다: “너희의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오늘 말씀만 잘 지키면, 멋지고 매력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님들이 모여 있는 우리 교회는 말 그대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나가기를 기도 가운데 노력합시다.-河-

하나님의 선물

선물 – 언제 들어도 마음 설레는 말입니다. 남에게 선물을 줄때도 기분이 좋지만, 선물을 받고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업습니다. 그래서 잠언 19장 6절에서는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선물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고받는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선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에베소서 말씀에도 선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2장 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교훈합니다.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은혜”와 “선물”은 각각 다른 헬라어가 사용되었지만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베풀어주는 호의입니다. 선물은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낄 정도로 구체적인 사건 또는 물질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2장 1-3절에 있듯이, 우리들은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추한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세상 풍속을 따릅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을 따르는 모든 행위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시해 주는 두 번째 삶의 모양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삶의 모양은 두 번째 모습과 비슷한데 마음이 추가되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이 충동적이고 말초적이라면, 마음의 욕망은 고상해 보이지만 그 안에 역시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하면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을 허물과 죄로 인해서 죽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믿는 삶은 겉모습과 삶의 목적에서 차이가 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커다란 사랑을 입었으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가사가 딱-맞습니다. 육체를 좇는 삶은 이 세상의 삶이 끝입니다. 지나갈 것들입니다. 그래서“죽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은 영생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살려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뿐인데 이렇게 큰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했습니다. 할렐루야!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선물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 자체가 선물인 것을 깨닫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구원받은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삶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첫째는,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고 그것을 오는 세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은혜는 분수처럼 세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둘째로, 구원을 놓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갖고 서로 키재기를 하거나 자랑을 한다면 그것은 선물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겸손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선한 일입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다음 한 주간 하나님의 선물인 여러분 각자의 삶을 귀하게 여기고 누리기시를 바랍니다.-河-

주님의 은택

기독교인들은“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아니 기독교 자체를 은혜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혜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3장 24절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는데 이것이 곧 구속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가 사라졌기에 의인이라 칭함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값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었고, 신앙의 복을 누린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행위에서 얻는 보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쳐주는 온전한 신앙은 우리들이 어떤 것을 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혜택을 누리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은혜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103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찬양입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1-2절)는 말씀은 다윗이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외치는 커다란 외침입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체험한 다윗은 자신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영혼은 다윗의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목숨을 다해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함은 그만큼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이 감사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신하의 아내를 범했고, 결국 그 신하도 전장에서 죽도록 사주했습니다. 그의 집안도 갖가지 죄들로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죄사함에 대한 감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깊은 은혜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신의 병을 고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건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육신의 질병도 고침을 받습니다. 건강하게 살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윗은 깨닫고 그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시는 여호와라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자와 긍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육신의 질병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린 것입니다. 모든 죄와 파멸의 세력에서 새로운 삶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결단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원을 만족케하시고 독수리처럼 힘차게 생의 도약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을 향하여 날아오르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수요예배에서는 (5)

지난 수요예배는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2년 전에 시작했던 구약성경의 소예언서 공부를 모두 마쳤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부터 시작되는 12권의 소예언서는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일예배에서 설교하려면, 그 내용이 너무 무겁습니다. 지루하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도 많이 있어서 혼자 읽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소예언서 말씀을 강해나 설교로 함께 나눌 기회가 적습니다. 아니 교회를 수십 년 다니셨어도 소예언서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지 못한 경우도 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년여 소예언서를 모두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소예언서의 마지막인 말라기 4장을 공부하면서, 구약 성경 예언서의 주제를 “남은 자의 신앙”이라고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불안하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를 일삼았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도 그 지위가 세습된다는 안정감에 구태의연하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왕들도 역사의 흐름 속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급기야 주전 6세기에는 남북으로 갈렸던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무너집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세우셔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신앙은 물론 당시 사회적으로 타락한 도덕과 신앙양심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백성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씀도 거침없이 선포했습니다. 심판을 선포하지만 그 안에는‘헤세드’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끝까지 신앙을 지킨 남은자들이 늘 구원의 기쁨에 참여하게 됩니다.

요즘 세대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처럼 영적으로 많이 타락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함(구별됨)을 상실한 채, 세상에 섞여 살아갑니다.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혼합주의 신앙을 갖고 있었듯이, 요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 쾌락을 하나님과 겸해서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지난 2년 동안 함께 살펴본 소예언서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하고 바른 믿음을 갖기를 교훈합니다. 무엇보다 신앙과 삶이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거룩하라고 가르쳐줍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 속에 예언자들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살아서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앞으로 10주 동안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한 가지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딱딱한 말씀을 들었다면, 예수님의 비유 속에 깃든 보화와 같은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하늘나라의 비밀이나 꼭 필요한 신앙의 진리를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비유에 예수님의 실제 목소리가 들어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들에게 익숙해서 말씀을 묵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남은 올 한 해 동안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이 한창 성숙되기를 기대합니다. 수요예배에서 뵙겠습니다.  -河-

인생을 사는 지혜

한국에서는 수십 년 동안 행복한 인생에 대해서 강연을 하면서 행복전도사라는 별칭까지 얻은 분이 남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분의 강연을 들은 적은 없어도 그분이 어떤 강연을 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연의 주제는 행복이었고, 어떻게 하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론을 강연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 앞에 불치병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한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프리드만이라는 구약학자는 본문을 출애굽기 32장과 연결시켰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는 동안 지상에서는 모세의 형 아론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앞에 절을 하고 흥청망청 즐겼던 사건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서 애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그의 기도는 힘이 있었습니다.

시편 90편은 1-12절과 13-17절의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소위 ‘세상살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곧바로 임하지 않았을 때 불평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고 번쩍거리는 금송아지가 근사해보였기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앞에 절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자신들 좋을 대로 먹고 마시면서 춤을 추며 즐겼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인생살이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모든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마지막 인생길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도 아침에 돋는 풀처럼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시편기자 당시에는 칠십을 살면 수를 다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팔십을 살면 특별히 장수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한평생을 돌아보면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먹구름이 끼여 있던 인생길이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좋았던 시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금방 지나갈 것, 언젠가는 사라질 것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시편 90편이 후반부 (13-17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아침에 돋는 풀처럼 시들어버릴 세상 것들을 추구하기보다 아침마다 임하시는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구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견뎌내는 것입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과 기쁨을 평생 동안 누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후대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라는 시편 기자의 기도를 따라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만들어주시는 인생길을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세상에 진정한 행복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믿음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진정한 행복을 전하는 행복전도사가 되어 봅시다.-河-

고난 중의 부르짖음

늘은 토요일 큐티 말씀인 시편 88편을 설교본문으로 삼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은 모두 150편의 시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들은 다시 크게 5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것은 구약성경의 첫 번째 다섯 책인모세오경을 따라 구분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시편에는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고, 그 밖의 시편들은 아삽이나 고라와 같은 구약시대에 음악을 담당하던 시인들이 기록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시편 88편은 “전체 시편가운데 가장 슬픈 시(the saddest Psalm in the whole Psalter)”라고 불리곤 합니다. 시편 88편을 개인탄식시라고 불립니다. 개인이 겪는 신앙과 삶의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는 이와 같은 개인 탄식시가 꽤 많습니다. 대부분의 탄식시는 후반부에서 기도응답과 희망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시편 88편은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증이 없습니다. 바이저라고 하는 구약학자는 시편 88편에는 한 줄기 위로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시편 88편을 기록한 시편기자는 현재 개인적으로 무척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3절에 의하면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모든 삶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무덤에 누워있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돌보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주의 진노가 자신을 눌러서 현재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편 기자의 영혼과 육체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힘이 빠졌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곁에 있던 친구들도 모두 떠나갑니다. 세상에 시편 기자를 위로하고 격려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입니다. 사람에게마저 버림받은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처럼 칠흑과 같은 어둠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습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친구들마저 떠난 지금, 시편 기자가 바라볼 수 있는 곳은 하늘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움

직이면 움직일수록 깊이 빠져드는 수렁에 빠진 그 순간에도 시편기자는 밤낮없이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여호와여 오직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요즘은 형통의 신학(prosperity theology)이 유행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현대판 기복주의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풍조 속에서 시편 88편은 진실된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의 진수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깊

은 신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잊지 않고, 주님을 향하여‘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도리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이끄는 축복으로 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씨름하면서 주님께 부르짖는 것이 진실된 신앙입니다. 정금과 같은 아름다운 신앙이지요! -河-

새로운 삶의 법칙

주보에 있는 큐티 본문이 골로새서에서 디도서로 넘어갔습니다. 골로새서는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한 적이 없어서 만나본적이 없는 성도들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기에 기쁨과 간절함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이번 달 말까지 큐티하게 될 디도서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신실한 동역자 디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레데 섬에서 사역하던 디도가 교회를 섬길 일꾼들을 잘 세우고, 바른 신앙으로 성도들을 이끌 것을 조목조목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임원들께서는 디도서를 깊이 묵상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지난 화요일 큐티본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옛생활을 정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누릴 것을 부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과거의 삶을 모두 청산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기에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전에는 땅엣 것을 추구하면서 세상과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하늘을 바라보는 새로운 삶이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보면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를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육체와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쫒는 것입니다. 허무한 삶입니다.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입니다. 3장 5절에서“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체와 욕심으로 살면 분쟁과 훼방에 휘말리게 마련입니다. 서로를 비교합니다. 시기하고 경쟁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져야합니다. 비교하는 가운데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삶이 불안하고 늘 무엇엔가 쫓기게 마련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모두 벗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 옷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입게 된 구원의 옷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입은 옷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긍휼”“자비”“겸손”“온유”“오래참음”입니다. 이 다섯 가지 옷을 입고 세상을 살면 사는 것이 황홀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끝까지 오래 참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합니다. 사랑이 넘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과 삶을 주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언제나 풍성하게 거합니다. 말씀이 주는 지혜로 서로를 대하고 세상을 살아가니 그 길에 찬양이 넘칩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 안에 감사가 넘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요즘에는 교회도 많고 기독교인들도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옛 생활에 젖어 있고, 육체와 탐욕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배운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