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기다림

교회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구원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수백 년 전에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와 미가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유대땅 베들레헴에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성경에 예언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가 하루속히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기다림만큼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것도 없습니다. 기다림의 끝과 시간을 알지 못한 채 막연히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에 지치거나, 확실한 보장이 없기에 중간에 포기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메시야 예수님을 만날 것을 확신하면서 긴 세월을 기다린 두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정치적으로 압제를 받았습니다. 조국이 없으니 경제나 사회가 어렵고 어둡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때 시므온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고 위로하시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고 성령께서 주시는 약속도 받았습니다:“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눅2:26). 하루는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성전에 들어가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부모님을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신 아기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고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아기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이처럼 시므온은 믿음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그 임재와 인도하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때 아기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그가 세상을 죄에서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시므온은 마음이 열리고 눈이 열렸기에 메시야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또 한분은 안나입니다. 안나는 결혼하고 7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84년을 과부로 살았으니 안나는 거의 100살에 가까운 분입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전에 머물면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섬기는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안나도 마침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성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라고 외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평생을 기다림으로 사신 분들입니다. 메시야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성전을 떠나지 않으신 분들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깨어있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끝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아기 예수를 맞으신 인물들로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를 쓰십니다. -河-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온유함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업적이나 외적인 조건을 보고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여기서 마음의 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간절함, 경외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또한 마음의 중심은 성품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의 특징적인 성품입니다:“오직 성령의 열매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성품과 삶 속에 드러나야 하는 매우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성품을 하나 선택하라면, 저는 “온유”를 꼽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접“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네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마음도 헤아리셨고 그들도 맞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만큼 낮아지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힘없이 갈보리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분노하지 않으시고 그 모든 고초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온유한 마음을 갖고 세상에 오셨다면, 구약 성경의 모세는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된 예입니다. 온유의 반대말은 “난폭함”입니다. 모세야 말로 혈기가 아주 강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이집트 왕자로 있을 때, 이집트 사람들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이집트 사람을 죽였습니다. 다음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싸움에 성급하게 끼어들었다가 전날 살인사건의 목격자를 만납니다. 바로에게 고발하겠다는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면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출애굽기 2장 11-15절에 나타나있는데 모세가 얼마나 난폭하고 경솔한 사람이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에게서 온유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것이 탄로날까봐 얼떨결에 미디안 광야로 도주한 모세는 그곳에서 40년을 지냅니다. 이집트 왕자의 신분은 이미 없어졌고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그곳 제사장의 딸과 결혼도 합니다. 40년은 그의 인생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입니다. 모세는 그 기간 동안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세안에 있던 혈기, 난폭함, 경솔함이 사라지고 말 그대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을 쓰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온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속에는 “가난함”이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온유는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갑니다. 온유에는 “겸손”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안성맞춤으로 준비된 사람입니다. -河-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범사에 감사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사실은 모든 일에 감사하려는 마음을 갖고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쳐 줄 만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세상살이가 힘겹고, 태평양 바다에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듯이 삶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에게 1년에 한번 추수감사절이 주어진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추수감사절기를 맞으면서 한 해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헤아려봅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무척 빠르게 흘렀습니다. 어르신들은 더욱 빠르게 느끼셨을 겁니다. 커다란 강물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손길과 도우심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얀 종이를 꺼내놓고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써 내려가면 생각보다 많은 복을 받았음을 새삼 발견합니다. 그때는 자신도 모르게“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정확히 390여 년 전인 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보스턴 근교 플리머스에 도착했던 청교도들이 최초로 추수감사를 드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02명의 청교도들은 66일의 항해 끝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동부의 혹독한 겨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겨울을 난 청교도들은 인디안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봄철에 씨를 뿌렸고 그 해 가을에 첫 번째로 수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126편 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는 말씀이 이들에게 그대로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도왔던 인디언들을 초청하고, 살아남은 모든 청교도들이 함께 모여서 첫 번째 추수감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의 전통 속에는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그들을 도운 이웃들을 향한 고마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셨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또한 이웃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한 해 동안 도움을 준 이웃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은 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이웃의 도움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는 예배로 이웃들과는 감사의 축제를 벌이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냅니다. 그 은혜에 감격해서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립니다.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河-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산 제사를 드리라

모든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고, 서로를 인정해 주고 또 인정받으면서 사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임에 틀림없습니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는 서로가 부모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서로 시샘을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선생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손을 높이 들고 선생님이 자신을 지적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또래집단인 친구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왕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배우자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자기를 인정해 준다고 믿을 때, 동기부여가 되어서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쁘고 보람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이처럼 기쁜데 하물며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식처럼 아끼는 제자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하나님 말씀을 옳게 분별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라는 부탁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에서는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몸은 단순히 육체가 아니라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거룩한 산제사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죽은 동물을 갖고 지냈습니다. 동물을 죽이고 그 위에 각을 떠서 그 안에 자신의 죄를 담아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립니다.삶을 통한 제사요 예배입니다. 구약에서 거룩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듯이 우리들의 삶도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은 구별됨(separation)입니다. 세상의 유행과 풍조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거룩한 산제사를 기대하시고 그것을 기뻐받으십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시고 높이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최고의 인생을 사는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데는 빈부와 귀천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면 가장 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을 살 수 있을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보다 반대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잘못을 종종 범합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 보다 자신을 먼저 앞세워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 속에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기려는 마음이 불타오릅니다. 늘 불안하고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안절부절 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것을 두고 오늘 본문인 로마서 12장 2절은 변화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가르쳐줍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의 변화입니다. 시기와 질투에서 사랑과 배려로의 변화입니다. 무엇보다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의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변화 받는 비결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했습니다.“마음”이라는 말 속에는 생각, 뜻, 태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화를 받으라고 했지 변화하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변화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변화를 받으라는 명령은 한번만 변화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늘 변화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변화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변해야하고,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도 변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항상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풍조와 유행을 따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송사리가 커다란 강물을 거슬러서 올라가듯이, 성령 안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혜와 힘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하신 길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삶을 삽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 성령 안에서 온전히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이 흔치 않습니다. 적당히 믿는 분들, 자기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자꾸만 무력해 집니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 마음껏 쓰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듯이,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인생의 목적과 태도를 하나님께 맞추시는 멋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河-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지난 6주 동안‘행복에의 초대’라는 주제를 갖고 연속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은 아침안개처럼 금방 사라집니다. 세상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것은 먼 산에 걸려있는 무지개를 쫒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때때로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세상의 행복은 누가 더 많이 갖고 더 많은 것을 누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상대적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뛰어넘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밖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마음속에 행복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이 주는 약속과 능력을 누리며 살아갑니다.무엇보다 예수님으로부터 얻은 행복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의 극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씀임 받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한 평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만 있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입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께서 쓰신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귀족 출신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반면에 아모스는 양을 키우던 목자였습니다. 다윗 역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의 직업도 다양합니다. 마태는 삭개오와 같은 세리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입니다. 반면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입니다. 사도바울은 교육을 많이 받았고 로마 시민권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신 인물들 가운데 많은 경우가“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입니다. 오늘 살펴본 사도행전 4:13절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학문도 없는 범인”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 눈에 베드로와 요한은 말 그대로 보잘 것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배운 것도 없습니다. 외모도 초라합니다.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를 했는데 5천명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루살렘 시내가 이들이 행한 능력과 전한 복음으로 떠들썩해졌습니다. 이들의 힘과 능력이 어디서 왔습니까? 성령 충만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이해하기 힘든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통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을 들어서 쓰신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두 눈을 두루 살피시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세상에서 보잘것없고 천해 보여도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순수한 믿음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을 찾으십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 세상 기준으로 미련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인생들을 쓰셔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밝히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고전1:26-28).

여기에 우리네 보통 사람들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

행복에의 초대 : 옷깃을 만지는 믿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지역에 퍼져나갔습니다. 병도 고치시고, 폭풍도 잠잠케 하시고, 귀신을 쫒아내신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 반대편 거라사 지역에서 귀신을 쫓고 오신 후이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무리들 가운데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12년을 혈루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혈루병은 하혈을 하는 병의 일종으로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병입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유명한 의사를 모두 찾아 다녔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병세가 더 심해졌고 재산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거리로 나와서 무리들 틈에 섞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절망가운데 빠뜨리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지난번에 살펴본 여리고 소경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외칠 용기도 없었습니다. 삭개오처럼 나무위에 올라갈 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내가 그의 옷깃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막5:28).

여인은 예수님 뒤로 가서 몰래 예수님의 옷깃을 만집니다. 그러자 그 즉시 그녀의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직감하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믈으십니다.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 옷깃에 손을 댔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모두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여인의 믿음이 그녀를 살렸습니다.

옷깃을 만지는 믿음 – 구약성경 민수기 15장 37-41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옷단 귀퉁이에 청색 술을 달았습니다. 옷에 끝에 달린 청색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시고 고질병에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옷깃을 만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옷깃만이라도 만지려는 겸손한 믿음이 요청됩니다. 예수님의 옷깃에도 능력이 임한다는 확신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엄청난 믿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옷깃을 만졌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감지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 들으시고 기억하십니다. 옷깃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삶 한가운데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옷깃을 만지는 믿음 –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또 한 가지 비결입니다.-河-

행복에의 초대 :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위치한 금문교는 최고의 관광명소이지요. 교회 앞길을 다니는 전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온 듯합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고층건물들은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합니다. 공항 쪽에서 101번 도로를 타고 올라오면 오른 편에 끝없이 넓은 베이(bay)가 펼쳐집니다. 주말에는 하얀 요트들이 바다에 떠있는데 푸른 하늘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장관입니다. 샌프란시스코 49er’s 풋볼 구장도 멀리 보입니다. 도심으로 들어오면 아름다운 도시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참 아름다운 도시라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게 베이브릿지를 타면, 왼쪽에 커다란 빌딩이 나타납니다. 사무실 같기도 하고 주거용 빌딩처럼 보이는 꽤 높은 건축물입니다. 그것도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어서 다리를 건널 때마다 마주치게 됩니다. 저는 이 빌딩을 볼 때 마다 왠지 모르게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건물 주변에는 오래된 작은 건물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이 더 커 보이고, 심지어 외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차라리 도심에 있었다면 다른 고층 건물과 어울려서 멋진 스카이라인을 형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도 해봅니다. 앞으로 그 건물을 중심으로 재개발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뭔가 생경한 느낌의 고층 건물입니다.

기독교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관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친환경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이웃, 세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웃을 향해서는 상대방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배려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을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겸허한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따로 서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보아도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성전의 한 구석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기가 행한 일들을 모두 나열하면서 은근히 자랑합니다. 하지만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할 뿐입니다.

바리새인에게서 겸손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겸손한 자세로 가슴을 치며 회개합니다. 바리새인은 혼자 우뚝 서 있는 고층건물처럼 보이는 반면에, 세리에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세상사람들은 홀로 높은 성을 쌓으면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은 철저하게 낮추고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겸손과 경외의 삶을 살아갑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河-

예수님을 닮으려는 갈망

예수님께서 사셨던 2천 년 전의 이스라엘도 지금 우리네 세상만큼이나 깜깜하고 답답했습니다. 삭개오처럼 민족을 등지고 돈을 벌기위해서 권력과 결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리고 소경처럼 앞을 보지 못해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소리에 목숨을 걸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나았습니다. 배를 갖고 고기를 잡으면서 나름대로 생활을 영위했으니까요. 그중에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 배만 채우고 재산을 꼭꼭 잠겨두는 욕심쟁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줄도 모르고 천년만년 살줄 알았으니 정말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만나주셨습니다. 고쳐주셨고, 살려주셨고, 위로하시면서 저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뽕나무 위의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삼아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행복을 찾아낸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마음과 발자취를 따라가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행복의 세계, 행복의 언어들, 행복의 몸짓들이 우리 서머나 식구들께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16세기에 살았던 십자가의 성 요한이 남긴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들 각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河-

오,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사랑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칭송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높임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선호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의논의 대상이 되려는 갈망으로부터, 승인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인기 얻으려는 갈망으로 부터 구해 주십시오.

오,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모욕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멸시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책망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잊혀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비웃음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사랑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오 예수님,

은혜를 베푸셔서 이런 갈망을 갖게 하소서.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존중 받기를 바라는 갈망,

세상의 기준에서 다른 사람이 더 높아지고 저는 더 낮아지기를 바라는 갈망,

다른 사람이 선택받고 저는 제외되기를 바라는 갈망,

다른 사람이 칭송받고 저는 주목받지 않길 바라는 갈망을 주십시오

행복에의 초대 4 – 네 집에 유하겠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만은“군중속의 고독(the lonely crowd)”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첫째가 전통적인 유형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맞춰서 살아갑니다. 근대화가 되기 이전의 세상은 전형적인 전통적인 사회였고, 전통을 무시하면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자기 지향적인 유형(inner-directed type)입니다. 전통적인 세상에서는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로 타인 지향적인 유형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경쟁이 치열해 졌고 사람들 간에 마음의 벽이 높아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끝없는 경쟁을 하다 보니 불안과 초조가 밀려옵니다. 여기서 군중 속의 고독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삭개오라는 인물을 만납니다. 삭개오가 살던 시대는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었고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로마를 위해서 일하는 세리가 됩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자기 민족에게 세금을 거둬서 로마정부에 바치는 일을 했기에 동족으로부터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세리라는 직업을 스스로 택했고 요즘말로 하면 세무서장까지 되었으니 그는 자기 지향적인 인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삭개오의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군중속의 고독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리가 되었지만, 사람들 역시 그를 사람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외로운 인생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배운 여리고 소경이 거지라는 천한 신분 때문에 외로웠다면, 삭개오는 나름대로 자기의 꿈을 이루면서 성공했지만 내면의 문제로 인해서 외로웠습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가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여리고 소경은 예수님을 불렀지만, 삭개오는 단지 나무에 올라앉아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구경합니다. 그것이 삭개오가 한 행동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삭개오를 보시고“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답니다. 이 말은 삭개오에게 정말 기쁜 소식(복음)이었습니다. 세무서장까지 되었지만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곧 그의 마음의 집에 들어가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와 그곳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서“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도 부르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속에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세상의 행복은 남의 눈치를 보느라 힘겹고 초조합니다. 설령 세상에서 성공했어도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외로움과 불안감을 해결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누리는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뛰어넘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인생길이 열립니다. 그 길이 곧 행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줄 믿습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