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자 – 감사함으로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라는 올해 주제에 맞춰서 참된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신령(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했습니다. 구경하듯이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깊은 마음(영)과 몸을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또한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성령을, 진정(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그리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온전하고 참된 예배임을 배웠습니다.

예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샤하”에는 왕이나 신에게 몸을 숙여서 경배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예물을 갖고 오듯이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갖고 와야만 하나님께 예배가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율법조항들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종류와 하나님께 나와서 경배하는 제사 방법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우 복잡한 절차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예배할 때 구별된 마음과 태도가 중요함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제사를 드리다보니 제사의 본뜻은 사라지고 제사의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물을 어떻게 드리느냐가 관심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제물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가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예배가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50편 본문은 잘못된 제사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온 세상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수소를 드리던지 숫염소를 드리던지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종류에 따라서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끊이지 않았지만, 하나님 마음이 편치 않으셨습니다. 제물은 끊이지 않는데 형식적인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된 제사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고,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무엇보다 감사로 드리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을 갖고있어야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올 때 참된 예배자가 되기 힘듭니다. 둘째는 서원을 갚는 예배입니다. 새해에 하나님 앞에서 많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성실하게 찾아오듯이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했던 결심들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서원을 갚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환난 가운데 부르짖는 예배입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만이 도움이 되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51편 17절에서 있듯이 상한 심령(broken spirit)을 구하십니다. 하나님은 근사한 것, 완전한 것을 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은 모두 양 같아서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서진 마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참된 예배는 손에 들고 있는 제물이 아니라 마음에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부서진 마음까지 드리는 예배자가 되기 원합니다. -河-

참된 예배자 – 영과 진리로

새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참된 예배자가 됩시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덕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예배가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종종 예배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은 뒷전에 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시대의 조류에 맞추다보니 예배의 본질을 상실한 것입니다.

새해를 설계하면서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에게도 예배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발걸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가 회복되면 인간적인 생각이나 세상의 풍습들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명예욕이나 힘을 과시해 보려는 권력욕도 참된 예배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들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섬기는 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입니다.

예배의 회복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들 각자에게도 필요합니다. 지난 열두 달을 보내고 또 다시 새해를 맞지만 마음 한편에 늘 찜찜한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와 근심,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받은 상처들, 스스로에게 갖는 실망감 등등 우리들의 마음이 그리 편치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우리 안에 슬며시 들어온 죄의 속성들이자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참된 예배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줍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것이 이웃과의 관계 회복으로 연결됩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풍성한 은혜를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in spirit and truth)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신령은 “영”으로 예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예배하는 자신의 백성을 찾으십니다. 그렇다고 신비로운 것들을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죄를 고백하면서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예배하는 것이 곧 신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진정 곧 진리는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거짓”“교만”“불의”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위선”입니다.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르고 -척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진실됨입니다. 진실은 하나님 앞에서 겉과 속이 똑같은 것입니다. 솔직함입니다. 거짓이 있으면 곧바로 고백하고 정직한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나오는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올 한 해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갑시다. 2013년에 예배의 회복을 이루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승리의 종

이사야서 53장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여기서 고난 받는 종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어떤 개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어려움 가운데서 끝까지 하나님을 믿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처절한 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서 희생물로 쓰였다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사야서 53장을 700여년 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받고 믿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종은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는 연약한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질고와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죄를 지어서 형벌을 받는다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렸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고난 받는 종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본문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이 모두 양같아서 그릇행하고 하나님을 버렸는데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는 어떤 폭력이나 거짓된 일을 꾸미지 않으셨는데 죽으셔야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홀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처럼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셨고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악을 이기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의 계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과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원합니다. 이사야서 53장을 반복해서 정독함으로 그 안에 깃든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눈으로 보일 듯이 그려지고 그가 이루신 사역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지기 원합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새 힘과 소망을 줄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죽음으로 가는 종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이틀 앞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이 주님의 종의 죽으심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맡겼습니다. 추수할 때가 되어서 주인의 몫을 가져오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다른 종들을 보냈지만 매한가지였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냅니다. 아들은 대우를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입니다. 상속인을 없애면 땅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과 행함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한 기적들을 보면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발걸음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서 53장 7-9절 말씀은 주님의 종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의 종은 그의 비천하고 볼품없는 모습 때문에 무시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마치 자신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처럼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마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찔렸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과 질고를 지고 가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말없이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와 똑같은 양이 되셔서 말없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주님의 종이 죄를 지어서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분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기까지 복종하셨고 결국 무덤에 묻히시는 죽음의 끝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은 영락없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유월절 어린양이 죽어서 그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듯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양이 우리를 대신해서 제물로 드려지듯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성전에 가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한 번에 그리고 영원히(once and for all)사해졌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강절 마지막 네 번째 주일을 보내고 성탄을 맞으면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부터 급기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말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마음 속 깊이 모시기 원합니다.-河-

고난 받는 종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 무감각에 빠진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보내는 종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볼품도 없고 힘도 없어서 사람들은 주님의 종을 무시했습니다. 철저하게 버림받았습니다. 누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우리 주님, 나사렛이라는 하찮은 동네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세상의 주목을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빌립보서 2장에서는 종의 형체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않고 무시할 수밖에요.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죽기까지 버림받으셨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무시 받고 버림받은 주님의 종에 대한 연민이 생깁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면 왠지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 53장 4-6절은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버림받은 종과 우리들을 연결시켜 줍니다. 그분이 무시 받고 버림받은 것이 우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똑같이 갖고 계셨습니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욥이 겪는 고난을 보고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결과라고 단정했듯이, 주님의 종이 겪는 질고와 슬픔 역시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가시와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벌(징계)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롭게 잘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화평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회복되었고 치유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종은 철저하게 우리를 위해서 보내지셨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겪을 고난과 질고 그리고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까지 모두 자신이 담당하셨습니다.

본문 속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은 우리를 위해서 가진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로부터 수없는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일이었다니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죄의 짐이 없어졌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53장 속의 고난 받는 종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6절은 앞 두 구절의 마무리입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해서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시력이 약한 양은 대열에서 이탈하면 금방 길을 잃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길을 고집부리면서 갑니다. 우리의 모습이 양에게서 발견됩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지면 양처럼 가야 할 길에서 이탈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지어 버리는 본능이 아담과 하와 이래 우리들 속에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양이 자기 힘으로 대열로 돌아오기 힘들듯이 우리들도 우리 힘으로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대속의 은혜입니다.

대강절 세 번째 주를 맞아서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 속 깊이 떠올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 조아리며 감사하기 원합니다.-河-

버림받은 종

구약성경의 이사야서는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기록된 책입니다. 특별히 네 개의 종의 노래들(songs of servant)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사야 7장 14절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는 말씀은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신약성경(마1:23)은 물론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믿어 왔습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메시야 예언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53장입니다. 다른 종의 노래들과 달리 이사야 53장은 전체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매우 실제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700여 년 전에 예언된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매우 정확한 기록입니다. 예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3장을 자세히 읽고 깊이 묵상할 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모습까지 자화상처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위로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공감하고 힘을 얻습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서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이 새롭게 회복됨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계절인 대강절에 이사야 53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올 해의 남은 한 달 동안 우리 교회 전체가 이사야 53장을 함께 읽고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주일 설교를 듣는 것에 그치지 마시고 평소에도 종의 노래인 이사야 53장을 틈틈이 소리 내서 읽으시고, 마음 깊이 새기시고, 각자의 삶에 대입해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손길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53장 1-3절을 살펴봅니다. 본문 속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국가는 힘이 없습니다.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 팔로 임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영적 무감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의 상황과 너무 흡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종교는 위선적인 지도자들로 인해서 오염되었고 백성들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지만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셨는데 그곳은 메시야가 태어날 동네라고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연한 가지 같았고 뿌리가 드러낸 나무처럼 별로 근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풍채도 그리 훌륭하지 못하셨음은 예수님의 외모를 언급하는 말씀이 없는 것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메시야는 무엇인가 다르고 왕처럼 외모부터 특별해야 한다고 믿었던 백성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하나님의 능력을 기적을 통해서 베풀어도 예수님을 멸시했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질고와 고난을 온 몸으로 느끼시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이나 존귀함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죄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시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무시당하셨고 철저하게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버림받는 우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이 이렇게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 사랑에 한 목소리로 그리고 한 마음으로 감사하기 원합니다.-河-

감사의 예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쫓아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예배하는 존재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는 영광이 됨을 이사야서 43장 7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줍니다.:“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성경에는 예배를 가리키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히브리어“샤하”가 대표적입니다. 샤하는 하나님은 물론 왕과 같은 지도자들 앞에 허리를 숙여서 경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 18장 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은 몸을 굽혀서(샤하) 그들을 맞았습니다(창18;2).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살려준 후에 땅에 엎드려(샤하) 절했습니다(삼상 24:8). 사울이 여전히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7장 2절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러(샤하)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밖에도 예배에 대한 히브리어로 경외심에 해당하는 “야레,” 섬김에 해당하는“아바드”와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도 예배에 해당하는 말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히브리어 샤하와 맞물리는“프로스큐네오”로서 몸을 굽혀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을 굽혀서 존경과 경외심을 표시해야 합니다.“세보마이”라는 단어는 존경과 헌신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것입니다.“라트류오”는 실제로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일에 몸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의 계심, 하나님 이름의 권위, 하나님의 성품과 하시는 일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도 필요합니다. 찬양과 감사도 예배의 필수요소들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영적 축제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늘의 위로와 치유 그리고 은혜를 체험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예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138편은 다윗이 커다란 위험 속에 있다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 드린 개인 감사시입니다. 어려움은 늘 닥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손의 능력을 구하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함을 배웁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배에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함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솔직함과 정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길 부탁하셨습니다(요4:24).

우리들도 본문의 다윗처럼 주님의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성품, 기도를 들어주시는 은혜, 환난 날에 구원해 주신 체험을 떠올리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 혼자만 감사하지 않고 다윗처럼 온 세상 사람들을 감사의 자리로 초대할 수도 있습니다. 열방이 다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신앙은 물론 삶을 온전케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주님의 보호하심과 구원하심이 임합니다.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한 명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도 감사의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욥처럼 무슨 일이 닥쳐도 입술로 죄짓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감사의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우리의 감사가 예배로 이어지길 원합니다. 감사 속에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河-

감사의 마음

성경을 읽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자꾸만 잠이 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도 무척 많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흥미진진한 말씀도 많아서 때때로 성경 속에 푹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글을 깨쳐야 책을 읽을 수 있듯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는데도 성경에 대한 눈이 떠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 은혜 속에 들어갔을 때 성경이 비로소 하나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성경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도 필요합니다. 성경 속에는 시를 비롯해서 편지글, 예언서 그리고 이야기체 본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 장르가 들어 있어서 각각의 특성에 맞게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 파노라마> 성경공부에서 배웠듯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 각 권의 특색과 핵심 메시지를 알고 있으면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연애편지, 성경이 신앙은 물론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성경 가운데 흥미진진하면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 요즘 큐티 본문인 욥기입니다. 욥기는 처음 두 장과 마지막 장만 읽으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끼인 30여장에 이르는 말씀은 우리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성경 지식과 대치되는 듯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질병이 찾아오면 죄를 지은 대가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회개의 자리로 나오기도 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복을 받고 형통하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행한 보상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우쭐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벌을 받고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욥기는 흠이 없는 의인도 고난을 받을 수 있음을 욥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반대로 욥의 친구들은 의인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욥기의 처음 두 장은 욥기 전체를 이해하는 서론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자녀들도 출세했고 당대에 소문난 부자였습니다. 자녀의 복과 물질의 복을 겸해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고난이 닥칩니다. 자녀들이 죽고, 하루아침에 재산도 모두 사라집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온 몸에 병이 생깁니다. 아내가 저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신앙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보증한 인물이 욥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단이 주는 시험이 고난으로 임했습니다.

욥기 처음 두 장에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식들과 재산이 없어졌을 때“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질병이 닥쳤을 때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는 감사를 훈련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생긴 신앙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욥이 의로운 것은 단지 그의 신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감사와 찬양으로 훈련되었음을 가리켜 줍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임을 욥을 통해서 배웁니다. -河-

감사의 발걸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요즘은 문둥병자라는 말 대신에 한센씨병이라고합니다. 한센은 노르웨이의 의사로서 나병환자의 치료제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통상 문둥병자라고 하겠습니다. 문둥병자라면 마을에서 격리되어서 따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염이 강했기에 구약시대부터 엄격하게 관리해 오던 질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서“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너희들의 문둥병이 나을 것이니 구약의 율법에 있는 대로 제사장에게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고 정상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그들의 병이 낫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병이 나아서 정상생활을 해도 된다는 판정을 받고 세상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님을 다시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그 사람은 유대인들이 천시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다시 와서 감사하는 것을 본 예수님께서도 조금 당황하신 것 같습니다. 아홉 명은 어디로 가고 한 명만 왔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한 명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온 그 사람은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이 비슷합니다. 좋지 않은 것은 오래 기억하지만 좋은 일이나 남에게 받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할 때는 “예수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막상 병이 나으니 예수님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잘나서 병이 나은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래도 한 명이 예수님께 왔으니 그 나마 다행입니다. 그 마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세어 보아야 합니다. 감사는 잠시 멈춰 서서 기억해 내야 합니다. 섭섭한 일이나 좋지 않은 일들은 저절로 마음에 새겨져있는데 감사는 잊혀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감사는 더 쉽게 잊혀지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마련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사가 우리 삶의 여정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한 가지씩 세어보고, 마음에 담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왔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열 가지 은혜 가운데 한 가지 정도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잊어버린 아홉 가지의 감사를 찾아내고 그것을 갖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감사를 빠짐없이 기억해내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들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길 원합니다. 할렐루야! -河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는 우선 하나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 즉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 그 다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나온 성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결과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거듭남(born-again)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성화, 곧 거룩함의 길이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의 삶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삶의 주인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고백하듯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에 속에 갈등이 생깁니다. 옛본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거듭 태어난 그리스도의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옛성품을 예수님 앞에 완전히 굴복시키면 이런 갈등이 없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순간순간 갈등하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갈등의 과정을 말씀과 기도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입니다. 그 과정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임하는 은혜를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쉽지 않지만 이 길이 영생으로 통하는 것임을 알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최선의 길임을 알기에 감사와 기쁨 가운데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을 지은 마태입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레위가 살던 가버나움에는 큰 세무서가 있었고, 레위는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동족의 재산을 포탈하는 행동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소외된 인생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혼자서 번민하는 인생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그대로 꼼짝없이 앉아 있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보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서 좇았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뒤로 한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동안 세금을 포탈하면서 돈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쫓는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서 잔치를 베풉니다. 죄인들과 자신과 같은 세리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먹고 마시면서 친구로 지내셨습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죄인들과 함께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부르십니다. 믿음의 자리로 부르시고, 작은 예수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기 원합니다. 친구로 맞아주시고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좇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