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노래 (2007.3.18)

그동안 다섯 번에 걸쳐서 시리즈로 살펴보았던 이사야서 40-55장 말씀은 위로로 시작해서 고난의 골짜기를 거친 후에 희망의 노래로 끝이 납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희망의 빛줄기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칠흑 같은 밤하늘에 북극성이 더욱 빛나듯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세상이 어둡고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마음속에 꼭 품고 있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이라는 단어입니다. 현재 삶이 아무리 화려해도 희망이 없다면 머지않아 막힌 길(dead end)을 만날 것입니다. 반면에 현재는 고난 가운데 있어도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면 축복된 미래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1)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희망찬 세계로 부르십니다 (1절).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값을 지불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2)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3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죽어가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5절)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안간힘을 쓸지라도 그것은 헛수고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삶은 천사도 흠모하는 멋진 삶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마치면서,서머나 성도님들의 신앙과 삶이 “희망”으로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희망이란 단어를 마음속에 꼭 품고 계십시오. 그러면 고난이 축복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두움 속에서 모두 가슴아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있으면 안됩니다. 온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아멘”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로 나가야합니다. 그러면 산들이 노래를 터뜨리고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치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올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河-

은혜의 때 (2007.3.11)

구약성경의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솔로몬이 노년에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전도서는 첫 마디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헛되다”라는 의미는 솔로몬이 미련을 갖고 집착했던 모든 것들이 별 것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욥1:21)는 욥의 고백과 같은 맥락입니다. 솔로몬과 욥의 고백처럼 이 세상의 삶은 어떤 것 이상(플러스 +)도 그 이하(마이너스 -)도 아닙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세상의 삶에 온 정신을 팔면서 한 평생을 산다면 이다음 천국에서 예수님을 뵈올 때 무척이나 부끄러울 것입니다. 안개처럼 금방 사라질 것들만을 따라다니면서 귀한 삶을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리고 한평생을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선포하십니다. 구원의 때가 찼다고 선포하십니다. 이제는 해방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재차 약속하십니다. 거기에 한 가지 덧붙여서,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사49:16)는 눈물겨운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솔로몬의 고백대로 헛되고 헛된 세상살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의 삶은 샘솟는 샘물과 같은 신선한 인생이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 받을 때입니다.-河-

고난이 주는 유익 (2007.3.4)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이후에 세상은 고난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땀을 흘리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지나 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고난이 배어 있습니다. 현재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축복으로 여겨야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엎드려 눈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사가 잘 될 때는 들로 산으로 놀러가지만, 고난의 시간에는 하나님 앞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져주십니다. 우리의 슬픈 마음과 상한 마음을 꿰매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솜이불처럼 따뜻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습니다. 병정들의 조롱과 채찍도 말없이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고 거기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고난이 닥치면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길을 가야합니다.

우리들은 고난을 통해서 인격이 더욱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질고의 인생을 사신 분들을 만나면 삶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인생의 광야학교를 통과하신 분들이 주시는 말씀은 한 마디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고난은 우리를 정금같이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고난은 우리들의 신앙인격을 다듬는 축복된 기회입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같은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축복입니다. 소망으로 이어지는 건널목입니다.-河-

고난중의 위로 (2007.2.18)

오늘부터 여섯 번에 걸쳐서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시리즈로 설교할 예정입니다.

이사야서 40장 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 맞춰서 선포된 예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400년 종살이를 한 이후, 두 번째로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나라를 잃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나라가 멸망한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죄의 결과임을 알면서도 여기저기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렸다는 탄식소리가 들립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입니다. 이런 상황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위로의 말씀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은 “위로하라”는 명령이 반복되면서 시작됩니다. 이어서 모든 고난의 때가 끝났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고난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선택한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 임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을 통한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가까운 친지를 통해서, 영적인 지도자를 통해서, 때로는 예상치 않았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참되고 따뜻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위로는 환경을 통해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막힌 길을 열어주심으로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만져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다음 한 주간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흠뻑 체험하시길 바랍니다.-河-

참된 복 (2007.2.4)

수요예배에서는 지난 4주간에 걸쳐서 “무엇이 성경적으로 참된 복”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처음 두 시간에는 동양에서 말하는 “5복”을 성경의 관점에서 재조명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복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어렵게 살아서 그럴 수도 있고, 5복을 강조하는 동양사상의 영향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기독교인들 역시 세상에서 복을 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복”에 대한 말씀은 두 가지로 분명하게 정리됩니다.

첫째는 영원한 복입니다. 이것을 절대적인 또는 우선적인 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복 가운데 최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상급”(창15:1)이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긴밀한 사귐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를 늘 체험하는 것이 복입니다.

둘째는 세상에서 누리는 복입니다. 이것을 상대적인 복 또는 부차적인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부와 장수함의 축복을 누립니다. 소위 세상에서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은 상대적입니다. 이 세상에서만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혜택인 셈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절대적인 복이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절대적인 복은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상대적인 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인 복을 자랑할 만큼 받지 못했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복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이 더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6-7)-河-

삭개오의 변화 (2007.1.28)

“삭개오의 용기”, “삭개오의 구원” ‘삭개오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전한 삭기오에 대한 말씀이 오늘로 끝이 납니다. 삭개오는 어쩌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식민지하에서 세리장이 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겁니다. 비록 백성들에게 착취한 것이지만, 삭개오는 상당한 재산도 모았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키가 작다는 것 외에도, 세리라는 직업으로 인해서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자기 배를 불렸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살아있었다면 밤마다 괴로움에 시달렸고 무척 외로웠을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창피를 무릎쓰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갔을 것입니다.

이런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에게 찾아 오셔서 우러러 보시면서 삭개오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삭애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말 그대로 복음(福音)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집에 머물겠다는 의미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의 집에, 삶의 집에 머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계3:20). 그 말을 듣고 나무에서 내려오는 순간부터 삭개오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그때부터 삭개오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삭개오 자신이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숨기고 핑계대는 것에 급급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죄까지 드러내놓고 고백하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그동안 남의 재산을 탈취하면서 살았다면 이제는 나눠주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죄인”에서 “아브라함의 아들”로 지위가 바뀌었습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삭개오에게 임한 행복한 변화가 우리에게도 그래도 임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河-

놀라운 스타트 (Wonderful Start)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신비롭고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은혜를 힘입는다는 사실은 매우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말이나 논리로 설명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신비(mystery)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으면서 경이로움을 종종 경험합니다. 상식을 초월하는 깜짝 놀랄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임한다면 온 몸이 얼어붙고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사건은 정말 신비롭고 경이롭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그 사람은 이름도 없습니다. 그냥 40평생을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으니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그를 업어다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신비롭고 경이로운 사건이 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의 구걸하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힘차게 외칩니다.:“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돈을 던져주는 손만 보면서 평생을 보낸 앉은뱅이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신기한 말이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즉시 앉은뱅이에게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임했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만도 기적입니다. 그런데 발을 뛰어보니 걸을 수 있습니다. 뛰어보니 뛸 수도 있습니다.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앉은뱅이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렇게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임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40년 묵은 타성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신비로움과 경이 속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008년 새해를 예수 이름의 권세로 삽시다. 일어납시다. 걸어 봅시다. 뛰면서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河-

삭개오의 구원 (2007.1.21)

지난주에 이어서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시리즈로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과 키가 작다는 열등감을 뒤로 한 채 용기를 내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예수님께서는 뽕나무 위의 삭개오에게 찾아 가셔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하겠다”(눅19:5)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나무에서 내려와서 그동안의 삶을 회개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눅19:9).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악명 높은 세리였습니다. 재물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은 분명히 불만족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니 외로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키가 너무 작아서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을 테니 신체적인 열등감이 그를 괴롭혔음에 틀림없습니다.

삭개오는 용기를 내서 예수님을 찾는 자리인 뽕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신앙에는 어느 정도의 모험과 용기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의 삭개오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회개했습니다. 세금을 과하게 부과해서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율법의 최고법인 네 배로 보상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회개와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입니다. 이처럼 복음에는 과거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못 박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달려 나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복음 안에서 힘차게 앞으로 나갑시다. -河-

삭개오의 용기 (2007.1.14)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예루살렘에서 약 17마일 떨어진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입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세리장이면 로마 식민지하에서 나름대로 출세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동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거둬야하는 그의 직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키가 작은 그의 외모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꼭 뵙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키가 작은 삭개오는 군중 틈으로도 예수님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자존심을 구기는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키가 작다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요, 사람들의 핀잔과 조소를 스스로 유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한번 뵙고 싶다는 삭개오의 열망 앞에 사람들의 이목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 – 이곳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던 자리였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올라가야 할 뽕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삭개오가 달려가서 쉽게 올라갔듯이 뽕나무는 우리들 가까이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뽕나무에 올라가려는 용기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버릴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입니다. 때로는 무시할 것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입니다. 마지막으로 간직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꼭 만나 뵈리라”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외롭고, 삶이 힘겹고, 자신의 현재 모습에 실망스러울 때는 우리들 삶 속에 드리워진 뽕나무로 달려갑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오셔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불러 주시며 만나주실 것입니다. -河-

굿 스타트 (Good Start)

2008년 새해를 맞아서 “시작(始作)”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무슨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씨앗을 심는 것과 같아서 어떤 열매가 맺게 될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지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그런데 시작에서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일의 성격입니다. 어떤 경우는 동기가 그릇되어서 시작과 상관없이 그 결과가 보기 흉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시작의 동기와 목적을 점검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는 “착한 일”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착한(선한)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거나 욕심을 채우는 것은 착한 일의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착한 일은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을 하라고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서는 자신을 깨끗이 해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그릇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에 사용하신다고 교훈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넉넉히 하려는 것이라고 깨우쳐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에 쓰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실 뿐 아니라 친히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올 한 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시작해 봅시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에게 이익이 생기는 일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순수한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드러나는 선한 일입니다. 큰 일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사람들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됩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굿 스타트  (Good Start) – 한 해를 훌륭하게 시작합시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비결은 바로 착한 일을 찾아서 그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것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올해 내내 “예수 믿기 잘했다”는 행복한 고백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