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가득한 인생 7 : 신실하신 하나님 (2)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신약성경이나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보다 세상 역사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즉각 심판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축복도 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창세기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흉년을 피해서 블레셋으로 피신 간 이삭은 그곳에 머물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땅에 머뭅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넘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리브가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동생이라고 속입니다. 이방 땅에서 이삭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사이인 것을 알아내고 온 백성들에게 이삭과 리브가를 해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구해주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움직이셔서 이삭과 리브가를 구해주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블레셋 땅에 머물라고 하시면서, 이삭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창26:3).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의지해서 그랄에 머물기고 결정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삭과 함께 하셨고 아비멜렉을 통해서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블레셋 땅에 머문 이삭은 그곳에서 농사를 짓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삭이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생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은 백배의 수확을 얻게 되고 블레셋 땅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아주 큰 부자가 됩니다. 백배의 결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13절에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게 임했다는 히브리어 표현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니 온 세상이 흉년이 든 상황에서도 이삭만은 기적 같은 풍년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환경에 상관없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한없이 축복하신 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시기했습니다. 이삭의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을 텐데, 흉년을 피해서 자기 땅에 온 이삭이 부자가 된 것만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을 흙으로 메우면서 이삭을 훼방합니다. 당시는 우물이 중요했고, 흉년이 드는 경우 우물을 갖고 있는 것은 커다란 재산이었습니다. 우물을 메웠다는 것은 이삭에게 아주 치명적인 손해를 입힌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자기 땅을 떠나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삭은 그랄 평지를 떠나서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거합니다. 이삭은 이미 거부가 되어 있었고 종들도 있어서 블레셋 사람들의 요구에 힘으로 대항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아비멜렉 왕의 요청대로 그동안 일구어놓았던 삶의 터전을 떠납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하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이삭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더라도 여호와 이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6 : 신실하신 하나님 (1)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던 비결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그의 신앙과 삶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체험을 통해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삭은 튼튼한 믿음위에 4가지 S로 요약된 신앙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단둘이 교제하는 영적인 고독(spiritual solitude)을 즐겼습니다. 이삭의 삶은 단순했습니다(simple life). 이삭은 양보하며 희생했습니다(sacrifice). 겉으로 보면 부드럽고 나약해 보일 수 있었지만 이삭은 강했습니다(strong).

우리들도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이삭의 네 가지 삶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삭이 추구했던 네 가지 삶의 모습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 리브가가 아이가 없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고 쌍둥이 아들을 얻었습니다. 기도는 이삭의 삶에 힘이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였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말씀에 의하면, 이삭은 완벽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 가까이 하기 힘든 탁월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삭도 사람입니다. 그에게도 허점이 있었습니다. 이삭이 살던 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애굽으로 피난을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만류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삭의 자손들이 만민에게 복의 통로가 될 것이랍니다. 이삭과 그의 후손이 이 같은 복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삭과 그의 후손에게 그대로 지키시는 장면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지요.

하나님 말씀을 들은 이삭은 블레셋 땅 그랄에 그대로 머무릅니다. 하나님 말씀에 두말없이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삭에게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그랄 사람들이 외모가 출중했던 리브가를 탐낸 것입니다. 이삭 역시 행여나 이방 사람들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서 아내 리브가를 여동생이라고 속입니다. 아내라고 하면 리브가를 빼앗기 위해서 남편인 자신을 죽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비겁하지요. 부전자전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랄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가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둘이 부부인 것을 알아챈 아비멜렉 왕은 이삭을 불러서 사실을 확인한 후 모든 백성에게 리브가를 범하는 사람은 죽일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랄 왕 아비멜렉을 통해서 이삭의 두려움을 바로잡으시고 두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를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의 백성을 세상에서 구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은 그의 성품과 노력위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5 : 기도

지난 주 설교에서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이삭의 신앙과 인생에서 토대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첫째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창 17: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듯이 그의 아들 이삭과도 태어나기 전에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이삭 역시 하나님과의 언약 가운데 약속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약속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백성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이삭이 약속의 자녀에 걸맞은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삭의 믿음과 순종 없이는 아브라함이 그를 하나님께 바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었고 이삭이 많이 컸기에, 이삭의 협조 없이는 모리아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제단에 제물로 드려지는 모든 과정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조건 순종하는 이삭의 믿음은 그의 인생길을 웃음 가득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경험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향한 확신 때문입니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에 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 하나님께서 미리 보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다는 뜻인데,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었습니다. 실제로 이삭의 아내를 얻는 과정에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앞서 가셔서 그의 아내를 예비하셨고, 그것을 통해서 이삭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길을 지켜보고 계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약속의 자녀 이삭은 아내 리브가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리브가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어머니를 잃은 이삭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와 어머니 사라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외모가 남달리 아름다웠습니다. 훗날 이삭의 아들 야곱도 외모가 출중한 라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결국 그녀를 아내로 삼지 않습니까? 그토록 아름다웠던 리브가였지만 그녀도 시어머니 사라처럼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이삭이 60이 되었지만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약속하실 때 그의 후손과도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삭에게 자식이 없으니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삭에게 자신의 힘으로 넘기 힘든 큰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은 셈입니다. 그때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삭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음으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창25:21). 하나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던 이삭 – 그는 아내 리브가를 기다리면서 들에 나가서 묵상했습니다. 인생길이 막혀서 불가능해 보일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때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비결이 바로 기도였음을 잊지 맙시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4 : 이삭의 웃음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제물로 드려지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제물로 드려지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의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듯이 이삭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제단 위에 결박당한 채 누워 있었던 이삭의 마음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아버지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던 순간에 이삭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지만 그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젊은 시절에 경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숫양을 예비해 놓으셨고 이삭 대신 양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잠깐 동안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의 인생에 모리아산에서의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하나님 체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가장 선한 길로 예비해 놓으신다는 사실도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체험했습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의 인생길에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 역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구체적으로 임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이삭 역시 어머니 사라를 잃고 슬픔에 쌓여 지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장가들일 계획을 세웁니다. 가장 아끼는 종을 불러서 자기 친족들이 있는 하란으로 가서 이삭의 규수감을 구해오라는 부탁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먼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의 규수감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들 가운데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자신과 약대들에게 물을 주는 여인이 있으면 그 여인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삭의 규수감으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종의 바람대로 우물가에서 아리따운 여인 리브가가 그에게 물을 건네줍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해서 예비해 두신 규수감이라고 확신합니다. 알고 보니 아브라함의 친척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가문에서 자란 여인이었습니다. 리브가는 물론 그녀의 아버지도 이삭의 아내로 데려가겠다는 종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상황의 인도하심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여호아 이레의 하나님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모든 과정에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종을 멀리 보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종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들에 나가서 산책합니다. 단지 산책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이삭 앞에 나타납니다. 리브가를 본 이삭은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아내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리브가를 데리고 어머니의 장막으로 들어갑니다. 드디어 어머니를 잃고 슬퍼하던 이삭이 다시금 웃음을 되찾은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준비하심 가운데 그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할렐루야! -河-

웃음 가득한 인생 3 : 하나님의 웃음

하나님의 약속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의 집에 와서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장막 뒤에서 이 얘기를 들었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사라에게 임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도 웃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자식의 이름은 이삭(웃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얼굴을 땅에 대고 웃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진정한 웃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삭을 낳은 후, 사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0:6).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셨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고 한없이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면 꼭 특별한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을 시험(test)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 너무 어렵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달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100세에 이삭을 얻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더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네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날 아침,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욥1:21)는 욥의 고백을 연상시킵니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아 땅에 오자 종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아들 이삭과 단둘이 길을 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에 쓸 장작을 메고 가게 한 것을 보면 이삭이 꽤 컸고 아브라함은 많이 연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산에 두 부자가 도착해서 제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어서 제단에 올려놓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음을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아니라 번제로 드릴 양을 이미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 갈 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그대로 따른 이삭의 모습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모리아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해서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서 죽이려고 했을 때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되었던 또 다른 비결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 하나님과 아버지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던 이삭을 보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이처럼 이삭은 하나님께도 웃음을 주었습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2 : 사라의 웃음

지난주에 함께 나눴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아기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진 딜레마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때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나타나셔서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충직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15:4)고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사라의 아이디어로 이집트에서 온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재차 약속하십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창17:19).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나서 사라는 실제로 아기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첫째로,“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as he said) 사라를 권고하사”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는 “평상시에 하는 말”을 뜻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천사들이 평상적인 언어로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엿들은 사라가 장막 뒤에서 웃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의 일상적인 말 그대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라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둘째로 1절 후반부에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as he spoke/promised)”라는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는 앞에 쓰인 표현보다 의미가 깊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단순히 ”말하다“는 번역보다 ”약속하신대로“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녀가 아이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2절에 있듯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때가 되니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히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말실수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예사롭게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주신 말씀, 깊은 기도 가운데 마음에 주신 약속을 꼭 간직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기대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1년 전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 속으로 웃었고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이삭(웃음)”으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진정한 웃음을 주신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비로소 자신을 웃게 하셨다고 기뻐합니다. 사라의 웃음은 아브라함은 물론 온 세상을 웃음 짓게 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기에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히 이루어졌기에 기쁨의 웃음을 지은 것입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1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쳤습니다. 일곱 교회의 모습은 곧 우리 교회의 모습이었고, 우리들 각자가 그리스도의 성전이라고 했으니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 칭찬받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시에 질책을 받아서 마땅한 교회의 모습, 삶의 모습도 있습니다. 교회에 주신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약속은 “흰옷 입은 자”의 반열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와 주님을 찾는 열심”이 필요함도 깨달았습니다. 지난 겨울동안 함께 나눈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설교말씀 가운데 깊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신앙생활 가운데 실천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마지막 장이었는데, 성경 맨 처음인 창세기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저는 이번 연속설교의 제목을 “웃음 가득한 인생”이라고 정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의 이름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이 웃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와서 아내 사라가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사라가 천막 뒤편에서 듣고는 사라 역시 웃었습니다. 자신에게 생산능력이 모두 끊겼는데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듬해 사라가 아들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짓습니다.

창세기에 이삭에 대한 말씀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삭만을 위한 말씀은 한두 장 정도에 불과하고,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과 야곱에 대한 말씀 가운데 샌드위치처럼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일을 당하고, 야곱의 인생이 말 그대로 험악했던 것에 비해서 이삭은 그의 이름처럼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이삭의 어떤 점이 하나님 안에서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하였을까요?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이삭이 웃음 가득하고 어려움 없는 인생을 살았던 비결을 발견하고 우리들 역시 이삭의 믿음을 닮기 원합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그냥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몸에서 아들이 낳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습니다. 아내 사라의 태가 닫혔고 게다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연령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다른 방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로 그가 생각했던 것은 자기의 종 가운데 다메섹이라는 사람을 상속자로 삼아서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몸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상식과 이성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복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태를 여셔서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도 그것을 듣고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식을 초월해서 일하시는 분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새 해 첫 달을 보내는 요즘,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우리들 상식에 가둬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河-

내가 사랑하는 자

지난주에 이어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만 들은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였던 서머나 교회와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빌라델피아 교회였습니다. 반면에 다른 네 교회들은 칭찬과 동시에 질책도 받습니다. 그런데 유독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 없이 질책만 받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던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자칭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 만족도가 높았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미지근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번드르르했지만 실상 신앙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벌거벗은 영적상태입니다. 라오디게아의 신앙의 모습이 17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겉으로 보면 멋진 교회였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형편없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다는 것입니다.

칭찬할 것이 하나도 없었던 라오디게아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두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열심을 내는 것은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과 자기 우월의식에서 돌아서라는 깨우침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명칭이 확실히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칭찬할 것도 없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십니다. 이들은 진실된 신앙에서 떠나갔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필레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이들을 친구로 대해주십니다.

20-21절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회개하고 열심을 내는 신앙을 회복했을 때 임하게 될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친히 자신의 목소리로 이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문을 열면 예수님은 들어가셔서 식탁을 함께 나누실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식탁을 나누는 것은 매우 친밀하다는 표시였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앚을 것이라는 약속도 주십니다. 여기서 보좌는 왕의 보좌입니다. 그곳에 함께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왕의 자식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미지근한 신앙과 자기 교만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도 회개하고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면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문이 열릴 때만 고대하십니다.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실 수 있지만,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문을 열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문 밖에 서 계시도록 홀대할 때가 많다는 증거입니다.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신앙의 식탁을 나누고 왕의 보좌에 앉을 준비를 합시다. 할렐루야!-河-

차든지 덥든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 가운데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두 주에 걸쳐서 전하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셀류시드라는 왕조가 소아시아를 다스렸는데 그때 왕이었던 셀류시드 2세가 라오디세라는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안약을 비롯한 의학도 발달해서 지금으로 말하면 의과대학 같은 학교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도시가 부유하다보니 라오디게아 교회에 모여든 성도들도 세상의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소위 ‘난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의 수준과 모습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지만 이들의 믿음은 말 그대로 형편없었습니다. 자칭 부자라고 할 만큼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이들의 영적 상태는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가난하다 못해서 가련해 보였고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겉만 화려한 신앙입니다. 또한 세상적으로 풍족하고 어려움이 없다보니 믿음이 식었습니다.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간혹 본문의 찬 것과 더운 것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이해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본문의 핵심은 찬 것과 더운 것에 있지 않고“미지근함”에 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가 교회에 흘러 들어와서 교인들의 신앙을 미지근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라오디게아는 물 공급이 어려웠습니다. 약 6마일 떨어진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뜨거운 온천수를 갖고 왔지만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한 물로 변했습니다. 또한 동쪽으로 11마일 떨어진 골로새에서 차가운 물을 갖고 왔는데 차가운 물 역시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해졌습니다. 물이 미지근하면 먹기 힘듭니다. 물로서 가치가 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을 미지근한 물에 비유하시면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치리라”(16절)고 강력히 경고하십니다. 입에서 토해 내서 내친다는 말씀은 보통 무서운 말씀이 아니지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은 풍족함을 누리는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불경기라고 하지만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합니다. 세상의 물결이 교회에 흘러 들어와서 교회 안에 물질주의, 세상의 명예, 개인의 욕심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난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과 상관없이 교회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꽤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예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청산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으로 우물쭈물하는 것보다 확실한 신앙으로 무장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 것을 자랑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님의 이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올 한 해 세상의 가치들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기뻐하고 그 능력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하나님 성전의 기둥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여섯 번째인 빌라델피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더불어 질책 없이 칭찬만 받았던 교회라고 했습니다. 두 교회 모두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유대인들을 두고“사단의 회”라고 표현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몸에 할례를 받음으로 선택받은 백성의 표시를 지니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엇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기독교가 점점 커지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동네나 도시에 있던 회당에서 기독교인들을 좇아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저주하였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도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회당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가 큰 힘을 가진 교회가 아니었기에 유대인들의 핍박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능력의 교회였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앙 하나만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빌라델피아 교회를 칭찬하시고 이들을 축복하십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빌라델피아 교인들 앞에 절하는 일이 생길 것이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빌라델피아 교회를 붙잡고 계시고,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시겠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지금 자신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장차 그들의 발 앞에 절할 날이 온다는 사실은 빌라델피아 교인들이 믿음을 지키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힘든 것을 예수님께서 보상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로, 끝까지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훗날 세상이 당할 시험을 면제해준다는 약속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끝가지 참고 신앙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상해 주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는 말씀대로 빌라델피아 교회는 비교적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참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우리의 삶이 형통할 것입니다. 시험의 때를 면해 주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신답니다. 빌라델피아 교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핍박을 참게 만들어 주는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면류관을 빼앗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얻게 된 구원을 빼앗을 세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열린문은 그 어떤 세력도 닫을 수 없습니다.

넷째로, 신앙으로 끝까지 승리한 자들을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당시 빌라델피아에는 많은 신전이 있었고, 신전에 기둥이 있어서 그곳에 성자들의 얼굴이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델피아 교인들을 기억하신다는 칭찬입니다. 세상의 신전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 성전에서 안전하고 존귀하게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이처럼 빌라델피아 교회는 칭찬과 축복만 받았습니다. 비록 적은 능력이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결과입니다. 올 한 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기대와 소망을 갖고 끝까지 말씀 가운데 살아갑시다. 약속을 붙잡고 이기는 자의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