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돌봄 (4)

  • 여디디야

우리를 세심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인간을 만드시고, 자신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세심하게 대하시는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을 떠납니다. 외모가 출중했던 사울입니다. 처음 왕으로 세움 받을 때는 왕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수레바퀴 뒤에 숨었는데 전쟁에 승리하고 자신의 영역이 커지면서 안하무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에 보내서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으로 기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압을 비롯한 이새의 일곱 아들 가운데 왕이 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들에서 양을 치는 막내 다윗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카탄” 막내 다윗을 찾아서 그를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던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안목이 돋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이지만, 다윗 역시 그의 왕국이 견고해 지면서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커다란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 다섯 가지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셔서 그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시편 51편에 있듯이 우슬초로 자신을 정결하게 씻겨 주시길 회개하며 간구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기가 심하게 앓게 되자 다윗은 방에 들어가서 금식하면서 밤을 새우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7일 만에 아이가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다윗이 상심할 것이 두려워서 아이의 죽음을 알리지 못했지만, 다윗은 일어나서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차려 입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왕궁에 돌아와서 왕업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데려 가셨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살피시고 돌보셨습니다. 밧세바가 다시 아들을 낳으니 다윗은 그를 “솔로몬 (평강)”이라고 불렀습니다. 첫째 아들을 잃고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평안을 주시고 그의 처지를 돌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여디디야”(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사람)”로 부르십니다. 아들을 잃은 다윗을 여전히 사랑하심을 확증하고 그를 위로하신 말씀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꼭 맞게 임함을 다윗을 통해서 봅니다.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河-

하나님의 돌봄 (3)

다윗을 찾아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흙을 빚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처음 두 장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보기 좋았더라”고 연거푸 감탄하셨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이기에 정성을 기울이셨고 그에 비례해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손으로 빚어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어서 생명을 얻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실 때, 무화과나무로 수치를 가린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습니다. 자신을 거역하고 자신의 자리를 넘보았던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처지나 상황과 상관없이 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처음에는 왕이 되는 것을 꺼릴 정도로 수줍어하던 사울이지만,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하나님보다 자신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교만과 욕심이 그에게 들어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 이새의 집에 보내십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 장면입니다. 이새는 물론 그의 아들을 먼저 정결하게 하고 주님 앞에 서길 부탁했습니다.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은 키도 크고 용모도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의 예상과 달리 엘리압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아비나답과 셋째 삼마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새의 일곱 아들을 인터뷰했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한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새에게는 막내아들 다윗이 있었습니다. 이새가 다윗을 부르지  않은 것을 보면 다윗은 말 그대로 “꼴찌”였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보겠답니다. 다윗은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왕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 형제들의 서열도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막내인 다윗을 찾아내셨고 그를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새의 가족들이 하찮게 여기는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니라 막내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돌보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 찾아서 돌보시고, 행여나 작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도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들어 쓰십니다. 작은 것까지 챙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꼭 만나기 원합니다. -河-

하나님의 돌봄 (2)

가죽옷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임합니다. 은혜에 “선물”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이유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자신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믿음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믿고 난 다음에 돌아보면,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길을 가는 여정이 모두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방문과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셨기에 예정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섭리”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돌보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생각이나 삶의 중심을 나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돌보라는 의도였습니다. 돌봄의 최종 목적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롬12:1) 것입니다. 그 길을 감사와 기쁨으로 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서 왕 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서 권력을 휘두르고 주인공이 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의 모습과 반대입니다. 이러한 본성을 통제하고 뛰어넘게 만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조건없이 어느 때나 작동합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런데 막상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눈이 밝아졌고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은혜 가운데 살 때는 서로의 허물과 수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려니 세상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왔습니다. 수치, 즉 부끄러움은 양심에 가책을 받거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그릇 행했을 때 밀려오는 감정입니다.

 

옆에 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서 몸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이 하는 일이 결국 그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가죽옷을 손수 지어서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수치를 가려 주시고, 결국에는 이들을 다시 에덴으로 부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연약하고 심지어 거역한 모습 가운데도 임합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정성껏 빚으신 인간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살아감을 감사하고 주님의 돌보심을 깊이 경험하는 한 주간 되기 바랍니다.-河-

하나님의 돌봄 (1)

  • 토기장이 하나님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돌보는 교회”입니다. 요즘 세상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돌보는 것보다 내 것을 챙기고 내가 행복한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의 도움을 구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향하길 바라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자세로 살아가니 세상살이가 각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돼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성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억지로 또는 의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경험하면 저절로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으로 확대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돌보며 삶 전체를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새해 첫 달에 함께 나눴던 말씀의 요약입니다.

 

지난 반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돌보는 삶을 사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돌봐야 할 가족, 참빛 식구들, 이웃과 세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셨을 것입니다. 이제 하반기에도 돌봄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이번 달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돌봄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기 원합니다.

 

창세기 두 번째 장인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아담을 만드시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웅장하고 조화로운 우주의 창조를 알려줍니다. 반면에 창세기 2장은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4절)라는 말씀이 뜻하듯이 이 땅에 초점을 맞춥니다. 특히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메마른 땅을 경작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세상을 관리할 의무와 특권을 아담에게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먼지(dust)라고 직역할 수 있는 땅의 흙을 빚어서 아담(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아다마”이니 “아담”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아다마>에서 먼지를 취해서, 거기에 물을 묻히시고 <아담>을 정성껏 세심하게 빚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토기장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세심하게 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정성껏 빚어서 만든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이 돋보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듯이 선한 일을 하라는 의미와 목적도 부여하셨습니다(엡2:10). 다음 한 주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와 사랑으로 살기 원합니다.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河-

용서 (5)

용서와 화해

 

창세기 요셉에 대한 말씀은 용서를 넘어서 화해에 이르는 여정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요셉이 아버지는 물론 형들까지 그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을 가족에게 알리자 아버지는 그 꿈을 마음에 두었지만, 형들은 도리어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들에 있는 형들을 만나러 갔는데 요셉이 오는 것을 본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창37:19)고 말하면서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가 유다의 중재로 요셉을 이집트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들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집트에 팔려 간 요셉은 바로왕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집안일을 총괄하는 청지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를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를 뿌리쳤다가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은 감옥 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바로왕의 신하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서 바로왕의 이상한 꿈도 해석해 주고, 결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해석해준 바로왕의 꿈처럼 이집트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으로 고생하던 야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열 명의 아들을 이집트에 보냅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는 곳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쉽게 알아보았습니다. 요셉의 꿈대로 형들이 그에게 절을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서둘러 드러내지 않고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밟습니다. 형들을 이집트를 정탐하러 온 첩자로 몰아붙이고, 아버지 야곱과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이 살아있는지도 캐묻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시므온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가서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자기 동생인 것을 알지 못한 형들은 그제야 살려달라는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먹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후회합니다. 요셉이 형들의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결국, 막내 베냐민를 이집트에 데려왔습니다. 친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이 다른 방에 가서 목놓아 울 정도로 반가움과 서러움이 교차했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용서의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평온을 찾았을 때 형들 앞에 나가서 자신이 그들이 팔아먹은 요셉임을 밝힙니다. 그때 했던 요셉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한 요셉을 통해서 용서의 최종 목적지가 화해임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용서와 화해의 길을 가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