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우리 예수님(5): 귀신을 쫓으신 예수님/ 마 8:28-34
찬양: 내 진정 사모하는
예수님, 우리 예수님(5): 귀신을 쫓으신 예수님/ 마 8:28-34
찬양: 내 진정 사모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두 번째 사건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불어닥친 바람을 잠잠케 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데가볼리(10개의 도시) 지역에 도착한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지내는 귀신들린 두 사람을 온전케 해주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영적인 세력인 귀신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가다라”는 데가볼리에 속한 마을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같은 사건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보다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막 5:1-20).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힘이 무척 세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밤낮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을 갖고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군대(6천 명에 달하는 로마 군대 조직 레기온)라고 불리는 큰 귀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으로 돌아오면, 귀신들린 두 사람이 몹시 사나워서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 소리 지르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자연 세계를 초월한 영적인 세계가 존재함을 알려줍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자신들을 괴롭히러 오셨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요한 계시록에서도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세력이 모두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자신들이 소멸될 시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알고 있어서 더욱 강력하게 활동했을 것입니다.
귀신들이 자신들을 돼지 떼에게 넣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향해서 “가라”하시니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나와서 돼지 떼에 들어갔고 돼지는 비탈을 내리 달아서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돼지의 숫자가 2천 마리라고 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마을에 알렸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님께 떠나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곳은 유대 땅이 아닌 갈릴리 건너편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깁니다. 악한 귀신이 부정한 동물 돼지에게 들어가길 원한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에 빠져 죽은 돼지 2천 마리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 들린 두 사람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들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온전케 회복시켜 주는 것이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으로 귀신들을 통제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방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할렐루야 –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4):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마태 8:23-27
찬양: 내 맘이 낙심되며
–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9장을 중심으로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산상수훈 다음에 나오는 본문인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이 연거푸 등장합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러한 기적을 행하시는 중간 중간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대해서 (8:18-22) 알려주시고 실제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9-13).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고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은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마비된 로마 백부장의 종을 일으키시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의 벽과 경계를 허물고 지우셨음을 배웠습니다. 나병 환자나 백부장의 경우, 벽을 넘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베드로 장모는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가셔서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이 모든 사역을 통해서 나병은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종교적 경계, 로마 군대 백부장에게 있던 민족과 신분의 경계,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허무시는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질병뿐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배에 올랐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 여정입니다. 그때 갑자기 큰 폭풍이 불어서 배가 몹시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이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8:25)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폭풍 앞에서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데도 무서워했습니다.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기도의 응답이 없거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주무시고) 계신 것 같을 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에서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통해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게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3):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 마태 8;14-17
찬양: 어저께나 오늘이나
봉헌송
교회가 세워지는데 많은 손길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손길이 없으면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를 세우는 모든 손길이 귀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여느 교회처럼 소위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두고 억지로 배치하거나 일을 하도록 강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사역은 감히 시작하지 않고 중간에 그만두기도 합니다. 맡을 분들이 계시고 그 일이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와 맞을 때 실시할 뿐입니다. 때로는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그동안 우리 교회가 추구했던 사역의 방향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사역이 많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에 집중합니다. 샌프란에 계신 권사님들 중심의 수요 예배와 새벽기도회는 이런 사역을 지원하는 시간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속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만남을 갖지 못할 때도 있지만, 가능한 대로(할 수 있는 만큼) 모이는 데 힘씁니다. 대신, 이 모든 것이 자원하는 손길로 이뤄지는 것이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그래도 꼭 필요한 사역이 있습니다. 점심 친교와 설거지입니다. 주일예배가 점심 친교 즉 사랑의 애찬까지 이어지기에 점심 친교 자원이 필요합니다. 넉 달에 한 번씩 자원을 받으니 일 년에 세 번 섬겨야 합니다.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자원하는 손길들로 채워졌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설거지는 접시를 닦는 기계를 기증받은 이후 한결 쉬어졌습니다. 예전에 쓰던 종이 접시도 덜 쓰게 되었으니 환경운동에도 참여하는 셈입니다. 그래도 백여명 가까운 점심 설거지가 만만치 않게 나옵니다. 그동안 속회 별로 돌아가면서 설거지를 담당했는데, 이번 주부터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여섯 개의 설거지 조를 만들었으니 한 달 반마다 돌아오게 됩니다. 주일 오후에 모임을 갖는 청년부를 한 조로 만들고 (물론 청년부의 한두 분을 지원받았음) 나머지 조들은 기혼 그룹과 어르신 그룹을 합쳤습니다. 설거지를 하시면서 서로 교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 설거지 조에서 다음 사항을 꼭 기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첫째, 자신이 속한 설거지 조를 꼭 확인하시고, 주보에 다음과 이번 주 설거지 조에 자신의 조가 있다면 가능한 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최소 인원을 배치하다 보니 결석하시면 다른 조의 지원을 받아야 가능해집니다. 둘째, 조장님들께서 담당자들을 배정해서 분업으로 설거지를 하시면 적은 인원으로 무난히 설거지를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엌 설거지와 쓰레기만 담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모두 가신 후에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궂은일이지만 마음을 합쳐서 섬길 때 기쁨과 보람이 배가될 줄 믿습니다. 은밀히 교회를 섬기는 참빛 식구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예수님/ 마태 8:5-13
찬양: 세상의 소망, 천국의 기쁨, 예수
–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8-9장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 모음집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을 무릎쓰고 예수님 앞으로 나온 나병 환자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맞아주시고 심지어 그의 상처에 손을 대시면서 나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천하고 사람 취급받지 못한 사람이 나병 환자였을 것입니다.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에서 쫓겨나 따로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레위기 말씀대로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치며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온 것도 대단한 용기와 믿음이지만, 그를 맞아 주신 우리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심이 틀림없습니다.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심)에 들어가시니 로마 백부장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비록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따로 살아야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어쩌면 나병환자보다 예수님께 나오기 더욱 어려운 신분입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장교가 자기들이 정복한 식민지 그것도 갈릴리 목수의 아들에게 와서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자신이 부리는 종이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종은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아픈 종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같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특별합니다. 말씀만 하셔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랍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찾아온 백부장의 성품과 믿음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감탄하십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절) 사방에서 온 새로운 하나님 백성들이 교만하고 배타적인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날이 올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합니다.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13절)라고 말씀하시니 즉시 백부장의 종이 나았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께서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습니다. 당시의 고정관념을 깨시는 행동입니다. 벽을 허무셨습니다. 믿음은 민족이나 신분을 초월해서 예수님께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갖고 자신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받아 주십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1):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 마태 8:1-4
찬양: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해도
봉헌송: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피아노 3중주
–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
가능하면 주일설교 본문을 신약과 구약성경을 번갈아 다루고 있습니다. 새해 첫 달에는 우리 교회 표어인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가 들어 있는 구약 성경 이사야서 60장 말씀을 나눴습니다. 말씀대로 올 한해 <쿰>하고 일어나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전하기 원합니다.
참빛 식구들께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사셔서 세상의 부조리와 악한 모습이 드러나고, 그곳에도 예수님의 빛이 임하길 바랍니다. 새해 첫 달부터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쟁, 자연재해 그리고 최근의 신종 폐렴까지 어수선한 세상에 예수님의 치유와 온전함의 은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는 말할 수 없이 타락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 다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니 힘없는 백성들의 삶이 피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에 저항하셨습니다. 그릇된 종교를 무너뜨리고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시도를 하셨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세상에 전하셨습니다.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불편해하고 급기야 죽일 생각을 했지만, 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열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어부, 고민하던 세리, 로마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을 재건하려던 열심당원까지 다양했습니다. 이들은 가족과 재산까지 모두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질병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로 여겼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병이 나도 의사를 찾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앞으로 살펴볼 마태복음 8-9장에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만난 병자는 당시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공동체에서 쫓겨나서 격리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고, 저주받은 인생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병으로 인해서 흉해진 외모만큼 이들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진 채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찾아와서 깨끗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 나오기까지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비난과 저지를 감수하고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서 나병 환자를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시니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꺼리고 혐오하는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 역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