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 : 성도들

오늘부터 주일 설교에서는 에베소서 말씀을 살펴보게 됩니다. 우선 예베소서의 첫 여섯 구절을 한 절씩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3년 동안 사역했던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초대 교회들 가운데 에베소 교회는 일찍 세워졌고 본이 되는 교회로 자라갔습니다. 물론 요한 계시록에 의하면 에베소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만 그래도 에베소 교회는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의 올바른 모습에 대해서 교훈합니다. 그런 점에서 에베소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신앙은 물론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기초를 단단히 놓아주는 말씀입니다.

<신앙 터잡기>에서 말씀드렸듯이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왔다고 생각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다고 깨우쳐줍니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그러니 성도인 우리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교회를 중심으로 설명하면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聖徒)는 거룩한 무리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성도를 saints라고 합니다. 대문자로 표시하면“성자(the Saint)”가 되니 성도는 곧 하나님께 부름 받은 일반 성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성도라는 말을 교회에서 직분을 갖지 않은 사람을 가르치는 용어로 쓰고 있지만 성도보다 귀한 명칭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성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목사를 비롯해서 교회의 모든 직분이 성도라는 거룩한 신분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불리어지는 것을 최고의 자랑과 권위로 여겨야 합니다.

또한 성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라고 했습니다. 신실함은 성도의 표지(mark)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신실함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곧 신실함입니다. 삶이 예배가 될 때 성도의 신실함이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부름 받은 성도입니다. 자부심을 갖고 성도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잠언은 하나님 백성인 성도가 마땅히 살아야 할 세상 속에서의 지혜를 알려줍니다. 잠언의 가르침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선포한 후에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교훈합니다. 이번 주부터 수요예배에서 잠언을 한 장씩 공부하게 되는데, 오늘 우리가 살펴본 성도의 지위와 사명이 잠언 말씀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적용되길 바랍니다.-河-

2015년 기도 : 시편 142편 4

기도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사도바울도 디모데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교훈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목표가 있다면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구별됨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은 이후에 세상과 구별되어야 함은 물론 하나님을 믿기 전과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다고 알려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선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속의 거룩함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거룩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고 기도가 영혼의 호흡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오늘로 기도에 대한 말씀은 끝이 나지만 앞으로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직 기도가 낯선 분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기도를 훈련하셔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간절히 기도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힘들 때는 저절로 하나님을 부르고, 기쁠 때는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 기도하는 시간 자체가 즐거워야 합니다. 그때 기도는 인격이 됩니다. 비로소 기도의 사람(man of prayer)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저절로 거룩함에 이를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기쁨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의 사람은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행복합니다. 평안합니다. 은혜 가운데 푹 잠겨서 살아갑니다. 믿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앞으로 기도로 사시길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하십시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시고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서 세상을 마음에 품고 어그러진 세상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기도한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시편 142편의 마지막 말씀은 다윗의 세 번째 부르짖음입니다. 다윗의 상황은 매우 열악합니다. 말 그대로 동굴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피난처가 되어주지 않습니다. 비참합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해 주시길 간절히 간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공로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살고, 그 능력으로 구원받고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싶어 합니다. 다윗의 간절함을 닮기 원합니다.

시편 142편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드린 기도라고 했습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페르시아가 통치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시편을 갖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할 차례입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어려울 때 다윗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기 원합니다. -河-

2015년 기도 : 시편 142편 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수요예배시간 요한복음에서 배웠듯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신 후에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들 안에 내주(內住,dwelling)하십니다. 교회와 가정은 물론 성도들의 모임 속에 함께하십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곁에 계시면서 위로해주고, 도와주고, 조언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우리의 변호인이 되시는 셈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성령께서 제자들 가운데 능력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도록 돕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을 만큼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안타까워하면서 기도해주십니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의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모두 만족시켜 줍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7)

이처럼 성령의 사역은 광범위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 이후에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삼위 하나님가운데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아니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기도 자체에 성령의 일하심을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저는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내 욕심이나 주장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려는 태도입니다. 둘째는,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는 먹구름들, 죄들을 회개를 통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어서 구별된 삶을 살 때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셋째는, 주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배운 간절한 기도입니다. 한 마디 기도를 하더라도 마음을 담아서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나눈 시편 142편 말씀은 피난처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속의 다윗은 지쳐있습니다. 다윗의 영혼을 돌봐줄 사람이 곁에 없으니 외롭습니다. 그때 다윗은 또다시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난처가 되시고 분깃(모든 것)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갖고 있었던 기도의 힘입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河-

2015년 기도 : 시편 142편 2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매우 신비로운 영역입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설교가 스펄전은 “마른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눈물로 기도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웻(Jewett)이란 분은 “나는 열사람에게 설교를 가르치기보다 한 사람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열 사람의 훌륭한 설교가보다 기도의 사람 한 명이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풀어서, 열 번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 번의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말 그대로 영혼의 호흡이고 하나님께 나가는 관문입니다.

올해도 한 달 동안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기도를 두고 여러 가지로 정의합니다. 기도의 종류도 마음으로 기도하는 조용한 기도부터 온 교회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 통성기도까지 다양합니다. 내용에 따라서 감사와 찬양의 기도부터 이웃을 위한 기도까지 각각의 상황에 맞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올 해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는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간구하는 기도는 따로 배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들 기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구의 기도를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기도의 힘을 알면서도 기도의 자리로 나가지 않고 염려하고 때로는 낙심합니다. 세상살이가 바쁘고 마음과 생각을 다른 곳에 두고 살 때가 많아서 실제로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많이 부족합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듯이“내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기 원합니다. 기도 속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토해내고, 자신의 어려움을 진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원합니다. 기도 가운데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고 평안함을 얻는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삶의 모습이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잘 먹고 잘 삽니다. 남이 생각하면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내면은 많이 빈약합니다. 허전합니다. 자신 있어 하지만 알고 보면 매사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생업, 가정, 자녀, 인간관계, 자신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간구할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과 삶을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앞길을 생각하면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142편 3절 말씀에는 “길”이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 길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길입니다. 시편 말씀 속의 다윗은 매우 혼란한 상태에 있습니다. 영이 혼미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그때 자신의 길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알고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두 번째 길은 자신이 걷는 길입니다. 자신의 길에는 여기저기 함정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걷기 원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살펴주시길 간구합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들이 걷고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살펴주시고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구합시다. 다윗처럼“주께서 내 길을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합시다. -河-

2015년 기도 : 시편 142편 1

우리 교회는 행사가 많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앞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지칠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신앙생활보다 참빛 식구들의 세상살이를 지원하고 여러분들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시길 원해서 교회 행사를 가급적 삼갔습니다. 때로는 너무 행사가 없으니 교회사역이 밋밋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매월 꼭 필요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2월에는 두 번째 참빛 보이스, 3월에는 행복한 부부세미나, 4월에는 기도회를 다녀왔습니다. 모든 순서들이 유익하고, 은혜롭고 성도님들의 호응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외부의 도움 없이 우리 교인들이 주관하시고 인도하신 사역들이었기에 더욱 뜻 깊었습니다.

5월에도 훌륭한 행사가 마련되었습니다. 5월 말 메모리얼 데이 주간에 청년부가 수련회를 갑니다. 5월 29일에는 이경민 지휘자의 네팔 후원을 위한 한국 가곡 음악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6년여 네팔의 박재면 선교사님을 지원해 왔기에 네팔은 각별한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 속하기 때문에 지진 피해가 예상외로 컸고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차제에 훌륭한 성악가(소프라노)이신 지휘자님과 우리 교회가 함께 자선음악회를 개최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지휘자님께서 한국 가곡들을 연주하신다니 우리 교회는 물론 이웃들을 초청하시면 분명 커다란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네팔도 돕고 우리 교회도 알리는 좋은 기회에 온 교회의 지원과 기도 그리고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매년 그랬듯이 올해도 한 달 동안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올 해는 시편 142편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점검하고, 참빛 식구들의 기도생활이 실제로 회복되길 기대합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소개한 웨슬리의 은총의 수단에 기도와 말씀이 으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먹지 않고,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충만한 은혜는커녕 살아있는 신앙을 유지하기조차 힘들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요즘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미국만 해도 인종과 종교 그리고 계층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심지어 폭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가 차오르고 그것들이 올바로 표출되지 않으니 불안감이 커집니다. 우리들 각자의 삶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가지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 없이 하루하루를 맞이합니다. 아니 지금은 안전해 보여도 언제 인생의 폭풍이 밀려올지 모르니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곧 기도일 것입니다.

시편 142편에는 “다윗이 굴에 있을 때 지은 기도”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동굴 속으로 피난했을 때 드렸던 기도라는 것입니다. 당시 다윗도 왕으로 기름을 받았고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지만 모두 과거지사요 현실은 매우 깜깜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고,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솔직히 진술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빛이 없는 동굴의 위기를 견뎠습니다. 기도의 힘입니다.-河-

은혜로 사는 삶 (4) : 혈루병이 낳은 여인

어느 덧 5월이 되었습니다. 올 해도 절반을 향해서 가고 있네요. 지난 넉 달 동안 우리는 올해 교회의 표어에 맞춰서 요한 계시록에 등장한 교회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 창세기의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나눴고, 지난 한 달 동안은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도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99%의 노력에 1%의 영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력이 무척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1%의 영감이 없다면 100%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영감 즉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우리의 삶이 온전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차별 없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이나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는 절대로 주인공이 되기 힘든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그들의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나인성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여인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단지 슬퍼할 뿐입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면서 여인의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도하신 일입니다. 아들을 잃은 여인이 불쌍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은혜의 시작은“측은지심(惻隱至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자리를 엿보다가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낙원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를 쓰셨습니다. 그 절정이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랑입니다. 이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측은지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때, 은혜가 임합니다. 나인성 과부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은혜가 우리를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친히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의 여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은 여인은 사람들의 이목을 무릅쓰고 예수님께서 나와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남아있을 때는 힘을 다해서 은혜를 사모하고 찾아야 합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에게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병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듯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살기 원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은혜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참빛 식구들과 우리 교회에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河-

은혜로 사는 삶 (3) : 나인성 과부

은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은혜’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의지)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없습니다. 은혜는 경험하고 느끼는 정(情)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동하고 감격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은혜를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 단순하게 느끼고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 속에 들어가고, 은혜 속에 거하고,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과거의 사건부터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모든 삶에 은혜가 요청됩니다. 날마다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 종일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이 은혜임을 확신하고 은혜를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했지만 결국에는 유다(“찬송”)를 낳고 하나님을 찬송했듯이 말입니다. 은혜로 사는 삶에 힘이 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삶에 용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모험도 감수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고 은혜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은혜로 사는 삶 속에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 주님과 동행합니다.

은혜로 사는 삶에 치유와 회복도 있습니다. 앞에서 은혜는 느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진다고 고백합니다.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질 때, 마음속에 있는 상처와 쓴 뿌리가 치유되고 새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경험하기 원합니다. 온 교회가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주일 이후의 6일 동안 가정과 세상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간증하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이 나인성에 들어가실 때 장례행렬을 만나셨습니다. 나인성에 사는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장례를 지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그 과부를 보셨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울지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관에 손을 대시고 아이를 살려내셨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본문 속에서 나인성 과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일하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측은히 여기시면서 찾아가셨고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河-

은혜로 사는 삶 (2) : 레아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라고 불리는 은혜 받는 방법을 소개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기도를 강조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골방기도부터 회중이 함께 드리는 통성기도까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을 것을 부탁했습니다. 셋째는 성만찬에 참석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금식과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은총의 수단이지만 이것들을 형식적으로 행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진정한 마음으로 즉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대하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금식과 성도의 교제를 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은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은총의 수단에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면 그것은 마른 잎사귀요 그림자입니다. 또 내가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업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하나님의 영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아무 공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일지라도 당신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영혼에 은혜를 전달하지 못합니다.”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비로소 충만한 은혜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구하는 열심히 요청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온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속으로 들어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고 은혜 받을 일을 하지 않은 사라의 여종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 살길이 열렸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전적인 은혜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입니다. 레아라는 이름에는 “지침(weary)” “둔함(dull)” 또는 ”들소(Wild cow)”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레아는 그의 이름 그대로 뭔가 조금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레아 역시 하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 라반에 의해서 야곱에게 시집갔습니다. 야곱은 처음부터 라헬을 사랑했기에 레아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야곱의 첫째 부인이 되었지만 레아의 결혼생활을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레아를 돌아보셨습니다.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여섯 명을 낳았고 딸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인 유다와 훗날 이스라엘의 제사장 지파가 되는 레위까지 레아의 아들입니다. 야곱은 레아에게 눈길을 두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눈길은 레아를 향했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아들인 스불론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후한 선물을 주셨다고 찬양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받지 못해서 외롭고, 누군가의 위로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 풍성히 임합니다. 할렐루야! -河-

은혜로 사는 삶 (1) : 하갈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서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앞으로 6주간 성경강림절까지 부활 절기를 살게 됩니다. 부활절이 지난 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50여일이 부활절의 연속인 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행1:3).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회개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고, 부활하셔서 승천하기 전에도 하늘나라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더불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제자들이 두려움에 모두 흩어졌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길 기다렸습니다.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오순절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거듭났습니다.

이처럼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까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함께 기도했듯이 우리들도 기도하는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묵상하고, 우리가 사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 강림절을 준비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은혜(grace)는 값없이 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서 얻게 되는 보상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서 받는 상급도 아닙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할 수 있는 여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은혜 속에 사는 것은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아무 조건도 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깊이 만납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성경에 나오는 네 명의 여성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은혜를 경험한 인물들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입니다. 하갈이라는 이름에는 “훌쩍 떠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나자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사막으로 쫓겨납니다. 마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키울 여력이 없자 죽음을 택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들 모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샘물이 터지게 하시고 사막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십니다. 주인에게 추방당한 여종과 그녀의 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없이 임합니다. 할렐루야!河-

그리스도와 함께 (2)

2015년 부활의 아침 밝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9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세례도 헛되고 믿음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부활절에 세례 받는 자매와 아기가 있습니다. 세례 받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첫 걸음을 내딛는 성도님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신앙 여정을 위해서 온 교회가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유아세례의 경우 그 책임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의 믿음으로 세례를 받기에 앞으로 자녀가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다음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기도로 키우고 부모님들이 먼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예식은 공동체가 함께 행합니다. 교회는 오늘 세례 받는 성도님과 아기를 책임감을 갖고 지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온 세상에 새로운 생명이 전파되길 원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폭력, 미움, 시기, 불의, 차별 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모두 해결하셨건만 여전히 세상은 그것들을 손에 쥐고 쩔쩔매며 싸우고 갈등합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우리들 마음속에도 욕심과 염려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살펴보았듯이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살펴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우리들은 여전히 육체 가운데 거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믿음은 신뢰(trust)입니다. 신뢰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믿음은 또한 결단입니다. 저절로 믿어질 수 없습니다.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매 순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듯이 매 순간 예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는 동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죽으면 사는 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내려놓으면 얻게 되고 나를 비우면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지고 걷는 갈보리 언덕길이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길을 가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우면서 함께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의 영광을 맛보기 원합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He is risen!)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