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은혜/ 고린도전서 15장 12-20절
부활의 은혜/ 고린도전서 15장 12-20절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했던 2020년 3월에 모든 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부활절에는 다시 만나자고 광고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웬걸,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2년여 계속되었습니다. 한창 힘들 때는 교회에 다시 모여서 예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때의 기억이 아련한 추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부활절은 물론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에 감사할 뿐입니다. 작년 말부터 주일학교 아이들까지 함께 예배할 수 있으니, 한국말을 쓰는 참빛 공동체가 말 그대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어려웠던 기억을 떠올리면 감사가 나옵니다. 막연했던 상항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묵묵히 걸으니 빛이 찾아왔습니다.
올해도 지난해에 이어서 <부활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굳게 신뢰할 때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부활을 믿는 자가 누리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부활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그를 신뢰할 때,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선물로 얻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부활절 달걀(Easter Egg)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달걀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어미 닭은 생명을 갖고 있는 유정란을 3주 동안 품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3주가 되면 달걀을 깨고 병아리가 세상에 탄생합니다. 신비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어미 닭이 3주 동안 달걀을 날개 아래 품고 있는 것도 감동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들어옵니다.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 심깁니다. 겉으로 보면 모든 달걀이 비슷하지만, 생명을 갖고 있는 유정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계신다는 것도 겉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압니다. 생명을 품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달걀을 뚫고 병아리가 세상에 태어나듯이, 올해 부활절을 맞으면서 우리 안에서 탈피(脫皮)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껍질을 벗고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기를 원합니다.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무덤 문을 활짝 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길 원합니다.
새롭게 시작합시다. 힘겨운 세상이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갑시다.-河-
찬송가 해설(13): 갈보리산 위에/ 요한 3장 16절
갈보리산 위에 (찬송가 150장)
앞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나눌 예정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습니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으면서, 교회가 함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나누게 되어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십자가에서 비롯되는 믿음이 충만해지는 시간이길 원합니다.
오늘은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말씀을 마치고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는 길목에서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찬송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갈보리 산 위에”(찬송가 150장)입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로 시작합니다. 영어 제목은 “Old Rugged Cross(오래된 험한 십자가)”입니다.
이 찬송은 1912년 조지 베나드(George Bennard, 1873-1958) 목사님이 만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물론 당시의 부흥 집회에서 많은 은혜를 끼친 찬송입니다. 찬송가 인기가 한창이던1960년대에는 미국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으로 뽑힐 정도였습니다.
조지 베나드 목사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찬송을 꼭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상(詩想)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만 눈에 그려질 뿐이었습니다. 고민과 기도 속에 미시간 집회를 인도하는 날에 찬송시가 폭포수처럼 떠올라서 단숨에 찬송을 완성했습니다.
베나드 목사님은 집회를 주최한 미시간 포카곤 감리교회의 담임 목사 앞에서 기타를 치면서 자신이 방금 완성한 “갈보리 산 위에”를 불렀습니다. 찬송을 들은 보스트윅(Rev. Bostwick) 담임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불멸의 찬송을 허락해 주셨군요. 다른 찬송을 통해서 받아 본 경험이 없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라고 극찬하셨습니다. 보스트윅 목사님은 이 찬송을 출판하는 재정을 담당했고, 그 찬송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면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를 처음 연주한 미시간 포카곤 감리교회는 미시간주의 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고, 찬송가 가사를 동판에 새겨 놓았답니다.
찬송가 “갈보리 산 위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을 바라보니 죄 사함의 은혜가 밀려옵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렴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河-
요한복음 5장 (4): 영생을 사는 것/ 요한 5:16-18절
영생을 사는 것
지난 한 달 동안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셨고 그곳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를 일으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시스템에 주목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일등만 살아남는 베데스다의 법칙이 요즘 세상과 비슷했습니다. 무엇보다 천사가 내려오는 것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혹시나’하고 기다리는 연못가 병자들의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삶으로 보이지만, 정작 헛된 희망이 이들을 묶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38년 동안 누워있던 병자가 일어나서 걷는 놀라운 사건은 보지 않고 쓸데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거에 묶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선입견과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만나서 38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병에서 해방된 사람은 담대하게 자신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선포하고 증언했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거칠 것이 없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누워서 천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인생에서 일어나 걷고 자기의 삶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생각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자신들이 쌓아놓은 기득권이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지키는 것에 연연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하시면서 자신의 길을 가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것을 두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박해하고 급기야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버지가 생명을 주관하시듯, 예수님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버지는 심판하는 권한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격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경멸하고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생명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요한복음 5장 (3): 고치신 이는 예수라/ 요한 5장 10-15절
고치신 이는 예수라.
병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병자를 찾아가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이 매우 오래된 것을 감지하셨고, 불쌍한 마음에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한 것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사건이 특별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이 당시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병을 고치셨을 것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38년 된 병자는 곧바로 병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 날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신 것에서 시작된 안식일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십계명에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이 네 번 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날입니다. 안식하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조차 금지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안식일 규정이 사람들을 판단하는 데 사용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따먹은 것을 갖고도 시비를 걸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당시에 안식일 법은 매우 복잡해서,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에게 큰 족쇄가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 법을 갖고 백성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종교 권력의 남용이었습니다.
병에서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해서 걷고 있다고 답변합니다. 맞습니다. 이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이 중요했습니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걷는 것이나,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뻤을 뿐입니다. 게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만 고쳐 주시고 자리를 뜨셨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사람들이 헛된 희망을 갖고 천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안식일에 병에서 해방된 사람을 정죄한 유대인들은 과거의 율법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38년 된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났고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河-
요한복음 5장 (2): 일어나 걸어가라/ 요 5:5-9
38년 된 병자 (1): 일어나 걸어가라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베데스다 연못은 절망적일 정도로 안타까웠습니다. 수많은 병자가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사가 내려와서 연못물이 소용돌이 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바람만 조금 불어서 연못 물이 움직이면 천사가 내려왔다고 생각해서 연못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모두 목이 빠지게 천사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 명만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자입니다. 자기만 살아남아야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희생, 양보, 배려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살면 됩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분위기를 눈에 그리면 끔찍할 정도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매우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보게 하셨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입도 열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더욱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베데스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연못물에 있었기에 예수님이 오신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자기 체면을 걸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병을 고칠 수 없으니,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베데스다 연못에 머물러 있습니다. 참 이상한 모습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의 평생 병을 앓고 누워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가능성도 큽니다. 예수님께서 자리를 깔고 누워있는 38년 병자를 찾아가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베데스다 연못의 시스템을 생각하면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천사가 내려와도 일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낫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제는 불가능합니다.
이 사람이 솔직히 말합니다:”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혼자 누워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희망의 줄 한 가닥을 붙잡고 베데스다 연못에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전적인 은혜가 이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38년 동안 자리에 누워있던 사람이 곧 나아서 예수님 말씀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습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