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두 주 동안 주말마다

비행기를 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비행기가 3시간 이상 지연되고

엔진 고장으로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안전하게 다녀왔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행기에 승객들의 짐을 싣고,

비행 정비와 안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애틀 공항에는 주말마다 비가 내렸는데

빗속에서 그 궂은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뒤쪽에 있어서

차례를 기다려서 내리다 보면,

앞쪽 승객이 앉았던 곳을

청소하는 분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승객들이 남긴 쓰레기를 모으고

좌석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2.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K자형 모습을 띠고 있답니다.

 

위쪽에 있는 계층은 어려움을 모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반면, K자의 아래에 계신 분들은

예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선, 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미국에서 체류 신분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하루하루 살아내야 합니다.

 

K자의 위쪽 가지보다

아래쪽 가지에 속한 분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자기 의견을 말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히면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어쩌면, 공항에서 궂은일을 하고 계신 분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가는

소위 아래에 속한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3.

궂은일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 없다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예상도 못 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분들이야말로

말없이 세상을 바치고 있는 분들입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분들의 귀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도 한 해를 살면서,

궂은일을 도맡아서 한 적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때로는 직장에서도 말없이 궂은일을 담당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빛이 나지도 않고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참빛 식구들께

칭찬과 찬사를 보냅니다.

 

더불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 일에 종사하고 계신 모든 분을 응원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예수님도 3년 공생애를 사시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일을 하셨습니다.

섬김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인자가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하나님,

궂은 일을 하면서

섬김의 자리에 지키신 참빛 식구들을 축복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8이-메일 목회 서신)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여정(journey)

또는 그냥 ‘길’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한때는 동네를 산책하면서

제 앞에 있는 길들을 사진으로 남긴 적도 있습니다.

매일 보는 길인데 새롭게 보일 때가 있고,

갔던 길을 돌아올 때 새롭게 보이는 감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신앙의 길,

우리가 실제로 걷는 길까지

인생은 말 그대로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생로병사, 우여곡절, 희로애락 –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단어들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힘든 것에는 제외되고

좋은 것만 누리는 특혜를 얻고 싶지만,

마음처럼, 기도하는 것처럼 길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타락한 이후의 세계,

땀을 흘려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만물이 타락해서 신음하는 세상은 나름의 자연법이 존재합니다.

 

때때로 자연법의 창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여느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매번 일어나는 일상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예외입니다.

 

그러니 행여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로 자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실수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지요.

그것은 얼른 교정하면 되는데,

우리가 길을 걸으면서 닥치는 대부분의 문제와 어려움은

생각보다 복합적입니다. 인생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2.

주일에 ‘예수님의 발’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밟고 걷는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을 걸어 다니시면서

기쁨과 평화,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힘든 백성들을 만나시고 만져 주시고 치유와 회복을 선물하셨습니다.

부지런히 걸으셨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까지 걸어오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3년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걷습니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즘은 셀폰 앱이 있어서

우리가 걷는 곳을 다 표시해 줍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발길이 샬롬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이길 원합니다.

 

예외 없이 때로는 무작위로 어려움을 겪지만,

그것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함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리만 어려움에서 배제된다면

그야말로 욕심 아닐까요!

 

대신 인생의 희로애락 속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모든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순간순간 내려 주시는 힘, 지혜, 용기를 갖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진지한 발길입니다. 소중한 발길입니다.

 

남은 올 한 해도 예수님을 따라서

뚜벅뚜벅, 때로는 사뿐사뿐,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이 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1이-메일 목회 서신)

불가사리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작은 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가 드린 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시면서 생긴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번 연속 설교의 주제에 맞춰서
‘예수님의 손’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우리의 문제, 기도 제목, 염려, 불안,

계획 등등 모든 것을 올려 드리기로 다짐했습니다.

 

동시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린

어린아이의 손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배고픔을 잊고

예수님께 내어드린 어린아이의 마음이

신기하고 대견했습니다.

 

이름도 없이 “한 아이’라고 기록된 손이

오 천명이 배불리 먹는 기적의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2.

작은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막상 작은 것을 실천하거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자리에 있으면,

“이 작은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될까”하는

회의가 찾아오고 때로는 주눅이 듭니다.

 

그때, 우리가 배운 오병이어의 기적,

특히 자기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린

어린아이의 작은 손이 큰 힘이 됩니다.

 

제가 종종 인용하는 비슷한 예화도 생각납니다.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 노인이

큰 폭풍이 지나간 다음 날, 해변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폭풍우에 밀려온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가 해변가에 있었습니다.

 

저 멀리 한 아이가 불가사리를 한 마리씩 들어서

바다에 풀어주고 있습니다.

햇볕이 쨍쨍해서 금세 말라 죽을 상황입니다.

한 두 마리를 살려준다고 대세가 바뀔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의 행동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인이 아이에게 다가가서

그렇게 몇 마리를 살려준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기겠냐고 물으니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할아버지, 그래도 제가 바다에 던진 불가사리는 살아날 거예요.”

 

3.

그렇습니다.

작은 일이 소용없어 보여도,

오병이어의 작은 아이의 손처럼 큰 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해변가에서 죽어가는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그래도 바닷가에 들어간 불가사리는 생명을 유지할 겁니다.

 

작은 것에도 힘이 있습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듯이

한 걸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작은 아이가 드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받아 주신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는 작은 것에서 희망을 봅니다.

 

올 한 해,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신

참빛 식구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16:10)

 

 

하나님,

겨자씨 알에서

풍성한 열매를 아는 안목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4 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에서 기다림으로

Happy Thanksgiving!

 

1.

제가 처음 담임 목회를 시작했던

인디애나 교회는 장소와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수요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에

수요 예배 대신에 목회서신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1, 2, 3 숫자로 단락을 구분하면서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그때까지 포함하면, 목회하는 내내 수요일 또는 목요일마다

교인들에게 목회서신을 보낸 셈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인들께 작은 힘을 보태기 위해서

서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25년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빠름도 실감하고,

작은 것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함을 스스로 배웁니다.

 

목요일마다 이-메일 서신을 보내기에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 추수감사절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

대개 한 해의 감사한 일을 돌아보면서 준비합니다.

 

2025년 올해는

담임 목회를 시작한 지 25년,

샌프란 우리 교회에서의 목회 20년을 맞는 해이기에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보게 되고,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지난주 설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제안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물론,

힘들 때 조용히 다가와서

손을 꼭 잡아 주었던 이웃도 기억하길 원했습니다.

 

우리를 믿어주고,

힘들 때 함께 해주고

지친 손을 잡아 주면서 위로와 힘을 주었던 손,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손길이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좋으신 하나님과 사랑하는 친지들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감사의 기념비를 세우는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뜻깊게 보내기 원합니다.

 

3.

감사절이 끝나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이 시작됩니다.

 

올해는 강단에 네 개의 촛불도 준비했습니다.

매주 하나씩 켜면서 온 교회가 예수님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일찌감치 크리스마스트리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주일에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트리를 장식하면서

교회에서의 특별한 추억을 쌓고

성탄을 기다릴 것을 눈에 그리니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무엇보다 사분오열 갈라져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갈 때

세상에 온전한 샬롬이 임할 것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기에 더욱 마음이 설렙니다.

 

2025년 성탄에는

우리들과 세상에 어떤 기쁜 소식을 갖고 오실는지요!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33:15)

 

하나님,

감사함으로 우리 주님을 기다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7 이-메일 목회 서신)

온전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마음에 이어서

지난주부터 예수님의 손과 발에 관한

연속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생각은 “생명”

예수님 마음은 “긍휼”

예수님의 손과 발은 “샬롬(평강)”이

핵심 메시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대한 첫 번째 말씀은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이었습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절)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처럼 보기 흉하고 치명적인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부정하였기에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부정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시며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를 살리셨습니다.

 

2.

마가복음은 이 사람을

나병환자(레프로스, leper)라고 정확히 알려줍니다.

 

그런데 나병에 대한 규정으로 알려진

레위기 13장 본문에는 “나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가

오늘 날의 한센병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악성 피부병”이라고 옮겼습니다.

 

예배 후 한 집사님께서

레위기에서 묘사한 증상들이

오늘날 피부암에 가까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피부암은 전염되지 않는데,

억울하게 격리되어서 암과 싸우는 경우도 생겼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용어나 표현은

성경이 쓰일 당시에 통용되던 것입니다.

요즘의 과학이나 의학에 비교하면, 턱없이 미천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는

성경이 쓰일 당시로 꼭 찾아가서

그 당시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는 교리에 묶여서

당시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하나님 말씀으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드시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3.

레위기에서 피부에 발생한 질환과

그로 인해서 옷이나 물건까지 부정하다고 엄격히 규정한 것은,

하나님 백성의 “온전함(wholeness)”과 관련됩니다.

 

질환으로 인해서 피부가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질병을 하나님의 벌 또는 저주라고 봐서도 안 됩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온전함’을 지향하듯이

우리의 성경 읽기 역시  ‘온전함’을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올바른 해석과 바른 신앙을 갖출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 5:48)

 

하나님,

매사에 온전함을 추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0 이-메일 목회 서신)

애통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울음, 예수님의 울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잃어버리고

몰락의 길로 향하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니 슬퍼하는 친지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우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울음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혀서 에덴을 내보내는 순간

하나님은 속으로 우셨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직전,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면서

하나님은 우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서 주야로 울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울음은 곧 하나님의 울음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시고, 예수님께서 우셨으니

우리 역시 우는 것이 결코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진실함도

울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경우에 맞는 울음은 숭고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팔복(八福)에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젊어서는

애통하는 자의 복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씀과도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애통(哀痛)의 의미가 새롭고 깊게 다가옵니다.

 

‘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펜토스>는

사랑하는 친지가 죽었을 때 느끼는 비통(悲痛),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흐느끼는 통회(痛悔),

삶 속에서 닥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모두 포함합니다.

 

인생이 우리 동네 날씨처럼 항상 맑을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잘못이 없어도,

갑자기 밀어닥치는 손님처럼

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마음껏 울 수 있습니다.

서러움에 흐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치면서 엉엉 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셨고, 예수님도 우셨으니

애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3.

저도 예전에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강단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가셨기에

아내 역시 자리에서 울면서 함께 애통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옆에 와서

제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함께 울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우리 교회 교육 전도사님이었습니다.

베트남 출신의 전도사가 새벽에 일부러 찾아와서 함께 울어준 것입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습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우시는 예수님이 되어서

누군가와 함께 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하나님,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13 이-메일 목회 서신)

방심은 금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10월 19일 주일 오전 9시 30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매해 8백만 명 이상이 방문합니다.

예약하지 않고는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문을 열자마자 수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곳입니다.

철저한 보안이나 경비는 필수입니다.

 

그런데, 박물관이 문을 열고 30분이 지난

휴일 아침 9시 30분에 도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네 명의 범인은

박물관을 보수 중인 인부처럼 형광색 조끼를 입고

사다리차를 이용해서 귀중품들이 전시된 아폴로관으로 침투해서

전시해 놓은 유리 진열장을 부수고

나폴레옹이 왕비에게 선물한 사파이어 목걸이를 비롯한

귀중품 아홉 점을 훔친 후,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스쿠터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들이 도난에 필요한 시간은 7분 내외였습니다.

 

도둑들이 훔친 귀중품들은 값을 매길 수 문화유산입니다.

대략 1억 달러로 추산합니다.

두 명은 잡혔는데, 훔쳐 간 귀중품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밤중이나 새벽도 아닌

대낮에 세계 최고의 루브르 박물관이 도난당한 것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이번만 도난 사건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1912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모나리자가 이탈리아 출신 인부에 의해서 도난당했다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 도난사건 후에

귀중품이 전시되어 있던 아폴로관에

더 많은 관람객들이 몰린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2.

세우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쉽습니다.

철저하게 대비하고 지키지 않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 때가 많습니다.

 

대낮에 발생한 루브르 박물관 도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도둑들의 박물관 침입, 탈취와 도주까지 모든 과정은

영화 같은 극적인 장면도 없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성능이 떨어진 CCTV가 설치되었다는

박물관 책임자의 변명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파숫군의 밤샘 지킴이 헛되다는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물론 철저히 준비해야 하지만,

마음먹고 달려드니 세계 최고의 박물관도 털리니 말입니다.

 

새달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 조심조심 새달을 시작합니다.

기도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낮의 해가 상하지 않고

밤의 달이 해치지 않도록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신실하게 새달을 살기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편 1절)

 

하나님,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6 이-메일 목회 서신)

팁의 유래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에 살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가 ‘팁(tip)’입니다.

팁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하고

팁이 없는 한국에 가면 뭔가 허전할 정도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팁플레이션(tipflation)”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아진 팁입니다.

 

27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보통 감사의 표시로 5-10%의 팁을 주었기에

팁이 부담되지 않았습니다.

커피처럼 간단한 것을 살 때는

특별한 서비스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팁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즘 우리 동네에서는 18-25%의 팁이 계산기에 찍혀 나옵니다.

간단한 것을 사도 자동으로 팁을 줄 것인지 물어보니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큰 부담입니다.

 

2.

팁의 유래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팁이 미국의 유일한 전통인 줄 알고 있었는데

16-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었답니다.

귀족들이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이 시작이랍니다.

 

영국의 선술집에서

TIP(to insure promptitude)이라고 쓰인 통에 돈을 넣으면

빠른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전통에서

TIP이라는 용어가 나왔다고 봅니다.

 

유럽을 방문했던 미국인들이

팁을 주는 사람은 뭔가 있어 보이고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을 도왔다는 자부심도 들어서

미국에 도입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이 되면서

팁은 석방된 노예들의 임금을 보장해 주는 데 이용됩니다.

주인들이 따로 임금을 주지 않으니

종업원들은 팁으로 먹고살아야 했습니다.

약간 서글픈 미국식 팁의 역사입니다.

 

3.

미국 연방 정부에서는

팁을 받는 종업원의 최소 임금을 $2.13으로 규정하고

팁 수입이 적으면 고용주가 $5.15의 크레딧을 주어서

최소 임금 $7.25를 맞춰야 합니다. 그리 높지 않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연방 정부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습니다.

무조건 캘리포니아(또는 각 카운티나 시) 최소 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현재 $16.50입니다. 팁은 종업원들에게 그대로 돌아갑니다.

연방 정부 가이드라인에 비하면 꽤- 파격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법률이나 규정이 많이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좋은 전통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에게

따로 임금을 주지 않고 팁으로 먹고살게 했다는

팁의 역사가 씁쓸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많은 것에 특별한 역사가 있습니다.

힘없는 민초들의 서러움과 눈물이 베어 있기도 합니다.

 

불평하거나 무작정 반대하기보다

세심하게 살피고,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원합니다.

 

p.s.

요즘 팁의 비율이 너무 높습니다.

현실적으로 조정되거나,

팁에 걸맞은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받아서

팁이 아깝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Whatever you wish that others would do to you, do also to them (Mt 7:12)

 

하나님,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세상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30 이-메일 목회 서신)

깨달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은혜 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목사 입장에서는 설교나 예배 후에

“은혜받았습니다”는 말을 들으면 내심 흐뭇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받았다는 것은

종종 감정이 움직였다는 의미로 쓰이곤 합니다.

 

설교를 비롯한 예배 시간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뜨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감정과 연결하다 보니

기복이 심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주관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 동하지 않거나 자기 확증이 되지 않으면,

좋은 말씀이나 예배조차 ‘은혜’로 느끼지 못합니다.

 

2.

저는 ‘은혜받았다’는 표현을

‘깨달음’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말씀에

커다란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예배나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감정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감정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입니다.

때로는 낯설거나 불편한 말씀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큰 깨달음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거듭 나게 하고,

세상을 보는 가치관을 바꿉니다.

새로운 세상에 들어서는 경험입니다.

 

3.

지난주에 제가 존경하던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이라는

여성 구약학자께서 92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90년 중반 신학교 시절, 트리블 교수님의 저서

<공포의 텍스트, Text and Terror>를 처음 읽었습니다.

100쪽 남짓한 작은 책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제가 무심코 지나쳤던

구약 성경의 네 여성(하갈, 다말, 사사기의 어떤 여성, 입다의 딸)에 관한

교수님의 해석에 무릎을 쳤습니다.

 

그동안 저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하찮은 네 명의 여성에게 얼마나 무관심했고

가부장적인 입장에서 또는 기독교 전통 속에서

이들의 아픔을 지나쳤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위해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을 새롭게 뜰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성경 본문 자체에 집중하면서,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가르쳐 준 ‘교과서(text)’였습니다.

 

트리블 교수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책꽂이에서 교수님의 책을 꺼내서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곳곳에 밑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흔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는

깨달음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창 21:19)

 

하나님,

눈을 밝히셔서 깨달음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23 이-메일 목회 서신)

꿈을 쫓는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에 공부했던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될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0).

 

이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이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뛰쳐나갔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베드로조차

곧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마음도 비통해서

잠시 후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면

“이 잔을 내게서 치워달라”고 기도하실 겁니다.

물론, 아버지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시고

말씀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이러한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모습은 눈에 그리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들을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예수님은

미래를 내다보시고 꿈을 꾸시는 비전가(visionary)셨습니다.

 

2.

‘꿈을 꾸는 사람’을 생각하면

창세기의 요셉이 떠오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이 꾼 꿈을 가리켰지만,

성경을 읽는 우리는 믿음의 사람 ‘비전가’ 요셉을 떠올립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잃지 않고, 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형제들의 잘못과 그들을 향한 미움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집트에서의 성공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앞으로 나갔던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3.

꿈을 쫓는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과거에 미련을 갖고

자책하거나 후회하는 것을 자제합니다.

 

아쉬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누군가를 탓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절대 가룟 유다 탓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도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형제들을 통해서 이집트에 팔려 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꿈꾸는 사람은 원망 대신 감사를,

절망 대신 소망을 붙듭니다.

우리도 그 길을 걷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노래하며 하루를 시작합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하나님,

희망을 노래하고

꿈을 쫓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16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