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이 어느덧

신명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이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우리 성경 제목, 신명기(申命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듭’ 펼쳐서 기록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제목 Deuteronomy는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두 번째 율법/Second law”이라는 뜻이니 우리 말 신명기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첫 번째 율법을 주셨고,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번째로 당부하신 말씀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5장에는 출애굽기와 마찬가지로 십계명이 나옵니다.

 

신명기 말씀은 매우 명확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부탁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율법)을 사랑하고 지켜야 합니다.

 

2.

신명기에서 말하는 하나님 말씀은

인과응보(因果應報)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도 100%의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길 꿈꾸면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명기 법전의 정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최고 사랑합니다.

이웃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사랑합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신명기가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선과 악의 심판이 신명기에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악(惡)은 없고 선(善)만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곳에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을 멸절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땅의 악을 진멸하고 완전한 나라를 세우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이스라엘을 향한 기대가 크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버렸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신명기에 이어서 기록된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하)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멸망한 후에

신명기 말씀에 비추어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3.

신명기 말씀이 너무 완벽하고

축복과 저주가 확실해서 읽기가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명기 말씀에 깃든 정신을 생각하면

신명기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두 마음을 품고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선과악의 이분법, 축복과 벌의 이분법,

인과응보 논리는 언제나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신명기 5장 33절)

 

하나님,

오늘 하루 만이라도

완벽한 신앙을 꿈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19 이-메일 목회 서신)

배려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인 모습 때문이랍니다.

예수님은 절대 배타적이지 않으셨는데,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가 배타적이 된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마태복음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천국(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을

애지중지 지키는 유대인들을 위한 ‘배려’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배타적인 것의 반대말을 꼽으라면

“배려”를 선택하겠습니다.

 

예수님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맞지만,

자칫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는 배타적인 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한 끗 차이 같습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필요하지만,

다른 종교나 다른 신들을 악마화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중동 분쟁이 유일신 하나님/알라를 믿는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 간의 싸움인 것이 좋은 예입니다.

각자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이 서로 소통하십니다.

서로 손을 잡고 춤추시는 ‘페리 코레시스’의 하나님이십니다.

매우 색다른 유일신 신앙입니다.

 

2.

엊그제 성경 통독에서 읽은

레위기 마지막 27장에는

하나님께 서원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였다면,

율법이 정한 값을 제단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한창 활동할 연령인 20-60세 남성은 은 오십 세겔,

같은 연령대의 여성은 30세겔,

5-20세의 남성과 여성은 각각 20세겔과 10세겔,

1개월에서 다섯 살까지 남자와 여자아이는

각각 은 다섯 세겔과 삼 세겔입니다.

 

요즘 은 값이 많이 올랐는데,

최근 은 값으로 환산하니 남성 은 오십세겔은 약 1,500불입니다.

예수님은 성인 여성의 서원값인 은 삼십 세겔에 팔리셨지요.

은 삽십 세겔은  노예 한 명에 해당하는 값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정해진 서원값을 지불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나올 수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기도 힘이 버겁습니다.

 

율법은 가난한 백성들을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서원값을 지불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제사장을 찾아가고, 제사장은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해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신약 성경은 물론

구약 성경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

공동체 속에서의 배려가 차고 넘치게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크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 ‘배려’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시작이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

 

 

하나님,

넉넉한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12 이-메일 목회 서신)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AI가 이끌어가는 세상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마주하면서

깜짝 놀라면서도 솔직히 두렵습니다.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편리한 것도 많습니다.

Chatgpt같은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서

한 번도 불평하지 않는 훌륭한 조력자(비서)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10년여

권사님이 하시던 예배 통역을

지난 연말부터 애플 에어팟으로 바꿨습니다.

누구나 에어팟이 제공하는 언어로 들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제자들의 말을 각자의 언어로 들은 것이 생각날 정도입니다.

 

과학 이론이나 기계의 원리를 잘 모르는

저에게는 모든 것이 신비의 세계일 뿐입니다.

 

2.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커다란 아나콘다에 온몸이 칭칭 감긴 아기 코끼리가

뛰어가다가 결국 넘어지는 유튜브 쇼트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표범이 달려와서 아나콘다를 제압하고

코끼리는 달아났습니다.

 

처음에는 진짜인 줄 알았는데,

표범의 생김새나 뛰어가는 모습을 보니 가짜였습니다.

깜짝 같이 속을 뻔했습니다.

 

분별해 내기가 어려울 정도의

진짜 같은 가짜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보이스 피싱은 물론

우리 생활 전반에 가짜가 침투해서

감쪽같이 속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서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개인의 영역을 떠나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가짜가 활동해서

세상을 교란하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인간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인류에 재앙이 닥치는

공상 과학 영화에 나왔던 일들이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과학 문명이 올바른 길로 발전할 수 있는

기준, 규범, 때로는 제재가 필요해 보입니다.

 

3.

가짜가 판치는 세상이 될수록

진리(眞理)를 설파하는 종교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생각, 마음, 하신 일을 따를 때,

길을 잃고, 거짓에 휩싸이고, 죽음의 세력에 지배되는

세상을 지키고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리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매우 큽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진리 가운데 붙들어 주시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목에 매며 마음판에 새기라 (잠언 3:3)

 

하나님,

진리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5 이-메일 목회 서신)

여백

 

좋은 아침입니다.

 

1.

나이가 들다 보니 옛날 일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설교 시간에 제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중학교 때 아주 무서운 미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외모는 물론 말투까지 무서웠습니다.

잘못 보이면 체벌도 가하셨습니다.

 

미술 시간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겁을 먹고 잔뜩 긴장했습니다.

숨을 죽인 채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시키시는 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동양화 국전에

응모하실 정도의 실력자셨습니다.

 

하루는 수묵화 난초를 그리게 하셨습니다.

대충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난초 하나하나 순서대로 그려야 했습니다.

 

숨을 죽이고 난초 몇 가닥을 그리고 났더니,

선생님께서 갑자기 크게 웃으시면서,

난초 그림에는 “여백”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어리둥절했고,

화를 내시지 않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습니다.

 

2.

무서우셨던 미술 선생님이 생각나서

사군자 난초 그림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지금 보니 시골 아이들에게

사군자 기초를 정확히 연습시키셨습니다.

 

난초 줄기가 5개 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큰 화선지가 모두 여백입니다.

저희는 난초를 그리는 데 온 정신을 쏟았지만,

선생님은 우리가 그린 그림 속에서

여백을 먼저 보셨던 것입니다.

 

미술 선생님처럼 우리 조상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종이를 가득 채우기보다 ‘여백’을 남겨 놓았습니다.

수양버들처럼 멋있게 그린 난초도 중요하지만,

난초보다 훨씬 넓은 여백을 보고 즐긴 것입니다.

 

3.

어느덧 1월이 모두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 한 해도 새해 첫 달이 지나간 것처럼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 삶은 더 빠르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누가 당기는 것 같고

뒤에서는 누군가 밀고 있는 느낌으로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쉬면 안 될 것 같은 압박 속에서의 쉴 틈 없는 삶입니다.

‘여백’을 말하는 것이 사치인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새해 첫 달을 마무리하면서

‘여백’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립니다.

난초 다섯 줄기가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다섯 개여서 더 넓어진 여백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2026년의 한 달이 지나갔을 뿐입니다.

남겨진 여백을 이용해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여백도 남겨 놓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 삶은 물론 신앙의 여백을 즐깁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하나님,

여백이 있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29 이-메일 목회 서신)

분별력

좋은 아침입니다.

 

1.

1980년대 미국에 이민 와서

정착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미나리>(2020년)는

초기 이민 선배들의 강인한 삶을 잔잔히 소개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 부모님의 직업이

병아리 감별사입니다.

 

병아리가 부화되자마자

수컷과 암컷을 구분해 내는 일로,

이 분야에는 우리나라가 탁월하답니다.

 

매우 세밀하고 빠른 판단이 요구되는 직업인데,

한국인 특유의 꼼꼼함과 신속함을 따라올

병아리 감별사가 세계에 없는 셈입니다.

 

알을 낳는 암컷 병아리만 남기고

수컷 병아리를 감별해서 제거한다는 점에서

동물학대 논란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영화에 나오듯이

1980년대 이민오신 분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지금도 비교적 높은 소득이 보장된답니다.

 

2.

갓 부화한 병아리의 암수를 구별해 내는 일은

손끝의 섬세한 감각과 순간적인 판단이 필수입니다.

 

병아리를 감별하는 일만큼은 아니지만,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엇이 옳은 지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흐려졌습니다.

자기 생각은 옳고 남의 생각은 틀리다는 식입니다.

내 편은 옳고 남의 편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합니다.

객관적인 기준은 사라지고

각자의 이익과 관심에 맞춰서 판단합니다.

 

세상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튜브에 보면 설교들이 넘쳐나고,

같은 성경 본문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전하는 설교는 나은 편입니다.

신앙이나 성경 해석을 다룬 유튜브들을 보면,

마치 자신만이 옳다는 듯한 제목을 내걸었습니다.

 

알고리즘으로 독자의 관심에 맞춰서

자동적으로 영상을 배열을 해주기에,

자칫 잘못된 것을 계속 듣고 보면서

그릇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일 위험성도 큽니다.

 

3.

이제는 더욱 세심한 분별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옳은 정보와 잘못된 정보,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를

구별(감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내용도

세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해석한 것을

‘성경적’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도 세상의 정보는 물론,

신앙에 관련된 수많은 정보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헷갈려서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이민 선배들이

병아리의 암컷과 수컷으로 세심하게 감별했듯이,

수많은 정보 가운데

올바른 정보를 감별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10)

 

하나님,

분별의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22 이-메일 목회 서신)

닮은꼴

좋은 아침입니다.

 

1.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네”(1932년)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남자로서 아기를 가질 능력을 상실한

주인공의 부인에게 아기가 생겼습니다.

이만저만 고민이 아닙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話者)는

주인공의 친구이자 의사입니다.

의사 친구 역시 아기가 생겼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고민에 휩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이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자신의 긴 발가락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기 아이라는 것입니다.

 

난감한 일인데,

그래도 잘 풀어졌습니다.

누구보다 고민했을 주인공이

어쩌면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2.

아이들을 키우면서

모습은 물론 어떤 행동에서

부모를 닮은 부분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닮으면 흐뭇합니다.

그런데 나쁜 것, 부족한 것, 아쉬운 것을

아이들이 닮았을 때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앞서고

자식을 위한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부부도 오래 살면 서로 닮아간다고 합니다.

말투와 표정도 닮습니다.

생각이나 생활 방식도 닮습니다.

이것도 신기한 경험입니다.

 

부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친한 친구도 서로 닮아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를 닮게 마련입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서로 닮아가면서 인생길을 갑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렘 >은

모양이 닮은 것을 뜻합니다.  닮은’꼴’입니다.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하여튼 하나님을 닮은 것은 분명합니다.

 

억지로 발가락이 닮았다고 꿰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한참을 살면서 서로 닮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여기서 나옵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누구도 무시하거나 차별할 수 없는 근거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그러지고 부서지고 망가졌습니다.

새해 초부터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닮은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

주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15 이-메일 목회 서신)

세 가지 유혹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아침에 읽는 요한 일서는

구십이 넘은 사도 요한의 편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 걸맞게

사도 요한은 “사랑”을 갖고

신앙생활을 풀어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가치관과 분명히 구별된 삶을 살게 된다고 알려줍니다

초대교회 당시 요한 일서를 처음 읽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요일2:16):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자기 몸을 위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으로 대표되는 육신의 정욕,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 안목의 정욕,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을 추구하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2.

생각해 보면,

사도 요한이 말한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의 본성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3:6)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이어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이생의 자랑까지 세 가지 유혹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 섞여 살면서

세 가지 유혹을 떨쳐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세상 것들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3.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이미 아시고

세 가지 유혹을 친히 당하시고 이기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인간의 몸을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계실 때,

마찬가지로 세 가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첫째는, 돌로 떡을 만든 시험(먹음직하고, 육신의 정욕)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라는 시험 (보암직도 하고, 안목의 정욕)

마지막으로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을 다스리게 하겠다는 권력에 대한 시험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되는, 이생의 자랑).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올 한 해를 살아가면서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광야의 예수님,

그리고 사도 요한이 세상의 것들이라고 정의한

세 가지 유혹을 순간순간 마주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려울 수 있어도

우리를 위해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말씀으로/믿음으로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

하나씩 내려놓고 이겨내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그 믿음의 길을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있느니라 (히2:18)

 

하나님,

세상의 대세와 풍조에 휘말리지 않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8 이-메일 목회 서신)

두 가지 기도

Happy New Year!!!

 

1.

말띠 해인 병오년(丙午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성경에서 “말(horse)”이 종종 등장합니다.

힘이 있는 동물로 묘사됩니다.

말이 끄는 전차가 대표적입니다.

구약 성경 스가랴에 나오는 네 가지 색깔의 말들은

요한 계시록에 그대로 등장하는데

세상을 정찰하고 심판하는 군대입니다.

 

‘말을 의지하지 말라’는 시편 말씀도 있습니다.

기마부대가 있는 이집트를 비롯한 제국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권면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과 시합해서 이길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갖출 것을 요청했습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렘12:5)

 

올 한 해

하나님 안에서 말과 경주할 수 있는

믿음과 힘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지난 주일,

예수님의 손과 발 마지막 연속 설교에서

예수님의 가상칠언(架上七言)을 소개했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능한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한 예수님의 가상칠언은

신기하게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속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군병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자기를 해치는 군병들을 위한 기도이기에 더욱 고귀합니다.

이처럼 가상칠언 첫 번째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依託)하십니다: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 동안, 세상에 사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마지막

그러나 가장 고요하고 고귀한 ‘맡김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 평안(peace)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나님께 갈 때,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맡김의 기도>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3.

2026년 한 해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기도를 실천하면서2026년을 살아갑시다.

 

미움, 분노, 원망, 복수하려는 마음 등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용서의 기도’).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맡김의 기도’)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한 해를 살기 원합니다.

 

용서하고 맡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복할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올 한 해도 우리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시작합시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주님

2026년을 주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1 이-메일 목회 서신)

궂은 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두 주 동안 주말마다

비행기를 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비행기가 3시간 이상 지연되고

엔진 고장으로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안전하게 다녀왔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행기에 승객들의 짐을 싣고,

비행 정비와 안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애틀 공항에는 주말마다 비가 내렸는데

빗속에서 그 궂은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뒤쪽에 있어서

차례를 기다려서 내리다 보면,

앞쪽 승객이 앉았던 곳을

청소하는 분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승객들이 남긴 쓰레기를 모으고

좌석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2.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K자형 모습을 띠고 있답니다.

 

위쪽에 있는 계층은 어려움을 모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반면, K자의 아래에 계신 분들은

예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선, 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미국에서 체류 신분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하루하루 살아내야 합니다.

 

K자의 위쪽 가지보다

아래쪽 가지에 속한 분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자기 의견을 말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히면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어쩌면, 공항에서 궂은일을 하고 계신 분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가는

소위 아래에 속한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3.

궂은일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 없다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예상도 못 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분들이야말로

말없이 세상을 바치고 있는 분들입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분들의 귀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도 한 해를 살면서,

궂은일을 도맡아서 한 적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때로는 직장에서도 말없이 궂은일을 담당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빛이 나지도 않고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참빛 식구들께

칭찬과 찬사를 보냅니다.

 

더불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 일에 종사하고 계신 모든 분을 응원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예수님도 3년 공생애를 사시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일을 하셨습니다.

섬김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인자가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하나님,

궂은 일을 하면서

섬김의 자리에 지키신 참빛 식구들을 축복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8이-메일 목회 서신)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여정(journey)

또는 그냥 ‘길’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한때는 동네를 산책하면서

제 앞에 있는 길들을 사진으로 남긴 적도 있습니다.

매일 보는 길인데 새롭게 보일 때가 있고,

갔던 길을 돌아올 때 새롭게 보이는 감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신앙의 길,

우리가 실제로 걷는 길까지

인생은 말 그대로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생로병사, 우여곡절, 희로애락 –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단어들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힘든 것에는 제외되고

좋은 것만 누리는 특혜를 얻고 싶지만,

마음처럼, 기도하는 것처럼 길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타락한 이후의 세계,

땀을 흘려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만물이 타락해서 신음하는 세상은 나름의 자연법이 존재합니다.

 

때때로 자연법의 창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여느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매번 일어나는 일상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예외입니다.

 

그러니 행여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로 자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실수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지요.

그것은 얼른 교정하면 되는데,

우리가 길을 걸으면서 닥치는 대부분의 문제와 어려움은

생각보다 복합적입니다. 인생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2.

주일에 ‘예수님의 발’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밟고 걷는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을 걸어 다니시면서

기쁨과 평화,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힘든 백성들을 만나시고 만져 주시고 치유와 회복을 선물하셨습니다.

부지런히 걸으셨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까지 걸어오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3년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걷습니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즘은 셀폰 앱이 있어서

우리가 걷는 곳을 다 표시해 줍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발길이 샬롬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이길 원합니다.

 

예외 없이 때로는 무작위로 어려움을 겪지만,

그것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함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리만 어려움에서 배제된다면

그야말로 욕심 아닐까요!

 

대신 인생의 희로애락 속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모든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순간순간 내려 주시는 힘, 지혜, 용기를 갖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진지한 발길입니다. 소중한 발길입니다.

 

남은 올 한 해도 예수님을 따라서

뚜벅뚜벅, 때로는 사뿐사뿐,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이 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1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