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네이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토요일 새벽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20여 분 동안

토네이도 경보가 내렸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토네이도라니요!

경고음에 잠이 깬 주민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 전에는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쓰나미 경보기 내린 바 있어서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요일 새벽기도회를 가는데

한 권사님께서 zoom에서

모이자는 제안을 주실 정도로 급박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토네이도가 상륙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80마일에 육박하는 비바람이 불어서

주택가는 물론 Golden Gate Park에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산호세 남쪽의 스캇 밸리에

토네이도가 불어 닥쳐서

나무들이 쓰러지고, 자동차가 뒤집히고

인근 주택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2.

20여 년 전, 인디애나에 있을 때는

토네이도 경보 사이렌도 종종 울리고,

학교 기숙사 전체가 정기적으로

토네이도 대피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사는 지역에서 40여 분 떨어진 곳을

토네이도가 쓸고 간 흔적이

마치 커다란 트랙터가 밟고 지나간 것처럼

들판은 물론 집까지 밟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미나리로 유명한 정이삭 감독이

1996년에 제작된 토네이도 영화의 원조 <트위스터>의 속편으로

<트위스터스>를 제작해서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토네이도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토네이도의 신비를 밝히고, 방지할 방안을 모색하는

대표적인 재난 영화입니다.

 

3.

지금 생각해도 샌프란에 토네이도 경보가 내린 것,

실제로 샌프란에서 70여 마일 떨어진 스캇 밸리에

토네이도가 상륙한 것 등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어서 활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물론 고대 시대에 자연재해를

신의 심판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토네이도급 계엄이 선포되었다니,

국민들에 의해서 6시간 만에 제지가 되었지만,

상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자연재해로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으니

전쟁은 물론 계엄까지

인간이 만드는 재앙은 그쳐야 하고 꼭 막아야 합니다.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가 안전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동네를 넘어서 태평양 건너 조국 대한민국이

다시는 불안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빛 식구들 각자의 삶에 세상의 물질과 힘이 줄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샘물처럼 솟아나길 기도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계 3:16)

 

하나님,

안팎으로 평화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2. 19 이-메일 목회 서신)

요한 계시록 읽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요한 계시록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달에 읽는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종말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을 비롯한 하나님의 천사들과

악한 세력들이 벌이는 천상의 전쟁과 천지개벽의 종말은

요한 계시록을 묵시(apocalypse)라는 문학 장르에 편입시켰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계시록은

앞에 있는 성경을 다 읽고 그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비로소 이해가 가능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전체는 물론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 세계의 종말을 전하고 있으니

내용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2.

요한 계시록은

666과 같은 마지막 때의 환난, 악과 선의 싸움,

마침내 성취될 하나님 나라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일곱 두루마리,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어린양 예수의 승리로 끝나고,

이마에 인을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귀향 가서 환상을 보고 기록한 말씀이기에

계시록에는 상징이 넘칩니다:

악한 세력을 가리키는 바빌론,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는 각종 보석과 유리 바다 등등.

 

상징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계시록을 바라보는 입장도 많이 갈립니다.

계시록은 역시 어려운 말씀입니다.

 

3.

그런데, 요한 계시록은

초대 교회 당시 네로 황제를 비롯한 로마 제국의 박해 한 가운데 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이랍니다.

 

장차 이뤄질 일들을 미리 알려주면서

현재의 고난을 끝까지 견디고 신앙을 지킬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니,

요한 계시록의 실제 의도는 미래가 아닌 현재입니다.

현재를 견디는 힘과 지혜, 소망을 주시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이뤄질 미래를 당겨와서

현재를 사는 데 꼭 필요한 하나님 말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까? 종말은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 등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선의 최후 승리와 최종 구원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공상 영화 같은 이야기들은

사실(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해서 다채롭게 읽고,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에 빠져야 합니다.

 

4.

우리의 삶도 절대 쉽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려움이 늘 상존(常存)합니다.

 

아침마다 계시록 말씀을 읽으면서

어려움에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미래를 상상하면서

소망의 기쁨과 능력을 장착하기를 원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현재의 삶을 단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계시록 말씀을 읽는 자세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롭건만

나는 언제나 무거운 눈꺼풀로 아침을 맞이한다.

피부가 너무 두꺼워 성령의 바람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귀가 어두워 궁창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영광도 듣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나다.

유진 피터슨,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하나님,

계시록 읽기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힘과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2. 12 이-메일 목회 서신)

단순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소망의 인내>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갖고 있던 소망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비롯한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론을 믿었습니다.

핍박과 환난이 거세지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향한 소망이 더 커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에게는 다시 오실 예수님이라는 기대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교회에서 상투적으로 가르치고 말하는

일반적인 교회 용어일 수도 있습니다.

 

2.

초대교회가 갖고 있던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우리에게도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언제든지 기쁨으로 그리도 당당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수시로 삶을 정리 정돈합니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립니다.

거추장스러운 삶을 못 견뎌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수시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루를 사는 것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사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3.

단순한 삶입니다(Be simple).

중요한 것, 서너 가지 우선하여 선정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삶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영성가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때 신앙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었고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연스레, 주어진 삶에 집중하면서

밀도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은 물론 삶의 열매가 풍성했습니다.

 

그렇지만 ‘단조로운 삶’은 경계해야 합니다.

삶이 단조로우면 지루합니다.

무색무취, 특색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듯이

분명한 색깔과 맛, 영향력이 있는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삶입니다.

 

단조로움이 흑백 텔레비전이라면

단순함은 다양하고 선명한 색상의 컬러텔레비전입니다.

대신, 너저분하고 불필요한 채널이 없을 뿐입니다.

 

4.

올해도 마지막 달을 맞이했습니다.

한해 내내 끌고 다니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과감히 가지치기(pruning)하고

가벼운 발길로 새해를 맞기 원합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5장 2절)

 

하나님,

단정한 신앙과 삶을 갖추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2. 5 이-메일 목회 서신)

숨은 축복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은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나무 마루가 있었습니다.

 

옛날집 마루는 신발을 벗어 놓고 올라가는 앞쪽이 트여 있습니다.

가지고 놀던 작은 공이나 구슬 같은 것들이

마루 밑으로 굴러 들어가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마루 밑이 깜깜하니

군대에서 사용하는 군청색 플래시(손전등)를 갖고

마루 밑을 비춰서 공이나 구슬을 찾아내곤 했습니다.

 

마루 밑을 손전등으로 비추면

온갖 쓰레기들과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여기저기를 비추고 자세히 살펴야

마루 밑으로 굴러 들어간 공이며 구슬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예전에 잃어버렸던 제 물건도 덤으로 찾곤 했습니다.

먼지 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순간이었습니다.

 

2.

겉으로는 번드레해도

우리 삶의 뒷면은 꽤 복잡합니다.

마루 밑창처럼 먼지를 비롯한

쓸데없는 것들이 쌓여 있기도 합니다.

 

‘쓸데없는 것들’이 정말 많지요.

마루 밑에 슬쩍 넣어버린 것들도 많구요.

먼지가 쌓여가는 것들입니다.

 

비유가 심한 것 같아 보여도

솔직한 우리 모습입니다.

 

올 한 해도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마루 위만 신경 쓰지 말고

마루 밑도 살피기를 원합니다.

 

3.

그런데요!

제가 잃어버린 구슬이 마루 밑에 숨어 있듯이,

그곳에도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더 사랑하시거든요.

 

우리 삶이 너저분하고 부끄러워도

그곳에 숨겨진 하나님 손길의 흔적이 꼭 들어 있습니다.

숨은 축복들(hidden blessings)입니다.

 

4.

믿음의 잣대로 우리 삶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곳을 빛 되신 예수님으로 비춰서

빛의 자녀에 걸맞은 신앙과 삶을 갖추기를 원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잊고 있었던

숨은 축복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축복이 아닙니다.

마루 위에 올려놓고 세상에 자랑할 축복도 아닙니다.

먼지 속에 숨겨져 있는 보석 같은 축복입니다.

잃어버린 축복이고, 꼭 찾고 싶었던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진리임을,

우리가 믿는 믿음이 생명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우리에게 임했음도

덤으로 그리고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숨겨진 축복을 찾아내는

감사절이 되길 바랍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8-9)

 

하나님,

감사절을 맞아서

잃어버린 진짜 중요한 축복들을 찾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1. 28 이-메일 목회 서신)

아슬아슬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입니다.

재선에 실패했다가 다시 당선된

두 번째 징검다리 대통령입니다.

 

하여튼, 그의 이력과 성품이 보여주듯이

미국 역사에 없던 독특한 대통령임이 틀림없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측근들을 정부 주요 부서의 장관과 기관장에 앉히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파격적인 인사라고 우려 섞인 보도를 내놓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엊그제는

미국에 있는 불법체류자(서류 미비자)들을 추방하는데

주 방위군을 동원할 것이라는 의중도 내비쳤습니다.

실제로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인사를 책임자로 내정했답니다.

 

트럼프 대통령 1기 정부에서도

불법 체류자는 물론 이민자에 대한 규제가 심했습니다.

영주권을 신청하신 분들이 어려움을 겪었고

시민권을 신청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는 일도 생겼습니다.

 

비슷한 일이 재발한다면,

미국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분들께는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2.

자동차 엔진오일을 교체하러

단골 정비소를 찾았더니 손님이 무척 많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좋겠다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부품값이 올해만 세 배가 올랐다고 푸념합니다.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 뽑힌 대통령이

물가를 꼭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옆에 있던 여직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거들었습니다.

 

단골 정비소 주인의 소원이 꼭 이뤄지길 바랍니다.

 

3.

어떤 비영리 단체에서 교회로 이-메일보냈습니다.

체류 신분을 갖추지 못한 채 미국에 거주하는

청년들의 추방을 유예하는 프로그램(DACA)이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폐지되지 않도록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체류신분을 갖추지 못하면 합법적 신분증이 없어서

심지어 비행기를 탈 수 없습니다.

받아주는 대학교만 가야 하고, 취업도 어렵습니다.

 

그나마 DACA(서류미비 청년 추방 유예) 프로그램으로

체류 신분을 연장해 가면서 미국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나마 취소된다면 살길이 막힙니다.

그들의 심정으로 기도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4.

지난 토요일 아침 기도회에서 시편 72편을 읽었습니다.

<솔로몬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의 통치 덕목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공의로 다스리고

무엇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손해를 입지 않도록

공평하게 재판하고 통치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때 산들까지 기뻐하고 풍성한 비를 내려 주시고

바르게 살려는 의인이 형통케 되는

샬롬(평화)이 임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 백성들의 소박한 꿈이 이뤄지고

이 땅에서 안전하게 살기 원하는 청년들의 간절한 소원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아슬아슬’이 ‘휴-안심’으로 바뀌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시편 72:5)

 

하나님,

이 땅의 약한 자들이

꿈과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11. 21 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1.

1998년에 미국에 왔고

그동안 한국을 방문했지만,

가을에 한국을 찾은 것은 26년 만에 처음입니다.

 

올여름 한국이 무척 더웠다고 하는데

추석이 지나고 10월이 가까워지니 많이 선선해졌답니다.

그래도 한낮에는 무척 덥고 습합니다.

 

이번 한국 방문은

저희를 지원한 재단의 안식년 취지에 맞게

친지를 만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보다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을 여행하면서 쉼을 가질 계획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재정이 부족하고,

재정이 충분하면 시간이 부족하다는데

올해 우리 부부에게는 시간과 재정이 동시에 주어진 셈입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2.

9월 한 달 동안

<햇볕 같은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시편의 감사시 네 편을 공부했습니다.

 

봄에 공부한 탄식시에서는 탄식이 기도로 표출되었다면

감사시에서는 감사가 찬양으로 이어졌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지만,

어려움이 닥쳐야 무릎을 꿇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만,

좋은 일이 생길 때 감사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렇게라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음이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3.

성경 공부에서는

세상의 감사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감사를 비교했습니다.

 

세상의 감사는 잘될 때 감사합니다. 행복할 때 감사합니다.

감사가 ‘자기중심’입니다.

나 혼자 좋은 것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합니다.

감사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습니다.

형제자매와 더불어 감사합니다.

 

감사를 말로 표현하고, 잔치를 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감사의 끝에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있음을

시편 감사시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세상의 감사에는 자랑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 감사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내가 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이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올 한 해도 4분의 1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시다.

그 답이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이길 원합니다.

 

우리 삶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편100편 2절)

Serve the Lord with gladness!

Come into his presence with singing (Ps 110:2)

 

 

하나님,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26 이-메일 목회 서신)

함께하심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노년에 지은

감사와 고백의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삶 구비구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기억하고 경험했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2.

지난 주일 예배에서는

익숙했던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부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야훼 하나님은 생소했을 것입니다.

아닌 밤에 홍두깨처럼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약속을 믿고

말씀대로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갔습니다.

 

누구든지 떠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떠남에는 위험과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대의 서사나 이야기에 나타난 영웅들의 삶은

떠남과 귀환, 다시 떠남으로 이뤄집니다.

서양 문학의 근간이 되었다는

호머의 오딧세이아가 대표적입니다.

 

그래도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딧세우스같은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갈데아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브라함도 떠남이 무서웠을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매우 강력한 말씀을 주십니다: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12:3).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입니다.

사물은 쳐부수면 되고 상황을 극복하면 되지만,

사람은 예측불허입니다. 통제할 수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명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끝까지 지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00% 아브라함 편에 서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단,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저주하신다는 말씀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실 것을 최상급으로 강조하신 수사(rhetoric)입니다.

 

4.

우리 모두 외롭습니다. 힘이 듭니다.

관계는 불안정합니다.

믿을 사람도, 믿을 것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가 믿고 바라봐야 할 분은

끝까지 함께 하시고, 우리 편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외면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23:4)

 

하나님,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19 이-메일 목회 서신)

딱 한 가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당시 바빌론은 이집트와 더불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고 있던 세상 제국이었습니다.

신약성경 계시록에서 바빌론을

악을 대표하는 세상 제국으로 표현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다니엘은 이곳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식민지 국가의 젊은이들 가운데

총명한 사람을 데려다가 특별 교육을 시켜서

국제 외교의 특별한 직무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빌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이름이 벨드사살로 바뀝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그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벨드사살은 “왕의 명령을 지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당시 왕은 바빌론 신의 대행자로 여겼으니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바빌론 신과 왕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사람에서

바빌론 왕의 사람으로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언어와 학문을 배웠습니다.

당시 학문은 별을 보고 국가의 미래를 가늠하는 점성술이고,

이것은 모세 율법에서 금하는 일이었습니다(신18:10-14).

 

하나님을 믿던 다니엘이

거의 대부분 제국의 문화에 동화(assimilation)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심적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제국의 권력 안에서 다니엘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2.

그때 다니엘은 한 가지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우상에게 드린 음식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것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정한 <구별점>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다니엘서 6장에 나오지만,

그와 세 친구는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상 제국에서 살아남았고,

어려움도 겪었지만 바빌론 총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제국 한 가운데 드러내는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함께 하신 덕분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3.

우리 각자도

적어도 한 가지, <구별점>을 세우고

그것을 꼭 지키시길 부탁했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구별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21세기 세상 제국에 살아갑니다.

포로로 잡혀 온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삶에 동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칫,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세상에 완전히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꼭 한 가지 구별점을 만듭시다.

그것을 붙들고 지키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을 사시려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단1:8)

 

 

하나님,

뜻을 정한 것을 지켜 나갈 믿음과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12 이-메일 목회 서신)

패럴림픽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파리에서는

장애인들이 겨루는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포털 사이트의 스포츠 란을 즐겨 보는데

얼마 전까지 한국의 모든 매스컴이 올림픽에 집중했습니다.

방송사들은 정규 방송까지 중단하고

올림픽 중계에 열을 올렸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스포츠 포털에서

패럴림픽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딘가 있을 텐데 제 눈에 띄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한 달 전 올림픽 기사로 도배하던 때와 비교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의 경우,

늦은 시간에 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NBC에서

패럴림픽 경기를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내보냅니다.

미국 경기는 생중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패럴림픽은 사람들의 관심 밖입니다.

 

2.

패럴림픽에서는

모든 선수가 승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쪽 팔이 없는 선수가 육상 경기에 등장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농구 경기를 합니다.

모든 종목에 참여한 선수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감동이 밀려옵니다.

 

한국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고

유튜브 쇼트 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열일곱 살 된 데비라는 인도 양궁선수가 눈에 띕니다.

 

선천적으로 팔다리가 짧게 성장하는 병을 앓고 있기에

두 팔이 거의 없습니다.

발가락으로 활을 잡고, 다른 발을 이용해서 화살을 활에 끼웁니다.

손이 없으니 입으로 잡아당겨서 활을 쏩니다.

 

발과 입에 얼마나 큰 힘이 들어갈까요!

그런데 이 선수가 10점을 쏘았습니다.

관중석에서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다고 하지만,

패럴림픽 선수들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메달이나 순위에 상관없이

어떤 선수와 인터뷰해도 각자의 이야기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꿈과 소망을 주는 위인들입니다.

 

3.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우 넓습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맨 앞에 서 있거나

눈에 띄는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목을 받습니다.

 

조금만 부족해도 관심 밖입니다.

올림픽에 비해서 패럴림픽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부족함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진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패럴림픽에 참여한 모든 선수를 응원합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경기에 참여하지 못한

무명의 선수들도 기억합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깊어집니다.

절망이 밀려오는 곳에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힘을 얻습니다.

고맙습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편 41:1)

 

 

하나님,

뒷전에 밀려 있는 분들을 기억하고

마음으로 몸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5 이-메일 목회 서신)

여호야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열왕기하 11-12장에 등장하는

여호야다 제사장과 예루살렘 왕 요아스에 관한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반역을 일으켜서

왕족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손자들을 죽이고 할머니가 왕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바알 신을 섬기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한 살 된 왕자 요아스를 침실에 숨겨서 구해냅니다.

어린 요아스는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성전에는 여호세바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꺼질 뻔했던 다윗 가문의 등불이

여호세바의 기지와 여호야다 제사장의 돌봄으로 보존된 것입니다.

 

요아스 왕자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여호야다 제사장은 백부장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처형합니다.

6년 만에 이방 여인 아달랴는 통치가 끝나고

요아스에 의해서 다윗 왕국이 회복된 뜻깊은 사건입니다.

 

2.

요아스가 겨우 일곱 살에 왕이 되었기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130살까지 살면서 요아스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여호야다의 조언대로

바알 신전으로 변한 성전을 보수하고 회복합니다.

바알 종교의 잔재를 없앱니다.

요아스의 멘토 여호야다 덕분입니다.

 

문제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으면서 발생했습니다.

다른 지도자들이 요아스에게 접근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버리고

가나안 토착신인 아세라 목상을 섬깁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나서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 제국까지 의지하더니

결국 신하들에 의해서 살해됩니다.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왕들의 묘지에 묻히지 못합니다.

왕족이 아니면서도 왕들의 묘지에 묻힌

여호야다 제사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아스의 말년과 죽음이 안타깝습니다.

끝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4.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때,

요아스는 하나님 안에서 행하고 통치했습니다.

나라가 평안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으면서

요아스가 새롭게 의지한 멘토 그룹은

그를 타락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요아스 역시 어려서부터

제사장 여호야다를 의지했기에

혼자서 판단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데 서툴렀을 것입니다.

 

신앙은 물론 인생의 멘토를 잘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따르는 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남의 복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참빛 식구들이 가는 길에

훌륭한 멘토를 만나고

더불어 참되고 선한 길을 걷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한가지,

우리에게 최고의 멘토가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대하 24:2)

 

 

 

하나님,

참빛 식구들께 훌륭한 멘토를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29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