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아침 묵상 본문이 구약성경 민수기입니다.

민수기는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민수기의 히브리어 성경 타이틀이

“광야에서”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모세가 신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정탐꾼으로 뽑아,

40일 동안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 여호수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지도자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부정적인 의견에 동조했고,

결국 40일을 햇수로 계산한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몸소 경험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내내

불평과 불만, 원망을 달고 살았습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직후,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자

“이집트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데리고 나와서 죽게하느냐”고

모세에게 강력히 항의했습니다(출14)

 

두 달도 채 되지 않아서는 물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집트에 있을 때는 고기를 배불리 먹었는데,

굶어 죽게 생겼다고 불평했습니다(출16).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에 있을 때는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 마늘”을 충분히 먹었다면서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에 대해 불평했습니다(민11).

여기서 참외는 멜론 종류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1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40년 광야 생활 끝에 도달한 2세대조차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불평과 원망의 끝판왕이 되었습니다.

 

2.

불평과 불만은 비교해서 비롯됩니다.

과거와 비교해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사정이 나쁘면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자신이 기대한 것과 현실 사이에 차이가 생길 때도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불평과 불만의 지경이 꽤 넓어서

상황과 환경, 친지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불평까지 총망라됩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달고 사는 ‘투덜이’입니다.

 

불평과 투덜거림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감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희망 가운데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헤아릴 때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평과 불만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은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표시임도

꼭 기억하고 잊지 맙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하나님,

오늘 하루 불평없이 감사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8. 이-메일 목회 서신)

품격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정기 검사를 위해서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프란치스코 교황 이야기를 합니다.

 

제 의사는 약간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입니다.

물론 제가 목사인 것을 압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보적인 면은 탐탁지 않지만,

그는 매우 서민적인 훌륭한 분이었다고 칭찬합니다.

개신교 목사에게 은근슬쩍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존경받을 분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2.

지금부터 12년 전입니다.

교황이 연설하는데,

한 아이가 교황의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의치 않고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교황이 한 아기를 안았는데

그 아기가 교황의 모자(“주케토”)를 벗기고 머리를 만졌습니다.

아이가 모자를 벗기고 머리를 만져도

교황은 웃음을 잃지 않고 아이를 안아주었습니다.

 

이 두 개의 그림만 생각해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민적이었습니다. 소박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겠다고 했을 때,

“다리는 세우지 않고 벽만 세우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따끔하게 충고했습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도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제의 길에 접어든 이태리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에서 왔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평화의 기도”를 지으신 분입니다.

교황 중에 처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가졌답니다.

 

3.

교황의 유해가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되고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을 때였습니다.

 

가까이는 남성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데

키가 150cm에 불과한 80대 수녀가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말없이 조문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자넹그로스라는 수녀였습니다.

그는 교황과 수십 년 동안 우정을 쌓아온 분입니다.

소외 계층을 위해서 헌신한 분입니다.

 

교황은 이 조그만 수녀를 향해서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라고 불렀답니다. 작은 거인쯤 됩니다.

자넹그로스 수녀는 교황을 회고하면서

아버지 같고 형제 같고 친구 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계속 앞으로 나가라”고 말하면서 격려했던 눈빛과 격려를 회고했습니다.

 

4.

지도자들에게서

‘품격’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요즘 세상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정한 품격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아니 높은 자리에 있어도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성육신(incarnation)의 신앙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너무 폼을 잡지 않고 이해관계에 민감하지 않고

조금 어리숙해 보여도 일상의 작은 행동과 말투,

오랜 우정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품격을 갖추고 싶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Mat5:9)

 

하나님,

근사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1. 이-메일 목회 서신)

부활의 삶

좋은 아침입니다.

 

1.

부활절이 지났지만,

앞으로 일곱 주간은

교회력에 따른 부활 절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앞으로 50여 일 동안 부활을 삽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오늘날 과학의 잣대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부활이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야 한다고 강요할 것도 아니고,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는 척할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는 신앙의 많은 부분을

주입했고 믿도록 강요했습니다.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괄호)에 넣고

자신에게 확실한 것을 중심으로

신앙을 펼쳐 나가는 것도 현명한 자세입니다.

 

3.

눈에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어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그대로 따라 사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과학 지식을 대입하면서

부활의 문제와 씨름하기보다 부활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부활을 연습하라(Practice Resurrection)”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부활을 연습해야

훗날 하나님 앞에서 부활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과 평안을 주십니다.

죽음의 세력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차분하고 침착합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매일같이 자존심, 자만심,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갑니다.

이 모든 것이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살 때,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가 되고,

역사적인 사실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리가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무엇으로 끊임없이 들어가게 된다.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살아 계시며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 길은 언제나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유진 피터슨 <부활을 살라: Practice Resurrection>-

 

하나님,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24.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길

좋은 아침입니다.

 

1.

3주에 걸쳐서

‘길’에 대한 글을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길은

베드로와 바울이 걸었던

로마의 <아피아 가도>였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가 걷는 인생길이었습니다.

우여곡절을 모두 겪는 인생이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믿음의 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한

“해골(골고다, 갈보리)”이라는 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지은 죄의 무게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는

육신적으로도 많이 지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과 겟세마네 기도,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의 심문, 군인들의 조롱까지

밤새도록 시달리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병정들은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아프리카 북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시켜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도착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2.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순례길이 있답니다.

라틴어 <비아 돌로로사>는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는 것은

기독교의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빌라도 법정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무덤에 묻히신 것을 기념하는
“성묘 교회(Holy Sculpture Church)”까지

600미터 (2000ft)에 달하는 길입니다.

 

비아 돌로로사에는 14개의 스테이션이 있답니다.

앞에서 말한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곳,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

예수님께서 세 번 넘어지셨다고 추정되는 곳들을 지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힌 무덤이 마지막입니다.

각 지점마다 교회가 세워졌거나 기념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를 걷는 순례객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3.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비아 돌로로사”를 생각하고 걷기 원합니다.

 

한 해 동안 지나온 발길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예수님을 초대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모두 지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지난주에 나눴던 조지 베나드(George Bennard) 목사님의

“갈보리산 위에(Old Rugged Cross)”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 우리도 걷겠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So I’ll cherish the old rugged cross,

till my trophies at last I lay down;

I will cling to the old rugged cross,

and exchange it some day for a crown.

 

 

하나님,

낡고 거친 십자가 붙들고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17. 이-메일 목회 서신)

인생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길(道)”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인생도 우리가 걸어가는 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 <할라크>는 “걸어가다”는 뜻인데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도(道)”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행18:26).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걸어야 할 길,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자체가 “길(道)”입니다.

 

2.

우리가 걷는 길이 결코 일정하지 않습니다.

평평한 인생길은 없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곧게 뻗은 길이 있으면

구불구불한 길이 있습니다.

울퉁불퉁한 길이 지나면 쭉 뻗은 아스팔트 길이 나옵니다.

오솔길도 있고, 신작로도 있습니다.

 

한 평생 살면서

우리는 모든 길을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때로는 옆에 펼쳐진 길은 쉽고

자신이 걷는 길은 늘 어려운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떤 길도 쉽지 않습니다.

우여곡절이 없는 길은 없습니다.

 

3.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국의 한 재판관의 사연을 보았습니다.

최고의 위치에 오른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자폐증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잘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폐 아들을 키우면서 겪는 아픔이 너무 컸습니다.

아들이 달려드니 부부의 몸에 상처가 끊이지 않고

네 식구가 외출하면 사람들이 쳐다보고 마음이 편치 않답니다.

그래도 주말이 되면 아들과 등산하는 것이 기쁨이고

그 아들을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아 보였고,

그 분이 걸어온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같아 보였는데,

말못할 아픔을 갖고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발자국만 들어가보면,

한두 시간 깊은 대화를 나눠 보면,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 평탄치 않습니다.

돌멩이를 가슴에 안고 걷는 무거운 발길입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평안하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분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4.

우리의 삶도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 앞에서만 했던 말들을 모으면 한 자루는 될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어진 길을 걸어갑니다.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눈에 그리고 꾸역꾸역 걸어갑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옆에서 걸어가시는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수 1:9)

 

 

하나님,

함께 하시니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10. 이-메일 목회 서신)

아피아 가도

좋은 아침입니다.

 

1.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영토를 넓혀가면서 대로를 만들고

군사, 무역, 치안 등을 관리했습니다.

 

로마가 첫 번째 만든 대로가

아피아 가도(via Appia)입니다.

주전 312년 아피우수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라는 집정관이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아피아 가도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반도 남부에는 늪지대가 있어서

군인들의 이동은 물론 보급품 공급이 힘들었습니다.

이것을 파악한 아피우수가 군사용 대로를 건설한 것입니다.

 

훗날, 이탈리아 남부 부린디시 항구까지 연장되면서

군사는 물론 무역과 일반인의 통행까지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563킬로미터(350마일)에 이르는 로마 제국 최초의 대로(大路)입니다.

 

2.

아피아 가도는

군인들과 화물의 편리한 이동을 위해서 직선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운데를 높여서 배수가 가능했고, 인도와 차도를 구분했습니다.

길 양옆에 사이프러스와 같은 나무를 심는 조경도 잊지 않았습니다.

 

길에는 자갈과 모래를 깔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돌 조각을 아스팔트처럼 넓게 배치했습니다.

악천후가 되면, 로마 제국의 도로들이 진흙탕으로 변하는 것에 비하면

아피아 가도는 포장도로인 셈입니다.

현재도 국도로, 관광객들의 순례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박해와 사역에 지친 베드로가

아피아 가도를 통해서 로마를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가 로마를 두고 떠나면 예수님 자신이 로마에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발길을 돌려서 로마로 향했고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죽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아피아 길 초입에

베드로를 기념하는 쿼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 안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베드로의 성화가 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된 사도 바울 역시

보디올이라는 나폴리 근처에 위치한 항구에 도착해서

아피아 가도를 통해서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1960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전설의 마라톤 영웅 아베베가

금메달을 딴 것도 아피아 가도 코스였습니다.

돌로 만든 길이어서 아스팔트처럼 도로 면이 평평하지 않은데

그곳에서 마라톤 경기를 진행했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3.

작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

잠시 아피아 길을 걸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걸었던 길이라고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2,300년 전,

돌을 깔아서 만든 튼튼할 길입니다.

2천 년 동안 다녔던 발길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길이었습니다.

 

4월, 새달을 맞이했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길로 이어질지

근심과 우려가 큽니다.

 

그래도 우리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임시방편이 아니라,

얄팍한 계획과 행동이 아닌,

깊이가 있고 수많은 발길과 사건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튼튼하고 살아있는 대로이길 원합니다.

 

함께 그 길을 만들어갑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하나님,

튼튼하게 길을 만들고

꿋꿋하게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3. 이-메일 목회 서신)

달걀 대란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토요일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9시 개장에 맞춰서 코스코(Costco)에 갔는데

입구부터 줄이 길게 서 있었습니다.

달걀을 사기 위한 줄이었습니다.

 

참고로, 계란(鷄卵)은 한자어이고

달걀은 순우리말입니다.

둘 다 표준어이고 뜻도 같습니다.

 

몇 달째 달걀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한정 판매를 합니다.

그나마도 늦게 가면

달걀을 팔던 가판대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팬데믹 때 휴지를 사려고 줄을 서고

개인당 숫자를 한정해 주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2.

자료를 찾아보니,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미국의 달걀값은

지난 20여 년 동안 거의 변함이 없었습니다.

계란 열두(dozen) 개들이 한 판에 2불에서 2불 50센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국적으로 달걀값이 두 배 이상 올랐고

캘리포니아의 경우 9불에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달걀값이 치솟은 이유는

작년 말,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8개 주에서 유행한 조류독감 때문입니다.

그동안 2천백만여 마리의 닭을 살(殺)처분했습니다.

예년보다 심각한 조류 인플루엔자 탓에

전염에 노출된 닭들을 미리 처단한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대부분 달걀을 캘리포니아주에서 공급합니다.

운송비는 물론 신선도 면에서 최고의 달걀입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 조류독감이 생기면서

더욱 심각한 달걀 위기를 맞았습니다.

 

며칠 전, 지역 TV뉴스에

병아리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닭을 직접 키워보겠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습니다.

 

3.

달걀 파동이 생긴 또 하나의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사재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을 경험해서인지

사람들이 달걀 사재기에 혈안이 된 것입니다.

가뜩이나 공급이 모자라는데

너도나도 필요 이상으로 달걀을 사가니

달걀값이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달걀이 꼭 필요한 식당을 비롯한

소상공인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봅니다.

다른 물가도 따라서 오르기에 소비자들도 손해입니다.

 

사재기만 하지 않았어도

달걀값이 이렇게까지

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요즘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예전에 없던 일들이 다반사로 생기고

전쟁과 폭력은 끊이지 않고,

그러니 사람들에게 불안한 마음이 큽니다.

 

게다가 달걀 파동까지 시작되니

사람들이 허둥지둥, 안절부절못합니다.

그것이 사재기로 이어졌겠지요.

 

달걀을 부화시키고, 병아리를 키워서 어미 닭을 만드는데

4-5개월 정도 걸린다니

얼마 가지 않아서 달걀 공급이 정상화될 것입니다.

 

우리부터 양보하고

차분하게 기다리십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10)

 

 

하나님,

사랑과 배려가 살아있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3 27 이-메일 목회 서신)

누군가 널 위하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 찬양팀이 선곡해서

함께 부른 찬양 가운데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가 있었습니다.

 

언제 불러도 은혜로운 찬양입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누군가 위해 기도하네

 

본문에서 누군가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부모님, 자녀들,

형제자매, 교회 식구들이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기도가 있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도의 빚을 지며 살고 있습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면

아름답고 강력한 기도의 체인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2.

위에 소개한 찬양 가사를 세심하게 읽으면,

우리가 외롭고 힘들 때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누군가”는 곧

예수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침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

제자들과 훗날 예수님을 따를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17장, 대제사장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외롭고 힘들 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편이 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그 힘으로 우리가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알려줍니다.

 

성령 하나님의 별칭은 보혜사입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위로하시고

상담해 주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심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3.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무심코 하는 말이나,

인사치레가 아니길 바랍니다.

기도해 드리겠다는 약속을 꼭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셀폰 캘린더에 노트해 놓는 것도 약속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오늘도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임한 은혜이고 힘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6)

 

하나님,

기도의 체인을 만들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3 20 이-메일 목회 서신)

나우루 섬

좋은 아침입니다.

 

1.

셀폰으로 전달되는 뉴스 가운데

호주에서 2천 마일 떨어진 남태평양에 있는

나우루(Nauru)라는 섬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나우루는 바티칸시티와 모나코에 이어서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작은 독립 국가입니다.

섬의 면적이 20제곱킬로미터(약 8마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곳에 12,000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 남태평양 원주민입니다.

인구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이고요.

 

나우루는 3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19세기에는 독일 식민지였고, 2차 대전 때는 일본군이 주둔했습니다.

호주 네덜란드 등의 합병 통치를 받다가1968년에 독립하였습니다.

 

나우루는 한 때 세계에서 아랍 에미리트에 이어서

두 번째로 잘 사는 국가였습니다.

인광석으로 덮인 섬이었기에 자원이 고갈된

1980년대까지 최고의 부를 누린 것입니다.

 

국민들은 게을렀습니다.

90% 이상이 비만이고, 절반 가까이 당뇨병을 앓고 있습니다.

기대수명이 65세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나우루 정부는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웠습니다.

페이퍼 컴퍼니를 허용해서 조세 피난처가 되기도 했고

1997년에는 천여 개의 여권을 돈 주고 발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피아들의 자금 세탁 경로가 되고

나우루 여권을 갖고 테러를 일으킨다는 제보도 있어서

그나마도 중단해야 했습니다.

 

2.

CNN보도에 의하면

올해 나우루 정부는 $105,000.-을 내면

나우루 시민권을 발급해 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세계 89개국을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말 그대로

황금 여권(Golden Passport)입니다.

 

이번에 시민권 장사를 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서 나우루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변에 사는 주민들이 이사를 해야 하는데

개인은 물론 정부에 재정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주민들의 이사비용은 물론,

해수면 상승 등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기사를 읽고

나우루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니 사정이 딱합니다.

수십 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에 속했는데

길가에 버려진 고급 승용차들과 녹슨 광산 장비만 뒹굴고 있습니다.

 

부정부패가 심한 관리들이

시민권 장사를 통해서 조달한

자금을 제대로 쓸지도 의문입니다.

테러와 사기 등에 사용될 가능성도 큽니다.

 

3.

나우루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구약성경 전도서가 생각났습니다.

 

모든 것이 헛됩니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취하고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자만에 빠져서 몸집만 불려도 안 되겠습니다.

 

어렵게 쌓아온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하게 관리하고 발전시켜야겠습니다.

 

처음과 끝이 똑같은 신앙과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7:25)

 

 

하나님,

반석 위에 집을 짓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3 13 이-메일 목회 서신)

단짝

좋은 아침입니다.

 

1.

“단짝”

– 꽤 친근한 말입니다.

 

어릴 적에는 거의 항상

단짝 친구를 만들 곤했습니다.

단짝 친구가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행복하고 당당했습니다.

 

십 대 시절에는

단짝 친구(들)와 끝까지 우정을 지키자고

엄숙함에 가까운 약속도 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삶이 다르게 전개되고

물리적으로 헤어지게 되면서

단짝 친구와의 약속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를 단짝 친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탄생했으니,

옆구리(side)를 맞대고 살아가는 단짝 친구입니다.

성경은 돕는 배필(helper)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단짝 친구의 우정을 그릇 사용했습니다.

둘이 함께 연대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자리를 감히 엿보았으니

무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윗과 요나단도 단짝 친구였습니다.

사울 왕의 아들로서 왕국의 후계자였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아버지가 아니라 다윗 편에 섭니다.

피는 진하다는 속담을 삭제해 버린 순간입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아버지를 배신하면서까지

단짝 친구 다윗과 함께 옳은 길을 갔습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우정)이 지극했습니다.

 

3.

지난 주일 설교에서 나눴던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작사 작곡한

대니얼 위틀(Daniel Whittle)과 제임스 맥나라한(James Mcnarahan) 은

1840년생 동갑이었습니다.

 

두 분의 친분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우리 찬송가에 실린 3곡을 작사 작곡한 것을 보면

단짝 친구였을 것 같습니다.

 

위틀은 시(詩)를 쓰고,

맥나라한은 친구가 쓴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자신들의 찬송이 교회에서 불리는 것을 보면서

둘이 있어서 한없이 행복했을 것입니다.

 

홀로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외롭습니다.

인생을 함께 걸어갈 단짝 친구가 있다면,

발걸음이 한결 가벼울 것입니다.

행복할 것입니다. 든든할 것입니다.

 

참빛 식구들이

서로에게 단짝 친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목사로서 갖고 있는 기도 제목이고 바람입니다.

그런 공동체, 장(場)을 만들고 싶답니다. 함께 노력해 봅시다.

 

혹시 안되어도 실망하지는 맙시다.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함께 걸었던

단짝 친구의 이름도 불러보고, 안부도 전해 봅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잠언 13장 20절)

 

 

하나님,

항상 곁에서 동행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3 6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