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나그네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베드로전서 말씀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흩어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특별히 “흩어진 나그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나그네를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베드로가 나그네라는 말을 썼을 때도 같은 의미였을 것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기에

한평생 나그네로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흩어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스포라>입니다.

디아스포라는 씨가 한곳에 모이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씨”라는 의미가 마음에 듭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질 때는

예수의 생명이 들어 있는 복음의 씨를 갖고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각자가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2.

흩어진 나그네의 삶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소수(minority)에 속했습니다.

본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지만,

현실은 로마 제국의 백성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당시의 정부나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막대기가 되어서 선을 이루도록

그들을 지원하고 기도할 것을 부탁하는데,

약자(마이너리티)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에 함몰되거나 세상을 쫓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하게 된

하나님 백성답게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가치관을 과감히 떨치고 “주의 소유된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뭇사람을 존중하고, 열심히 선을 행합니다.

기쁨으로 고난을 대면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주의 공동체를 섬기고

서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제국의 통치 밑에 살지만

제국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백성답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3.

팬데믹을 사는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될 수 없음을 실감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삶에 소홀할 수 없음은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까지 우리의 거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흩어진 나그네의 삶을 멋지고 근사하게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이 뜻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요즘,

나그네 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멋지게 설계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힘냅시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벧전 3:13)

Now who is there to harm you

if you are zealous for what is good?  (1 Pet 3:13)

 

하나님,

흩어진 나그네로

각자의 삶을 사는 참빛 식구들께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17이-메일 목회 서신)

 

 

 

마스크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예일대학에서 발표한 것을 보니

2020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듣고 사용한 말은

“마스크를 쓰세요 wear a mask”였답니다.

 

팬데믹 전까지

일상생활에서는 마스크를 거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마스크 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 얼굴에 마스크를 쓰는 것은

의료, 건설 현장 등 특별한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로 한정되었습니다.

 

실제로,  펜데믹 초기에는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질병관리본부(CDC)의 권고를 무시하고

많은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자신은 물론 이웃을 향한 배려요 보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2.

사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얼굴 일부를 가리거나 멋지게 장식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장수들과 군병들도 보호용으로 마스크를 착용했습니다.

 

우리나라 탈춤에서 보듯이

페스티벌이나 얼굴을 가리고 춤을 추곤 했습니다.

자신의 실체를 가리기 위함이고,

종종 하층민이 권력자들을 풍자하기 위해서 마스크를 쓰고 무대에 섰습니다.

 

이처럼 마스크는 오래전부터

얼굴 가리개 이상으로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3.

성경에도 천으로 얼굴을 가린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40주야를 머물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내려온 모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이 너무 빛이 나서

그의 형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거룩한 모습에 두려워하는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천(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수건을 벗은 것을 보면

모세가 마스크를 착용한 것은 철저히 백성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지금도 미국 일부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꺼린다는 보도를 종종 듣습니다.

모세의 예를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마스크 착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할 겁니다.

 

백신이 보편화되기까지

마스크 착용이 최선의 바이러스 전파 방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4.

마스크가 민 낯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니 편할 때도 있습니다.

마스크가 얼굴을 가리니 화장을 할 필요도 없고

모자 정도를 써주면 외모를 치장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아름다운 미소도 잃어버렸고,

얼굴 표정으로 전하는 소통도 상실했습니다.

 

팬데믹처럼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마스크로 자신을 가리는 것도 정상은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런데,

마스크 착용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일상이 될 것 같습니다.

이웃을 위한 배려요 사랑이니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대신, 우리 자신이 마스크 속에 숨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살지만,

우리의 내면은 훨씬 더 아름다워지고 깊어지길 원합니다.

 

언젠가 마스크를 벗고 만났을 때

우리의 모습이 모세처럼 밝게 빛나길 기대합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34:33)

And when Moses had finished speaking with them,

he put a veil over his face.(Exo 34:33)

 

하나님,

숨김이 일상이 된 요즘이지만,

우리의 내면은 더욱 빛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10 이-메일 목회 서신)

 

 

 

느슨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자고 일어나면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 숫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납니다.

 

경제활동 제한은 물론

통행 금지를 권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 지루한 팬데믹이 언제나 지나갈지요!

 

그런데

요즘 동네를 다니다 보면,

사람들의 경계심이 느슨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가끔은 마스크 없이 거리나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을 봅니다.

코스코를 비롯한 시장에 가도

6 ft 거리 두기를 잘 지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경제를 닫게 되면

소상공인들은 물론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 분명하기에 염려스럽습니다.

 

2.

팬데믹과 같은 전염병이 돌면

자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이웃의 건강을 위해서도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예수님 말씀의 적용입니다.

 

지난번에 나눴던 요한일서 말씀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동안 기독교는 이웃 사랑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이 함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공동체 구원을 무시했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도 무시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주일예배로 모이지 못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습니다.

목숨 걸고 예배드리던 예전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바뀐 예배 형태를 통해서

세상을 향한 기독교인의 또 다른 사랑의 실천을 배웠습니다.

나보다 남을/이웃을/세상을 먼저 생각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억지스럽게(?)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일찍 깨닫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느슨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3.

모든 것이 느슨해지기 쉬운 시간입니다.

 

코로나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우리의 마음가짐,

매주 현장 예배로 드리지 못하면서

솔직히 우리 신앙도 느슨해지는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팬데믹이 갖고 온 새로운 일상에

점차 길들여진 느슨함입니다.

 

이제 2020년의 마지막 달력을 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든 세대가 특별한 해로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세상을 향해서도

느슨해진 것들을 다시 정돈하면서

한 해를 근사하게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p.s. 팬데믹 초반에는 Happy birthday노래를 두 번 부르면서 손을 씻었는데

요즘은 손을 씻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듭니다. 다시 처음/기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 (Philippians 2:5)

 

하나님,

팬데믹의 고난이 얼른 지나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3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절에

Happy Thanksgiving!

 

1.

2020년 추수감사절을 맞았습니다.

팬데믹으로  대부분의 모임이 취소되고

조촐하게 맞는 감사절입니다.

 

그래도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샘솟길 원합니다.

 

2.

올해는

1620년 겨울, 메이플라워를 탄 102명의 청교도들이

미국 동부 플리머스에 도착한 지 400년되는 해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원래 예정했던 뉴욕 허드슨강 하구가 아닌

보스턴 근처 플리머스에 상륙해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는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근처에 살던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이

집을 짓는 법부터,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 법과

사냥까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비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청교도들이

한 해 농사를 마치고 함께 모여서 잔치를 벌인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3.

그런데 4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들의 관점이 아닌

원주민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을

새롭게 조망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엊그제 USA Today/Cape Cod Times에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추수감사절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 대한 기획 기사가 실렸습니다.

 

청교도들이

자신들에게 생존 비법을 알려준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함께 잔치를 벌였다는 것에 대해서,

사실 청교도들은 자신들만의 조촐한 감사절 축제를 했고,

총을 쏘면서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는데

총소리를 들은 원주민들이 무장하고 찾아오면서

협상과 동시에 원주민들이 사냥한 사슴 등으로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화기애애한 축제이기보다

어색한 긴장감 속에서 펼쳐진

일종의 외교적인 만남이었다는 것이지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신대륙을 찾아온 청교도들이

자신들을 해칠 수 있다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청교도들도 원주민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 신사협정을 맺지만, 청교도들에게 유리한 조문들이었습니다.

 

결국, 원주민들은

총으로 무장한 청교도들에게 제압당하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깁니다.

 

그러니,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오늘이

이 땅에서 원래 살고 있던 네이티브 어메리칸들 입장에서는

통곡의 날(the day of mourning)이 된 것입니다.

 

4.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지 40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제정한 지 157년,

그동안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축제의 날로 흥겹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마음 한쪽에

추수 감사절을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으로 내어쫓긴 비극이  시작된 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 명암이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 혜택을 입으면, 누군가 손해를 입고

누군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하고

세상일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감사절을 보내면서,

올 한 해 동안, 행여나 나(우리)로 인해서 슬퍼하거나 손해 본 이웃은 없는지

내가 기뻐하고 감사할 때, 같은 상황에서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은 없는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를 세심하게 살피고, 매사를 속단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22:2)

The rich and the poor meet together; the LORD is the maker of them all. (Prov 22:2)

 

하나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어그러진 세상을 품고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1. 26이-메일 목회 서신)

 

 

 

 

 

 

다니엘

좋은 아침입니다.

 

1.

매일 아침

구약성경의 다니엘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6장)는 바빌론에 포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에 대한 말씀입니다.

후반부(7-12장)은 장차 일어날 예언으로

신약의 요한 계시록에 맞먹는 구약의 묵시입니다.

 

다니엘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1차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단순히 포로로 잡혀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중에서 명철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바빌론식 교육을 시킨 후에

제국 바빌론을 대표하는 현지 출신 지도자

또는 왕의 자문관으로 채용하기 위해서 선발된 것입니다.

 

2.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빌론 왕궁에서

바빌론의 학문과 왕을 보필하는데 필요한 과목을 수강하고

이름도 바빌론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다니엘의  히브리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라는 뜻이었는데

그만 <벨드사살>로 바뀝니다.

바빌론의 신 ‘벨’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포로 신분이었기에 다니엘은 꼼짝없이

바빌론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한 가지 뜻을 정합니다.

이름도 바뀌고,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바빌론 학문과 정책을 배워야 하지만

바빌론 신들에게 바쳤던 음식만은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국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다니엘이 지키려는 거룩, 구별점이었습니다.

음식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마침 좋은 상관을 만나서 다니엘은 채소만 먹으면서

수련 기간을 모두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꿈을 해몽하는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3.

다니엘은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알아내고 해석하면서

왕을 보좌하는 높은 관리에 임명됩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하는 일은

이방 나라, 제국의 일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백성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일과 별개의 일을 해야 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어떤 면에서 제국 바빌론과 흡사해서

신앙과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무조건 세상일을 거절할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은 기꺼이 수용(assimilation)하고

지켜야할 신앙의 원칙은 고수(separation)하려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처음에 뜻을 정해서 우상의 음식을 먹지 않은 다니엘이

바빌론의 높은 관리에 올랐지만,

하루 세 번 고향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성취한 업적을 두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앞에서 하나님을 언급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도 하나님을 높이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제국 한가운데서

포로 다니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삶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4.

아침마다 함께 읽어나갈

다니엘서 말씀이 기대됩니다.

 

비록 짧은 분량의 나눔이지만,

제국과 같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께 위로와 도전이 되길 기대합니다.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단 2:47)

The king answered and said to Daniel,

“Truly, your God is God of gods and Lord of kings”(Dan 2:47)

 

 

하나님,

오늘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하시고

다니엘에게 주신 지혜와 용기, 신앙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1. 19 이-메일 목회 서신)

 

 

 

 

편견

좋은 아침입니다.

 

1.

영국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813년에 출판된 소설인데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당시 영국은 계층 간의 구별은 물론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였습니다.

결혼도 가문 간의 연합이었지, 당사자의 의견은 무시되었습니다.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부의 차이를 극복해서

남녀가 결혼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 주인공 다아시는 부유한 집안 출신에 외모도 출중한 청년입니다.

여자 주인공 베넷은 서민에 속했습니다.

 

서민 출신인 여자 주인공은

부자 청년 다아시가 “오만(pride)”하다는 “편견(prejudice)”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아시는 오만하게 행동했습니다.

다아시가 특별히 오만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어도

그의 가문은 물론 외모와 외적인 조건이 그를 오만하게 보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은

자신의 오만함과 서로를 향한 편견을 극복하면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성공합니다.

 

부자 청년과 마음씨 착한 가난한 여성의 결혼 –

뻔한 주제인데,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치밀한 구성으로

당시의 사회상은 물론 인간 내면을 깊이 살피고 있습니다.

 

2.

오만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오만을 해결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겸손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도 오만을 막는 길입니다.

 

편견은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입니다.

오만보다 조심할 것은 “편견”입니다.

편견의 결과가 생각보다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만과 편견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부잣집 남자는 오만하다는 편견을 떨쳐버린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

자신의 오만함을 반성하고 은근히 선행을 펼친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

이들이 결혼에 이른 비결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한 열매였습니다.

 

우리 모두 “편견”을 갖고 살아갑니다.

 

분명히 잘못된 근거에서 비롯된 선입견인데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는 것들입니다.

 

편견은 떨어 내야 할 불필요한 선입견입니다.

편견을 갖고 사는 것도 오만입니다.

 

3.

요즘 미국의 화두는

흑백갈등으로 대표되는 인종차별(racism)입니다.

 

어떤 작가는 인종차별의 시작이

편견이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편견이 차별(discrimination)로,

그 끝에 인종차별이라는 결과물이 생산되었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차별로 발전하면 안 됩니다.

그 결과는 인종차별과 같은 추악한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는 사랑, 배려,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두 달여 살펴본 요한일서에서도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길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오만하지 않고

사랑은 편견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기 원합니다.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요일 4:12)

No one has ever seen God; if we love one another, God abides in us  (1 John 4:12)

 

하나님,

행여나 편견을 갖고 이웃을 대한 적이 있다면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 원하시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1. 12이-메일 목회 서신)

 

 

화평

좋은 아침입니다.

 

1.

전 세계의 관심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 쏠려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처럼 특별한 선거도 없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예상치 못한 재난 속에서

치러진 선거입니다.

많은 사람이 우편투표를 하다 보니

개표도 늦어지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선거 당일 자정쯤 되면

승패가 결정됩니다.

 

패한 후보는

선거 결과에 승복을 선언하고

상대방 후보에게 축하 전화를 겁니다.

 

승리한 후보는

국민들 앞에서 당선 소감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이번 대통령선거는

여러 가지 변수도 있고, 말 그대로 박빙의 승부였기에

이틀이 지나도록 당락이 결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2.

선거 결과를 표시한 미국 지도를 보니

파란색과 빨간색이 확연히 갈립니다.

미국의 지역갈등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거기에 인종, 계층, 종교, 심지어 성별까지

갈등의 골이 매우 깊습니다.

 

선거를 치른 지도자들은

이제부터 정쟁을 그치고 마음을 합쳐서

말 그대로 미국이 하나 되는데 나서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더 이상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안 됩니다.

팬데믹으로 서민들의 삶이 가뜩이나 힘겨운데

선거로 인해서 혼란이 찾아온다면 손해가 너무 큽니다.

 

더 늦기 전에

최소한이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평화와 일치를 도모해야 합니다.

 

3.

당선된 후보는

자신을 반대한 절반의 국민을 품고 감싸면서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길 바랍니다.

 

정치의 속성 대로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지만,

갈등/격차해소, 평화, 환경과 같은 공동의 문제를 놓고 초당적으로 협력해서

우리 같은 이민자들과 후손들은 물론

모든 이에게 행복한 미국을 만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땅에 주님의 평화가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Mt 5:9)

 

하나님,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물론 온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1. 5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과 사랑

좋은 아침입니다.

 

1.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에 대한 말씀을 배우면서

하나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함임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행하는 것이고

그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뢰의 아들이라는 사도 요한의 별명대로

‘사랑은 행함’이라는 그의 외침이

천둥번개처럼 우리 마음에 울려 퍼집니다.

 

2.

지난 주일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4:18)

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본문의 두려움은

우리의 삶이나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세상 종말(또는 개인의 종말)의 순간 느끼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구원의 요건으로 믿음과

동시에 ‘사랑’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날에

창세 전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길은

가장 작은 형제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며

그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평생 요절로 삼자고 제안했습니다: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 (마태 25:40)

 

3.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도

마지막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 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때 꼭 필요한 것이

우리 가운데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행했던 사랑 여부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실천 여부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어도

내 욕심과 야망을 채우면서 이기적으로 살고

베풀고 나누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다면

훗날 두려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4.

요한일서 4장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욕심껏 사는 것의 끝을 생각하며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 필수적입니다.

그때,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가장 작은 사람, 가장 약한 자에게

주님의 사랑을 아낌없이 행하기 원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요일4:17)

By this is love perfected with us,

so that we may have confidence for the day of judgment (1John 4:17)

 

하나님,

담대함을 가질 정도로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29이-메일 목회 서신)

 

 

홀로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1.

팬데믹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밖에 나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닙니다.

마스크 없이는 공공건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팬데믹 전, 특히 미국에서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도 악수할 수 없습니다.

악수는 커녕 6피트 거리를 두고 얘기해야 합니다.

자칫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질까 염려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변화는

교회에서 예배로 모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대면예배 대신

영상으로 예배한 지 7개월이 넘었습니다.

 

팬데믹 전에는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필수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보수적인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중요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코로나바이러스가

길게는 수천 년 이어오던 주일 예배 개념을

단숨에 바꿔 놓았습니다.

 

이제는 유튜브 또는 zoom으로 드리는

예배와 모임이 일상화되었고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2.

팬데믹과 동시에

신앙생활의 모습이 바뀌다 보니

개인과 가정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졌습니다.

 

그동안 주일 예배 참석에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면,

이제는 교회에 오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관리하고, 세워가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 묻어가던 신앙에서

흩어진 자리에서 스스로 홀로서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그동안 안일했던 신앙을 되돌아보는 기회도 됩니다.

 

대신, 신앙의 홀로서기에 실패한다면

그동안 세워놓은 신앙의 집이 흔들흔들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가정의 역할도 중요해졌습니다.

2500여년 동안 각지에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가정교육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했듯이

우리도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에 힘을 써야 할 때가 왔습니다.

 

3.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심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도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속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자신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역사를 설계하며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회복을 꿈꾸었 듯이

우리도 팬데믹으로 집에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과거에 당연하게 여겼던 신앙을 되짚어 보고,

진정한 신앙,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팬데믹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답답함에 손발이 꽁꽁 묶인 듯 하지만,

팬데믹이 깨우치는 교훈과 팬데믹 기간에만 누리는 선물을 통해서

우리 신앙이 더 깊어지고, 어디에 있든지 흔들리지 않는

홀로서기 신앙을 갖추기 원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32:24)

And Jacob was left alone.

And a man wrestled with him until the breaking of the day. (Gen 32:24)

 

하나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홀로 설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22이-메일 목회 서신)

 

 

 

 

아가페 사랑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에서 사랑장을 찾으라면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요즘 주일에 살펴보는 요한일서 4장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알려줍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의 시작점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사랑을 믿음과 연결시켰습니다.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말하기 쉬운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가짜가 판을 치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2.

사도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아가페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감정, 욕심, 서로 탐닉하는 에로스 사랑이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서 보내시고

화목 제물로 내어주신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만큼 숭고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길 부탁하십니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라는 책에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음은

특권이라고 강조합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전유물인데

남녀노소, 빈부 귀천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전유물인 아가페 사랑을 나눠 주시고

그 사랑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그 사람도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순간

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최고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16)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고,

그것을 세상에 나누기 원합니다.

 

비록 우리 사랑의 지경이 넓지 않고

사랑의 분량도 크지 않고

자랑할 만한 사랑도 아니지만,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받은

<아가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할 때나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아가페> 사랑임을 꼭 기억합시다.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1:5)

The aim of our charge is love that issues

from a pure heart and a good conscience and a sincere faith. (1Tim 1:5)

 

하나님,

<아가페>사랑을 나눌 특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15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