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연말부터 미국 정부의 모든 예산 집행이 닫혀있습니다(shut-down).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겠다는 대통령과

그것은 재정의 낭비라는 의회의 대치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닙니다.

국경을 넘어온 사람 중에는

미국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넘어올 정도라면 보통 사람들이 아니니 위험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넓고 긴 국경에 벽을 쌓는다고 밀입국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국경을 넘은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이 감당해야 할 몫일 수 있습니다.

미국이 돌봐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돌봄에는 부작용도 있고, 희생도 따르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돌봄입니다.

 

2.

헨리 나우웬은 <돌봄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

이 정체성을 주장할수록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이 있다.

사랑의 창조주가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려는 관점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나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경청, 심방, 독서, 글쓰기 등을 통해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을 섬긴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험에 동참해야 했고, 그중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돌보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 쉬운 일을 해볼까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깨달은 게 있다.

쉬운 일을 욕망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내 헌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봄의 영성, 46-47쪽)

3.

헨리 나우웬의 고백대로

돌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 <돌보는 교회>라는 주제로 살게 됩니다.

돌봄을 받으려고 하면 돌볼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돌봄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값 주고 사신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와 이웃, 그리고 세상을 돌보기 원합니다.

 

돌볼 수 있는 믿음, 마음, 손과 발과 능력이 있음에 감사하면서…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Be merciful, even as your Father is merciful. (Luke 6:36)

 

하나님 아버지

돌봄을 받고 돌봄을 기대하기보다

돌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10이-메일 목회 서신)

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새해에 보내는 첫 번째 목요서신입니다.

올해도 서신을 함께 나누면서

신앙과 삶이 함께 가고,

우리 자신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저로서는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늘 감사하답니다.^^

 

엊그제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 판에

감동적인 미담(美談)이 실렸습니다.

 

40년 전 각각 미국에 입양이 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각자의 건강정보를 위해서

DNA 테스트를 했고 DNA가 일치하는 자매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자매는

조지아주에서 불과 40분 거리에서 10년동안 살고 있었습니다.

 

두 자매는 생후 5개월과 18개월이 되었을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생모가 공장에서 일하던 미혼모였는데 양육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입양한 가정에서 잘 자라서

신기하게도 자매 모두 프리스쿨 교사가 되었습니다.

 

40년 만에 만난 두 자매는 가족들의 축하를 받았고

서로 지난 얘기를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낸 후에

어쩌면 생전에 계실 생모를 찾을 계획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의기투합해서 파티 관련 사업도 시작했답니다.

불혹이 넘어서 재회한 자매가

둘이 있어서 그들의 인생이 더욱 행복하길 기사를 읽으며 기도했습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1970-80년대에 미국으로 보내진 입양아가 11만 명이 넘는다니 엄청난 숫자입니다.

기사에 나온 자매들처럼 함께 입양된 형제자매들끼리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2.

인생에서 만남만큼 귀한 것도 없습니다.

만남 속에는 헤어짐이 숨겨져 있다지만

헤어짐도 만남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예수님과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족은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우리 교회에서의 신앙생활도 만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웃과의 만남은 물론 우리는 올 한해 누군가를 계속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정기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실 것도 부탁드립니다.

 

저는 아침에 보내드리는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과 만나겠습니다.

일주일마다 목요서신을 통한 만남도 기대합니다.

 

올 한해 참빛 식구들에게 만남의 복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들을 만나길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동료를 만나고, 조력자들을 만나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기대하시는 만남도 꼭 이뤄지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만남, 신앙의 동역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17)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seek me diligently find me.(Prov 8:17)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참빛 식구들의 모든 만남을 예비하시고

주님께서 참빛 식구들을 순간순간 만나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3이-메일 목회 서신)

마무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작은 일에 충성>이었고

올 초에 교회 표어와 관련한 목요 서신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 앞 유리에 돌이 날라와서 구멍이 났을 때

그것을 정성껏 보수해 주신 분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세상에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계심을 소개했습니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분은 말을 못 하는 분이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연초에 보냈던 메일 가운데 일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작은 일에 불과할 겁니다.

그러니 매사에 충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실제로 “작은 일”도 있습니다.

사소하고 스쳐 지나가기 쉬운 일입니다.

올 한해는 그런 일도 챙겨 보고 싶습니다.

 

유리창의 아주 작은 흠집을 보수해주셨듯이

세상에는 작은 일을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수행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존경과 박수를 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우리 교회 표어대로

올 한해, 아니 오늘 하루

우리 주변의 작은 일에 성실하고

작은 자들을 챙기고

작은 일을 하시는 분들께 감사하기 원합니다.

 

2.

올해가 나흘 남았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이웃과 세상 속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였는지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보여드릴 수 있을지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요?

 

물론, 자신 있게 “예스/yes”라고 답할 정도의 강심장은 우리 가운데 없으십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은혜가 필요하고

올 한해도 은혜로 살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재빠르게 은혜 속으로 숨거나, 무작정 은혜를 갖다 대지 말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과연 “작은 일에 충성”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3.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께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찮아 보이는 일을 정성껏 하시는 분들입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시는 분들입니다.

 

이처럼 작은 일에 충성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일정하게 유지될 겁니다..

 

더불어, 작은 자 하나를 사랑하시고

창조주 입장에서 보면 정말 하찮은 일까지 챙기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한 해를 마무리합시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 25:21)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over a little;

I will set you over much. Enter into the joy of your master. (Mat 25:21)

 

하나님 아버지

작은 일에 충성하며 한 해를 살아온

참빛 식구들께 힘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2. 27이-메일 목회 서신)

일상의 보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얼마 전에 소천하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몬태나 출신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정육점을 하셨습니다.

피터슨 목사님은 어려서부터 정육점에 나가서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목사님은 종종 그의 저서에서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억을 신앙과 연결시킵니다.

 

정육점에서 입었던 앞치마를 보면서

성경의 인물인 사무엘이 입었던 에봇(제사장 복장)을 떠올렸습니다.

성소에서 자랐던 어린 사무엘은 키가 자라면서 에봇을 교체해야 했는데

자신도 자라면서 정육점의 앞치마가 점점 커졌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육점을 사무엘이 자랐던 성소와 비교한 것도 특별했습니다.

 

“칼은 자기 나름의 의지가 있어” –

정육점 직원이 피터슨 목사님께 해준 말입니다.

실수해서 손을 베면,  “네가 칼을 몰랐다”며 주인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칼도 함부로 사용하지 말고

용도에 따라서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고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렇게나 고기를 자르거나 손질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의 종류와 부위에 맞게 다뤄야 합니다.

 

피터슨 목사님의 아버지는 고기를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다루는 직원을 “해커”라고 불렀답니다.

칼은 물론 고기까지 존중하는 것이 정육점의 관습이었습니다.

 

정육점을 찾는 손님들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정육점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가 아버지의 고객입니다.

아버지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손님을 존중하셨습니다.

이름을 부르면서 맞이하셨기에

정육점에 들어오는 모든 고객은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정육점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몸을 파는 여성들이 거주하는 곳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여성들이 고기를 사러 정육점에 들어오면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면서 부자 고객과 똑같이 맞이하셨답니다.

 

고기를 구입한다는 면에서

정육점을 찾는 사람들은 차별이 없었고

아버지 역시 모든 사람을 존중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거나 또는 누구를 대하든지

우리 고집 또는 생각대로 하지 말고

상대에 맞게 또는 주어진 조건에 맞게 처신해야 하는데

그것을 피터슨 목사님은 “겸손”이라고 불렀습니다.

 

2.

늘 그렇듯이

피터슨 목사님의 글쓰기는 창의적이고

자잘한 부분까지 공감을 일으킵니다.

 

어릴 적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자신의 신앙, 사람을 대하는 태도, 목회자의 덕목으로

발전시키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피터슨 목사님에 비하면

우리는 일상의 삶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 대충대충 넘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상 속에 보석을 숨겨놓으셨건만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리 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보석을 숨겨놓으신 하나님께서 꽤- 섭섭하시겠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존재합니다.

우리의 숨결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모든 장소, 우리가 사는 모든 시간도

은혜요 그 속에 숨겨진 보물들이 있습니다.

 

올해가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삶 속에 숨겨진 보물들을 한 개씩 한 개씩 찾아 세어봅시다.

특히, 가족과 이웃 속에 숨겨진 보물들에 주목합시다.

감사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시편119:37)

Turn my eyes from looking at worthless things; and give me life in your ways (Ps 119:37)

 

하나님 아버지

일상 속의 보물을 찾을 수 있는

세심한 안목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2. 20이-메일 목회 서신)

열정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화요일에는

구글(Google) CEO가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서

자신들이 정치에 개입하거나 편파적인 일을 한적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구글 CEO는 인도 출신입니다.

인도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일을 시작해서

20여년 만에 구글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인도 출신의 기업가들이 꽤 많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도 인도 출신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왔지만, 영어의 이점이 있기에

그 어렵다는 최고경영자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나봅니다.

 

흥미를 갖고 이분들의 이력을 살펴보았습니다.

단지, 영어가 자유롭다는 것만이 장점은 아니었습니다.

꽤 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탁월한 능력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우리 교회는 세상에서의 소위 출세/성공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제가 지향하는 목회 방향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으로/큰 목표를 갖고 성공하라는 얘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출세보다는 섬김과 희생,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인내와 성실을 강조합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인도출신 경영자들을 보면서

솔직히 약간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으면서,

하나님 안에서 꿈을 갖고 시작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세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첫째는 “열정(passion)”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그 안에서 보람을 느끼는 과정입니다.

 

둘째는 “노력(perspiration)”입니다.

아무리 열정이 충만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올해 표어 대로 작은 일까지 충성하는 태도가 필요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감(inspiration)”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을 수단 삼아서 내가 출세한다면

그것 역시 “나 중심”이니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열정과 노력을

하나님 뜻에 맞춰 조율하는데 필요한 영감입니다.

 

3.

우리의 목표가 출세나 성공은 아닙니다.

 

우리는 매사에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무엇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최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 노력, 영감,

우리 삶을 향한 열정, 노력, 영감

허물어진 세상을 다시 세우려는 열정, 노력, 영감!

그 안에서 주의 뜻을 발견하고 최대치로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길 원합니다.

 

우리 자신을 살피며

한 해를 뜻 깊게 마무리합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들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present y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Rom 12:1)

 

하나님 아버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참빛 식구들의 삶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2. 13이-메일 목회 서신)

크리스마스 트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20년 전 한국에 있을 때를 회상하면

이맘때가 되면 캐럴이 거리에 울려 퍼지고

흰 눈도 내리면서 연말연시 기분이 났는데

미국은 땅이 넓어서인지 늘 비슷비슷한 일상입니다.

 

우리 교회도 12월 첫 주가 되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것이 최고의 변화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 가정의 80% 정도가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한답니다.

 

예전에는 거의 생나무 트리를 사용했지만

요즘은 인조 트리도 많이 사용합니다.

초기 비용은 비싸지만

매년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국에서 수입한 플라스틱 제품이 대부분이어서

환경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생나무를 훼손하면서

일 년에 한 달 트리를 세우는 것이 자연 훼손아니냐는 의문도 제기합니다.

 

생나무 트리를 지지하는 분들은

서부의 오레곤이나 동부의 노스캐롤라이나의 대형 트리 농장에서 재배된 것으로

트리를 뽑고 나면 다시 심는 식이고,

침엽수인 트리는 아무 곳이나 잘 자라서 쉬는 땅을 이용하는 이점이 있다고 반박합니다.

 

2.

트리 하나를 놓고도 이렇게 사람들의 견해가 갈리니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살펴보는 로마서 3장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 생각을 갖고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희생하시면서

화평케 하는 자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역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많이 갈라져 있습니다.

추구하는 삶의 목표, 생각하는 관점,

세상을 보는 견해가 흑과 백처럼 갈라졌습니다.

화평케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상실한 것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가 임하길 바랍니다.

 

자잘한 것에는 의견의 차이가 생겨도

크고 중요한 이슈에 마음을 합치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인조 트리가 좋을까요? 생나무 트리가 좋을까요?

아이들과 함께 트리를 파는 야드에 가서 트리를 골라와서

장식하는 것을 생각하면 생나무가 좋을 겁니다. 향도 느낄 수 있구요^^

비용이나 재활용 측면에서는 인조도 괜찮겠지요.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자잘한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로마 3:25)

God put forward as a propitiation by his blood, to be received by faith. (Rom 3:25)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를 주시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2. 6이-메일 목회 서신)

지킴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창세기를 읽고 있는데

어제는 창세기 4장의 가인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생명의 기운을 갖고 태어난 가인(“생명”)이

허무하게도 동생 아벨(“하벨/허무함”)을 죽였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서 에덴에서 쫓겨났다면 (창 3장)

가인이 아벨을 죽이므로

사람 사이 (특히, 가족)의 관계를 깼고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아우를 지켜줘야 할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천연덕스럽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쫓아내시며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mark)를 주셔서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거역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배우고 있듯이, 이 사랑이 결국 우리에게도 임했지요!

 

가인이 이렇게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을 놓고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내면서 시작했습니다.

시기와 질투, 하나님을 향한 원망, 자존심, 분노 등등이 작동한 것입니다.

 

가인의 불편한 심기를 아신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죄가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고 너를 원하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고 부탁하고 경고하셨건만

훗날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그랬듯이

가인 역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로 나가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가인이 한 질문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래, 너는 아우를 지켜 주어야 했어”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키는 자(keeper)”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에덴을 지키는 자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자였습니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자고 유혹했을 때 이브를 지켜줘야 했습니다.

형 가인 역시 동생 아벨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동생 아벨의 생명을 빼앗은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청지기(steward)”라고 부릅니다.

 

매 주일 한마음과 한 목소리로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각 인생은 물론 세상의 주인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인생을 살고

가족과 공동체는 물론 이웃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까지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 올 한 해도 한 달 남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았습니다.

작은 일까지 충성하는 청지기로 열한 달을 살았습니다.

 

이제 남은 한 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의롭고 선하게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기 원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반문하지 말고

아우를 지키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각자의 삶도 아름답게 관리하고

가족과 공동체도 아름답게 세우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세상까지 지키고 세우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행여나 지킬 것을 소홀히 했거나

쓸데없는 자존심과 시기와 질투로 죄를 다스리지 못한 채

넘어지고 무너진 영역이 있다면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복구하면서

올 한 해 깔끔하게 마무리합시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 4:15)

And the LORD put a mark on Cain, lest any who found him should attack him.(Gen 5:18)

 

하나님 아버지,

서로 지켜주고 세워주는

참빛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29이-메일 목회 서신)

해피 땡스기빙

Happy Thanksgiving!!!

 

1.

단비와 함께 맞는

2018년 추수 감사절입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다음 주에도 비소식이 있으니

산불도 꺼지고, 덕분에 공기도 좋아지고,

우리 동네 산천초목이 푸르게 변할 것 같습니다.

 

여름철 교회 앞 정원(?)에 물을 줄 때마다

제가 아무리 정성껏 물을 줘도

아침마다 내리는 이슬과 밤새 내린 보슬비를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곤 하는데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추수감사절과 구약의 절기 (특히 가을의 초막절)을 연결해 보았지만

추수감사절 자체는 꽤 미국적인 절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추수감사절 전주에 늘 있는 교회에서의 터키를 곁들인 만찬,

추수감사절에 가족 친지들과 함께 나누는 만찬과 대화,

그리고 추수감사절 다음날(요즘은 상술이 발달해서 당일 저녁부터 시작하는데)

Black Friday shopping 등등 – 나름 추수감사절을 꽤 즐기고 있습니다.

 

원래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코스코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팔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이번 주부터 팔고 있어서 서둘러 트리 하나를 사다가 교회에 세워놓았습니다.

이번 주일에 청년들과 주일학교 아이들이 함께 트리를 장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2.

올해 우리 교회는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표어로 한 해를 살았습니다.

 

지나치기 쉬운 작은 일에도 마음을 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듣기 원했습니다.

 

미국 생활이 그렇듯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시라도 한눈을 팔면 금세 자리가 나는 것이 나그네로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 듯이,

한 해를 지켜주시고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곁에서 한 길을 걸어간 가족, 교우, 친지들께

무엇보다 한 해를 꿋꿋하게 살아준 자신에게 감사하기 원합니다.

 

찬송가 429장 가사 대로

받은 복을 세어보고, 그 복에 이름을 붙이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원합니다.

 

조금 부족하고 아쉬워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으니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감사절을 맞는 것입니다.

 

산불로 인해서 집과 가족을 잃은 이웃들과

명절이기에 더욱 마음이 힘들고 외로운 분들도 마음 한 켠에 두고

겸손한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는 것도 기독교인의 미덕입니다.

 

복된 추수감사절 맞으십시오

Happy Thanksgiving!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for you.(1thes 5:18)

 

하나님 아버지,

감사절을 맞는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

가정 가정을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22이-메일 목회 서신)

                   

산불

1.

캘리포니아 역사상 최악의 산불이

우리 지역에서 160여 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서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이 불에 탔고

목숨을 잃은 숫자가 40명이 넘어섰지만

실종자를 고려하면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산불 잡히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있는 데이비스는

산불로 인해서 공기가 나빠지니 어제 휴교령이 내렸답니다.

 

우리 지역도 지난주 내내 낙엽 타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셀폰으로 날씨를 검색하면 계속해서

“건강에 해로운 공기 (unhealthy air quality)”라고 나옵니다.

 

이번 산불로

파라다이스 마을은 주택 7,700여 채가 모두 불에 탔습니다.

마을 전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내년에 학교도 문을 열 수 없을 것 같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연일 보도되는 “캠프파이어” 산불 소식을 접하면서

안타까움만 더해 갑니다.

 

2.

그러고 보니

우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산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다음주 수요일에 비소식이 있는 것이 얼마인지요!

일기예보가 왔다갔다하는데 이번엔 꼭 맞추길 바랍니다.

 

사람이 그 큰 산불과 싸우는데 한계가 있으니

어서 비가 내려야 합니다.

 

신앙의 용어를 빌리면

하나님께서 캘리포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비로 산불을 끄시고, 갈색 산을 얼른 초록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3.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AI가 출현하고,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큰 산이 “자연”입니다.

 

이번과 같은 산불, 쓰나미, 태풍

요즘은 뜸하지만, 가끔 지축을 흔드는 지진까지

인간이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올리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겸허히 인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갑니다.

 

수요예배에서 살펴보는 창세기 말씀도

결국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공허를 채우시고,

어둠에 빛을 비추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렇게 커다란 자연재해 앞에서

그 옛날 성경의 인물들처럼 “비를 내려주시길” 기도하게 됩니다.

어쩌면 원초적인 기도입니다:

 

주님, 비를 주옵소서!

산불로 인해서 가족과 재산을 잃은 분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도다 (시편145:9)

The LORD is good to all,

and his mercy is over all that he has made. (Psalm 145:9)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15 이-메일 목회 서신)

로마서 3장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일부터 함께 나눌

설교 본문은 로마서 3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이나

철학과 도덕을 앞세운 헬라인들도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길을 가는 죄인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죄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보다

“하나님을 거역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 보면

파생적으로 도덕적인 죄들을 짓게 마련입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죄(거역)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면서 시작합니다.

 

2.

죄,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문제는

수요예배에서 살펴보는 창세기 2-3장 말씀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히브리어 “아바드”가 쓰였고, 경작하다, 일하다, 섬기다 특히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있음)

지키며 (“샤마르”라는 히브리어에는 듣다, 지키다, 순종하다는 의미)

각종 생물에 이름을 짓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과업(그때는 일이 곧 예배)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 자유를 사용하면서

세상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면

“악”은 조금 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죄를 야기시킨 창세기의 “뱀(사단)”이 대표적입니다.

 

이처럼 죄와 악의 문제는

창세기 3장 이후로 시작된 근본적이고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때부터 일이

예배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노동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3.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라는 책에서

악과 인간의 고통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을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죄를 짓고 고통스러워 하거나

악한 세상이 고통을 안겨줄 때가 있는데,

그 순간에 소리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루이스의 역설입니다.

 

로마서 3장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악(죄)의 본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결국에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지,

은혜가 임할 때 일이 노동이 아니라 예배가 될 수 있을지

그 가능성과 확실함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9)

What then? Are we Jews any better off? No, not at all.

For we have already charged that all, both Jews and Greeks, are under sin (Rom 3:9)

 

하나님 아버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주님을 바라보고

고통 속에서 소리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