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이 지나치게 갈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과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만 존재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

푸른색의 민주당과

빨간색의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있는 국민들도 많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앞에 나서거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공감대를 찾지 않고 극단적으로 갈라져 있으니

빨간색과 푸른색만 눈에 띌 뿐입니다.

 

2.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면서 생기는

정치, 문화, 경제 전반의 현상입니다.

 

포퓰리즘은

자기들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점점 극단적인 의견이나 정책을 제시합니다.

현실성이 없어도 일단 발표하고 봅니다.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은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대중의 요청이나 필요를 무시했기 때문이랍니다.

 

기득권에 취해서 국민들을 챙기지 못하고 안주하고 있을 때,

포퓰리즘을 내세운 그룹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기존의 교회들이 제 몫을 못 할 때, 이단이 판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무엇보다, 포퓰리즘은 갈라치기의 명수입니다.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만 주입하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에 눈과 귀를 빼앗기지 말아야겠습니다.

 

3.

갈라치기가 유행인 세상은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포퓰리즘이 가세하면

세상은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내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만 옳다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포퓰리즘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기를 힘입어 세상을 갈라놓지 않으셨습니다.

 

경계를 허무시고, 차별을 폐지하셨습니다.

복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악에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셨지만,

선한 길을 가려는 모든 이를 받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던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전쟁,

예수님이시라면 호되게 꾸짖고

희생자들을 감싸안으시고, 둘을 하나 되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추한 모습이 정상은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품는 예수님의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

‘그들’이라고 갈라치지 않고

‘우리’라고 품어주는 세상을 기대합니다.

 

생명의 복음, 화해의 복음,

용서와 회복의 복음이 세상에 편만 하길 기도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4)

 

 

하나님,

주님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25 이-메일 목회 서신)

탄식할 용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올봄에는

시편의 탄식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70%가 탄식시라는 사실은

시편을 기록하고 전해준 하나님 백성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보여줍니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배웠지만,

우리의 현실이 늘 기쁘고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슬픔과 탄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시편의 대부분이 탄식시라는 사실에

도리어 위로를 받습니다.

 

2.

시편 탄식시의 특징은

하나님을 부르고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사연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탄식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확신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시편의 탄식시는

‘자기연민’이 아니라

탄식을 넘어서 믿음과 확신으로 나가는 여정입니다.

 

무엇보다, 탄식의 과정을 충분히 갖습니다.

눈물로 이불이 젖을 정도로

자기 죄를 놓고 참회하며 탄식합니다.

뼈가 마를 정도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이를 부러뜨려달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내놓고 탄식합니다.

 

탄식의 과정을 온전히 지나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3.

어렸을 때는

울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눈물을 보이지 말고

대장부답게 견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혹시라도 눈물을 보이면

약하고 소심하고 쩨쩨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슬픔을 꾹꾹 참는 것을 강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탄식을 올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슬플 때는 슬퍼하고 울어야 합니다.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탄식은 솔직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도리어 정직하고 진실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10여 년 시간이 흘렀어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사는 분들을 일일이 찾아가시고

눈물을 씻겨 주시길 기도합니다.

 

슬픔 없는 세상은 불가능할 겁니다.

탄식 없는 인생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탄식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힘

그리고 소망을 구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하나님,

여전히 슬퍼하며 탄식하는 이웃들을 위로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18 이-메일 목회 서신)

스캠이 판치는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모든 길은 AI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인공지능(AI)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스마트 폰”이라고 불리는 휴대전화가 대표적입니다.

한글이나 영어 번역기도 성능이 약해서 그렇지

벌써 오래전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세상 속으로 들어오던 인공지능(AI)이

갑자기 게임체인저가 되고 주인공이 된 느낌입니다.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우리 삶은 훨씬 편리해질 것입니다.

요즘 번역기의 성능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 준  전통적인 직업들이 사라지는

슬픈 일도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우려가 현실이 되고,

과연 그럴까 했던 기대도 현실이 되는 느낌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2.

인공지능에서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요즘 전화, 메시지, 이메일 등에

스캠(scam상대방을 속이는 사기성 연락)과

스팸(spam, 원치 않는 정크 메일들)이 판을 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심코 클릭해서 정보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사용한 메일 계정은

누군가 제 이-메일로 로그인하면

저에게 곧바로 연락이 오고, 특정 숫자를 클릭해 주어야 합니다.

계정 정보에 들어가 보니, 성공하지 못한 로그인 시도가

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로부터 여러 개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보낸 텍스트 메시지로 가장한 스캠도 종종 받습니다.

클릭하기 전에 은행에 가서 보고하니

절대로 은행에서는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고

모두 거짓 메시지라고 명쾌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사기꾼들의 수법이 점점 발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인공지능을 사용한다면,

우리 같은 범인에게 큰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큽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대낮에 코를 베어 간다는 옛말이

현실이 되게 생겼습니다.

 

3.

성경에도 스팸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했던

거짓 선지자 (junk prophets)들이 꽤-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대표적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나라도 멸망하고

성전도 무너진다는 심판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했습니다.

 

그때,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운 나라여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평화” “안전”을 역설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지금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현혹하는

스팸(거짓 메시지) 또는 사기(스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대표적이지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신 바짝 차리고 분별해야겠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음을 믿습니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편120:2)

 

 

 

하나님,

진리와 정직이 통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11 이-메일 목회 서신)

세 가지 돌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큰 돌로 막아 놓았던 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던 여인들이

돌을 어떻게 옮길까 걱정하던 것을 보면

무덤을 막은 돌이 매우 큰 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도둑이 자기 발이 저린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큰 돌로 무덤을 막아 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

무덤을 막은 큰 돌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신비한 몸을 입으시고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2.

부활절에 성경을 읽으면서

무덤 문을 막아 놓았던 돌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에게는 세 가지 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아 놓은 것처럼

길이나 입구를 막아 놓은 돌입니다.

헤치고 나가야 할 걸림돌(stumbling stones)입니다.

 

길에 툭- 튀어나온 돌에 걸리면

영락없이 넘어집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 문제, 사람이 걸림돌이 되어서 넘어지곤 합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문제가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둘째는, 디딤돌(stepping stones)입니다.

걸림돌과 반대로 디딤돌은 길을 이어줍니다.

 

다리가 발달하기 전에는

웬만한 냇가나 작은 하천에 디딤돌을 놓아서 건넜습니다.

높은 선반 위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때도

디딤돌을 놓고 그 위에 올라갑니다.

 

인생길 이곳저곳에 놓인 디딤돌을 밟으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와서 영적 슬럼프에 빠질 때나

어려움이 찾아와서 깊은 시름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디딤돌을 놓아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마지막 세 번째는 산 돌(living stone)입니다.

우리에게는 산 돌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산 돌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신 것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고 건물을 세워갑니다.

그 위에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짓고, 그 집에 하나님을 모십니다.

우리 인생과 신앙의 기초가 산 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4월이 되었습니다.

교회력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절로 이어지는

부활절기입니다.

 

우리 신앙과 인생의 기초가 되시는

산 돌,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을 살기 원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디딤돌이 되실 것도 믿습니다.

 

힘차게, 담대하게 새달 맞읍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벧전 2:4-5)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에 디딤돌이 되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4 이-메일 목회 서신)

고의적 무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도 십자가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난 주간이라고 해서

지나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조롱과 비난, 외로움에 동참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난주간은

부활을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고 나누는 시간입니다.

고난의 끝에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

 

2.

고의적 무지(willful ignoran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예수님 주변에는 “고의적 무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

빌라도 역시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백성들의 민란(민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른 척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이 단지 나사렛 청년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알면서 모른 척 했습니다.

 

백성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성전에서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생각하면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의 인물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맹목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예수님께서

쓰러지셨을 때, 군병들이 십자가를 대신 질 사람을 찾았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군병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외면했을 것입니다.

얼굴을 돌려 외면하는 것도 일종의 고의적 무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꿰뚫어 보셨기에 더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위엄 있게 꿋꿋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3.

고난주간을 보내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오늘,

하나님을 향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향한

“고의적 무지”가 우리에게 없는지 살피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리사욕에 빠져서 하나님의 아들을

고소하고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비판하고 군중에 휩쓸릴 것도 아닙니다.

나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길 원합니다.

 

담대한 신앙,

정직한 신앙,

힘과 권력 앞에 숨지 않고 대면하고 저항하는 신앙,

예수님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부활절 새벽이 밝으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 담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28 이-메일 목회 서신)

새봄

좋은 아침입니다.

 

1.

샌프란의 올겨울은 꽤 길었습니다.

여느 해보다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몇 해 전, 겨울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캘리포니아가 사막으로 변할 것 같다고

설레발을 떨 때가 머쓱할 정도입니다.

 

비가 충분히 내리니

삼라만상이 초록으로 변했습니다.

멀리 보이는 민 등성이 산들도 파랗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멀지 않게 비가 내리니

캘리포니아 특유의 맑은 날씨가 그리웠습니다.

 

기온도 꽤 내려가서 쌀쌀하고 추웠습니다.

코로나는 잦아들었지만,

독감이 유행해서

여러 날 고생하는 분들도 많으셨습니다.

 

매번 겨울이 그렇듯이,

이처럼 올겨울도 꽤 길었습니다.

 

2.

이번 주 들어서

봄기운이 완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바람입니다.

 

맑은 날이 많아지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캘리포니아 날씨의 귀환입니다.

 

이따금 비 소식이 있는데

우기(雨氣) 끝에 찾아오는

성경에도 나오는 늦은 비입니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길가의 가로수와 이웃집 정원의 나뭇가지에

아기 손처럼 귀여운 연한 순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찾아왔습니다.

 

3.

우리에게 봄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부활절이 있는 계절입니다.

 

춘분(春分) 이후 보름이 지나고

첫 번째 맞는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올해는 3월 31일이 부활절이니 여느 해보다 빠릅니다.

봄이 빨리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새봄과 더불어

부활의 생명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바랍니다.

 

새봄에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 차가움,

겨우내 꽁꽁 싸 놓은 것들이

예수님 부활의 생명의 빛으로

밝아지고 따뜻해지고 술술 풀어 지길 바랍니다.

 

새봄에 찾아오실

부활의 주님을 기다립니다.

생명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아가 8:14)

 

 

하나님,

봄을 맞아서 주의 동산에 뛰어노는

사슴처럼 발걸음이 가볍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21 이-메일 목회 서신)

화분갈이

좋은 아침입니다.

 

1.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로 이사 온

13년 전부터 미뤄왔던 숙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이웃집과 공유하는 담이

지난번 심한 바람으로 쓰러졌고

보험회사의 도움을 받아서 이웃집과 얼굴 붉히지 않고

새로운 담으로 교체하였습니다.

 

담이 워낙 낡았고

혹시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넘어지면

담벼락에 다칠 위험이 있어서 염려가 되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웃집 할머니에게 함께 담을 교체하자고 요청했지만,

자기는 돈이 없으니, 우리가 알아서 하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비바람으로

담을 교체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우리 교회에 임했습니다.

 

뒤뜰이 안전하게 정리되니

10여 년 앓던 이를 빼고 임플란트를 해 놓은 것처럼 상쾌합니다.

늘 가탈스러운 이웃집 할머니도 “하나님이 했다”면서 좋아하니

말 그대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

다른 한 가지 역시

미루고 미루던 숙제였습니다.

주일마다 강단을 장식하는 종려나무의 화분 갈이입니다.

 

강단의 종려나무는

현재 교회로 이사올 때부터 강단을 지켰습니다.

작은 종려나무 세 그루를 사서 화분 하나에 심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훨씬 작았습니다.

 

매주 물을 주면서 정성껏 관리했더니

가지가 계속 나오고 키도 부쩍 컸습니다.

생명력이 강했습니다.

 

최근에 화분을 옮기다 보니

한쪽 화분 겉에 금이 간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칫, 화분이 쪼개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광고하니

화분 갈이의 달인들이 모여서

미뤄둔 숙제를 순식간에 해치웠습니다.

 

얼마나 개운한지요!

딱딱한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버텨준

종려나무에게도 감사했습니다.

 

3.

새봄을 맞이하고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과 삶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살다 보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랫동안 찜찜한 상태로 지내는 것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우리 교회 담장 공사처럼

이웃이나 누군가의 협조가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화분 갈이처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차일피일 미루면서 쌓아 놓고 있던 것들은

날을 잡아서 깔끔하게 해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생명의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전14:40)

 

하나님,

오래된 숙제를 얼른 끝낼 있는

부지런함과 지혜를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14 이-메일 목회 서신)

니고데모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는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Nicodemus)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백성의 정복자 conqueror of the people”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공한 인물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를 70인으로 구성된

입법과 사법 그리고 행정을 관할한 최고 의결 기구였던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봅니다.

 

게다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손색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나오지만,

바리새인들은 랍비로 대표되듯이

유대교 안에서 영향력이 무척 컸습니다.

 

2.

예수님 당시 종교적으로/사회적으로

흠잡을 것이 없는 니고데모가

밤중에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에 비하면 출신성분은 물론

나이도 훨씬 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랍비(스승)라고 부릅니다.

 

신분 격차와 차별이 확실히 존재했던 당시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파격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본문에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추측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이룬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갈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의 가장 밑에 있는 고민입니다.

 

3.

저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니고데모에게 이런 영적인 고민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공회원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바빴을까요!

 

워낙 바쁜 일상이어서

예수님을 찾아올 정도로 영적인 일이

다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그것도 모르냐?”는

예수님의 핀잔 섞인 말에도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니고데모는 갈급했습니다.

영원한 진리를 향한 갈급함입니다.

물질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영역에 대한 고민이고 질문입니다.

성경은 니고데모가 답을 얻고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더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놓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논쟁할 때,

온건하지만 예수님 편에서 발언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장례에 향품 70파운드를 갖고 찾아옵니다.

 

니고데모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선언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결과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덕분입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문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놓고 고민한 결과입니다.

 

니고데모의 영성(신앙)을 닮고 싶습니다.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것을 두고 고민하고 신앙 안에서 풀어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시대의 니고데모가 되기 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느니라 (요3:3)

 

 

 

하나님,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7 이-메일 목회 서신)

2월 29일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4년마다 찾아오는

2월 29일 윤일(閏日)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도는 데 걸리는 기간은

365.2422일이랍니다.

지구의 관점으로 보면

태양이 춘분해서 시작해서 다시 춘분점으로 오는 기간입니다.

 

달력에서는 1년을 365일로 규정하니

지구의 정확한 공전 주기에 맞추기 위해서

4년에 한 번씩 하루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계산하면 1년이 365.2425일이 됩니다.

실제 지구의 공전 기간보다

윤달을 고려한 우리 달력이0.003(25.92초)가 길어졌습니다.

 

이것을 조정하기 위해서

윤년 중에서 1800, 1900년처럼 100으로 나눠서 떨어지는 해는 윤년을 없애고,

2000년처럼 400으로 나눠서 떨어지면 그대로 윤년을 지킵니다.

 

실제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공전주기와

365일로 규정한 우리 달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복잡한 계산법입니다.

 

2.

이 정도의 미세한 차이는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1250년을 지냈는데,

1582년에 점검해 보니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제정한 부활절에서

10일 이상 빨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주전 46년부터 사용해 오던 율리우스력을 수정해서

지구의 공전 주기에 0.003초만 빠른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을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2월 29일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365일이 아닌 366일을 삽니다.

덤으로 하루를 더 갖게 되었습니다.

 

2월에 군대에 입대한 청년들은 군대 생활을 하루 더해야 합니다.

월마다 봉급을 받는 분들은 하루 더 일하고 같은 월급을 받습니다.

한국의 경우, 봄방학이 하루 길어집니다.

 

작은 것들인데, 생각보다 여기저기서 차이가 납니다.

신기하고 흥미로운 세상입니다.

 

2월 29일이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갖다 주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3.

2월 29일을 보면서

작은 것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우리 삶을 세밀하고 꼼꼼하게 관리해야 함도 배웁니다.

촘촘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정도 차이는 괜찮아’하면서

무심코 넘어가면 나중에 커다란 차이를 야기할 수 있으니

세심하게 챙기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마음과 생각을 정확하고 치밀하게 조율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지난 4년 동안 저축해 놓았다가

되찾은 2월 29일을 뜻깊게 보냅시다.

 

속이는 저울은 주님께서 미워하셔도,

정확한 저울추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잠언11:1)

 

 

하나님,

 정확하고 치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2. 29 이-메일 목회 서신)

밋밋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인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코로나바이러스를 경험한 세상은

예측불허, 각자도생, 일파만파입니다.

 

팬데믹 전까지 이어지던

많은 지표의 그래프가 팬데믹 동안

잡음(노이지)을 내면서 아래위로 크게 움직이더니

팬데믹이 끝난 후에는 예측불허의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는 매우 좋은데

대기업의 강제 해고는 늘어갑니다.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공동체라는 개념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우선 내가 살아남아야 합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 누구도 내 삶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기존의 언론매체인 신문이나 공적인 방송은 힘을 잃고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90년대 초 걸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생방송으로 보도하는CNN 기자가 영웅이 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어서 소셜 미디어에 올립니다.

일파만파(一波萬波) – 세계의 소식이 매우 빠르게 전해집니다.

 

2.

세상이 이렇게 변화되니

새롭고, 자극적이고, 특별하고 빠른 것에 주목합니다.

 

보통의 말을 하고

보통의 일을 하는 것은 주목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점점 더 특별하고 자극적인 것을 찾고 추구할 수 밖에요.

유행에 민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동시에 꽤 많은 결과를 쏟아내는 요즘 세상에서

“천천히” “밋밋함” “쉼”과 같은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경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공생애(public life)는

요즘 세상의 트렌드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동안 차근차근 천천히 모두 완수하셨습니다.

절대로 서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

예수님의 사역은 매우 밋밋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되살려서 복음서와 서신서에 기록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틈만 나면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지 묻고 조율하며 자신을 돌아보셨습니다.

배 안에서 주무시면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실 정도로

틈틈이 쉼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결코 화려한 것은 아닙니다. 밋밋한 일상입니다.

때로는 세상 풍조를 거슬러 가는 여정입니다.

그래도 뚜벅뚜벅 그 길을 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3.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잠깐 멈춰서 우리 삶을 돌아봅시다.

하루에 4-5분이라도

삶의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고 멈춰 봅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시다.

 

밋밋해도 상관없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62:5)

 

 

하나님,

밋밋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2. 22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