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들의 그림자

좋은 아침입니다

 

1.
1년 6개월 이상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괴롭혔던
코비드19의 어두움이 조금씩 걷히는 느낌입니다.

 

우리 지역은 내일(15일)부터 실내 마스크 착용도 완화되어서
사무실을 비롯한 일터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됩니다.
물론, 많은 군중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마스크 착용은 의무입니다.

 

백신 접종률과 3차 접종을 고려하면
올해 겨울만 잘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
예전의 일상을 거의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 상황, 팬데믹으로 인한 마음의 답답함 등을 고려하면
더 이상 코로나바이러스에 붙잡혀 살 수 없습니다.

 

하여튼
코로나바이러스는 지나갈 것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속담도 생각납니다.

 

2.
지난주일 AP통신 뉴스는
코로나로 인해서 부모님, 할머니/할아버지, 후견인을 잃은 아이들이
미국에만 14만 명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보도했습니다.
지난 7월에는 4만 명 정도라고 했는데, 다른 방법으로 조사하니
10만 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유색인종 출신 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의 67%가 히스패닉 가정입니다.
미시시피의 경우, 57%가 흑인 가정 출신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코비드로 부모와 후견인을 잃은 아이들은
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코비드19이 만들어 놓은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조지아에 사는 케이트 켈리(Kate Kelly)는 54세 된 아버지를 코로나바이러스로 잃고
두 명의 자매와 어머니와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 사회는 물론 이웃들의 도움이 이어졌지만
한 달이 지나면서 발길이 뜸해지고 국가가 주는 지원금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주목하니 위로와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면, 관심은 식고 섬처럼 외롭게 남겨지게 마련입니다.

 

20년 전에 일어난 9.11 에서 남겨진 가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코비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총체적으로 돕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AP 통신은 보도했습니다.

 

3.
세상은 크고 넓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삽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식량이 없어서 죽어가고, 부모와 가족을 잃고
삶이 완전히 망가진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간다면
어둠의 그림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종종 멈춰서서
우리가 모르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세상의 뒷면도 살피기 원합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앞만 보고 나가는 발길을 잠시 멈춰서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삶을 돌아보고 반추하기 원합니다.

 

코비드가 지났다고 모든 사람이 기뻐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여전히 슬픈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하나님,
외롭고 슬픔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의
보호자와 아버지가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14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인의 탄식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
구약성경의 하박국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3장으로 이뤄진 하박국서는
1장과 2장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는 방식으로,
마지막 3장은 질문과 응답을 통해서 만난 하나님을
하박국이 악기에 맞춰서 노래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절박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온몸과 삶으로 외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지적했듯이 세상에는
“죄악, 패역, 겁탈과 강포, 변론과 분쟁”이 판을 쳤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아무 일도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언제까지 하나님의 간섭과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지” 탄식하며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2.
“언제까지입니까? How long?”
하나님을 향한 한탄과 호소는
하박국뿐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응답, 구원을 기다리던
하나님 백성들의 탄식이었습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탄식시도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으로 시작합니다.

 

탄식(lament)은
찬양과 감사와 함께 주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의 삶이 온전하지 않고, 늘 밝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구원도 즉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때로는 눈물로
외치면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고난 가운데 드리는 솔직한 기도입니다.

 

3.
우리의 삶도 녹록치 않습니다.
기도 응답이 더뎌지고 삶의 어둠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언제까지입니까? How long”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느냐는 한탄이요 항의입니다.
이것은 고난 가운데 있는 모든 주의 백성의 자연스러운 고백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꼭 붙들려서
그리스도인들은 탄식하거나 불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탄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우리 속을 숨김없이 꺼내서 하나님께 내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4.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고민, 힘듦, 아픔, 불안, 염려, 두려움,
행여나 부끄러운 모습들, 안타까운 현실 등등 –
하나님께 갖고 와서 솔직하게 기도하기 원합니다.

 

행여나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함이나 불신이 생겼다면
자기 선에서 판단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하박국 선지자처럼
끝까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기 원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편13:3)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탄식에
주님의 귀를 기울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7 이-메일 목회 서신)

요즘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동네에는
인앤아웃(In-and-Out) 햄버거 매장이 있습니다.
공항 근처여서 매일 줄이 길게 서는 곳입니다.

 

매장에서 일하는 손길이 부족한지
종업원을 구한다는 표시가 유리창에 붙어 있는데
시간당 19불로 시작해서 22.5불까지 올려 줄 수 있답니다.

 

주 40시간으로 계산해 보니 한 달에 3,000 – 3,600불 정도가 됩니다.
매점 안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고등학생부터
젊은 청년들인 것을 생각하면 적은 임금이 아닙니다.
풀타임으로 채용되면 복지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가 속한 산 마테오 카운티의 최저 임금이
시간당 15.62달러 (샌프란은 $16.32)임을 고려하면
인앤아웃이 20% 정도 많은 임금을 지불하는 셈입니다.

 

동종 업계에서는 경쟁력 있게 대우하는 편이지만,
온종일 서서 쉴틈 없이 일하는 종업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주 높은 임금도 아닙니다.

 

흰옷을 입고, 빨간색 테두리가 둘린 모자를 쓰고,
아주 큰 옷핀으로 앞치마를 묶고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대견하고 또 때로는 안쓰럽습니다.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2.
인앤아웃은 1948년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시작했습니다.
창업자의 손녀인 린시 스나이더(Lynsi Snyder, 1982)가
2010년부터 사장이자 대주주로 있습니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여성 빌리어내어 (billionaire)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개인사는 평탄한 편이 못 됩니다.
부모님이 이혼했고, 자신도 세 번 이혼하고
현재 네 번째 남편과 7년째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와 현재의 남편이 인앤아웃 사원이었다는 점이 눈에 뜨였습니다.

 

인앤아웃 컵 뒤에 성경 구절이 있듯이
스나이더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랍니다.
자신의 인생, 결혼의 실패, 경영권 다툼 소송 등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했다고 간증한 적도 있답니다.

 

서른도 되지 않아서 한 기업의 사장이 된 스나이더,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지각색 다양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입니다.
일한 것만큼 보수와 보람을 얻는 세상이 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3.
우리가 아침에 읽는 디모데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재물(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교훈합니다.
돈을 잘못 사용하고 돈에 노예가 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돈이 일만 가지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고
여유가 있다면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딤전 6:18).

 

현대를 살면서 재물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돈이 최고인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일확천금을 벌었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그때마다 성실하게 일상을 사는 자신이 초라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우리는
돈에 노예가 되지 않고, 돈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고
돈과 비교할 수 없는 믿음, 소망,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두기 원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 6:19)

 

하나님,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30 이-메일 목회 서신)

상 아래 개들도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동안 주일 예배에서 살펴보았던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말씀에 “개(dog)”가 등장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개 취급하셔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도와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개”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자녀”에 반대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험한 표현입니다.

 

물론, 본문의 개는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라기보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작은 개)에 가깝습니다.
주인의 식탁 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강아지를 떠올리면 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자녀)의 잃은 양을 위해서 오신 것을 인정합니다.
대신, 식탁에서 개에게 던져주는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15:28)고 말씀하시니
그 시각에 험한 귀신에 들려 있던 딸이 회복되었습니다.

 

2.
개는 인류와 아주 오래전부터 친숙한 동물입니다.
사냥은 물론 운송 수단, 양몰이를 비롯한 경비견으로 사용되었고,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의 역사도 제법 깁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개를 신의 형상으로 사용하고
주인이 죽었을 때 함께 무덤에 묻을 정도로 거룩하고 친숙한 동물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가족처럼 대우받는 최고의 애완동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개를 귀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우선, 식습관에 대한 구약의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을 개에게 던지라고 하니
개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동물이고 개 자체가 부정합니다(출 22:31)

 

엘리야 시대의 가장 악랄했던 왕 아합과 그의 왕비 시돈 출신 이세벨이 죽었을 때
개들이 그들의 시체와 피를 핥아먹을 것이라고 했으니
죽은 것을 접촉하는 개 역시 부정합니다(왕상21:23-24).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도
구약과 같은 맥락입니다. 부정한 이방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개를 비교적 좋게 묘사한 것은 경비견인데
그것도 짖지 못하는 경비견이라고 했고(사56:10)
욥기에는 양을 지키는 개라는 표현이 나오는 정도입니다(욥 30:1)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의 정신을 흐리고 교회를 헤치는 사람들을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에 비유했습니다(빌3:2).

 

요한계시록에서도 개들은
점술가, 음행하는 자, 살인하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러니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심하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여인의 신분, 자존심, 가능성을 모두 망가뜨린 말씀입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을 개에 대입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으니
예수님도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다급했고, 그 정도로 예수님을 신뢰했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한길만 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닮고 싶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가짐과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끝까지 예수님을 쫓기 원합니다.

 

다급한 기도 제목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참빛 식구들에게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참빛 식구들이길 기도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 15:28)

 

하나님,
저희도 큰 믿음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3 이-메일 목회 서신)

한 끗 차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사무엘상을 마치고 사무엘하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첫 번째 지도자 엘리와 사울이 무너지고
그다음에 세워진 사무엘과 다윗이 하나님께 쓰인 받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후반부는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왜 사울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다윗은 흥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2.
사울의 외모는 출중했습니다.
그의 외모와 달리
사울이 처음 왕으로 세워질 때는 수줍고 소심했습니다.
그가 훗날 교만하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왕으로 변질된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사울의 영적 멘토는 사무엘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었고,
이스라엘 첫 번째 왕 사울을 차근차근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고 조언했습니다.
사울 역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사무엘 선지자와 동역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이라는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적대국을 물리치고
연거푸 전쟁에 승리하면서 사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무시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납니다.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이고 안하무인이 됩니다.
다윗이 장차 왕이 될 것을 알면서도
다윗을 제거하고 사울 왕국을 세우려 합니다.

 

마지막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는
자신이 쫓아냈던 신접한 여인(당시의 무속인)까지 찾아갔습니다.
처음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3.
다윗은 베들레헴 목동 출신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베들레헴을 찾아왔을 때,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으십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왕궁에서 사울에게 임한 악령을 쫓아내지만,
왕이라는 직책에 미련을 갖기보다
순간순간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서
광야 생활을 할 때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아비멜렉이라는 제사장을 곁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씩 있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울을 제거하지 않고 그 힘든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자기 사람들(군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로
장차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질 때를 착실하게 준비했습니다.

 

4.
사울과 다윗을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외모는 사울이 다윗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하지만 사울과 다윗의 인생,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지위와 명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시작되었을까요?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지에 있었습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신실(信實)함이 두 사람의 큰 차이였습니다.
어찌 보면 한 끗 차이입니다.

 

세상에서는 격차가 심하고, 매우 다양한 인생이 펼쳐지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한 끗 차이로 성패가 갈림을 보입니다.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끝까지
그리고 변함없이 주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하나님,
처음과 끝이 같은 신실함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16 이-메일 목회 서신)

 

산불

 

 1.
작년에 이어서
캘리포니아에 산불이 다시 극성입니다.

 

7월 중순에 시작된 딕시(Dixie) 산불은
샌프란 면적의 30배에 달하는 90만여 에이커를 태웠습니다.
아직도 60%정도만 진화된 상태라니 엄청난 규모입니다.

 

8월 중순에는 스탁턴 동쪽에 위치한 산악 지대에서
산불이 나서 20만여 에이커를 태웠고 절반 정도 진화된 상태입니다.

 

올해 북가주에서 발생한 산불을 대충 계산해 보니
130만 에이커에 달합니다.
이것은 샌프란시스코 전체 면적의 44배에 해당합니다.

 

북가주의 산불은
작년부터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여름철 가뭄이 심해지고
리노 북쪽의 산악지대에 눈이 일찍 녹으면서
마른 나무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워낙 커다란 면적에 산불이 났기에
비가 오는 것을 기다릴 뿐
인간의 힘으로 진화하는 것도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집을 빠져나와서 대피하고
마을 전체가 타서 없어지는 등
산불이 난 지역의 주민들이 겪는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2.
산불은 산의 생태계 유지에 필요한 면도 있습니다.
번개를 비롯한 자연의 현상으로 발생한 산불을 뜻합니다.

 

요즘 발생하는 산불은 인재에 가깝습니다.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가 가속되면서
기후 변화(climate change)가 생겼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자동차나 화석 연료에서 발생하는 온실 가스로
지구 온도가 올라는 것이고,
기후 변화는 지구 온난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이상 기온 등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악순환입니다.
기후 변화로 서부지역에 가뭄이 찾아오니 산불이 잦아지고
산불은 산소를 만들어내는 산림을 태우는 것은 물론
화석 연료가 타는 것에 버금가는 온실가스를 증가시킵니다.
그러면 이상 기온이 나타나면서 악순환의 고리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최초 명령을
자칫 자연을 지배하고 개발하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서구 문명 속에 이 같은 인간 위주의 관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연을 친화적인 동료가 아니라 개발과 정복의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정복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오해한 소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연을 관리하고 유지할 책임을 주셨습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에덴동산, 낙원을 만들라는 것이지
인간이 우두머리가 되고 나머지 자연은 착취해도 된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자연을 유린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기후 온난화와 기후 변화라는 난제가 닥쳤습니다.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서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막아내야 합니다.
어떻든지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지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결단과 추진력을 요청합니다.
우리 자리에서 지구를 살리는 일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복을 올바로 사용하기 원합니다.

 

“주님, 지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하나님,
우리 지역에 단비를 흡족히 내려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9 이-메일 목회 서신)

 

 

 

 

꼭 붙잡고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여를 방학 동안
기혼 그룹이 가족 여행을 가는 것을 보면서
예전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가 생각났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여름 방학이 되면
제가 살던 인디애나 블루밍턴에서 가장 가까운
켄터키 루이빌에 있는 놀이 공원에 갔었습니다.

 

아이들은 전날부터 설레어서 잠을 설치고
아내는 새벽부터 도시락을 준비해서
두 시간 정도 자동차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놀이공원에 있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가능한 한 일찍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는
무엇보다 롤러코스터였습니다.

 

루이빌에 있는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는
완전히 나무로만 얼기설기 빽빽하게 만든 것입니다.
처음에 롤러코스터가 올라갈 때는 삐그덕 소리가 나는 듯하지만
50마일 이상의 속도로 오르락내리락 달리는 방식입니다.

 

20여 년 전이니
그때는 저희도 아이들과 함께 롤러코스터를 즐기곤 했는데
아이들은 두 손을 놓고 마음껏 즐기지만
저희는 앞에 있는 손잡이를 생명줄처럼 꼭 잡고 타야 했습니다.
불과 몇 분이 안 되는데도 내리면 어질어질했던 기억이 납니다.

 

2.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하곤 합니다.

 

언덕배기를 오를 때는 천천히 힘겹게 오릅니다.
그러다가 내리막을 만나면 최고의 속도로 쏜살같이 내려갑니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몇 번 하고 나면 마지막 종착역에 도착합니다.

 

때로는 우리 신앙도 롤러코스터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한창 좋을 때는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입술에 찬양과 감사를 달고 살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실제로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 은혜, 평안에 잠겨 삽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그 좋던 신앙이 사라지고 골짜기를 헤매곤 합니다.
기도와 말씀은 물론이고 교회 생활도 진부하게 느껴지고
심하면 하나님에 대한 회의까지 찾아옵니다.

 

그렇게 계속 골짜기를 헤맬 것 같지만,
어느 한순간의 말씀, 깨달음, 회개, 결심으로 다시 오르막을 탑니다.
이렇게 우리는 롤러코스터 인생, 롤러코스터 신앙의 길을 갑니다.

 

3.
이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평탄한 길만 걸어가는 경우는 매우 특별하거나
롤러코스터 인생을 느끼지 못하는 착각일 것입니다.

 

어제 수요예배에서 살펴본 다윗을 보아도 인생길이 만만치 않음을 발견합니다.
자칫 이스라엘과 싸울 뻔했는데, 블레셋 장군들의 만류로 중간에 가족들이 있는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살려주신 겁니다.
사흘 길을 오면서 다윗은 찬송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있는 시글락에 와보니
그 사이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다윗의 두 아내를 비롯한 아낙네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마을은 초토화되었습니다.

 

다윗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서럽게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탓하면서 돌로 치려고 덤볐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롤러코스터 손잡이를 잡듯이 하나님을 꼭 붙들고 일을 처리해 갑니다.

 

하나님 명령대로 아말렉을 쳐서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고
많은 전리품을 갖고 옵니다.
모든 일을 끝낸 다윗은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것처럼 어질어질했을 것입니다.

 

인생길이 롤러코스터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을 꼭 붙들고
힘과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야겠습니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 30:6)

 

하나님,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꼭 붙잡고 하루를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 이-메일 목회 서신)

 

 

 

지킴이 두 번째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주 전 목요 서신에서
40년 전 우리 교회에서 결혼하셨다는
노부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람들은 바뀌었지만,
1972년에 건축된 이래
말없이 자리를 지켰던 우리 교회 건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8월 20일 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F Chronicle)에
건물과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프랑스 이민자 후손인 라란(Lalanne)이라는 30대 여성이
그의 남편과 함께 어빙과 20가 교차로(intersection of 20th Ave and Irving St)에 위치한
100년이 넘은 집을 사서 입주했습니다. 2015년이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구입한 주택은
1904년, 덴마크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민 와서
목수 일을 하던 한슨(Hans Hansen)이란 분이 손수 지은 집입니다.
이분은 샌프란에 살면서 결혼했고 세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2019년, 라란 부부가 지진 대비 공사를 하던 중에
지하실에서 한 묶음의 서류를 발견합니다.
1900년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한 처음 집주인 한슨 씨의 일기였습니다.

 

스토리텔링 작가였던 현재 집주인 라란은
한슨의 일기에 꽂혀서 덴마크어 필기체로 흘겨 쓴 일기를
구글의 도움을 받아서 한 단어씩 판독합니다.

 

당시의 신문, 인구조사 자료, 공문서 등을 샅샅이 조사해서
한슨의 덴마크 고향도 알아내고 그곳을 직접 찾아갑니다.
돕는 손길과 연결되어서 일기도 번역했습니다.

 

2.
그가 사랑하던 애나(Anna)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만 애나가 미국에 오면서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왔습니다.
대서양을 넘나들며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지만,
연락이 끊겼고 한슨은 사랑을 찾아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미시간에 정착한 애나는 이미 결혼해 있었습니다.
한슨도 아쉬운 발길을 뒤로하고 샌프란에 정착해서 가정을 꾸민 것입니다.

 

라란의 인구 센서스 자료를 통한 끊임없는 추적에 의하면
술주정뱅이 남편과 결혼했던 애나가 무슨 연고인지 샌프란으로 이주했고
한슨이 결혼한 것을 알았는지 재혼해서 샌프란에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홀몸이 됩니다.

 

웬일인지 한슨도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한슨과 아나 두 사람은 텐더로인 지역에서 몇 블록 사이를 두고 살게 됩니다.
현재의 집주인 라난은 두 사람이 노년을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쩌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극적이지만
조금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3.
샌프란에는 100년 이상 오래된 집이 많아서
종종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물건이나 서류 등이 발견된답니다.
대부분은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겠지요.
라란이라는 분의 호기심과 추적하는 열심이 특별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죽음은 사람들에게 “기억(memory)”으로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놓고 하나님께 가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100년도 훨씬 넘어서 일기장이 발견된 것을 보면
기억을 넘어서 우리의 발자취, 흔적도 여기저기에 남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는 것’이 있는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다음 후대가 우리를 생각하면 흐뭇하고 미소지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많이 남겨야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주일에 살펴보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큰 믿음”을 남겼네요.
부럽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 15:28)

 

하나님,
오늘 우리의 삶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일들로 채워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26 이-메일 목회 서신)

고르반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일 설교에서
<고르반>이라는 표현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더 세세한 조항을 만들어서
부정한 것을 피하고 정결한 길을 가도록 도운 것이 장로의 유전인데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이것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종교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한 가지 행위를 갖고
완전히 나쁜 사람 취급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향해서
<고르반>이라는 당시의 관행으로 대응하십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갖고
고르반의 그릇된 사용을 지적하십니다.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보호자가 되고 그늘이 되지만,
부모님께서 연세가 드실수록 상황이 역전되어서
부모가 자식들의 짐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사람들
또는 부모를 공경할 생각이 없는 자식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팔았는데 그것이 바로 <고르반>이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면죄부를 사서 동전을 헌금통에 넣는 순간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죽은 부모와 친지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백성들을 현혹했듯이,
성전에 일정액의 헌금을 바치고
<고르반>하면 부모를 공경할 책임이 면제된다는 식이었습니다.

 

3.
면죄부나 고르반의 관행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것을 사람들이 만들어서
그것이 신앙인 것처럼 믿고 따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천로역정과 같은 신앙을 가르치기보다
편하고 값싼 은혜를 설파합니다.

 

루터의 말이 마음을 울립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 안에 슬며시 자리 잡은 그릇된 신앙의 관행이 없는지요?
추하고 얌체 같은 편이주의(便易主義)는 없는지요?
<고르반>하고 면피(面皮)하려는 얄팍한 속셈은 없는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되고 바른 신앙을 갖추기 원합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 12:22)

 

 

하나님,

우리의 중심, 온 마음이

주님을 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19  이-메일 목회 서신)

 

 

 

지킴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샌프란에 온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16년이면 짧은 기간이 아닌데,
샌프란은 도심의 높은 빌딩 외에 변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도심에서 바닷가를 연결하는
Geary Blvd를 운전하다 보면16년전과 같습니다.
저보다 훨씬 오래 사신 권사님들도 옛날 그대로라고 하실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샌프란은 100여 년이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싹- 갈아엎고 현대식으로 다시 짓는 것보다
과거와 현재, 첨단 건축과 기술이 공존하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2.
지난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을 배웅하고 있는데
60대 정도로 보이는 미국 아주머니가 교회 계단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종종 예배를 위해서 오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예배가 끝났다고 친절히 말씀드렸더니 들어가도 되냐고 물으십니다.

 

갑자기 밖에 계신 남편을 부릅니다.
설레발을 치신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매우 감격해 하시면서
“40년 전에 저희가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교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활발하신 아주머니셨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인 것을 보시고
약간 흥분한 듯 환호성을 치셨습니다.

 

강단 앞에서 사진을 찍어 드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겠냐고 물었더니
결혼식 후에 축하연을 지하에서 했답니다.

 

3.
우리 교회는 1972년 그리스 사도교회(Greek Apostolic Church)
(그리스 정교회가 주류이고 사도교회는 소수 개신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교회 부지를 구입해서 건축했습니다.

 

건축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가시고
교세도 축소되어서 여러 교회가 렌트를 얻어 사용했습니다.

 

주일에 오셨던 분에 의하면 1980년대 초반,
성령 충만한 은사 중심의 교회가 우리 건물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130여 명이 임시 의자를 갖고 앉을 정도였고
교회에 들어오면 예배실은 물론 아래 친교실까지 성령의 임재가 충만했답니다.
엄청난 능력의 교회였다고 자랑하셨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우리 교회 건물에 깃든 역사였습니다.

 

4.
교회 건축 후 50여 년 동안
우리 교회 모습은 거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강단은 우리가 설치한 커다란 TV 두 개 외에는
스테인리스 아름다운 십자가와 하얀 벽면까지 그대로입니다.
오죽하면, 엊그제 오신 부부께서 “그대로야, 그대로야”를 외치셨을까요!

 

그렇게 우리 교회 건물은 지난 50여 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교회와 교인들이 렌트를 얻어서 예배했으니
그 모든 다양함을 말없이 품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건물 자체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지킴이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건축한 교회에 이어 두 번째 건물주가 되었는데
우리 건물은 우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니 우리는 건물에 어떤 추억을 남겨놓아야 할까요?
40년 후에 우리 건물에서 누가 예배하고 있을까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교인(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이라고 늘 말씀드렸는데
엊그제 주일의 만남을 통해서
건물의 귀함과 교회 건물에 깃든 영성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우리 교회 건물이 우리 모두에게 추억이 되고,
우리의 신앙은 물론
교회 건물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지킴이가 되기 바랍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편63:2)

 

 

 

하나님,

우리 교회의 신앙이

우리 건물 속까지 스며들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12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