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 만큼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이맘쯤, 우리 부부는

Ely Lilly라는 재단의 재정 지원으로

40일 동안 유럽 여행을 하며 휴가를 보냈습니다.

 

감리교가 시작된 런던을 시작으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독일,

이태리 로마, 그리스의 아테네와 고린도까지

대부분 기차를 타고 여행했습니다.

 

유럽에서 흔하다는 소매치기도 당하지 않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다녀왔습니다.

저희 인생에 이렇게 긴 여행,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여행은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행이 끝났을 때,

“다 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하면 몸이 지칠 것 같았습니다.

계획한 곳들을 거의 모두 방문했습니다.

 

일 년이 지났지만, 엊그제 다녀온 것처럼

저희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평생에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입니다.

 

2.

여행을 다녀온 이후,

여행 관련 유튜브를 자주 시청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제가 다녀온 곳들을 중심으로

복기(review)하듯이 유튜버들의 설명을 듣고,

다시 방문하는 듯한 느낌으로 영상을 봅니다.

 

저희가 갔던 장소가 나오면 반갑고 익숙합니다.

방문하지 않았던 곳이 나오면

‘미리 알았더라면 꼭 들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여행은 아는 것만큼 보이고 즐긴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면,

그만큼 여행의 깊은 참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도 의미를 찾고, 세심하게 감상할 것입니다.

 

또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것은 작년으로 충분하고

한두 도시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미리 공부해서 골목까지 속속들이 충분히 즐기고 싶습니다.

 

3.

여행만 그럴까요!

우리 인생 여정도 비슷합니다.

대충대충 지나가면,

정말 귀하고 소중한 것을 놓칠 가능성이 큽니다.

 

인생길에 만나는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아는 만큼, 이야기한 만큼

이해하고 격려하며 도울 수 있습니다.

만남의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아셨고,

만날 사람들, 해야 할 일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벌써 6월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배우고 익히면서,

인생의 여정도, 신앙의 여정도 충분히 누리길 바랍니다.

 

아쉬움은 뒤로하고

감사가 넘치는 한 해를 만들어갑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25:4)

 

 

 

하나님,

주님의 생각을 알고,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12. 이-메일 목회 서신)

레드우드 나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말에는

전교인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몸이 편찮으신 권사님들,

출타한 식구들이 참여하지 못하셨지만,

아이들부터 권사님들까지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련회 장소는 완벽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그 넓은 장소를 우리만 사용하는 호사도 누렸습니다.

 

수련회장(場)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하늘까지 치솟은 레드우드 나무(redwood tree)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레드우드 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에 속합니다.

100미터 이상 곧게 자랍니다.

 

레드우드 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서로 엉켜 있어서 좀처럼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련회장에 있는 레드우드 나무를 살펴보니

하나의 뿌리에서 두 그루가 자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북부에 서식하는 레드우드 나무는

뿌리에서 공급하는 수분과 더불어

안개를 먹고 자란답니다.

 

우기와 건기가 구분되는 우리 지역에서

레드우드 나무가 그처럼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이

안개 때문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수명이 무려 천 년에서 삼천 년이 된다고 하니

수련회 장에서 만난 레드우드 나무를 보면서

수천년 전까지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레드우드 나무도 처음에는 작은 싹이었을 것입니다.

천년을 자라서 100미터가 되었다면

해마다 10센티씩 자란 셈입니다.

 

2.

레드우드 나무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떠올렸습니다.

 

신앙도 하나님을 향해서 곧게 자라야 합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자라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라갈 때,

레드우드 나무 못지않은 높은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레드우드 나무의 뿌리가

서로 얽혀서 크고 높게 자라듯이,

공동체가 서로 의지하고 삶의 뿌리가 서로 얽혀있을 때,

건강하고 힘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레드우드 나무가 안개를 먹고 자란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아침 읽고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개와 같을 것입니다.

당장 눈에 띄지 않아도 매일의 성경 묵상이 우리 신앙을 높이 자라게 할 것입니다.

 

뿌리부터 견고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곧게 높이 자라는

우리의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벧후 3:18)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높이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29. 이-메일 목회 서신)

나랏빚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용평가 회사 무디스에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상에서 한 계단 내렸습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가 지나치게 많고

그에 따른 이자 부담과 자금 조달 능력이 의심된다는 평가였습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2025년 5월 현재, 36조 달러(한화5경원)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이 지불하는 이자 비용은

국가 예산의 16%로 국방예산(15%)보다 많습니다.

빚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악순환입니다.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국은 예산의 70%가 사회보장, 고령자와 저소득 의료보험 지원

기타 실업 급여 등의 의무 지출(mandatory spending)입니다.

 

나머지 30%를 국방과 기타 예산으로 할당하니

거기서 흑자를 내고 부채를 갚아야 하는데

부채는커녕 이자 상환도 쉽지 않습니다.

 

2.

미국의 빈부격차도 매우 큽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을 때,

소위 수퍼 리치들의 자산은 천문학적으로 늘었습니다.

상위 1%의 미국 전체 자신의 30%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하위 50%가 갖고 있는 자산은 3%에 불과합니다.

 

100개의 피자 조각이 있다면, 한 명이 30개를 갖고 있고

하위 50명은 세 조각을 갖고 나눠 먹는 실정입니다.

 

어제 미국 하원에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이 통과되었습니다.

저소득층 지원을 축소하고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는 내용입니다.

 

격차가 더욱 심해질 것이 뻔합니다.

그나마, 중간 계층과 팁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하여튼,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할 겁니다.

동네 피자를 독식하는 수퍼 리치들에게서

세금을 더 거둬야 할 것 같습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알만한 부자들 19가정의 자산이

자그마치 1조 달러가 늘었다기에 하는 말입니다.

 

3.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만 지라고 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과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욕심 때문일 겁니다.

 

지도자들에게 하늘의 지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국가 재정의 문제를 힘없는 서민에게

직간접적으로 떠넘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렘 29:7)

 

 

하나님,

세상에 평안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22. 이-메일 목회 서신)

견딜힘

좋은 아침입니다.

 

1.

창세기를 읽으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 짠한 생각과 함께 깊이 공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입니다.

요셉이 이집트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을 소개합니다.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묻자, 야곱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이가 얼마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4:9)

 

“험악한 세월”에 쓰인 히브리어 <라아>는

“악(evil)”을 가리킬 때 주로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의 “험악한 세월”이라는 번역이 매우 적절합니다.

 

야곱의 답변은

130년 동안 살면서 겪은 고단한 인생 여정, 그 험악한 세월이

그의 얼굴과 몸에 고스란히 새겨졌다는 뉘앙스로 읽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곱의 삶은 거칠고 험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빼앗은 뒤 도망쳐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는 14년을 종처럼 살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라헬이 낳은 첫째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거짓 소식에 수십 년을 속고 살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넘긴 것이었지요.

 

흉년이 닥치자, 양식을 구하러 자식들을 이집트로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도 막내 베냐민을 보내야 한다는 일로 마음고생 합니다.

이집트에 총리로 있던 요셉을 만나는 과정도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인생 말년에 이집트로 내려와 가족들과 함께 지냅니다.

짐승에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다시 만난 것으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타향살이입니다.

 

말 그대로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고,

그의 인생이 그의 모습에 그대로 새겨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끝까지 견뎠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던 ‘이스라엘’답게 꿋꿋이 견뎠습니다.

 

2.

쉬운 인생은 없습니다.

희로애락을 모두 겪으면서 걷는 인생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설교나 간증이

‘나’에게 임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런 말에 감동하는 횟수도 뚝 떨어졌습니다.

 

대신, 조상들에 비하면 나이가 많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이집트 바로 앞에서 솔직히 말하는

야곱의 고백이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깊이 공감됩니다.

 

그렇습니다. 쉬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도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고난을 면제해 주시지는 않지만,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반드시 주십니다.

고난을 헤쳐 나갈 지혜와 용기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바라보면서

행여나 기죽지 말고,

꼿꼿하게 걸어갑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시편28:7)

 

 

 

하나님,

견딜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15. 이-메일 목회 서신)

투덜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아침 묵상 본문이 구약성경 민수기입니다.

민수기는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민수기의 히브리어 성경 타이틀이

“광야에서”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모세가 신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정탐꾼으로 뽑아,

40일 동안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 여호수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지도자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부정적인 의견에 동조했고,

결국 40일을 햇수로 계산한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몸소 경험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내내

불평과 불만, 원망을 달고 살았습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직후,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자

“이집트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데리고 나와서 죽게하느냐”고

모세에게 강력히 항의했습니다(출14)

 

두 달도 채 되지 않아서는 물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집트에 있을 때는 고기를 배불리 먹었는데,

굶어 죽게 생겼다고 불평했습니다(출16).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에 있을 때는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 마늘”을 충분히 먹었다면서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에 대해 불평했습니다(민11).

여기서 참외는 멜론 종류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1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40년 광야 생활 끝에 도달한 2세대조차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불평과 원망의 끝판왕이 되었습니다.

 

2.

불평과 불만은 비교해서 비롯됩니다.

과거와 비교해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사정이 나쁘면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자신이 기대한 것과 현실 사이에 차이가 생길 때도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불평과 불만의 지경이 꽤 넓어서

상황과 환경, 친지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불평까지 총망라됩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달고 사는 ‘투덜이’입니다.

 

불평과 투덜거림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감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희망 가운데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헤아릴 때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평과 불만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은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표시임도

꼭 기억하고 잊지 맙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하나님,

오늘 하루 불평없이 감사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8. 이-메일 목회 서신)

품격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정기 검사를 위해서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프란치스코 교황 이야기를 합니다.

 

제 의사는 약간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입니다.

물론 제가 목사인 것을 압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보적인 면은 탐탁지 않지만,

그는 매우 서민적인 훌륭한 분이었다고 칭찬합니다.

개신교 목사에게 은근슬쩍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존경받을 분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2.

지금부터 12년 전입니다.

교황이 연설하는데,

한 아이가 교황의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의치 않고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교황이 한 아기를 안았는데

그 아기가 교황의 모자(“주케토”)를 벗기고 머리를 만졌습니다.

아이가 모자를 벗기고 머리를 만져도

교황은 웃음을 잃지 않고 아이를 안아주었습니다.

 

이 두 개의 그림만 생각해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민적이었습니다. 소박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겠다고 했을 때,

“다리는 세우지 않고 벽만 세우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따끔하게 충고했습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도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제의 길에 접어든 이태리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에서 왔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평화의 기도”를 지으신 분입니다.

교황 중에 처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가졌답니다.

 

3.

교황의 유해가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되고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을 때였습니다.

 

가까이는 남성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데

키가 150cm에 불과한 80대 수녀가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말없이 조문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자넹그로스라는 수녀였습니다.

그는 교황과 수십 년 동안 우정을 쌓아온 분입니다.

소외 계층을 위해서 헌신한 분입니다.

 

교황은 이 조그만 수녀를 향해서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라고 불렀답니다. 작은 거인쯤 됩니다.

자넹그로스 수녀는 교황을 회고하면서

아버지 같고 형제 같고 친구 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계속 앞으로 나가라”고 말하면서 격려했던 눈빛과 격려를 회고했습니다.

 

4.

지도자들에게서

‘품격’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요즘 세상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정한 품격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아니 높은 자리에 있어도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성육신(incarnation)의 신앙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너무 폼을 잡지 않고 이해관계에 민감하지 않고

조금 어리숙해 보여도 일상의 작은 행동과 말투,

오랜 우정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품격을 갖추고 싶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Mat5:9)

 

하나님,

근사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1. 이-메일 목회 서신)

부활의 삶

좋은 아침입니다.

 

1.

부활절이 지났지만,

앞으로 일곱 주간은

교회력에 따른 부활 절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앞으로 50여 일 동안 부활을 삽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오늘날 과학의 잣대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부활이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야 한다고 강요할 것도 아니고,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는 척할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는 신앙의 많은 부분을

주입했고 믿도록 강요했습니다.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괄호)에 넣고

자신에게 확실한 것을 중심으로

신앙을 펼쳐 나가는 것도 현명한 자세입니다.

 

3.

눈에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어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그대로 따라 사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과학 지식을 대입하면서

부활의 문제와 씨름하기보다 부활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부활을 연습하라(Practice Resurrection)”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부활을 연습해야

훗날 하나님 앞에서 부활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과 평안을 주십니다.

죽음의 세력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차분하고 침착합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매일같이 자존심, 자만심,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갑니다.

이 모든 것이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살 때,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가 되고,

역사적인 사실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리가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무엇으로 끊임없이 들어가게 된다.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살아 계시며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 길은 언제나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유진 피터슨 <부활을 살라: Practice Resurrection>-

 

하나님,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24. 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길

좋은 아침입니다.

 

1.

3주에 걸쳐서

‘길’에 대한 글을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길은

베드로와 바울이 걸었던

로마의 <아피아 가도>였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가 걷는 인생길이었습니다.

우여곡절을 모두 겪는 인생이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믿음의 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한

“해골(골고다, 갈보리)”이라는 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지은 죄의 무게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는

육신적으로도 많이 지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과 겟세마네 기도,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의 심문, 군인들의 조롱까지

밤새도록 시달리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병정들은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아프리카 북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시켜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도착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2.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순례길이 있답니다.

라틴어 <비아 돌로로사>는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는 것은

기독교의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빌라도 법정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무덤에 묻히신 것을 기념하는
“성묘 교회(Holy Sculpture Church)”까지

600미터 (2000ft)에 달하는 길입니다.

 

비아 돌로로사에는 14개의 스테이션이 있답니다.

앞에서 말한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곳,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

예수님께서 세 번 넘어지셨다고 추정되는 곳들을 지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힌 무덤이 마지막입니다.

각 지점마다 교회가 세워졌거나 기념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를 걷는 순례객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3.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비아 돌로로사”를 생각하고 걷기 원합니다.

 

한 해 동안 지나온 발길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예수님을 초대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모두 지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지난주에 나눴던 조지 베나드(George Bennard) 목사님의

“갈보리산 위에(Old Rugged Cross)”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 우리도 걷겠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So I’ll cherish the old rugged cross,

till my trophies at last I lay down;

I will cling to the old rugged cross,

and exchange it some day for a crown.

 

 

하나님,

낡고 거친 십자가 붙들고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17. 이-메일 목회 서신)

인생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길(道)”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인생도 우리가 걸어가는 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 <할라크>는 “걸어가다”는 뜻인데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도(道)”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행18:26).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걸어야 할 길,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자체가 “길(道)”입니다.

 

2.

우리가 걷는 길이 결코 일정하지 않습니다.

평평한 인생길은 없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곧게 뻗은 길이 있으면

구불구불한 길이 있습니다.

울퉁불퉁한 길이 지나면 쭉 뻗은 아스팔트 길이 나옵니다.

오솔길도 있고, 신작로도 있습니다.

 

한 평생 살면서

우리는 모든 길을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때로는 옆에 펼쳐진 길은 쉽고

자신이 걷는 길은 늘 어려운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떤 길도 쉽지 않습니다.

우여곡절이 없는 길은 없습니다.

 

3.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국의 한 재판관의 사연을 보았습니다.

최고의 위치에 오른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자폐증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잘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폐 아들을 키우면서 겪는 아픔이 너무 컸습니다.

아들이 달려드니 부부의 몸에 상처가 끊이지 않고

네 식구가 외출하면 사람들이 쳐다보고 마음이 편치 않답니다.

그래도 주말이 되면 아들과 등산하는 것이 기쁨이고

그 아들을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아 보였고,

그 분이 걸어온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같아 보였는데,

말못할 아픔을 갖고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발자국만 들어가보면,

한두 시간 깊은 대화를 나눠 보면,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 평탄치 않습니다.

돌멩이를 가슴에 안고 걷는 무거운 발길입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평안하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분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4.

우리의 삶도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 앞에서만 했던 말들을 모으면 한 자루는 될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어진 길을 걸어갑니다.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눈에 그리고 꾸역꾸역 걸어갑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옆에서 걸어가시는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수 1:9)

 

 

하나님,

함께 하시니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10. 이-메일 목회 서신)

아피아 가도

좋은 아침입니다.

 

1.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영토를 넓혀가면서 대로를 만들고

군사, 무역, 치안 등을 관리했습니다.

 

로마가 첫 번째 만든 대로가

아피아 가도(via Appia)입니다.

주전 312년 아피우수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라는 집정관이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아피아 가도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반도 남부에는 늪지대가 있어서

군인들의 이동은 물론 보급품 공급이 힘들었습니다.

이것을 파악한 아피우수가 군사용 대로를 건설한 것입니다.

 

훗날, 이탈리아 남부 부린디시 항구까지 연장되면서

군사는 물론 무역과 일반인의 통행까지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563킬로미터(350마일)에 이르는 로마 제국 최초의 대로(大路)입니다.

 

2.

아피아 가도는

군인들과 화물의 편리한 이동을 위해서 직선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운데를 높여서 배수가 가능했고, 인도와 차도를 구분했습니다.

길 양옆에 사이프러스와 같은 나무를 심는 조경도 잊지 않았습니다.

 

길에는 자갈과 모래를 깔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돌 조각을 아스팔트처럼 넓게 배치했습니다.

악천후가 되면, 로마 제국의 도로들이 진흙탕으로 변하는 것에 비하면

아피아 가도는 포장도로인 셈입니다.

현재도 국도로, 관광객들의 순례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박해와 사역에 지친 베드로가

아피아 가도를 통해서 로마를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가 로마를 두고 떠나면 예수님 자신이 로마에 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발길을 돌려서 로마로 향했고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죽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아피아 길 초입에

베드로를 기념하는 쿼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 안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베드로의 성화가 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된 사도 바울 역시

보디올이라는 나폴리 근처에 위치한 항구에 도착해서

아피아 가도를 통해서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1960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전설의 마라톤 영웅 아베베가

금메달을 딴 것도 아피아 가도 코스였습니다.

돌로 만든 길이어서 아스팔트처럼 도로 면이 평평하지 않은데

그곳에서 마라톤 경기를 진행했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3.

작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

잠시 아피아 길을 걸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걸었던 길이라고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2,300년 전,

돌을 깔아서 만든 튼튼할 길입니다.

2천 년 동안 다녔던 발길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길이었습니다.

 

4월, 새달을 맞이했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길로 이어질지

근심과 우려가 큽니다.

 

그래도 우리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임시방편이 아니라,

얄팍한 계획과 행동이 아닌,

깊이가 있고 수많은 발길과 사건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튼튼하고 살아있는 대로이길 원합니다.

 

함께 그 길을 만들어갑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하나님,

튼튼하게 길을 만들고

꿋꿋하게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