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사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달 신문에 실을 칼럼 주제를 생각하다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시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와서 세 가지 숙제를 해야 하는 천사 미하일과

그를 돌보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 세몬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 미하일에게 주신 세 가지 숙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미하일이 교회 앞에서 헐벗은 몸으로 쓰러져 있을 때

구두 수선공 세몬이 다가와서 미하일을 그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오갈 데 없다는 얘기를 듣더니 구두수선 하는 일에 조수로 써주었습니다.

 

세몬의 따뜻한 환대를 경험한 미하일이 첫 번째 숙제를 마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 부자가 까다로운 조건으로 가죽 장화를 부탁했는데

천사 미하일은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었습니다.

부자의 신발을 망쳐 놓은 것입니다.

주인 세몬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부자의 하인이 와서 주인이 사고로 죽었다고 알립니다.

 

천사 미하일은 이 사건을 통해서 사람에게는

앞길을 미리 아는 예측력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발견했습니다.

두 번째 숙제도 마쳤습니다.

 

하루는 어떤 부인이 쌍둥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구두 두 켤레를 주문하는데

한 아이의 발이 비정상적이었습니다.

구두 수선공 세몬이 두 아이가 모두 친자식인지, 왜 발을 다쳤는지 물었습니다.

 

부인이 대답하기를, 이웃에 살던 여성의 아이랍니다.

여성이 죽었는데, 그 순간 한 아이 발 위로 넘어지면서 발을 다치게 되었고,

마침 부인에게 두살배기 아기에 있었기에 함께 젖을 먹이며 키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친자식이 갑자기 죽으면서

불쌍한 두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었습니다.

천사 미하엘은 부인을 보면서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의 답을 찾았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2.

지난 6주에 걸쳐서 함께 나눈 <돌봄>이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톨스토이를 통해서 다시 배웁니다.

 

인간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구두 수선공이 아내에게 값비싼 외투를 선물하기 위해서 시장에 갔다가

가진 돈으로 술을 먹게 될 것도 예측할 수 없던 일입니다.

기고만장했던 부자가 집에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앞을 내다보는 능력은 주지 않으셨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장착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주어진 인생을 아름답게 살라는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으로 삽니다.

 

요즘 아침 큐티 말씀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 신학적인 해석, 교리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리고 깊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고 세상과 섞여서 살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을 잃기 쉽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앞일을 알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삽니다.

부족하지만 ‘사랑’으로 서로 돌보며 살아갑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4-45)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so that you may be sons of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Matthew 5:44-45)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믿음과 사랑으로 사는 참빛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2. 21이-메일 목회 서신)

 

밸런타인 데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2월 14일 밸런타인 데이입니다.

밸런타인 데이를 맞아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밸런타인 데이를 연인들 간에 초콜릿을 주고받는 날로만 알고 있는데

그것보다 더 깊은 유래와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발렌타인은 300년경에 순교한 로마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성인 칭호를 받아서 성 발렌타인 (St. Valentine)이 되었습니다.

당시 황제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황제에게 기독교를 전하며 순교했답니다.

 

발렌타인 감독은

그를 지키는 간수의 딸이 앞을 보지 못했는데 눈을 뜨게 해 주었고,

순교 전에 그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맨 마지막에

“Your Valentine”이라고 덧붙였답니다.

이후에 발렌타인 카드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2월 14일의 특정한 날짜는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지만

발렌타인이 묘지에 묻힌 날이라는 것이 유력하니

그날이 발렌타인의 순교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영국 국교회는 물론 루터교를 비롯한 몇몇 기독교회에서

성 발렌타인 데이를 성일로 지키고 있답니다.

 

2.

발렌타인 데이가 연인 간의 사랑으로 발전한 것은

14세기 영국의 시인 초우서(Chauser)가

밸런타인 데이를 새들이 짝을 찾는 날로 묘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성 발렌타인 데이라네,

새들이 짝을 찾아 떠나는 날.
For this was on St. Valentine’s Day,

when ever bird cometh there to choose his mate

 

그 이후로 영문학에서 밸런타인 데이는

새들이 짝을 찾듯이 연인들의 사랑,

봄이 되는 길목 등을 상징하면서 종종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와 19세기를 지나면서

밸런타인 데이에 카드를 보내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꼭 연인들이 아니어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카드를 보냈는데

우표가 발명되면서 한해에 40만 장의 카드가 팔린 적도 있답니다.

 

1847년에는 미국 매사추세츠에 있는 카드 회사에서도 밸런타인 데이 카드를 발행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카드 뿐만 아니라 선물을 주고받는 날로 발전했습니다.

2017년 기준으로 발렌타인과 관련된 매상은

미국에서만 182억 불에 달한다니 엄청난 상거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밸런타인 데이에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면서

사랑을 표시하는 것은 일본 회사가 처음으로 시작했답니다.

 

3.

밸런타인 데이의 유래를 알고 나니

기독교인으로 다음과 같이 밸런타인 데이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신앙을 지키면서 순교한 성자 발렌타인을 기억하고,

기적적으로 눈을 뜨고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은 간수의 가족도 생각하면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지들이 있다면 카드도 보내고,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께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밸런타인 데이에 고백하는 사랑이

단지 연인들 간의 사랑인 <에로스>를 넘어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까지 기억하고

서로 나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Happy Valentine’s Day!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So we have come to know and to believe the love that God has for us.

God is love, and whoever abides in love abides in God, and God abides in him.(I John 4:16)

 

하나님 아버지,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과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이웃 사랑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2. 14이-메일 목회 서신)

레위기 11장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 성경 통독이

그렇게 어렵고 지루하다는 레위기에 왔습니다.

통독 반원들께는 레위기에 집착하지 마시고 쭉쭉 읽어 가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그만큼 레위기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어제 레위기 11장을 만났습니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을 구분합니다.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정하기에 먹을 수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만 해당하는 낙타, 토끼, 돼지는 먹을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도 먹을 수 있습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완벽한 물고기의 조건으로 본 것입니다.

독수리, 타조, 올빼미처럼 먹이를 탈취하는 조류는 먹을 수 없습니다.

날개가 있으면서 동시에 네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도 부정합니다.

메뚜기처럼 날개가 있어도 네 발로 뛰는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11장 1-23절)

 

심지어, 부정한 짐승의 사체를 만지거나 접촉해도 부정합니다.

이처럼 정한 것과 부정한 것 (clean vs. unclean)에 대한 규정이 복잡하고 엄격합니다.

 

2.

그런데 레위기 11장에서 알려주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첫째로, 특별한 기준이 없고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임의로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요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에 뚜렷한 기준이 없는 것을 고려한 해석입니다.

 

둘째는, 본문의 부정한 짐승들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의 제사에 사용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니 먹을 수 없습니다.

돼지가 대표적인데, 그렇다면 바알신의 상징인 소고기도 금해야 했기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셋째는, 의학이 발달한 근래에 제기된 의견으로 위생상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세균을 옮기기 쉽거나 박테리아 등을 갖고 있는 위험한 짐승들이라는 것입니다.

상하기 쉽고 종종 전염병을 일으키는 돼지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이 건강상 해롭다는 지적이 없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네 번째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온전한 것(wholeness)과,

창조 섭리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normality)을 중요시 합니다.

레위기 11장에서 정한 것으로 분류한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먹이를 새김질하는 짐승을 정한 것으로 구분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새김질하듯이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입니다.

상징적인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비약이 있고 주관적입니다.

 

3.

쉽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의견만 지지하거나 고집할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견해가 맞는지를 두고 집요하게 연구할 것도 아닙니다.

본문 자체가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1장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하나님께서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셨을 것이니

본문의 규정을 현대에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45)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의적 명령이든, 이방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했든지

위생상의 이유나 상징적인 의미에서든지 11장의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 백성에 걸맞은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함”은 무엇일까요?

우리 몸을 스스로 더럽히는 것들은 없는지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먹는 것으로 거룩함을 유지했다면

우리는 무엇을 갖고 거룩함을 지켜야 할까요?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오늘 하루를 살아 봅시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레 11:44)

For I am the LORD your God.

Consecrate yourselves therefore, and be holy, for I am holy. (Lev 11:44)

 

하나님 아버지

구약의 복잡한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함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2. 7이-메일 목회 서신)

격차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 한 신문에서 마이크로 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17세에 창업해서

얼마 전까지 세계 최고 부자의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현재 그의 자산은 96억 불입니다.

온 세계 사람들에게 10불씩 나눠줘도 20억 불이 남는 정도랍니다.

 

빌 게이츠는 일주일 가족여행에5백만 불을 씁니다.

스피드를 즐기는 그는 최고급 자동차는 물론

2천만 불짜리 자가용 비행기도 있습니다.

 

물론 빌 게이츠와 그의 부인은 자신들이 세운 자선단체에 많은 재산을 기부해서

후진국의 의료와 교육을 돕는 등 좋은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재산의 1% 정도에 해당하는

1천만 불 (우리에게는 천문학적 숫자)씩만 나눠준답니다.

 

기사에는 흥미로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맥도날드 햄버거를 좋아하고

10불짜리 손목시계를 차고 있으며

옷에는 관심이 없고, 하루에 서너 캔의 다이어트 콜라(Diet Coke)을 마신답니다.

 

그러고 보니 빌 게이츠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2.

미국은 2008년 경제 위기를 기점으로 소득 격차가 더욱 극심해져서

1% 수퍼 리치(super rich)의 자산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 전체 자산의 절반 정도를 1% 부자들이 차지할 정도입니다.

 

빈부/소득 격차를 줄여야 합니다.

1차 세계대전 때 당시 10만 불 이상 소득을 올리면 80%에 가까운 세금을 냈고

대공황 때도 최고 60% 이상의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세금을 비롯한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부의 공평한 분배가 이뤄져야 합니다.

 

빌 게이츠가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좋아하듯이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고 열심히 살았어도,

같은 사람인데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고 부를 독식하는 것은

불공평을 떠나서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이미 늦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습니다.

 

3.

이번 주 성경 통독이 출애굽기였습니다.

 

안식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일곱째 해가 되면 땅을  묵히고

행여나 저절로 맺는 열매가 있어도 절대로 수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심지어 들짐승이 먹도록 놓아두라는 것입니다.

 

50년마다 맞이하는 희년(the year of Jubilee)은 모든 것을 처음 상태로 되돌리는 해였습니다.

땅은 물론 백성들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람들이 만든 격차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 공평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출 23:11)

but the seventh year you shall let it rest and lie fallow, that the poor of your people may eat;

and what they leave the beasts of the field may eat. You shall do likewise with your vineyard, and with your olive orchard.  (Exodus 23:11)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애초에 의도하신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31이-메일 목회 서신)

                   

롤러코스터

좋은 아침입니다.

 

1.

새해 첫 달이 지나갑니다.

힘차게 새해를 시작했지만 20여 일이 지나면서

새해 역시 평범한 일상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생겼겠지요.

 

우리는 올 한해를 지내면서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꼭대기와 골짜기를 반복해서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 생각, 관계, 세상의 삶,

심지어 우리의 신앙도 높낮이를 경험하면서 한 해를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요 우리가 가진 밑천의 한계입니다.

 

지난번 설교에서

로마서 12장 2절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롬12:2)라는 표현 속에는

“다시” 새롭게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다시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함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2.

  1. S 루이스는

악마가 그리스도인을 유혹하는 전략을 흥미롭게 묘사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침체와 건조함의 골짜기”에 있을 때

그것을 잘 활용해서 시험에 들게 하는 악마의 전략을 알려줍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올 한해는 흔들림 없이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벌써 침체와 건조함의 골짜기에 내려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비관해서 힘들어하거나

반대로 “그럴 수 있다”고 지나치게 낙관하면서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데

악마가 그 순간을 교묘하게 파고 든다는 것입니다.

 

악마가 가장 힘겨워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인생의 골짜기를 걷고 신앙이 흔들리더라도

계속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도를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원수 [악마에게는 원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악마의] 커다란 전략이 위협받을 때는 없다”

 

3.

우리의 삶의 길이 장밋빛 융단일 것이라는 기대는

그동안의 경험상 일찌감치 접었습니다.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번갈아 내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삶은 롤러 코스터의 반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릴 적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즐겼듯이

우리의 인생도 결을 따라 살면서 즐겨야 합니다.

거기서 무너지면 C.S 루이스의 표현대로 악마가 가장 좋아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분명히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매번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And we know that for those who love God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for those who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Rom 8:28)

 

하나님 아버지

새해를 살면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떤 상황에도 신앙만은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17이-메일 목회 서신)

비판의 기술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후반기 동안

주보의 <짧은 글 깊은 생각>에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서 발췌한 글을 소개했습니다.

올해는 “비판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매주 한 단락 씩 발췌해서 소개할 계획입니다.

 

주보를 성심껏 챙겨서 읽는 분들도 계시고

그냥 넘어가는 분들도 계시는 줄 압니다.

목사인 저는 우리 교인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을

(요즘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고 제가 잘하는 것 위주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비판의 기술>은

세인트루이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인

테리 쿠퍼 (Terry Cooper)가 썼고 한국 IVP가 번역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비판과 비판주의를 구분합니다.

건전한 비판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하지만 비판을 일삼거나,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나 그의 생각, 세상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마지막 장은

“열린 마음과 너그러운 가슴을 품은 ‘은혜 충만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공동체와 그 안에서 펼쳐지는

서로 돌보는 거리낌 없는 대화를 제시합니다.

 

앞으로 중요한 대목을 주보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2.

비판의 기술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타인을 비판하는 데 익숙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서로 핑계를 댄 것도 일종의 비판입니다.

그러니 비판은 태생적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비판하는 방식을 배운 적이 없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잣대나, 방법을 사용하지만

꽤 주관적이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공동체도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속으로 다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으니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3.

비판에 기술이 필요합니다.

비판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앞으로 2-3주 살펴볼

로마서 12장 후반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칠 때

우리 자신은 물론, 가족과 공동체, 넓게는 세상을

비판을 넘어서 은혜로 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올해 우리 교회 표어인 “돌봄(긍휼)”과 만납니다.

 

멋진 비판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비판주의에 빠지지 않고

큰 바위 얼굴처럼 커다랗고 넓은 신앙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합니다.

 

긍휼이 전적으로 은혜의 선물 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긍휼을 우리 삶에서 얼마든지 계발하고 훈련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긍휼은 영적 훈련이다. (비판의 기술, 188)

 

하나님 아버지

올 한해 우리의 신앙은 물론

사고, 성품, 삶이 멋지게 자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17이-메일 목회 서신)

돌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연말부터 미국 정부의 모든 예산 집행이 닫혀있습니다(shut-down).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겠다는 대통령과

그것은 재정의 낭비라는 의회의 대치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닙니다.

국경을 넘어온 사람 중에는

미국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넘어올 정도라면 보통 사람들이 아니니 위험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넓고 긴 국경에 벽을 쌓는다고 밀입국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국경을 넘은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이 감당해야 할 몫일 수 있습니다.

미국이 돌봐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돌봄에는 부작용도 있고, 희생도 따르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돌봄입니다.

 

2.

헨리 나우웬은 <돌봄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

이 정체성을 주장할수록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이 있다.

사랑의 창조주가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려는 관점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나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경청, 심방, 독서, 글쓰기 등을 통해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을 섬긴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험에 동참해야 했고, 그중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돌보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 쉬운 일을 해볼까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깨달은 게 있다.

쉬운 일을 욕망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내 헌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봄의 영성, 46-47쪽)

3.

헨리 나우웬의 고백대로

돌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 <돌보는 교회>라는 주제로 살게 됩니다.

돌봄을 받으려고 하면 돌볼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돌봄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값 주고 사신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와 이웃, 그리고 세상을 돌보기 원합니다.

 

돌볼 수 있는 믿음, 마음, 손과 발과 능력이 있음에 감사하면서…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Be merciful, even as your Father is merciful. (Luke 6:36)

 

하나님 아버지

돌봄을 받고 돌봄을 기대하기보다

돌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10이-메일 목회 서신)

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새해에 보내는 첫 번째 목요서신입니다.

올해도 서신을 함께 나누면서

신앙과 삶이 함께 가고,

우리 자신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저로서는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늘 감사하답니다.^^

 

엊그제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 판에

감동적인 미담(美談)이 실렸습니다.

 

40년 전 각각 미국에 입양이 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각자의 건강정보를 위해서

DNA 테스트를 했고 DNA가 일치하는 자매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자매는

조지아주에서 불과 40분 거리에서 10년동안 살고 있었습니다.

 

두 자매는 생후 5개월과 18개월이 되었을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생모가 공장에서 일하던 미혼모였는데 양육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입양한 가정에서 잘 자라서

신기하게도 자매 모두 프리스쿨 교사가 되었습니다.

 

40년 만에 만난 두 자매는 가족들의 축하를 받았고

서로 지난 얘기를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낸 후에

어쩌면 생전에 계실 생모를 찾을 계획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의기투합해서 파티 관련 사업도 시작했답니다.

불혹이 넘어서 재회한 자매가

둘이 있어서 그들의 인생이 더욱 행복하길 기사를 읽으며 기도했습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1970-80년대에 미국으로 보내진 입양아가 11만 명이 넘는다니 엄청난 숫자입니다.

기사에 나온 자매들처럼 함께 입양된 형제자매들끼리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2.

인생에서 만남만큼 귀한 것도 없습니다.

만남 속에는 헤어짐이 숨겨져 있다지만

헤어짐도 만남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예수님과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족은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우리 교회에서의 신앙생활도 만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웃과의 만남은 물론 우리는 올 한해 누군가를 계속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정기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실 것도 부탁드립니다.

 

저는 아침에 보내드리는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과 만나겠습니다.

일주일마다 목요서신을 통한 만남도 기대합니다.

 

올 한해 참빛 식구들에게 만남의 복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들을 만나길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동료를 만나고, 조력자들을 만나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기대하시는 만남도 꼭 이뤄지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만남, 신앙의 동역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17)

I love those who love me,

and those who seek me diligently find me.(Prov 8:17)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참빛 식구들의 모든 만남을 예비하시고

주님께서 참빛 식구들을 순간순간 만나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3이-메일 목회 서신)

마무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작은 일에 충성>이었고

올 초에 교회 표어와 관련한 목요 서신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 앞 유리에 돌이 날라와서 구멍이 났을 때

그것을 정성껏 보수해 주신 분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세상에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계심을 소개했습니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분은 말을 못 하는 분이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연초에 보냈던 메일 가운데 일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작은 일에 불과할 겁니다.

그러니 매사에 충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실제로 “작은 일”도 있습니다.

사소하고 스쳐 지나가기 쉬운 일입니다.

올 한해는 그런 일도 챙겨 보고 싶습니다.

 

유리창의 아주 작은 흠집을 보수해주셨듯이

세상에는 작은 일을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수행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존경과 박수를 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우리 교회 표어대로

올 한해, 아니 오늘 하루

우리 주변의 작은 일에 성실하고

작은 자들을 챙기고

작은 일을 하시는 분들께 감사하기 원합니다.

 

2.

올해가 나흘 남았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이웃과 세상 속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였는지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보여드릴 수 있을지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요?

 

물론, 자신 있게 “예스/yes”라고 답할 정도의 강심장은 우리 가운데 없으십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은혜가 필요하고

올 한해도 은혜로 살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재빠르게 은혜 속으로 숨거나, 무작정 은혜를 갖다 대지 말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과연 “작은 일에 충성”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3.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께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찮아 보이는 일을 정성껏 하시는 분들입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시는 분들입니다.

 

이처럼 작은 일에 충성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일정하게 유지될 겁니다..

 

더불어, 작은 자 하나를 사랑하시고

창조주 입장에서 보면 정말 하찮은 일까지 챙기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한 해를 마무리합시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 25:21)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over a little;

I will set you over much. Enter into the joy of your master. (Mat 25:21)

 

하나님 아버지

작은 일에 충성하며 한 해를 살아온

참빛 식구들께 힘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2. 27이-메일 목회 서신)

일상의 보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얼마 전에 소천하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몬태나 출신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정육점을 하셨습니다.

피터슨 목사님은 어려서부터 정육점에 나가서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목사님은 종종 그의 저서에서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억을 신앙과 연결시킵니다.

 

정육점에서 입었던 앞치마를 보면서

성경의 인물인 사무엘이 입었던 에봇(제사장 복장)을 떠올렸습니다.

성소에서 자랐던 어린 사무엘은 키가 자라면서 에봇을 교체해야 했는데

자신도 자라면서 정육점의 앞치마가 점점 커졌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육점을 사무엘이 자랐던 성소와 비교한 것도 특별했습니다.

 

“칼은 자기 나름의 의지가 있어” –

정육점 직원이 피터슨 목사님께 해준 말입니다.

실수해서 손을 베면,  “네가 칼을 몰랐다”며 주인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칼도 함부로 사용하지 말고

용도에 따라서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고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렇게나 고기를 자르거나 손질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의 종류와 부위에 맞게 다뤄야 합니다.

 

피터슨 목사님의 아버지는 고기를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다루는 직원을 “해커”라고 불렀답니다.

칼은 물론 고기까지 존중하는 것이 정육점의 관습이었습니다.

 

정육점을 찾는 손님들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정육점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가 아버지의 고객입니다.

아버지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손님을 존중하셨습니다.

이름을 부르면서 맞이하셨기에

정육점에 들어오는 모든 고객은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정육점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몸을 파는 여성들이 거주하는 곳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여성들이 고기를 사러 정육점에 들어오면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면서 부자 고객과 똑같이 맞이하셨답니다.

 

고기를 구입한다는 면에서

정육점을 찾는 사람들은 차별이 없었고

아버지 역시 모든 사람을 존중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거나 또는 누구를 대하든지

우리 고집 또는 생각대로 하지 말고

상대에 맞게 또는 주어진 조건에 맞게 처신해야 하는데

그것을 피터슨 목사님은 “겸손”이라고 불렀습니다.

 

2.

늘 그렇듯이

피터슨 목사님의 글쓰기는 창의적이고

자잘한 부분까지 공감을 일으킵니다.

 

어릴 적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자신의 신앙, 사람을 대하는 태도, 목회자의 덕목으로

발전시키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피터슨 목사님에 비하면

우리는 일상의 삶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 대충대충 넘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상 속에 보석을 숨겨놓으셨건만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리 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보석을 숨겨놓으신 하나님께서 꽤- 섭섭하시겠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존재합니다.

우리의 숨결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모든 장소, 우리가 사는 모든 시간도

은혜요 그 속에 숨겨진 보물들이 있습니다.

 

올해가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삶 속에 숨겨진 보물들을 한 개씩 한 개씩 찾아 세어봅시다.

특히, 가족과 이웃 속에 숨겨진 보물들에 주목합시다.

감사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시편119:37)

Turn my eyes from looking at worthless things; and give me life in your ways (Ps 119:37)

 

하나님 아버지

일상 속의 보물을 찾을 수 있는

세심한 안목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2. 20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