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근상

저는 국민학교 출신입니다. 1996년 3월부터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국민학교는 ‘천황의 국민’이라는 뜻의 일제 잔재여서 바로잡았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이왕이면 초등학교로 정정해서 부르겠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우등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개근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등상이야 공부 조금 잘하면 탈 수 있지만, 개근상은 건강과 성실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초등학교 6년 동안 개근상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일 년에 3-4일은 감기와 편도선염 등으로 학교를 빠졌습니다. 5학년 때는 수학여행후에 류마티즘성 관절염이 찾아와서 반년 가까이 아예 학교를 쉬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내내 개근상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대신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은 개근했습니다. 부모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 주셨고 저도 커가면서 몸이 건강해진 덕분입니다. 사실 사고뭉치들 빼고 중고등학교는 대개 개근합니다. 코흘리개 꼬마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입학해서 초등학교  6년을 내리 개근하는 것이 훨씬 대단하지요!

 

우리 교회에는 팔순이 넘었거나 가까우신 권사님들이 꽤 계십니다. 연세가 드시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으신데, 주일마다 꼬박꼬박 개근하십니다. 출타하시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미리 알려주십니다. 교회 일에 관여하거나 나서지 않으시고 뒤에서 젊은이들을 응원하실 뿐입니다. 새로 오시는 분들이 보면,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시는 조용한 권사님들이십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주일예배에 개근하신 권사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한 가지만 더 교회를 자랑하겠습니다. 8월이 되면 광복절 기념 북가주 배구 대회가 산호세에서 열립니다. 우리 교회는 전교인 야외 예배와 겹친 작년을 빼고 3년 연속 참가했습니다. 서너 번 주일 오후에 모여서 연습을 했는데, 젊은 집사님들의 열의가 대단했고 우승은 못 해도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회에 참가해보니 모든 팀이 관록도 있고 우리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한 세트만 이기고 네 경기를 전패하고 왔습니다. 그래도 여선 교회가 준비한 근사한 점심을 먹고 교회 피크닉처럼 즐겼습니다.

 

이듬해 참가한 대회에서도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실력이 조금 늘어서 비등한 경기를 조금 더 했을 뿐입니다. 웬만한 교회는 두 번 참가해서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면 포기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젊은 집사님들은 올해 세 번째 다시 도전했습니다. 교회 근처 배구장에 가서 그곳을 찾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대여섯 주간 연습했습니다. 물론 선수로 참가하겠다는 분들도 바쁘다 보니 참석률이 들쑥날쑥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경기를 치르면서 손발이 맞아간다고 했을까요! 비교적 열심히 준비했건만, 올해 역시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듀스까지 가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기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음껏 대회를 즐겼습니다. 여선교회가 준비한 메밀국수와 김밥을 먹는 것만도 행복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년에도 참가할 것 같습니다. 키가 큰 청년들도 교회에 많아져서 평소에 조금만 연습하면 한두 경기는 승리할 것 같지만, 승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젊은 집사님들이 배구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승리보다 꾸준히 참가하는 개근이 중요함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이래 개근상에 목말라하는 저에게 커다란 위로요 도전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열심히 잘해서 상을 타는 것보다 개근하듯이 꾸준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귀합니다. 변덕스러운 신앙, 대회 우승처럼 큰 것만 추구하는 신앙, 남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과시하는 신앙이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작은 일에 충성하는 신앙이 최고입니다. 올해도 이제 넉 달 남았습니다. 때로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기적일 만큼 주어진 삶이 무겁습니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손에 든 열매가 초라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 남은 한 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개근상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갑시다.(2019년 8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해방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미국 시간으로

조국의 해방을 기억하는 광복절입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광복절 노래의 첫 소절입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살던 땅이지만

해방되고 다시 만져보는 흙은 우리 땅이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바닷물도

해방되고 나니 덩달아 춤추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태평양 너머에서 펼쳐지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두 나라는 운동경기만 해도

승부욕이 치솟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감정이 앞서는데

예전에 풀지 못한 숙제까지 겹쳐서 나타나니

분위기가 더욱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오래된 매듭은 풀고

앞으로 나갈 일들은 화해를 통해서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길 바랄 뿐입니다.

 

2.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 61장 1-2절 말씀을 읽고 그 뜻을 풀어 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4:18-19)

 

여기서 “자유”가 곧 해방입니다.

예수님은 포로되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에 포로가 되고

그릇된 습관과 악한 유혹에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실제로

억울하게 포로가 되었거나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임하길 바라십니다.

 

우리나라가 36년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것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맞물립니다.

 

3.

광복절을 맞으면서

아직도 풀지 못한 과거의 상처로 인해서

억눌리고 포로가 된 분들의 마음과 삶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은혜의 해(희년,jubilee)가 선포되길 바랍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잘못한 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보상하며

문제를 푸는 것이 도리요 상식이니

생떼 쓰지 말고 당사자가 나서서 풀기 바랍니다.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미국에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여전히 이런저런 일들로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외부의 세력이 아니어도

육체의 질병, 나쁜 습관, 우울, 세상 염려, 미래의 불안 등에

억눌리고 포로가 된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들께도 자유케하는 예수님의 복음이 임하길 바랍니다.

 

행여나 참빛 식구들을 괴롭히고 억누르고

포로로 삼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복음의 능력이 그 위에 임하고 자유케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4:18-19)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oclaim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liberty to the captives

and recovering of sight to the blind, to set at liberty those who are oppressed (Luke 4:18-19)

 

하나님 아버지

은헤의 해,

자유케하는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8.15 이-메일 목회 서신)

 

 

 

 

 

돈 키호테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무모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요즘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고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느냐”는

조소 섞인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하나님 믿는 것 아니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고 과연 실익이 있는지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선과 악, 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구분없이

뒤죽박죽 섞여서 복과 화가 발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임하는 복과

반대의 경우 임한다는 저주가 작동하지 않으니

우리 마음이 답답하고 무겁기 마련입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우 시끄럽습니다.

미국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소행으로 확인된

총격 사건이 수일이 멀지 않게 발생합니다.

숭고한 희생자들의 숫자가 점점 쌓여가는데

정치권은 손을 놓고, 투표에서 이길 궁리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제각각 자신이 옳다고 말하고

상대방을 향해서 “가짜(Fake)”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합니다.

 

지구 온난화, 핵무기를 비롯한 전쟁의 위협,

여전히 계속되는 빈곤과 식량, 차별 등

힘을 합쳐도 풀기 힘든 과제가 산적해 있는데

서로의 잇속을 챙기고 있으니 우리 같은 민초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뿐입니다.

 

지난주 목요 서신에 이어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곱씹으며 묵상합니다.

 

3.

미국에 올 때 아이들이 갖고 온  <돈 키호테>를 읽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긴 소설을 어린이용으로 아주 짧게 요약한 책인데

그래도 흥미롭습니다.

 

돈 키호테는 <양반/Sir 키호테>라는 뜻입니다.

스페인 시골에 기사 소설을 워낙 많이 읽고

스스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정의의 기사로 나선

돈 키호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로시난테라는 말,

정의와 평화의 세상이 오면 한자리를 주겠다는 말에

선뜻 따라나선 시골 농부 산초판사,

그리고 돈 키호테가 맞이하는 부조리한 세상.

 

풍차와 싸우고, 목동들에게 얻어맞아 이빨이 부러지고,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 임할 자유와 평등, 정의의 세상을 꿈꾸는

돈 키호테의 행적이 때로는 불쌍해 보이고, 위대해 보이고,

지나칠 만큼 엉뚱해 보입니다.

 

돈 키호테가 인기를 끌던 스페인에서는

길가에 앉아서 울고 웃으며 돈 키호테를 읽었다고 했듯이

왠지 모를 시원함과 작은 희망도 발견합니다.

 

4.

때로는 돈 키호테처럼 무모해 보일 정도의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피를 흘리며 매를 맞고 내쳐지면서도

소신껏 자신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 돈 키호테>말입니다.

 

복잡하고, 잇속에 빠르고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말하는 요즘,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무모할 정도의 용기!

 

2천 년 전,

예수님도 그 길을 가셨기에 우리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각자의 자리에서 꿋꿋이 신앙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실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9-10)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Mt 5:9-10)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살려는 참빛식구들과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8.8 이-메일 목회 서신)

첫날

좋은 아침입니다.

 

1.

8월의 첫날을 맞이합니다.

무엇이든지 시작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기대와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작하는 것에 숨겨진 염려와 불안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들인데,

때로는 시작이 무색할 정도로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편 37:3-6)

 

우리의 성실과 하나님의 성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정오의 빛처럼 빛나는 인생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시고

믿음으로 새달을 맞으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하며

제 기도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2.

지난주일 밤

기혼 그룹 카톡방에 길로이 총격 사건에 대한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길로이 마늘 축제 현장에서

열아홉 살 된 청년이 AK 반자동 소총으로 무차별 사격해서

4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청년은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서 사살되었지만,

범행 동기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범행 전 그의 SNS에 올린 글이나, 그가 읽은 책으로 보아서

백인 우월주의자 성향을 진진 청년으로 생각됩니다.

 

캘리포니아는 21세 이상만 총기를 구입할 수 있어서

네바다까지 가서 구입했다니 계획한 일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목숨을 잃은 6살 소년은 꿈 많고

자신을 치장할 줄 알고 R&B음악을 즐겨 들었답니다.

1학년 입학을 앞두고 사고를 당했습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 또래여서 더욱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보다 편을 가르고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험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순수한 희생자들이 발생하니 안타깝습니다.

 

하루속히 정부 차원에서 총기 규제가 법으로 제정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선해지고, 화평케 되길 원합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이 충분히 작동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3.

8월의 첫날을 맞으면서

오늘 아침 나눈 말씀대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성취하실 줄 확신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Casting all your anxieties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1Pet 5:7)

마음속에 있는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새달을 시작합시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새달을 살아갑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I am sure of this,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bring it to completion at the day of Jesus Christ. (Phil 1:6)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를 주옵소서.

오늘도 참빛 식구들이 화평케 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8.1 이-메일 목회 서신)

전도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은

구약성경 전도서에 와 있습니다.

 

전도서는 구약성경의 성문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아가서)에 속하고,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기록한 말씀이라고 전해집니다.

 

전도서라는 명칭은 1장 1절의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에서 왔습니다.

전도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코헬렛(Qoheleth)”인데

“모임”이라는 뜻도 있기에 혹자는 “집회서”라고 부릅니다.

전도서의 영어표현 “에클레시아스테스(Ecclesiastes)”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처럼 전도서라는 표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솔로몬 왕의 설교를 듣거나,

훗날 백성들이 모여서 솔로몬으로부터 전해진

지혜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2.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 그대로 읽으면 “하벨 하발림/ 하벨 하발림/하콜 하벨”입니다.

 

헛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벨”의 문자적 의미는

“수증기, 안개, 한숨, 가치 없음, 헛됨”입니다.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친 비관주의는 아닙니다.

헛되다는 것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제로(0)”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30:8)라는

아굴의 잠언을 떠올리면 전도서의 주제가  쉽게 이해됩니다.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전도서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입니다.

 

3.

이번 주 성경 통독에 해당하는 전도서 6장에도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와 재산과 명예를 다 얻었는데

당사자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즐깁니다.

그러니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식욕을 채울 수 없습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욕심이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언과 마찬가지로 언어 습관도 지적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빈말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4.

전도서는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줍니다.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게 합니다.

 

훗날을 위해서 아등바등 살기보다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어느새 7월도 훌쩍 지났습니다.

 

전도서 말씀을 기억하면

시간은 빠르게 지나는데 이룬 것이 없다고

행여나 초조해질 것도 아닙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잘 살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portion)을 누리고

범사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전도서 7:29)

See, this alone I found, that God made man upright,

but they have sought out many schemes. (Eccl 7:29)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25이-메일 목회 서신)

돌봄 2

좋은 아침입니다.

 

1.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교회 표어에 맞춰서

다시 한번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1월에는 “우리의 돌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면

이번 달에는 “하나님의 돌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돌봄을 실천하면 자칫 지치기 쉽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돌봄을 경험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돌봄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바탕으로

용서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

지난 1월 목요 서신에서 나눴던

헨리 나우웬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돌봄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

이 정체성을 주장할수록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이 있다.

사랑의 창조주가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려는 관점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나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경청, 심방, 독서, 글쓰기 등을 통해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을 섬긴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험에 동참해야 했고, 그 중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돌보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 쉬운 일을 해볼까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깨달은 게 있다.

쉬운 일을 욕망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내 헌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었다. (돌봄의 영성, 46-47쪽)

 

돌봄이 쉽지 않아서 때로는 대충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헨리 나우웬은 신앙이 식었다는 표시라고 일러줍니다.

 

3.

7월 한 달 동안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긍휼(compassion), 돌보심을

아주 깊이 경험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세심하고, 무조건적이고 때로는 예상을 뒤엎는지

몸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더없이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작은 돌보심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 힘과 은혜로 돌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의 돌봄을 말씀드리면서 외로워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시는

참빛 식구들을 챙기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서로 세심하게 챙기고 실제로 돌보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 (눅6:36)

Be merciful, even as your Father is merciful. (Psalms 6:36)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돌봄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8이-메일 목회 서신)

사모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 통독이

시편을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시편 말씀은 우리 신앙에 종합 비타민과 같습니다.

 

제가 신앙을

<머리/교리 또는 앎Doctrine>

<가슴/체험 Experience>

<손과 발/생활 Practice>로 설명하는데,

시편 말씀 속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지혜를 알려주는 시편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탄식함으로 주님께 나가는 탄식 시편,

온몸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주의 일을 하겠다는 결단의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막힐 때

시편을 갖고 기도할 수 있고,

찬양하고 싶을 때도 시편으로 찬양합니다.

시편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도 얻습니다.

 

2.

시편 말씀 가운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편42:1)는 구절을 종종 묵상합니다.

 

“갈급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라그>는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은 사슴이

살기 위해서 헐떡거리며 물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뜻합니다.

 

물 한 방울이 그립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목을 축이고 싶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물만 생각하고 물이 그립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슴이 헐떡거리며 물을 찾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것에 일치시킵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3.

우리 삶이 참 바쁩니다.

중요하고 다급한 일들에 쫓겨 삽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추구하고 찾아 나서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당장 필요한 의식주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헐떡거리며 찾아 나설 수 밖에요.

그렇게 우리의 힘을 모두 소진하니 하나님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가외의 것(extra-), 즉 욕심을 버리고, 경쟁심에서 한 발짝만 옆으로 비켜서면

하나님을 찾고 사모할 여유가 생깁니다.

 

요즘 시대에 우리가 헐레벌떡 찾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의 범주를 뛰어넘는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헐떡거리며 찾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우리 안에서 다시 시작되길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책임지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우리가 추구할 생명길입니다.

이것을 신앙 안에서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실제로 힘이 있고

우리 삶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간증할 만큼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시편 107:9)

For he satisfies the longing soul,

and the hungry soul he fills with good things.(Psalms 107:9)

 

하나님 아버지

당신을 향한

간절함, 갈급함, 갈망함을 회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1이-메일 목회 서신)

독립 기념일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243번째 맞는

미국의 독립 기념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 기념일(4th July)은

불꽃놀이를 하는 날,

여기저기서 큰 세일을 하는 날,

무엇보다 하루를 쉬는 휴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립 기념일은 말 그대로

미국이 영국의 통치에서 독립을 선언한 날입니다.

 

영국은 미국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인도 회사의 결손을 미국과의 무역으로 보충하고,

그러면서도 미국 대표단이 영국 의회에 참가할 기회를 차단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은 자치의회를 구성해서

1776년 7월 2일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동부 13개 주의 독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이틀 후인 7월 4일에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로도 독립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영국에 완전히 승리하고(1781년)

1783년 파리에서 조약을 맺음으로 완전한 독립이 가능해졌습니다.

 

2.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5인이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서에는

영국이 미국에 가한 학정 등을 조목조목 고발하면서 독립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독립 선언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서문의 첫 문장입니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확실한 권리를 부여 받았으며, 그 안에는 삶, 자유 및 행복의 추구가 포함됨을 자명한 진리로 인정합니다.

 

독립선언서에는

영국을 고발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영국이 미국으로의 이민을 억제한 것입니다.

요즘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규제안이 극성인데

미국의 건국 정신에 기초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뒷얘기로

영국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노예제도의 거부를 독립선언서에 포함하려 했지만,

전원 일치의 동의를 얻지 못해서 누락시켰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노예제도는 그로부터 87년 후인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3.

독립 기념일을 맞아서

우리가 살고있는 미국을 세웠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갖고 있던 정신을 돌아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경적인 건국이념은 아니지만

그 근저에 기독교 정신이 깔려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근거를

창조주 하나님에서 찾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독립 기념일을 맞으면서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평화롭고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휴일과 축제 분위기에 취할 것이 아니라

미국 독립의 처음 정신과 선조들의 투쟁을 되새겨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미국은 물론 온 세상에 강물처럼 흘러 넘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Gen 1:27)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미국 땅이

실제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모습을 갖추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4이-메일 목회 서신)

 

 

 

 

시편묵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이

시편을 지나고 있습니다.

 

150편으로 이뤄진

시편은 성경의 한 가운데에 위치합니다.

모세오경을 본떠서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하루 평균 석 장씩 읽는 성경 통독에서는

두 달여 시편을 읽는 동안

뒤처진 분량을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2.

시편은 구약성경에서 욥기 다음에 위치하고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와 함께 성문서에 속합니다.

 

욥기는 하나님 법칙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고

의인이 고난 받는 세상에 대한 고발이고 고민입니다.

얼기설기, 좌충우돌, 뒤죽박죽의 세상을 잘 반영합니다.

 

시편은 그래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함을 깨우칩니다.

시편에는 말씀, 기도, 찬양, 지혜가 골고루 들어있고

각 장의 분량이 짧아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선포하고

가정, 왕궁,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알려줍니다.

 

전도서는 삶의 좌표를 끝(죽음)에 갖다 놓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인생인지 알려줍니다.

세상과 인생 자체에 지나칠 정도로 큰 미련을 갖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portion)에 감사하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할 것을 요청합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노래입니다.

연인의 깊고 달콤한 사랑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친밀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3.

시편에는 다윗의 시가 많아서

혹자는 “다윗 오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희로애락을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삶과 연결해서 노래하는 시편들이 절반에 가깝습니다.

 

다윗의 탄식은 이스라엘은 물론 우리의 탄식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How long)?”

“왜 나입니까 (Why me)? “도와주세요” 등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시편의 저자는 탄식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감사 시편에서는

무조건 두루뭉슬하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르고, 감사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지혜 시편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조목조목 알려줍니다.

시편의 첫 번째 말씀이 지혜 시편인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메시아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고하고

감사와 더불어 호흡이 있는 자들은 다 나와서

목소리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부탁합니다.

 

4.

기도가 힘들 때는 시편 말씀을 읽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찬양하고 싶을 때도 시편 말씀을 갖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시편 말씀에 곡을 붙인 찬양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시편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예배 안내서입니다.

 

시편은

신앙의 깊이를 더하려는

참빛 식구들께서 꼭 가까이할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라 (시편 73:25-26)

Whom have I in heaven but you? And there is nothing on earth that I desire besides you.

My flesh and my heart may fail, but God is the strength of my heart and my portion forever.(Ps 73:25-26)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게 하시고

시편 말씀의 은혜에 깊이 잠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6. 27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버에서는 2023년에

날아다니는 택시를 운행하겠다면서

6월 초 그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겠지만

이러다가 영화 스타트렉에서 보던 세상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집니다.

 

때로는 인류문명이 적당한 속도로 발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땅따먹기하면서 놀던 옛날도 그립습니다.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때때로 고민이 깊어집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구식 취급 받을 것 같은 위기의식도 듭니다.

 

2.

예전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니

한 손에 성경을,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으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 생각을 하면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 몸 어디에 신앙을 간직하는 것이 좋을지

저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한 손에 신앙을 들고 다른 손에 세상일을 쥐고 살면

워낙 빨리 변하는 세상 때문에

신앙을 들고 있는 손이 뒤에 쳐질 수 있습니다.

 

신앙을 한쪽 발에 두고 산다면,

세상을 쫓아가려는 다른 쪽 발에 비해서

신앙을 간직한 발이 따라가지 못하면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머리에 둔다면 어떨까요?

자칫 세상을 쫓아가려다가 신앙을 제쳐 놓거나

신앙을 생각하다가 역시 세상에서 뒤처질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에서 신앙을 어디에 간직하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우리 각자의 “심장(heart)”에 두는 것이 제일 좋아 보입니다.

 

우리 몸에서 심장은 일정하게 박동합니다.

성경에서도 심장은 생명을 간직한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심장에 간직하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영향을 받지 않고

일정한 리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장에 우리의 신앙을 간직한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정말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살아갑니다.

세상에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올 정도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도 없습니다.

 

사랑, 생명, 그리고 신앙이 한꺼번에 만나는

우리 마음 한가운데 주님을 모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세상에 끌려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세상에 빠져들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챙기지 못하는 것도 조심할 일입니다.

 

행여나 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각박해지기 쉬운 세상이지만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1:8)

For God is my witness, how I yearn for you all with the affection of Christ Jesus.(Phil 1:8)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빠르게 발전해도

주님 믿는 신앙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6. 20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