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가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당시 바빌론은 이집트와 더불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고 있던 세상 제국이었습니다.

신약성경 계시록에서 바빌론을

악을 대표하는 세상 제국으로 표현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다니엘은 이곳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식민지 국가의 젊은이들 가운데

총명한 사람을 데려다가 특별 교육을 시켜서

국제 외교의 특별한 직무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빌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이름이 벨드사살로 바뀝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그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벨드사살은 “왕의 명령을 지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당시 왕은 바빌론 신의 대행자로 여겼으니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바빌론 신과 왕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사람에서

바빌론 왕의 사람으로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언어와 학문을 배웠습니다.

당시 학문은 별을 보고 국가의 미래를 가늠하는 점성술이고,

이것은 모세 율법에서 금하는 일이었습니다(신18:10-14).

 

하나님을 믿던 다니엘이

거의 대부분 제국의 문화에 동화(assimilation)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심적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제국의 권력 안에서 다니엘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2.

그때 다니엘은 한 가지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우상에게 드린 음식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것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정한 <구별점>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다니엘서 6장에 나오지만,

그와 세 친구는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상 제국에서 살아남았고,

어려움도 겪었지만 바빌론 총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제국 한 가운데 드러내는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함께 하신 덕분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3.

우리 각자도

적어도 한 가지, <구별점>을 세우고

그것을 꼭 지키시길 부탁했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구별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21세기 세상 제국에 살아갑니다.

포로로 잡혀 온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삶에 동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칫,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세상에 완전히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꼭 한 가지 구별점을 만듭시다.

그것을 붙들고 지키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을 사시려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단1:8)

 

 

하나님,

뜻을 정한 것을 지켜 나갈 믿음과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12 이-메일 목회 서신)

패럴림픽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파리에서는

장애인들이 겨루는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포털 사이트의 스포츠 란을 즐겨 보는데

얼마 전까지 한국의 모든 매스컴이 올림픽에 집중했습니다.

방송사들은 정규 방송까지 중단하고

올림픽 중계에 열을 올렸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스포츠 포털에서

패럴림픽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딘가 있을 텐데 제 눈에 띄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한 달 전 올림픽 기사로 도배하던 때와 비교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의 경우,

늦은 시간에 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NBC에서

패럴림픽 경기를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내보냅니다.

미국 경기는 생중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패럴림픽은 사람들의 관심 밖입니다.

 

2.

패럴림픽에서는

모든 선수가 승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쪽 팔이 없는 선수가 육상 경기에 등장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농구 경기를 합니다.

모든 종목에 참여한 선수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감동이 밀려옵니다.

 

한국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고

유튜브 쇼트 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열일곱 살 된 데비라는 인도 양궁선수가 눈에 띕니다.

 

선천적으로 팔다리가 짧게 성장하는 병을 앓고 있기에

두 팔이 거의 없습니다.

발가락으로 활을 잡고, 다른 발을 이용해서 화살을 활에 끼웁니다.

손이 없으니 입으로 잡아당겨서 활을 쏩니다.

 

발과 입에 얼마나 큰 힘이 들어갈까요!

그런데 이 선수가 10점을 쏘았습니다.

관중석에서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다고 하지만,

패럴림픽 선수들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메달이나 순위에 상관없이

어떤 선수와 인터뷰해도 각자의 이야기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꿈과 소망을 주는 위인들입니다.

 

3.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우 넓습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맨 앞에 서 있거나

눈에 띄는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목을 받습니다.

 

조금만 부족해도 관심 밖입니다.

올림픽에 비해서 패럴림픽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부족함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진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패럴림픽에 참여한 모든 선수를 응원합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경기에 참여하지 못한

무명의 선수들도 기억합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깊어집니다.

절망이 밀려오는 곳에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힘을 얻습니다.

고맙습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편 41:1)

 

 

하나님,

뒷전에 밀려 있는 분들을 기억하고

마음으로 몸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5 이-메일 목회 서신)

여호야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열왕기하 11-12장에 등장하는

여호야다 제사장과 예루살렘 왕 요아스에 관한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반역을 일으켜서

왕족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손자들을 죽이고 할머니가 왕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바알 신을 섬기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한 살 된 왕자 요아스를 침실에 숨겨서 구해냅니다.

어린 요아스는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성전에는 여호세바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꺼질 뻔했던 다윗 가문의 등불이

여호세바의 기지와 여호야다 제사장의 돌봄으로 보존된 것입니다.

 

요아스 왕자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여호야다 제사장은 백부장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처형합니다.

6년 만에 이방 여인 아달랴는 통치가 끝나고

요아스에 의해서 다윗 왕국이 회복된 뜻깊은 사건입니다.

 

2.

요아스가 겨우 일곱 살에 왕이 되었기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130살까지 살면서 요아스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여호야다의 조언대로

바알 신전으로 변한 성전을 보수하고 회복합니다.

바알 종교의 잔재를 없앱니다.

요아스의 멘토 여호야다 덕분입니다.

 

문제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으면서 발생했습니다.

다른 지도자들이 요아스에게 접근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버리고

가나안 토착신인 아세라 목상을 섬깁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나서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 제국까지 의지하더니

결국 신하들에 의해서 살해됩니다.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왕들의 묘지에 묻히지 못합니다.

왕족이 아니면서도 왕들의 묘지에 묻힌

여호야다 제사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아스의 말년과 죽음이 안타깝습니다.

끝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4.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때,

요아스는 하나님 안에서 행하고 통치했습니다.

나라가 평안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으면서

요아스가 새롭게 의지한 멘토 그룹은

그를 타락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요아스 역시 어려서부터

제사장 여호야다를 의지했기에

혼자서 판단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데 서툴렀을 것입니다.

 

신앙은 물론 인생의 멘토를 잘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따르는 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남의 복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참빛 식구들이 가는 길에

훌륭한 멘토를 만나고

더불어 참되고 선한 길을 걷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한가지,

우리에게 최고의 멘토가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대하 24:2)

 

 

 

하나님,

참빛 식구들께 훌륭한 멘토를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29 이-메일 목회 서신)

애틋함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의 마음을 두 글자로 요약하라면,

“긍휼(compassion)”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자기 백성을 긍휼이 여기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춥고 배고픈 백성들을 긍휼이 여기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긍휼의 절정입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함이

우리를 살렸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 긍휼을

“애틋함”이라고 달리 표현하고 싶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애틋함을 두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1)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

2)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

 

여기서 “섭섭하다”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보다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대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애틋함”은

이웃의 어려움이나 사정에 마음 아파하고

어떻게든지 함께 하며 도움이 되려는 태도입니다.

 

3.

팬데믹을 지내고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졌습니다.

개인은 물론 국가도 이기적으로 변하고

파당을 짓고 자기편만 챙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물론

우선 내가 잘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일을 겪는 이웃과 감정 이입을 하고

같은 심정으로 기도해 주고

아픔을 서로 나누려는 애틋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 대해주지만,

실제로 동지의식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진실한 공감이 그립습니다.

 

4.

애틋함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이웃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기쁨에 함께 기뻐하기 원합니다.

감정이입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느낄 정도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서로 대하고, 기도해 주고, 얘기합시다.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정(情)을,

하나님의 사랑을 힘껏 나눠봅시다.

 

참빛 가족!!!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22 이-메일 목회 서신)

선구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올림픽에서는

남자 마라톤이 맨 나중에 열립니다.

그런데,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여자 마라톤을 마지막에 배치했습니다.

 

지금부터 235년 전인 1789년,

자식들을 굶겨야 할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에

7천여 명의 어머니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면서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던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서 행진했습니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여성의 행진”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자 마라톤이 올림픽 마지막에 배치되었고

마라톤 코스도 파리 시내에서 베르사유 궁전까지였습니다.

 

2.

파리 올림픽 여자 마라톤의 시작을 알린

캐서린 스위처(Kathrine Virginia Switzer)라는 인물도 특별했습니다.

캐서린 스위처는 여성 최초로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당시에는 여성들이 마라톤을 하면 여성성이 망가지고

긴 거리를 뛸 힘과 건강이 없기에

800미터 정도가 최대 거리라고 믿었습니다.

 

1966년 바비 깁스라는 스물네 살의 마라토너가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하기 위해서 길옆에 몰래 숨어 있다가

중간에 합류해서 완주했지만, 정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깁스를 본 캐서린 스위처라는 대학생이

이듬해인 1967년, 정식으로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합니다.

 

여자인 것을 숨기기 위해서

<K V캐서린>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서를 제출해서

261번이라는 번호를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남자처럼 후드티를 입고 뛰던 스위처가

몇 마일 지나자, 후드티를 벗어버립니다.

여자인 것을 알아낸 대회 본부장이 따라와서

스위처를 길에서 밀쳐내는 등 행패를 부립니다.

이것이 카메라 기자의 셔터에 잡혔고,

세상을 변화시킨 100장의 사진 중 하나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처음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하고

50년이 지난 2017년,

70세의 스위처가 261번을 달고 보스턴 마라톤에서 완주합니다.

이처럼 캐서린 스위처는 여자 마라톤의 길을 만든

선구자로 마라톤은 물론 여성 운동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77세가 된 캐서린 스위처는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흰색 바지, 꽃무늬 셔츠, 화려한 운동화를 신고

맨 앞에 서서 여자 마라톤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또 하나의 여성 행진을 뜻했습니다.

 

4.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선구자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수요예배에서 살펴본

루터, 요한 웨슬리도 그 가운데 속합니다.

 

유리 천장을 뚫어내고

없던 길을 만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시작하는

용기 있는 선구자들입니다.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

역사를 바꿀 선구자들이 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모든 선구자들을 응원합니다.

새 날을 맞으시는 참빛 식구들도 응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있느니라 (빌4:13)

 

하나님,

앞서가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15 이-메일 목회 서신)

지극히 작은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일에는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약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공부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무조건 돌보십니다.

약자의 편에 서십니다.

약자를 보시면 하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이 발동합니다.

 

2.

마태복음 25장은

마지막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관한 비유입니다.

전반부 달란트 비유는

맡겨 주신 달란트를 갖고 최선을 다했을 때 하나님께 받을 칭찬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했기에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받습니다.

 

후반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오른편(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도와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왼편(염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돕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 (마 25:40)”

 

3.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우리가 예수님이고

어려운 이웃은 우리가 도울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유 속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4.

주일 말씀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점에서 고민이 생깁니다.

 

과연 우리의 도움이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돕는다고 해서 이들이 변화되거나 세상이 좋아질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섞인 고민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돕는 심정으로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커다란 전제입니다. 달리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대입해서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면 됩니다.

지속적이지 않고 한번만 도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만 도울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그때는 꼭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5.

거리의 노숙자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절대적 약자가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이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가 도와야 할 예수님입니다.

 

힘껏 도웁시다.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 (마태 25:40)

 

 

하나님,

도움을 주는 인생,

돕는 손과 발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8 이-메일 목회 서신)

넉넉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 음향 시스템은

훌륭한 편이 아닙니다.

 

용량이 크다면,

중간 정도의 볼륨을 조절해 놓아도 될 듯합니다.

마이크에서 조금 떨어져도

목소리가 편안하게 전달될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앰프의 용량이 작으니

마이크 볼륨을 높이면 “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니 방송실에서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조절하느라 늘 긴장합니다.

 

2.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사람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오클랜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분의 사연이 소개되는데

훔친 트럭으로 사업장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현금 입출 기계(ATM)를 떼어서 그 안에 있는 돈을 가져갑니다.

자동차 유리를 깨는 것은 이제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경찰에 연락해도 오지 않거나

와서는 대충 둘러보고 떠납니다.

웬만한 범죄는 하루 이틀 만에 다시 석방되니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개인의 삶도 뻑뻑한데

세상 질서도 어지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비해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여유가 확실히 줄었습니다.

서로 옳다고 자기주장만 하고 듣지 않습니다.

이해득실에 빠르고 결코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서두릅니다. 초조한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우리 교회 앰프 용량이 작아서

볼륨을 조금만 올려도 “삐—“하고 듣기 힘든 소리가 나듯이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남이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경고음을 냅니다.

듣기 힘든 ‘삐—’소리가 세상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넉넉함을 잃어버린 소치일 것입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웬만해서는 ‘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앙과 마음, 인격의 용량을 넓혀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이니

하나님 자녀라는 느긋함, 넉넉함, 자긍심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함을 주시길 간청합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지만,

우리 삶에 여백을 남겨 놓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차고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는 근사한 삶도 기대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16:11)

 

 

 

하나님,

우리 마음과 삶에 넉넉함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1 이-메일 목회 서신)

꼭 필요한 근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우리 안에서 독버섯처럼 생기는

염려, 불안, 두려움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것들까지 친히 맡아 주시고 돌보심을 확인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염려, 불안, 두려움이 생기면

우선 멈추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으로

몰아내고, 견디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학이나 상담을 비롯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할 바를 하는 것도

마땅한 우리의 임무이자 특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염려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필요 없는 염려, 해결할 수 있는 염려, 과거에 대한 염려,

일어나지 않을 염려, 불가항력적인 염려.

 

예를 들면, 필요 없는 염려는

스포츠 경기에서 자기 팀의 승리를 놓고 안절부절 염려하거나

유명인의 기사를 읽고 괜히 그들을 걱정해 주는 것,

해결할 수 있는 염려는

해결하면 될 일을 괜스레 염려하는 것

과거에 대한 염려는

이미 지난 일이어서 염려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일어나지 않을 염려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도 사서 염려하는 것,

불가항력적인 염려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염려의 5%에 해당한답니다.

 

3.

우리는 염려를 갖고 삽니다.

염려를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끊임없이 요청됩니다.

 

염려가 생길 때,

그 자리에서 <우선 멈춤>을 외치고

기도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기도는 염려를 막는 백신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염려를 극복하기 원합니다.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소위 쓸데없은 것임도 꼭 기억합시다.

 

4.

성경은

우리가 해야 할 근심[염려]과 하지 말아야 할 근심을

명쾌하게 구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돌아보며 근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근심의 끝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필요 없는 근심은 믿음 가운데 통제하고,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올바로 근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고후 7:10)

 

 

하나님,

우리의 근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25 이-메일 목회 서신)

조바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처음 미국에 와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30대 후반의 늦깎이 유학생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 공부를 시작했으니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도 헛되게 쓸 수 없습니다.

젊은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했습니다.

게다가 점수도 잘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비교적 좋은 성적을 받고 순항하고 있었는데,

한 과목에서 점수가 기대보다 덜 나왔습니다.

그리 중요한 시험도 아니었는데,

마음도 상하고 왠지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교수님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지만,

점수는 올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때는 한 과목 점수에도 조바심을 하고 속상해했습니다.

 

2.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데

당시에는 너무 크게 보여서

집착하고 실망하고 마음 상했던 일이 꽤 많습니다.

 

계획한 일 전체가 망가지거나

인생 전체가 무너져서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불안에 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조바심’ 때문입니다.

 

조바심은

바라고 계획했던 일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조바심이 찾아오면, 갖가지 경우의 수들이 생각나면서

모든 일을 그르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에 있을 때,

약속의 땅이 멀어만 가고, 광야 생활이 길어지면서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잘 있었는데

왜 데리고 나왔냐고 모세를 향해서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면서 압제와 학대받을 때를

그리워하는 어이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조바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말일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인생사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마음 같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기도해도 변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때 여지없이 ‘조바심’ 불쑥 찾아옵니다.

 

조금 멀리 보고 갑시다.

조바심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나갑시다.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29:11)

 

 

하나님,

마음속의 조급함을 통제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8 이-메일 목회 서신)

미소 되찾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이어서

반강제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할 때,

미소를 잃은 것이 아쉽다는 목요 서신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쓰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미소”입니다.

이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미소로 인사했습니다.

 

지금도 습관적으로 마스크 안에서 미소를 짓지만

서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조금 허전하고 삭막합니다.”

(2020년 5월 28일 목회서신)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과연 마스크를 벗을 날이 찾아올지 막막했습니다.

 

지난 5월 여행을 떠나면서

짐을 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40일 가까운 여정입니다.

기차 여행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유럽 항공사들의 짐 규정이 까다로웠습니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스크는 꼭 챙겨갔습니다.

 

여행하기 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마스크를 착용했기에,

생소한 나라에서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마스크 착용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목적지인 런던에 도착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곤 했거든요.

 

외국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우리 역시 마스크 착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맨 얼굴로 다녔습니다.

 

유럽의 작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예전 한국의 지하철 1호선이 생각날 정도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파리의 지하철에서도,

유명한 그림이나 조각상 앞에 빼곡하게 모인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았지만, 무사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2.

온 인류를 괴롭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거의’ 사라진 것이 놀랍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외출할 수 있게 된 것도 신기합니다.

이런 날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스크 뒤에 숨겨놓았던 미소도 되찾았습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도 미소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마음껏 웃어야겠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아름다운 미소로 정겹게 인사해야겠습니다.

 

무뚝뚝, 무표정이 아니라

활짝 웃으면서 서로 인사합시다.

교회에서는 물론,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미소로 인사합시다.

날씨도 덥고, 속상한 뉴스들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미소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잠언 27:19)

 

하나님,

밝은 세상을 만드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1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