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숨과 날숨

좋은 아침입니다.

 

1.

침묵기도(Centering Prayer)를 배우고

십여 년 동안 실천하면서

복식호흡이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었습니다.

 

허리를 펴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저도 모르게 배로 깊이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주변의 소음은 물론

제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곤 합니다.

 

그러다가 잡념이 떠오르거나 마음이 흔들릴 때면

다시 호흡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깊은 호흡은

제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향하게 합니다.

 

이처럼

호흡은 기도의 리듬을 되찾아 줍니다.

 

2.

마음의 근심(anxiety)과 불안은 물론

수면 장애를 완화하는 데에도

올바른 호흡법이 도움이 된답니다.

 

대표적인 방법이 4-7-8 호흡법입니다.

4초 동안 깊이 숨을 들이쉬고,

7초 동안 멈춘 뒤,

입을 오므리고 “후-“소리를 내면서

8초간 천천히 끝까지 내쉬는 방법입니다.

 

이 호흡법은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으로 이뤄집니다.

계속 들이마실 수 없고,

계속 내쉴 수도 없습니다.

들이쉬어야 내쉴 수 있고,

내쉬어야 다시 들이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호흡은 들숨과 날숨의 조화입니다.

 

3.

우리의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동안 주일에 살펴본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배웠습니다.

 

지난주부터 시작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이것을 ‘신앙과 생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받아들이는 들숨입니다.

 

그러나 들숨만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교회와 가정, 그리고 세상 속으로

흘려보내는 날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신앙과 생활’은 들숨과 날숨처럼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한 쌍(pair)입니다.

 

그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신앙의 들숨을 배우고 익혔다면,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 연속 설교를 통해

은혜의 들숨을 삶의 날숨으로 풀어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참빛 식구들 모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롬 12:1)

 

하나님,

들숨과 날숨을 통해서

날마다 진정한 예수쟁이로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7. 23 이-메일 목회 서신)

손 흔들어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씨애틀 큰 아이가 사는 동네에는

‘댄’이라는 이름을 가진 할아버지가 사십니다.

 

댄 할아버지는 열 가구 정도 모여 있는

마을 입구 자신의 집 앞 의자에 앉아서,

오가는 모든 차량과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주십니다.

 

우리 손자가

그분의 집 앞 텃밭에 들어가도 뭐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이며 호박을 따서 건네주십니다.

 

행여 외부인이 들어오면,

누구보다 댄 할아버지가 먼저 알아차리시니

동네 사람들의 안전까지 책임지고 계신 셈입니다.

 

2.

노스캐롤라이나 콘코드라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네 살 소년 ‘로만(Roman)’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로만의 부모는 1년 전에 결별했습니다.

아빠는 플로리다로 떠나고 엄마와 함께 지냅니다.

로만은 갑작스러운 가정의 변화에 많이 외로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로만은 집 앞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Hi”라고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맞은편에 사는 이웃집 아저씨가

다가와서 반갑게 인사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둘 사이에 따뜻한 교감이 생겼습니다.

다른 이웃들도 함께 인사를 나누면서

동네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운동을 하고,

생일에는 이웃 어르신들이 찾아와

로만을 안아주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네 살 소년의 작은 손짓이

동네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로만의 외로움도 자연스레 사라졌습니다.

 

3.

‘작은 것’에서 많은 일이 시작됩니다.

 

2천 년 전,

100여 명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사건이 그렇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에

온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일이 작게 느껴져서

의미를 잃고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비의 날갯짓이 종종 세상을 바꾸듯이,

네 살 소년 로만의 인사가 동네를 바꾸었듯이,

우리의 작은 말과 마음, 몸짓이

세상에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참빛 식구들이 품고 있는 기대입니다.

크지 않아도, 눈에 띄지 않아도

삶 속에서 작은 빛으로 살아가려는 이유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이” 하고 인사를 건네고,

생각나는 친지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 봅시다.

우리의 짧은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19절)

 

하나님,

누군가에게 빛이되고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7. 16 이-메일 목회 서신)

가장 행복했던 순간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틱톡(TikTok)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면서

뉴스위크 인터넷판에 실린 짧은 기사입니다.

 

구십이 넘으신 할머니,

환갑을 넘긴 딸, 그리고 손녀가 나눈 대화입니다.

 

손녀딸이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어요?”라고 묻습니다.

 

이 할머니는 아흔이 넘은 지금도

북클럽에 참석하고, 나인홀 골프를 즐기며,

필라데스도 배우고 계십니다.

남편은 의사였고, 모녀는  심리 치료사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손녀의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내 인생이 가장 힘든 때였을 거야.

남편은 아직도 수련의였고,

나는 나이가 차는 세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지.

우리는 재정적으로 너무 너무 어려웠어.

그런데 그때가 가장 활기차고 행복했단다”

 

보통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을 것 같은데,

인생의 골짜기를 걸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할머니의 대답에 딸과 손녀가 깜짝 놀랍니다.

 

딸은 엄마의 대답에 공감했습니다.

이 가족은 대화가 많았습니다.

농담과 스몰 토크(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즐겼습니다.

힘든 일, 기쁜 일도 가족 안에서 함께 나눴습니다.

그러니 힘들수록 더 많이 대화하면서

가족의 깊고 끈끈한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2.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곳(God, here and now)’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헨리 나우웬도

<지금 이곳 here and now>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심지어 구약의 예언도, 요한계시록의 묵시도

지금 이곳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면서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구약의 예언은 하루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언자가 예고한 심판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계시록의 묵시는 로마 제국 치하에서

핍박 받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악한 세력이 무너질 최후 심판이 있으니

신앙을 잃지 말고 소망 가운데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지금, 이곳”이 중요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할머니처럼,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골짜기를 걸어갔던 기억이

훗날 돌아보면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곳의 삶을 멋지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무지개와 같은 행복에 연연할 것도 아닙니다.

과거의 어려움이 반복될 것 같은 두려움에 쌓일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은혜, 능력을 믿고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친지들과 깊은 정을 나누면서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걷는 순간순간의 인생길을

멋지게 빚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오늘을 사는 것이지요.

 

주님 안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를 살아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

인생 최고의 하루를 살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7. 9 이-메일 목회 서신)

옛친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한국에서 40년지기 친구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습니다.

 

신우회에서 군대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입니다.

대학도 동기이고, 결혼도 한 달 차이로 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똑같은 제복을 입고 만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제대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신우회를 함께 했던 형제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찬양하고 교제했습니다.

 

모임 이름도

‘험우회(險友會)’라고 지었습니다.

험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

세상은 허무하지만 믿음 안에서 의미를 찾는 친구들,

우리가 근무했던 캠프 험프리 신우회 동문이라는 뜻입니다.

 

험우들만의 결혼식 축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큰아이가 한국에서 축하연을 했을 때도

친구들이 ‘그때 그 축가’를 그대로 불러 주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라브리’를 꿈꾸기도 했고,

언젠가는 뜻깊은 일을 함께 하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5년을 함께 지내다가

저는 199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편이 아니어서

마음속에는 늘 그리운 친구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미국을 방문하는 친구가 있거나,

제가 한국에 가면 꼭 한 번은 만났습니다.

 

이번에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친구와도

한국에 가면 만나고,

필요할 때 연락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지난주, 닷새를 함께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가 방문했으니

여행 일정도 빼곡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의 공백을

함께 채워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의 직업도, 삶도, 가족도 많이 달라졌지만,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세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며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허물이 없으니

남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친구가 좋습니다.

 

2.

저는 우리 교회도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허물없는 신앙의 친구를 만나고,

훗날 다시 만나면

참빛교회 시절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옛 친구’를 만드는 공동체 말입니다.

 

글쎄요.

우리가 그 정도의 공동체인지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참빛 식구들을 다시 만나면

참 반가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야기도,

그때는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되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워 갑시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잠 17:17)

 

하나님,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7.2 이-메일 목회 서신)

신실하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일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로마서 3장 21-31절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공부’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은

주일설교가 성경 공부를 겸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3장 2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한

헬라어 본문은 예수님을 주어로 삼아서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임합니다.

저는 이번 연속 설교를

우리의 믿음보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초점을 맞춰서

준비했고 함께 나눴습니다.

 

2.

우리의 믿음은

솔직히 우리 마음이나 기분에 따라서 변화무쌍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른다면

그 자체가 불안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통하여”라고 번역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 흔들림 없이 확실해집니다.

설교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 신실하게/성실하게 모든 것을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이 도식화해 보았습니다.

A: 의롭게 됨. 구원

B: 예수님의 신실하심(신실하신 예수님)

C: 우리의 믿음

 

우리의 믿음(C)이

직접 우리를 구원(A)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을 예비해 놓으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B)입니다.

 

3.

한 엄마가

맛있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어 있습니다.

 

아이가 믿음으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머니 손에 들린 ‘물건’을 향한 집착입니다.

 

아이가 가질 온전한 믿음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계신 어머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머니라면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종종 구원을 비롯해

예수님께서 손에 들고 계신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믿음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신실하게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니라,

그 초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너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하나님,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25이-메일 목회 서신)

카보베르데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전 세계가

북미에서 열리는 월드컵 열기로 뜨겁습니다.

 

각 지역 예선을 통과한 48개 국가가 한자리에 모여

치열하지만,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첫 경기를 멋지게 승리로 장식하면서

이번 월드컵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엊그제는 월드컵 우승 후보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과

이름부터 다소 생소한 카보베르데라는 나라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경기는 예상 밖의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피파 랭킹 6위인 스페인이

67위 국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카보베르데(Cabo Verde, 초록빛 곶)”라는 이름이 낯설어서

구글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있는 작은 섬나라입니다.

면적은 제주도의 두 배 정도이며,

인구는 약 50만 명 남짓입니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였고,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나라라고 합니다.

나라가 워낙 작다 보니

세계 지도에서 빠지는 경우도 있답니다.

 

2.

그런데 바로 그 작은 나라가

아프리카 예선에서 조 1위를 차지하며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습니다.

 

섬나라이다 보니

체계적인 프로축구 리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 섬의 우수한 팀들이 모여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을 가릴 정도의 환경입니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스페인과 카보베르데의 경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나라가

세계 최강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을 상대로

당당하게 맞서며 무승부를 만들어 냈습니다.

 

3.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감독을 비롯한 모든 선수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강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흔 살이 된 골키퍼의 선방이 뛰어났습니다.

 

또한 카보베르데 출신 부모를 둔 선수들 가운데

유럽 여러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외부의 도움으로 채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기술을 가진 스페인도

신바람이 나서 하나가 된 팀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경기를 하이라이트로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이 넉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채우면 됩니다.

혼자 힘들면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무엇보다 신바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생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안팎에서 도우시고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합시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54편 4절)

Behold, God is my helper;

the Lord is the upholder of my life.(Ps 54:4)

 

 

하나님,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18이-메일 목회 서신)

맡아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다니던 직장을 접고 목회의 길로 들어오면서,

몇 가지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제가 섬기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늘 각박합니다.

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앞서고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그러나, 제가 꿈꾸는 교회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핑계가 아니라

대형 교회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사람 냄새가 나고, 정겹고

목사인 제가 한 분 한 분을 친밀히 섬길 수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어느덧, 30여 년이 지났고,

우리 교회에서만 21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교회는 맞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참된 공동체를 이뤘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그룹도 시도해 보았지만,

생각처럼 진행하지 못했구요.ㅠㅠ

 

그래도

우리 참빛 식구들께서 “교회가 좋다” “교인들이 좋다”고

말씀하실 때는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아마 저의 목회는

이 정도에서 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2.

지난 토요일 아침기도회에서 읽은

고린도전서 12장은

제가 꿈꿨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각각의 자리와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

어떤 지체도 크거나 작지 않고, 강하고 약하지 않습니다.

모두 소중합니다. 모두 필요합니다.

 

머리가 발에게 “너는 쓸모가 적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구절이 감동입니다.

우리 몸에서 머리가 최고인데

땅을 밟고 다니는 저 끝의 발을 무시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도리어 약한 지체에게 힘을 실어주고

부족한 것을 대신 맡아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3.

지난번 주일 예배에서 나눴던

가인과 아벨의 말씀에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창 4:9)라는

가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에게 서로 지켜주고

서로를 맡아주는 형제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서로 지켜주고 맡아주는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위로와 힘, 격려와 도전이 끊이지 않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만일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12:26)

 

하나님,

우리 교회에서

진정한 공동체의 참맛을 느끼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11이-메일 목회 서신)

메꿔감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어떤 글을  쓸 때,

우선 초고(draft)를 가능한 한 빨리 작성해 놓습니다.

 

조금 부족하고 서툴러도

초고를 끝내 놓으면 안심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 번 읽으면서

중간중간 필요한 것을 메꿔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작성할 수 있으면

시간도 절약하고 일찌감치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한 번에 글을 완성하려다가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시간만 허비하고

마감 날짜에 허둥지둥할 때가 많았습니다.

 

2.

저의 이런 습관은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작성하면서 생겼습니다.

3년 만에 필요한 모든 수업을 듣고

종합시험까지 통과했습니다.

 

목회하고 있었고

교회도 계속 문제가 있었기에

논문을 남겨놓고 거의 6년을 보냈습니다.

 

그때 제 지도교수님께서

시간을 정해 주시면서

논문 초고를 완성해서 갖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문 통과는 불가능하다고 겁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6년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하고 책만 읽었다면

마지막 1년은 교수님의 엄한 명령에 순종해서

초고를 완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초고가 완성되니

교수님께서 코멘트하신 것을 위주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가면서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3.

우리는 생각만 하고

행동에 옮기지 않을 때가 다반사입니다.

 

완벽하게 하려고 고민하고

계획을 세우다가

실제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겠다는 다짐보다

우선 무릎 꿇어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초벌구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메꿔가면 됩니다.

채워가고, 완성해 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새달 6월을 맞았습니다.

미뤄두었던 것을 시작하고 실행해 옮겨봅시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잠16:3)

 

하나님,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함께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6. 4이-메일 목회 서신)

아이러니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이러니(irony)는

반어(反語)로 불리는 문학 용어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날씨 한번 참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과 속뜻이 정반대일 때

이것을 언어적 아이러니(verbal irony)라고 합니다.

 

영화나 연극에서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데

등장인물만 모른 채 전개되는  것을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라고 부릅니다.

 

상황이 예상과 전혀 다르게 펼쳐지는

상황적 아이러니(situational irony)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죄인들이 달리는 나무에 달리셨지만,

그 죽음이 오히려 죄인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으니,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아이러니입니다.

 

2.

엊그제 읽은 기사 역시

아이러니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요즘 구직 시장에는

AI를 이용한 지원서(job applications)가 많답니다.

손쉽게 지원서를 만들 수 있으니

지원서의 숫자도 크게 늘었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돋보이려고 사용한 AI 기술이

지원서들의 형식, 어투와 내용을

비슷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답니다.

그러다 보니

AI로 작성한 지원서를

AI로 걸러내는 기업까지 등장했습니다.

 

AI를 사용해서 훌륭한 지원서를 준비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적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입니다.

 

기사 속에서 전문가들은

AI로 초안을 만들고,

실제 경험과 구체적인 수치,

그리고 지원자 개인만의 이야기가 포함된

‘나만의 개성 있는 지원서’를 작성하라고 조언했습니다.

 

3

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돋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결과적으로 서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한 기술이

서로를 비슷비슷하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행여나 자신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생길까

염려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남을 닮은 모습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조금 부족해도

참되고 솔직한 모습을 더 기뻐하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길 원하십니다.

 

겉모습보다

우리 안의 <참됨과 선함>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나만의  삶”을 살아봅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9)

 

하나님,

‘참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5. 28이-메일 목회 서신)

배움

좋은 아침입니다.

 

1.

5월은

미국 대학들의 졸업 시즌입니다.

 

방송에서는 유명인들이 어느 대학에서

졸업 연설을 했는지가 소개되고

훌륭한 연설은 두고두고 회자됩니다.

 

2년 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눈길을 끄는 분이 계셨습니다.

 

당시 105세의 나이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으신

버지니아 히스롭(Virginia Hislop)여사입니다.

 

히스롭 여사는

1936년에 스탠퍼드 교육학과에 입학했고

1940년에는 교육 대학원에 진학해서

모든 과정을 마치고 논문만 남겨둔 상태였습니다.

 

교육자 집안 출신이던 히스롭 여사도

학업을 마친 뒤

교육자로 살아가길 꿈꾸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1941년,

남자 친구가2차 세계 대전 중 군대에 소집되면서

갑작스럽게 결혼하느라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히스롭 여사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이 그랬듯이

자신의 커리어를 쫓기보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장학기금을 조성하고

지역 교육은 물론 교육 관련 법을 고치는 데 동참하면서

평생 교육을 향한 열정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손자가 스탠퍼드 대학에 할머니의 상황을 알렸고

혹시 졸업이 가능한지 문의한 것입니다.

 

히스롭 여사가 공부할 때는

교육 대학원 졸업을 위해서 논문이 필요했는데,

현재는 논문이 필수 요건에서 제외되면서

1940년대 이수한 학점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렇게 히스롭 여사는

2024년,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83년 만에 받은 학위였습니다.

 

히스롭 여사는

생각지도 못한 학위를 받게 되었다고 감격했습니다.

졸업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축하해 주었습니다.

105세에 석사 학위를 받으셨으니 말입니다.

 

2.

요즘은 너도나도 “100세 시대”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 동네 샌프란시스코 노인회에

100세가 넘으신 어르신이 몇 분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의학이 더 발달하고,

건강 관리에 힘을 쏟으면

100세 시대가 활짝 열릴 가능성도 큽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사느냐?”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105세에 그것도 83년 만에

석사 졸업장을 받으신 히스롭 여사가

더욱 대단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오늘 하루도

감사함으로, 그리고 의미 있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인생길 굽이굽이 마다

깜짝 놀랄 선물과 기쁨을 준비해 두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16:31)

 

하나님,

특별히 우리 교회 권사님들을 축복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5. 21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