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근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우리 안에서 독버섯처럼 생기는

염려, 불안, 두려움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것들까지 친히 맡아 주시고 돌보심을 확인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염려, 불안, 두려움이 생기면

우선 멈추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으로

몰아내고, 견디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학이나 상담을 비롯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할 바를 하는 것도

마땅한 우리의 임무이자 특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염려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필요 없는 염려, 해결할 수 있는 염려, 과거에 대한 염려,

일어나지 않을 염려, 불가항력적인 염려.

 

예를 들면, 필요 없는 염려는

스포츠 경기에서 자기 팀의 승리를 놓고 안절부절 염려하거나

유명인의 기사를 읽고 괜히 그들을 걱정해 주는 것,

해결할 수 있는 염려는

해결하면 될 일을 괜스레 염려하는 것

과거에 대한 염려는

이미 지난 일이어서 염려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일어나지 않을 염려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도 사서 염려하는 것,

불가항력적인 염려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염려의 5%에 해당한답니다.

 

3.

우리는 염려를 갖고 삽니다.

염려를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끊임없이 요청됩니다.

 

염려가 생길 때,

그 자리에서 <우선 멈춤>을 외치고

기도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기도는 염려를 막는 백신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염려를 극복하기 원합니다.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소위 쓸데없은 것임도 꼭 기억합시다.

 

4.

성경은

우리가 해야 할 근심[염려]과 하지 말아야 할 근심을

명쾌하게 구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돌아보며 근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근심의 끝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필요 없는 근심은 믿음 가운데 통제하고,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올바로 근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고후 7:10)

 

 

하나님,

우리의 근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25 이-메일 목회 서신)

조바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처음 미국에 와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30대 후반의 늦깎이 유학생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 공부를 시작했으니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도 헛되게 쓸 수 없습니다.

젊은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했습니다.

게다가 점수도 잘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비교적 좋은 성적을 받고 순항하고 있었는데,

한 과목에서 점수가 기대보다 덜 나왔습니다.

그리 중요한 시험도 아니었는데,

마음도 상하고 왠지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교수님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지만,

점수는 올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때는 한 과목 점수에도 조바심을 하고 속상해했습니다.

 

2.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데

당시에는 너무 크게 보여서

집착하고 실망하고 마음 상했던 일이 꽤 많습니다.

 

계획한 일 전체가 망가지거나

인생 전체가 무너져서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불안에 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조바심’ 때문입니다.

 

조바심은

바라고 계획했던 일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조바심이 찾아오면, 갖가지 경우의 수들이 생각나면서

모든 일을 그르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에 있을 때,

약속의 땅이 멀어만 가고, 광야 생활이 길어지면서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잘 있었는데

왜 데리고 나왔냐고 모세를 향해서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면서 압제와 학대받을 때를

그리워하는 어이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조바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말일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인생사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마음 같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기도해도 변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때 여지없이 ‘조바심’ 불쑥 찾아옵니다.

 

조금 멀리 보고 갑시다.

조바심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나갑시다.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29:11)

 

 

하나님,

마음속의 조급함을 통제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8 이-메일 목회 서신)

미소 되찾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이어서

반강제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할 때,

미소를 잃은 것이 아쉽다는 목요 서신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쓰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미소”입니다.

이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미소로 인사했습니다.

 

지금도 습관적으로 마스크 안에서 미소를 짓지만

서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조금 허전하고 삭막합니다.”

(2020년 5월 28일 목회서신)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과연 마스크를 벗을 날이 찾아올지 막막했습니다.

 

지난 5월 여행을 떠나면서

짐을 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40일 가까운 여정입니다.

기차 여행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유럽 항공사들의 짐 규정이 까다로웠습니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스크는 꼭 챙겨갔습니다.

 

여행하기 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마스크를 착용했기에,

생소한 나라에서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마스크 착용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목적지인 런던에 도착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곤 했거든요.

 

외국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우리 역시 마스크 착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맨 얼굴로 다녔습니다.

 

유럽의 작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예전 한국의 지하철 1호선이 생각날 정도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파리의 지하철에서도,

유명한 그림이나 조각상 앞에 빼곡하게 모인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았지만, 무사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2.

온 인류를 괴롭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거의’ 사라진 것이 놀랍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외출할 수 있게 된 것도 신기합니다.

이런 날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스크 뒤에 숨겨놓았던 미소도 되찾았습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도 미소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마음껏 웃어야겠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아름다운 미소로 정겹게 인사해야겠습니다.

 

무뚝뚝, 무표정이 아니라

활짝 웃으면서 서로 인사합시다.

교회에서는 물론,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미소로 인사합시다.

날씨도 덥고, 속상한 뉴스들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미소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잠언 27:19)

 

하나님,

밝은 세상을 만드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1 이-메일 목회 서신)

길동무

좋은 아침입니다.

 

1.

기도해 주시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

두 달 간의 안식월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귀한 선물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

필요한 재정을 제공한 미국의 재단,

안식월을 가도록 허락하시고

교회를 섬겨 주신 참빛 식구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목요 서신을 받아 보시는 지체들 가운데

안식월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따로 연락을 주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매주 서신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고  관심 가져 주시니 고맙습니다.

 

2.

가족 여행을 포함해서

50일의 여정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제는 클래식으로 분류되는 <반지의 제왕>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었습니다:
“여행은 위험한 것이다.

집에서 나가면 어떤 운명이 닥칠지 모른다.”

 

지난 5월 6일, 여행을 떠날 때

기대와 불안함이 교차했습니다.

유럽의 대도시는 소매치기가 다반사라는 정보부터

기차를 타는 것, 정해진 숙소에 제날짜에 맞춰서 들어가는 것,

예순이 넘은 부부가 건강하게 여정을 끝낼 수 있을지 까지

영화 대사대로 집을 떠나는 순간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했고,

“아- 이래서 여행을 떠나는구나”하는 마음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3.

영국 런던부터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태리, 그리스까지

40여 일 여행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몇 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우리가 가려는 곳을 찾지 못해서 캠퍼스를 헤매고 있을 때,

법을 전공한다는 대학원생이 친절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분명히 바쁜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길을 물었는데,

상냥하게 끝까지 안내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일부러 인지 영어를 못하는 척하면서 지나친 경우도 꽤 있었거든요.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는 저와 아내가 따로 앉게 되었습니다.

둘이 같이 앉기 위해서 옆에 있는 신사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했더니

생색을 내면서 딱- 잡아뗍니다. 머쓱했습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서로가 편할 수 있는데,

자존심인지 아니면 우리 부부가 함께 가는 것에 대한 시샘인지 완강했습니다.

그 신사의 불친절한 표정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래도 저희가 묶은 에어B&B의 아랍인 여주인,

길을 묻는 우리의 짐까지 들어주겠다던 독일 시골의 장난꾸러기 십 대들,

군말 없이 무거운 짐가방 두 개를 트렁크에 실어주던 아테네 택시 운전사,

시부모님같은 우리와 재미있게 얘기를 나눠준 서울에서 온 신혼부부까지

기억에 남는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부부는 과연 다른 여행객들에게

어떤 길동무가 되었을 지 궁금합니다.

 

4.

집을 나서는 순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여행길이지만,

곳곳에 좋은 길동무들이 있으니

위험이 한결 줄고 편안하게 주어진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고,

우리가 좋은 길동무가 되는 것은 서로에게 커다란 축복입니다.

 

다시 매주 보내드릴 목요 서신도

여러분의 길동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잠언13:20)

 

하나님,

우리 모두

서로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는 길동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4 이-메일 목회 서신)

변화

제가 5월과 6월에 안식월 갖게 되어서

동안 목요 서신은 쉽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요한복음 4장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새로운 사건임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땅에 가십니다.

유대인 남성들이 무시하던 사마리아 여성에게 말을 거십니다.

땅끝을 살고 있던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일을 예수님께서 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전하신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갇혀 있던 복음을

사마리아는 물론 땅끝까지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신 사건이기에

인류 역사를 예수님 전과 후(BC and AD)로 나누는 것은 당연합니다.

 

2.

지금부터 62년 전,

아칸소(Arkansas)에서 시작된 한 잡화점이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성장했습니다.

 

오클라마호마의 농장주 아들이었던 샘 월튼(Sam Walton)의 가족은

대공황을 맞아서 미주리로 이사합니다.

월튼은JC Penney에서 월 75불을 받고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후 고향에 돌아온 월튼은

장인에게 빌린 2만 불을 갖고 잡화점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월튼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저렴한 가격의 다양한 상품으로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싼 가격으로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서 종횡무진 뛰었습니다.

물론, 그의 저가 정책이 주변의 상점에 피해를 주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에 명암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샘 월튼이 시작한 월마트 사업은

훗날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일으킨 기술 혁명에 버금가는

백화점 사업의 혁신이었습니다.

실제로 샘 월튼은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3.

월마트가 새로운 브랜드 “Better Goods”을

시작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Whole Foods 이나 Trader Joe’s와 경쟁하기 위해서

양질의 식료품을 저가로 공급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기업이 착수하는 브랜드이니

얼마나 많은 숙고와 연구를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새로운 브랜드에 창업자 샘 월튼의 이름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기업을 일으킨 창업자이고

여전히 그의 가족들이 소유는 물론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만,

변화된 세상에 맞추기 위해서 옛것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꾸준한 변화를 통해서 월마트가 지금의 위치에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4.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지위에 걸맞게 성품이 변하고 삶이 변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땅을 찾아가셔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으로 알려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날을 사시고

인생과 삶에 새로운 장(chapter)을 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믿음 가운데서

한 가지라도 변화되고 새롭게 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하나님,

어김없이 새날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저도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5. 2 이-메일 목회 서신)

갈라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이 지나치게 갈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과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만 존재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

푸른색의 민주당과

빨간색의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있는 국민들도 많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앞에 나서거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공감대를 찾지 않고 극단적으로 갈라져 있으니

빨간색과 푸른색만 눈에 띌 뿐입니다.

 

2.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면서 생기는

정치, 문화, 경제 전반의 현상입니다.

 

포퓰리즘은

자기들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점점 극단적인 의견이나 정책을 제시합니다.

현실성이 없어도 일단 발표하고 봅니다.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은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대중의 요청이나 필요를 무시했기 때문이랍니다.

 

기득권에 취해서 국민들을 챙기지 못하고 안주하고 있을 때,

포퓰리즘을 내세운 그룹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기존의 교회들이 제 몫을 못 할 때, 이단이 판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무엇보다, 포퓰리즘은 갈라치기의 명수입니다.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만 주입하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에 눈과 귀를 빼앗기지 말아야겠습니다.

 

3.

갈라치기가 유행인 세상은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포퓰리즘이 가세하면

세상은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내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만 옳다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포퓰리즘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기를 힘입어 세상을 갈라놓지 않으셨습니다.

 

경계를 허무시고, 차별을 폐지하셨습니다.

복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악에는 적극적으로 저항하셨지만,

선한 길을 가려는 모든 이를 받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던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함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전쟁,

예수님이시라면 호되게 꾸짖고

희생자들을 감싸안으시고, 둘을 하나 되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의 추한 모습이 정상은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품는 예수님의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

‘그들’이라고 갈라치지 않고

‘우리’라고 품어주는 세상을 기대합니다.

 

생명의 복음, 화해의 복음,

용서와 회복의 복음이 세상에 편만 하길 기도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4)

 

 

하나님,

주님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25 이-메일 목회 서신)

탄식할 용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올봄에는

시편의 탄식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70%가 탄식시라는 사실은

시편을 기록하고 전해준 하나님 백성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보여줍니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배웠지만,

우리의 현실이 늘 기쁘고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슬픔과 탄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시편의 대부분이 탄식시라는 사실에

도리어 위로를 받습니다.

 

2.

시편 탄식시의 특징은

하나님을 부르고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사연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탄식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확신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시편의 탄식시는

‘자기연민’이 아니라

탄식을 넘어서 믿음과 확신으로 나가는 여정입니다.

 

무엇보다, 탄식의 과정을 충분히 갖습니다.

눈물로 이불이 젖을 정도로

자기 죄를 놓고 참회하며 탄식합니다.

뼈가 마를 정도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이를 부러뜨려달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내놓고 탄식합니다.

 

탄식의 과정을 온전히 지나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3.

어렸을 때는

울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눈물을 보이지 말고

대장부답게 견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혹시라도 눈물을 보이면

약하고 소심하고 쩨쩨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슬픔을 꾹꾹 참는 것을 강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탄식을 올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슬플 때는 슬퍼하고 울어야 합니다.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탄식은 솔직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도리어 정직하고 진실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10여 년 시간이 흘렀어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사는 분들을 일일이 찾아가시고

눈물을 씻겨 주시길 기도합니다.

 

슬픔 없는 세상은 불가능할 겁니다.

탄식 없는 인생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탄식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와 힘

그리고 소망을 구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하나님,

여전히 슬퍼하며 탄식하는 이웃들을 위로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18 이-메일 목회 서신)

스캠이 판치는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모든 길은 AI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인공지능(AI)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스마트 폰”이라고 불리는 휴대전화가 대표적입니다.

한글이나 영어 번역기도 성능이 약해서 그렇지

벌써 오래전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세상 속으로 들어오던 인공지능(AI)이

갑자기 게임체인저가 되고 주인공이 된 느낌입니다.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우리 삶은 훨씬 편리해질 것입니다.

요즘 번역기의 성능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 준  전통적인 직업들이 사라지는

슬픈 일도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우려가 현실이 되고,

과연 그럴까 했던 기대도 현실이 되는 느낌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2.

인공지능에서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요즘 전화, 메시지, 이메일 등에

스캠(scam상대방을 속이는 사기성 연락)과

스팸(spam, 원치 않는 정크 메일들)이 판을 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심코 클릭해서 정보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사용한 메일 계정은

누군가 제 이-메일로 로그인하면

저에게 곧바로 연락이 오고, 특정 숫자를 클릭해 주어야 합니다.

계정 정보에 들어가 보니, 성공하지 못한 로그인 시도가

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로부터 여러 개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보낸 텍스트 메시지로 가장한 스캠도 종종 받습니다.

클릭하기 전에 은행에 가서 보고하니

절대로 은행에서는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고

모두 거짓 메시지라고 명쾌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사기꾼들의 수법이 점점 발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인공지능을 사용한다면,

우리 같은 범인에게 큰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큽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대낮에 코를 베어 간다는 옛말이

현실이 되게 생겼습니다.

 

3.

성경에도 스팸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했던

거짓 선지자 (junk prophets)들이 꽤-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대표적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나라도 멸망하고

성전도 무너진다는 심판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했습니다.

 

그때,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운 나라여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평화” “안전”을 역설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지금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현혹하는

스팸(거짓 메시지) 또는 사기(스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대표적이지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신 바짝 차리고 분별해야겠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음을 믿습니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편120:2)

 

 

 

하나님,

진리와 정직이 통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11 이-메일 목회 서신)

세 가지 돌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큰 돌로 막아 놓았던 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던 여인들이

돌을 어떻게 옮길까 걱정하던 것을 보면

무덤을 막은 돌이 매우 큰 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도둑이 자기 발이 저린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큰 돌로 무덤을 막아 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

무덤을 막은 큰 돌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신비한 몸을 입으시고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2.

부활절에 성경을 읽으면서

무덤 문을 막아 놓았던 돌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에게는 세 가지 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아 놓은 것처럼

길이나 입구를 막아 놓은 돌입니다.

헤치고 나가야 할 걸림돌(stumbling stones)입니다.

 

길에 툭- 튀어나온 돌에 걸리면

영락없이 넘어집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 문제, 사람이 걸림돌이 되어서 넘어지곤 합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문제가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둘째는, 디딤돌(stepping stones)입니다.

걸림돌과 반대로 디딤돌은 길을 이어줍니다.

 

다리가 발달하기 전에는

웬만한 냇가나 작은 하천에 디딤돌을 놓아서 건넜습니다.

높은 선반 위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때도

디딤돌을 놓고 그 위에 올라갑니다.

 

인생길 이곳저곳에 놓인 디딤돌을 밟으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와서 영적 슬럼프에 빠질 때나

어려움이 찾아와서 깊은 시름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디딤돌을 놓아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마지막 세 번째는 산 돌(living stone)입니다.

우리에게는 산 돌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산 돌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신 것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고 건물을 세워갑니다.

그 위에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짓고, 그 집에 하나님을 모십니다.

우리 인생과 신앙의 기초가 산 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4월이 되었습니다.

교회력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절로 이어지는

부활절기입니다.

 

우리 신앙과 인생의 기초가 되시는

산 돌,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을 살기 원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디딤돌이 되실 것도 믿습니다.

 

힘차게, 담대하게 새달 맞읍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벧전 2:4-5)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에 디딤돌이 되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4 이-메일 목회 서신)

고의적 무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도 십자가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난 주간이라고 해서

지나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조롱과 비난, 외로움에 동참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난주간은

부활을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고 나누는 시간입니다.

고난의 끝에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

 

2.

고의적 무지(willful ignoran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예수님 주변에는 “고의적 무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

빌라도 역시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백성들의 민란(민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른 척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이 단지 나사렛 청년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알면서 모른 척 했습니다.

 

백성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성전에서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생각하면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의 인물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맹목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예수님께서

쓰러지셨을 때, 군병들이 십자가를 대신 질 사람을 찾았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군병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외면했을 것입니다.

얼굴을 돌려 외면하는 것도 일종의 고의적 무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꿰뚫어 보셨기에 더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위엄 있게 꿋꿋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3.

고난주간을 보내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오늘,

하나님을 향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향한

“고의적 무지”가 우리에게 없는지 살피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리사욕에 빠져서 하나님의 아들을

고소하고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비판하고 군중에 휩쓸릴 것도 아닙니다.

나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길 원합니다.

 

담대한 신앙,

정직한 신앙,

힘과 권력 앞에 숨지 않고 대면하고 저항하는 신앙,

예수님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부활절 새벽이 밝으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 담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2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