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트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20년 전 한국에 있을 때를 회상하면

이맘때가 되면 캐럴이 거리에 울려 퍼지고

흰 눈도 내리면서 연말연시 기분이 났는데

미국은 땅이 넓어서인지 늘 비슷비슷한 일상입니다.

 

우리 교회도 12월 첫 주가 되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것이 최고의 변화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 가정의 80% 정도가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한답니다.

 

예전에는 거의 생나무 트리를 사용했지만

요즘은 인조 트리도 많이 사용합니다.

초기 비용은 비싸지만

매년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국에서 수입한 플라스틱 제품이 대부분이어서

환경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생나무를 훼손하면서

일 년에 한 달 트리를 세우는 것이 자연 훼손아니냐는 의문도 제기합니다.

 

생나무 트리를 지지하는 분들은

서부의 오레곤이나 동부의 노스캐롤라이나의 대형 트리 농장에서 재배된 것으로

트리를 뽑고 나면 다시 심는 식이고,

침엽수인 트리는 아무 곳이나 잘 자라서 쉬는 땅을 이용하는 이점이 있다고 반박합니다.

 

2.

트리 하나를 놓고도 이렇게 사람들의 견해가 갈리니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살펴보는 로마서 3장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 생각을 갖고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희생하시면서

화평케 하는 자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역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많이 갈라져 있습니다.

추구하는 삶의 목표, 생각하는 관점,

세상을 보는 견해가 흑과 백처럼 갈라졌습니다.

화평케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상실한 것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가 임하길 바랍니다.

 

자잘한 것에는 의견의 차이가 생겨도

크고 중요한 이슈에 마음을 합치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인조 트리가 좋을까요? 생나무 트리가 좋을까요?

아이들과 함께 트리를 파는 야드에 가서 트리를 골라와서

장식하는 것을 생각하면 생나무가 좋을 겁니다. 향도 느낄 수 있구요^^

비용이나 재활용 측면에서는 인조도 괜찮겠지요.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자잘한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로마 3:25)

God put forward as a propitiation by his blood, to be received by faith. (Rom 3:25)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를 주시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2. 6이-메일 목회 서신)

지킴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창세기를 읽고 있는데

어제는 창세기 4장의 가인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생명의 기운을 갖고 태어난 가인(“생명”)이

허무하게도 동생 아벨(“하벨/허무함”)을 죽였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서 에덴에서 쫓겨났다면 (창 3장)

가인이 아벨을 죽이므로

사람 사이 (특히, 가족)의 관계를 깼고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아우를 지켜줘야 할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천연덕스럽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쫓아내시며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mark)를 주셔서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거역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배우고 있듯이, 이 사랑이 결국 우리에게도 임했지요!

 

가인이 이렇게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을 놓고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내면서 시작했습니다.

시기와 질투, 하나님을 향한 원망, 자존심, 분노 등등이 작동한 것입니다.

 

가인의 불편한 심기를 아신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죄가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고 너를 원하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고 부탁하고 경고하셨건만

훗날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그랬듯이

가인 역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로 나가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가인이 한 질문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래, 너는 아우를 지켜 주어야 했어”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키는 자(keeper)”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에덴을 지키는 자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자였습니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자고 유혹했을 때 이브를 지켜줘야 했습니다.

형 가인 역시 동생 아벨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동생 아벨의 생명을 빼앗은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청지기(steward)”라고 부릅니다.

 

매 주일 한마음과 한 목소리로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각 인생은 물론 세상의 주인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인생을 살고

가족과 공동체는 물론 이웃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까지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 올 한 해도 한 달 남았습니다.

그동안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았습니다.

작은 일까지 충성하는 청지기로 열한 달을 살았습니다.

 

이제 남은 한 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의롭고 선하게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기 원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반문하지 말고

아우를 지키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각자의 삶도 아름답게 관리하고

가족과 공동체도 아름답게 세우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세상까지 지키고 세우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행여나 지킬 것을 소홀히 했거나

쓸데없는 자존심과 시기와 질투로 죄를 다스리지 못한 채

넘어지고 무너진 영역이 있다면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복구하면서

올 한 해 깔끔하게 마무리합시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 4:15)

And the LORD put a mark on Cain, lest any who found him should attack him.(Gen 5:18)

 

하나님 아버지,

서로 지켜주고 세워주는

참빛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29이-메일 목회 서신)

해피 땡스기빙

Happy Thanksgiving!!!

 

1.

단비와 함께 맞는

2018년 추수 감사절입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다음 주에도 비소식이 있으니

산불도 꺼지고, 덕분에 공기도 좋아지고,

우리 동네 산천초목이 푸르게 변할 것 같습니다.

 

여름철 교회 앞 정원(?)에 물을 줄 때마다

제가 아무리 정성껏 물을 줘도

아침마다 내리는 이슬과 밤새 내린 보슬비를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곤 하는데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추수감사절과 구약의 절기 (특히 가을의 초막절)을 연결해 보았지만

추수감사절 자체는 꽤 미국적인 절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추수감사절 전주에 늘 있는 교회에서의 터키를 곁들인 만찬,

추수감사절에 가족 친지들과 함께 나누는 만찬과 대화,

그리고 추수감사절 다음날(요즘은 상술이 발달해서 당일 저녁부터 시작하는데)

Black Friday shopping 등등 – 나름 추수감사절을 꽤 즐기고 있습니다.

 

원래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코스코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팔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이번 주부터 팔고 있어서 서둘러 트리 하나를 사다가 교회에 세워놓았습니다.

이번 주일에 청년들과 주일학교 아이들이 함께 트리를 장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2.

올해 우리 교회는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표어로 한 해를 살았습니다.

 

지나치기 쉬운 작은 일에도 마음을 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듣기 원했습니다.

 

미국 생활이 그렇듯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시라도 한눈을 팔면 금세 자리가 나는 것이 나그네로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 듯이,

한 해를 지켜주시고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곁에서 한 길을 걸어간 가족, 교우, 친지들께

무엇보다 한 해를 꿋꿋하게 살아준 자신에게 감사하기 원합니다.

 

찬송가 429장 가사 대로

받은 복을 세어보고, 그 복에 이름을 붙이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원합니다.

 

조금 부족하고 아쉬워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으니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감사절을 맞는 것입니다.

 

산불로 인해서 집과 가족을 잃은 이웃들과

명절이기에 더욱 마음이 힘들고 외로운 분들도 마음 한 켠에 두고

겸손한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는 것도 기독교인의 미덕입니다.

 

복된 추수감사절 맞으십시오

Happy Thanksgiving!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for you.(1thes 5:18)

 

하나님 아버지,

감사절을 맞는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

가정 가정을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22이-메일 목회 서신)

                   

산불

1.

캘리포니아 역사상 최악의 산불이

우리 지역에서 160여 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서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이 불에 탔고

목숨을 잃은 숫자가 40명이 넘어섰지만

실종자를 고려하면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산불 잡히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있는 데이비스는

산불로 인해서 공기가 나빠지니 어제 휴교령이 내렸답니다.

 

우리 지역도 지난주 내내 낙엽 타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셀폰으로 날씨를 검색하면 계속해서

“건강에 해로운 공기 (unhealthy air quality)”라고 나옵니다.

 

이번 산불로

파라다이스 마을은 주택 7,700여 채가 모두 불에 탔습니다.

마을 전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내년에 학교도 문을 열 수 없을 것 같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연일 보도되는 “캠프파이어” 산불 소식을 접하면서

안타까움만 더해 갑니다.

 

2.

그러고 보니

우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산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다음주 수요일에 비소식이 있는 것이 얼마인지요!

일기예보가 왔다갔다하는데 이번엔 꼭 맞추길 바랍니다.

 

사람이 그 큰 산불과 싸우는데 한계가 있으니

어서 비가 내려야 합니다.

 

신앙의 용어를 빌리면

하나님께서 캘리포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비로 산불을 끄시고, 갈색 산을 얼른 초록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3.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AI가 출현하고,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큰 산이 “자연”입니다.

 

이번과 같은 산불, 쓰나미, 태풍

요즘은 뜸하지만, 가끔 지축을 흔드는 지진까지

인간이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올리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겸허히 인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갑니다.

 

수요예배에서 살펴보는 창세기 말씀도

결국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공허를 채우시고,

어둠에 빛을 비추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렇게 커다란 자연재해 앞에서

그 옛날 성경의 인물들처럼 “비를 내려주시길” 기도하게 됩니다.

어쩌면 원초적인 기도입니다:

 

주님, 비를 주옵소서!

산불로 인해서 가족과 재산을 잃은 분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도다 (시편145:9)

The LORD is good to all,

and his mercy is over all that he has made. (Psalm 145:9)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15 이-메일 목회 서신)

로마서 3장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일부터 함께 나눌

설교 본문은 로마서 3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이나

철학과 도덕을 앞세운 헬라인들도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길을 가는 죄인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죄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보다

“하나님을 거역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 보면

파생적으로 도덕적인 죄들을 짓게 마련입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죄(거역)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면서 시작합니다.

 

2.

죄,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문제는

수요예배에서 살펴보는 창세기 2-3장 말씀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히브리어 “아바드”가 쓰였고, 경작하다, 일하다, 섬기다 특히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있음)

지키며 (“샤마르”라는 히브리어에는 듣다, 지키다, 순종하다는 의미)

각종 생물에 이름을 짓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과업(그때는 일이 곧 예배)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 자유를 사용하면서

세상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면

“악”은 조금 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죄를 야기시킨 창세기의 “뱀(사단)”이 대표적입니다.

 

이처럼 죄와 악의 문제는

창세기 3장 이후로 시작된 근본적이고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때부터 일이

예배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노동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3.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라는 책에서

악과 인간의 고통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을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죄를 짓고 고통스러워 하거나

악한 세상이 고통을 안겨줄 때가 있는데,

그 순간에 소리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루이스의 역설입니다.

 

로마서 3장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악(죄)의 본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결국에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지,

은혜가 임할 때 일이 노동이 아니라 예배가 될 수 있을지

그 가능성과 확실함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9)

What then? Are we Jews any better off? No, not at all.

For we have already charged that all, both Jews and Greeks, are under sin (Rom 3:9)

 

하나님 아버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주님을 바라보고

고통 속에서 소리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8 이-메일 목회 서신)

더불어 살기

1.

지난주 토요일에는

피츠버그에 있는 “생명 나무(three of life)” 유대인 회당에서

또 다시 총기 사건이 일어나서 경찰관 포함 열 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20년에 세워진 오랜 역사의 회당이었고

그날은 50-60명이 안식일 모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없애야 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던

40대 중반의 백인 남성이

자동소총을 들고 회당을 침입해서 총기를 난사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SNS에서 유대인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이제는 자신이 일을 치르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회당으로 향했답니다.

 

일종의 혐오 범죄입니다.

 

2.

미국과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혐오 범죄가 늘고 있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저지르는 범죄인데

이번 사건처럼 유대인을 혐오하는 사람이

무작정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입니다.

 

특정인을 미리 지정하지 않으니 미리 예방하기 힘들고

혐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미리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런 유형의 범죄가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지 않다는 표시입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복음서를 읽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예수님 역시 혐오 범죄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과 사역을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결국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들이 믿는 구약의 예언대로 메시아로 오셨으니

누구보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내쫓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쌓아놓은 세계에 들어와서는 안 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해야 할 인물로 본 것입니다.

 

3.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사자와 짐승이 함께 있고

심지어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칩니다(사11:6-8).

 

이처럼 더불어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모습인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다시 한번 총기규제를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 있는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기 원합니다.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Mat 6:10)

 

하나님 아버지,

행여나 우리 안에 미움, 시기, 질투가 있다면

주님 뜻대로 다스리게 하시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주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1 이-메일 목회 서신)

창조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 창세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는 창세기 1장의 전반부를 읽었는데,

1장 2절에서 창조 이전의 상태를 소개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over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face of the waters.(Gen 1:2)

 

첨부한 수요예배 핸드 아웃에서 설명했듯이

창조 이전에는 “혼돈(토우)” “공허(보우)” “어둠”이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1장 3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선한(아름답고 멋진) 창조는

2절의 문제를 바로잡는 과정입니다.

 

처음 3일 동안에는,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 빛을 창조하시고,

혼돈을 해결하기 위해서

땅과 궁창, 바다와 육지를 나누며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공간을 확보하고 골격을 세우신 창조입니다. 정적입니다.

 

다음3일은 공간을 채우시는 작업입니다. 동적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해와 달과 별을 궁창(하늘)에 붙이시고

궁창(하늘)은 날아다니는 새들, 바다는 물고기들

그리고 마지막 6일에 생물과 사람으로 육지를 채우셨습니다.

혼돈에 질서를, 공허에 충만을, 어둠에 빛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2.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의 선포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되시고,

주관자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도 믿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을 따르는

“창조 신앙”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심을 믿습니다.

 

우리 안에 어둠을 몰아내시며

참빛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빛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우리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혼란과 공허에 매여 있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과 삶에 질서가 잡혀야 합니다.

공허가 아니라 성령과 은혜의 충만을 경험해야 합니다.

 

어둡고 혼란한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빛으로 살아가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헤매는 세상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3.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일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합니다.

 

어둠과 혼란과 공허 아닌

빛과 질서와 충만으로 하루를 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1:31)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Gen 1:31)

 

하나님 아버지,

참되고 의롭고 선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25 이-메일 목회 서신)

깊은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극적인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던

어거스틴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청년 시절에

육체의 쾌락과 야욕에 빠졌던 자신을 돌아보며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정원 밖에서 들리는 “들고 읽으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들고 펼친 말씀이 로마서 13장 13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롬 13:13)

 

어거스틴은

자신에게 딱- 맞는 말씀을 마주 대하고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물론, 우연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말씀이니 덮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 순간 “확실성의 빛”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2.

터닝 포인트는

순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간이 인생 전체를 바꿔놓고

존재 자체가 180도 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지난날의 모든 경험이 응축되는 과정을 거쳤고

모아진 에너지가 한 순간에 폭발하면서

존재와 삶 전체를 완전히 바꿨을 가능성도 큽니다.

 

어거스틴 역시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는 종교와 학문을 섭렵했습니다.

집요한 추구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깊이 성찰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회심 후에도

성경, 신앙, 자신의 삶을 성찰했습니다.

어거스틴의 내적 곱씹기의 열매가 바로 “고백록”입니다.

 

3.

필요 없는 것을 끝까지 쫓는 것은

내려놓아야 할 집착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 진리, 하나님을 끝까지 추구하고 곱씹는 것은

신앙 여정에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대충 넘어가지 말고

한 가지라도 깊이 탐구해 봅시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곱씹으면서 하나님 마음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깊이”있는 신앙 –

곱씹고 읊조리면서 내면 깊이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올가을이 되길 바랍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 13:13-14)

Let us walk properly as in the daytime, not in orgies and drunkenness, not in sexual immorality and sensuality,

not in quarreling and jealousy. But put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make no provision for the flesh, to gratify its desires. (Rom 13:13-1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주님 안에서 깊이 깊이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18 이-메일 목회 서신)

무라드와 무퀘게

좋은 아침입니다.

 

1.

매년 이맘때가 되면

각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누구인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별히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두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라드는 2014년 ISIS에게 엄마를 잃고

자신은 성노예로 팔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25세 여성입니다.

 

이라크의 소수민족인 야지디족 출신인 무라드는

ISIS에서 탈출한 이후 여성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3개월 동안 성노예로 살았던 칠흑 같은 경험을 떠올리며

여전히 노예처럼 붙잡혀 있는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픈 경험을 극복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돕는 일에 나선 20대 중반의 여성

무라드가 대단해 보입니다.

 

올해 63세인 무퀘게는

아프리카 콩고의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20년동안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들의 치료와 재활을 도왔습니다.

그가 치료한 여성이 3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를 통해서

무퀘게 한 사람이 펼친 사랑의 의술이

얼마나 많은 여성에게 새 삶을 주었는 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무퀘게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 병원을 접고 콩고를 떠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여전히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돌아와 병원을 열었고,

그에게 치료받은 여성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면서

무퀘게와 그의 병원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일은

무퀘게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목숨을 건 그의 희생적 사랑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일 것입니다.

 

작은 자 하나에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무퀘게는 열악하고 위험천만한 곳에 병원을 열었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연약한 피해 여성들을 치료하고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노벨 평화상에 손색이 없습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악하고 험하지만

곳곳에서 말없이 희생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힘이 없어 보이지만,

그분들이 하는 일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회복됩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처음 시작은 미미했을 것입니다.

우연히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 너무 험해서 다시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지난달 우리 교회 <작은사랑나눔> 헌금도

일본 우토로 한인 마을에 찾아온 평화를 기념하는데

귀하게 사용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참빛 식구들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하는 데 자연스레 사용되는

주님의 손길/섭리가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Truly, I say to you, as you did it to one of the least of these my brothers, you did it to me. (Mat 25:40)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묵묵히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손길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11 이-메일 목회 서신)

염려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감사함으로…

[모든 염려 거리를] 하나님의 귀까지 배달하라”(빌4:6)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많은 분이 외우고 있을 정도로 익숙한 말씀인데

한 주간 설교에 할애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그만큼 염려하면서 살아가기에

빌립보서가 알려주는 <염려 관리법>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쉬지 않는] “기도”

모든 염려에 대한 구체적인 “간청”

그리고 “감사”였습니다.

 

특히, 쉬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염려가 습관이 되면, 기도가 무너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염려가 차지합니다.

염려한다면,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기도뿐만 아니라 기쁨과 감사도 잃어버립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그토록 염려하던 바로 그 내일입니다.

Today is the tomorrow we worried about yesterday. (Author unknown)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으면,

작년 이 맘때 우리가 무엇을 염려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이렇게 꿋꿋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그날의 염려는 그날로 족하니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마6:34).

 

염려가 생기는 그 자리, 그 순간에

주저말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기도가 염려를 다스리는 힘임을 우리 모두 경험합시다.

기도는 염려를 물리치는 하늘의 묘약입니다.

 

2.

염려는 나쁜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한 상상(imagination)입니다.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추한(ugly) 상상입니다. 소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기도와 감사 가운데 선하게 사용합시다.

 

산이 옮겨지는 것을 상상하고,

아기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늑대와 이리가 함께 지내는 세상을 상상하고

주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이뤄질 것을 상상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느끼는 영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간구로, 감사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히 염려를 다스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근심과 염려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살리는 선한 말을 건넴으로 주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임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12:25)

Anxiety in a man’s heart weighs him down, but a good word makes him glad.

 

하나님 아버지,

기도로 염려를 다스리고

염려 속에 있는 가족과 이웃을 격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9. 20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