푯대를 향하여

좋은 아침입니다.

 

1.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사뿐사뿐 뛰면서
올 한 해를 살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불황이 찾아온다는 예고가 많습니다.
팬데믹 동안에 너무 많은 돈을 풀어서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다시 돈을 거둬들이니 불황이 찾아올 수 밖에요.

 

그 과정에서
힘없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의 고생이 크고
격차는 더 벌어질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우리가 사는 베이지역도 뒤숭숭하고
웬만한 사건과 사고에 경찰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세상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양극화됩니다.
둘로 갈라져서 자기 편이 옳다고
내로남불의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갈등과 분열은 물론
배제와 혐오가 버젓이 행하여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평화의 동산으로 만드시고
그렇게 되길 바라시건만
세상은 점점 하나님의 의도와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2.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푯대를 향하여>입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공부한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왔습니다.

 

여기서 푯대는 목표(target) 목적(goal)
바라보는 곳 또는 가야 할 곳을 뜻합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목표가 없으면 망망대해와 같은 인생 속에서
표류할 가능성이 큽니다.

 

바른 목표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틀리면 노력한 것이 헛것이 되거나
잘못된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변치 않는 명확하고 확실한 푯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따라 살기에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부르심의 상을 푯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하늘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중간에 멈추거나 다 이루었다고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해마다/날마다 이전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쫓아 살아야 합니다.

 

부르심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이며
여러 개의 부르심이 동시에 작동할 수도 있고
심지어 한 번뿐인 부르심도 있다고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어쩌면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선물이자 부르심입니다.
그러니 매일같이 푯대를 향해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올 한 해, 예수님 바라보면서
그리고 각자 삶의 현장에서 힘차게 부르심을 좇아 삽시다.

 

거친 세상을 살아갈 때
생명과 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4)

 

하나님,
푯대를 향해서 나가는 참빛 식구들로 인해서
어두운 세상이 밝아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1. 5이-메일 목회 서신)

아침마다 새로우니 2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첫 번째 목요서신 마지막 부분입니다:

 

“새롭게 2022년을 맞았습니다.
올해도 우리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두려움과 기대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에
힘차게 그리고 담대하게 한 해를 시작합니다.

 

올해 주제 말씀처럼
아침마다 새롭게 찾아오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매일같이 성실하심을 보여주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2022년 한 해는 카이로스, 창조적인 순간들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2.
달력에 따라 흐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창조적인 순간들로 채워지는 카이로스를 구분했습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난 카이로스의 순간을 되새겨 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경험한
에피파니(epiphany)가 있었다면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빛이 우리에게 비추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잠깐 비추는 주님 은혜의 빛으로 살아갑니다.
한 순간의 은혜로 평생을 살기도 한답니다.

 

가족, 친지들, 교회 식구들과 함께 했던
일상의 시간과 추억도 소중한 카이로스 사건들입니다.
귀한 것, 진실한 것은 작은 일상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포착해서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카이로스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커가는 아이들의 현재 모습을
사진 찍듯이 마음에 간직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도 중요한 카이로스 시간들입니다.
아이들이 훌쩍 커서 부모의 품을 떠날 날이 금방 닥치거든요.

 

세상 속에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빛으로 소금으로 반사하면서 살았던 것도
카이로스 순간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드러내고, 받은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고 의무랍니다.

 

이 밖에도 올 한해
우리 각자가 경험했던 카이로스의 순간은 다양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필요하면 주님의 위로와 치유의 손길도 구합니다.

 

3.
우리는 이렇게 2022년을 떠나 보냅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작별인데
아쉬움은 남지만 행복하고 감사한 작별이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아침마다 새롭게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생의 순간순간 함께 하시고 손잡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의 은혜가 큽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16)
For from his fullness we have all received, grace upon grace.(John 1:16)

 

하나님,
2022년 한 해도
함께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22 이-메일 목회 서신)

기본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프랑스와 아르헨티나의 결승전을 끝으로
카타르 월드컵이 막을 내렸습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월드컵 이후에 약간의 금단현상이 있으시겠습니다.

 

우리나라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가 인터뷰한 영상이
유튜브에 있어서 챙겨보았습니다.

 

축구선수였던 손 선수의 부친은
아들에게 공을 다루는 기본기를 강조했답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기본기였음을 깨닫고
아들에게는 공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기본 기술 습득에 온 정성을 기울인 것입니다.

 

덕분에 손흥민 선수는 양발을 모두 잘 사용하고
공을 다루는 드리블 실력이 남다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손 선수뿐 아니라,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면
좀처럼 공을 뺏기지 않고 간수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메시 선수 같은 경우 공을 몸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공과 선수가 한 몸이 되어서 운동장을 누빕니다.

 

공을 다루는 기본기술과 더불어 꼭 필요한 것이
스피드라는 생각도 듭니다.
빠른 공격수들이 공을 치고 나가면 수비수가 쩔쩔맵니다.

 

기본기와 스피드, 거기에 골 결정력까지 갖추면
최고의 선수가 될 경쟁력을 확보한 셈입니다.

 

2.
어디 축구선수만 그럴까요?

 

신앙에도 기본기가 꼭 필요합니다.
신앙의 기본기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는 기본기는 필수입니다.
간청하고 요구하는 기도를 떠나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기도 시간을 확보한 그리스도인들은
시냇가의 나무처럼 늘 푸른 신앙을 자랑합니다.

 

신앙에서 스피드는 무엇일까요?
말씀과 기도를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규칙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해서 그것이 몸에 베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면서 쾌속 행진하는 신앙입니다.

 

거기에 사랑의 실천이 동반된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의 골 결정력을 갖춘 셈입니다.

 

이 정도 그리스도인이 되면 거칠 것이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싶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기본기,
그것을 훈련하는 스피드,
말씀과 기도가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신앙의 경주에서
경쟁우위에 서기 원합니다.
어떤 시험이나 악한 세력의 유혹이 닥쳐도
크고 작은 어려움이 밀려와도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신앙의 저력을 갖춥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6:13)

 

하나님,
꼭 필요한 일에 집중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22 이-메일 목회 서신)

살작 옆으로 비켜서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아침에는
구약성경 전도서를 읽고 있습니다.

 

연말을 맞아서 전도서를 읽는 것은
커다란 유익입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기준점을 맨 마지막에 갖다 놓고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조망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고 색다른 접근입니다.

 

전도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입니다.

 

여기서 “헛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벨>은
물 한 방울 똑 떨어지는 모습,
한숨(one breath), 바람결
+/-도 아닌 zero(0)
거기서 거기 등등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생 자체에 또는 세상살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관점으로 인생이나 세상을 보면,
자칫 비관주의에 빠지거나 의욕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출세해도 소용없고
심지어 지식과 지혜를 쌓아도 소용없다는 식이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요즘 세상에 적합하지 않은 가르침처럼 들립니다.

 

2.
이처럼 구약 성경의 전도서는
정통(일반적인 신앙)에서 살짝 옆으로 비켜 서 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잠언만 해도
열심히 일하면 대가가 있으니
개미처럼 열심히 일할 것을 촉구합니다.
물질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라는 말도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가능한 최고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로 넘어오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니 얼떨떨합니다.
이번에 전도서 묵상을 처음 하시는 분들은
전도서 말씀이 의아하고 적응이 안 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전도서는 색다른 말씀입니다.

 

3
2022년 한 해를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때로는 세상 것, 헛된 것에 집착했습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을 결코 탓할 수 없습니다.

 

대신, 연말을 맞았으니
가까운 출구(exit)를 이용해서
잠시라도 곁길로 내려가는 보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몰고 온 인생의 자동차를 세우고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것이지요.

 

꼭 필요한 것들, 의미 있고 중요한 순간들을 꼽아보고
그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잠깐이라도 꼭 필요한 시간이고, 반드시 해야 할 작업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도 12:13)

 

하나님,
꼭 필요한 일에 집중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15 이-메일 목회 서신)

격차(gap)

좋은 아침입니다.

 

1.
모래바람이 이는 중동의 카타르에서는
2022년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우리나라가 16강 전에서 세계 최강 브라질에 무릎을 꿇었지만,
12년 만에 16강에 진출하는 훌륭한 성과를 냈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뛰는 선수들의 모습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우리나라와 브라질 간의 16강전을 앞두고
두 팀 선수들 간의 연봉을 비교한 언론 보도가 눈에 띄었습니다.
브라질 선수단 전체의 연봉 합계는 한국 원화로 환산해서
자그마치 1조 5600억원(약 $130억 불)이랍니다.
우리나라 선수단의 연봉은 절반을 차지하는 손흥민 선수의 연봉을 합쳐도
2천260억원(약 1억 9천 불)입니다. 브라질 연봉 합계의 7분의 1입니다.

 

깜짝 놀랄 일은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축구선수들 가운데
80%가 브라질 최저 임금(연봉 약 2,500불)에도 미치지 못한답니다.
돈벌이가 잘되는 세계적인 클럽에 속한 선수들이지만,
자국에서 여전히 열심히 선수로 활약하는 일반 선수들보다
그들의 소득격차만큼 축구 실력에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축구는 물론
유명 운동선수(유명인)들의 연봉이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2.
베이지역에 살다 보면
연봉이 매우 높으신 분들을 만납니다.
초봉부터 여섯 자리 연봉을 받는 테크 회사도 있다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그런데, 회사 전체 인건비를 독식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대표(CEO)들입니다.

 

미국의 상장기업(S&P 500) CEO들의 평균 연봉은
2021년 현재 1천8백만 불이 넘습니다.
그런 CEO들이 경영하는 회사 종업원들의
중간 소득은 5만6천 불입니다.
CEO와 종업원의 봉급 격차가 자그마치 324배입니다.

 

1970년에는 CEO와 종업원의 임금 격차가 24배였습니다.
2000년대의 닷컴 버블을 지나면서 격차가 300배 이상으로 벌어졌고
2009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격차가 줄더니
흥미롭게도 팬데믹을 지나면서 다시 300배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극소수의 사람들이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3.
세상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이후에
빈부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을 고칠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이미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히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성경은 격차를 배격하고 공정한 분배를 지지합니다.
성경은 약자의 편에, 가난한 자의 편에 서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의는 공정과 공평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성경과 거꾸로 브레이크 없이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 끌려갑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월드컵 열기는 뜨겁지만,
점점 격차가 커지는 세상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연말입니다.
답을 찾기 힘드니, 시편 기자처럼 탄식하며 “주님”을 부를 뿐입니다.
“주님, 어찌해야 할까요!”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편 41편 1절)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중심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8 이-메일 목회 서신)

마지막 달력 한 장

좋은 아침입니다.

 

1.
상투적인 말 같지만
2022년을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달력이 마지막 한 장 달랑 남았습니다.

 

교회에서 첫 번째 생일, 돌을 맞는 아기를 축복하면서
앞으로 매해 맞이할 인생길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친히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한해 한해 사는 것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제정한
그레고리 달력을 사용하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똑같이 일 년 365일을 삽니다.

 

음력을 사용하던 우리나라도
1896년부터 소위 양력으로 불리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했고
60년 전인 1962년에 대한민국의 달력으로 공식화했습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날수를 기준삼아 만든 달력이니
자연의 법칙을 제정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365일 12개월 일 년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길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입니다.

 

2.
2022년을 시작하면서
팬데믹이 완전히 사라지고 포스트 팬데믹 시대가
활짝 열릴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고
주변에 코로나에 걸린 경우도 종종 보고
겨울이 되면서 바이러스가 다시 유행할 것이라는 보도도 접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꼬리가 꽤 깁니다.

 

저는 과학에 문외한이어서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바이러스가 야기하는 질병, 혼란, 불안과 두려움, 세상의 변화는
구체적으로 느낄 정도로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의 위력이 세상을 많이 바꿔 놓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만큼 이겨냈습니다.
단순히 비교할 수 없지만,
중세 유럽의 흑사병(페스트)이 300년 이상 지속된 것에 비하면
인류의 코로나바이러스 작전은 대성공인 셈입니다.

 

아쉬움도 있습니다.
힘을 합쳐서 백신을 개발하고 코로나에 대처하더니
금세 전쟁과 분열, 시기와 미움, 자연재해와 사고 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추하고 악한 본성이 다시 재연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3.
지난 주일 설교에서 언급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 나오는
마법의 화살처럼 우리 인생의 화살도 제 마음대로 날아갑니다.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이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게 됩니다.

 

2022년의 마지막 달을 시작하면서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가사대로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기기 원합니다.

 

올해의 마지막 달을
다시 믿음의 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 백성답게 믿음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많이 생각합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작은 것 한 가지라도 충실하게 실천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날 때가 최고로 멋진 순간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하나님,
합력해서 선이 이뤄지는 것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1 이-메일 목회 서신)

두려움 너머

해피 땡스기빙!!!

 

1.
지난 세 달여
주일예배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살아있는 모든 인간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
인류에 찾아온 원초적인 감정일 수 있습니다.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긴장시켜서
미래를 준비하고 대처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제때 바르게 관리하지 않으면
삶이 힘들어지고,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삶에 기쁨과 감사가 사라집니다.

 

“놀라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처럼
정서적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 성과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2.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제의 연속 설교를 통해서
말씀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통제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신앙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대면하고
관리하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이 나오는 것도
말씀과 신앙으로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동안 배운 대로
말씀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몸이 약하고,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강하지 않은
후계자 디모데에게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두려움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려움 너머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두려움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능력’입니다. 능력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힘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평안”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저절로 되지 않기에
“절제(self-discipline)”를 강조했습니다.

 

3.
세상을 사는 동안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의 좋은 면을 개발하고, 나쁜 면은 다스리면서
두려움에 대처할 뿐입니다.

 

두려움 너머에 있는
능력, 사랑, 평안, 절제가
우리 가운데 활발히 활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을 넘어서는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1:7)

 

하나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우리 삶에 실제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24 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예배의 교독문은
시편 104편이었습니다.

 

시편 104편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와 대비되는
시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에 좋은 선한 창조였습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을 묘사하는데
그 표현이 구수하고 소박합니다.
아이들이 그려 놓은 그림처럼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과학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기 쉬운 감수성이
시편 104편 속에 깃들어 있어서
읽다 보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2.
시편 104편이 묘사하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몇 가지 창조 세계의 모습들입니다.
천천히 눈에 그리면서 읽으면, 말씀이 그림 언어로 다가옵니다.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3절)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8절)

 

“그가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13절)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삶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20절)

 

게다가, 시편 104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30절).

 

3.
성경은 그림책으로 말하면
흑백이 아닌 천연색의 다채로운 그림입니다.
밝은 색깔, 어두운 색깔,
기쁜 색깔, 우울한 색깔,
감사한 색깔, 불평과 탄식의 색깔
– 이 모든 것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말로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하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너무 딱딱하지 않게
객관적인 또는 과학적인 진실에 얽매이지 않고
시편 104편 말씀처럼,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듯이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을 다양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묘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성경 속에 푹 빠지고
말씀 속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하나님,
말씀의 바다에 풍덩 온 몸을 담그는 은혜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7 이-메일 목회 서신)

끄덕끄덕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위기라는 말은
“레위인과 관련된”이라는 뜻의 라틴어
<레비티쿠스 Leviticus>에서 왔습니다.
영어도 제목도 <Leviticus>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레위인들 또는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로서
광야 시대에는 성막에서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에서 제의를 전담했습니다.

 

레위기는 제목에 걸맞게
레위인들 즉 제사장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규정들이 많습니다.

 

2.
지난 3주 동안 배운 레위기 첫 세 장에는
소, 염소와 양 그리고 새를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burnt offering)
곡식을 빻거나, 조리해서 드리는 소제(grain offering)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화목제(peace offering)가 나옵니다.

 

희생 제물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기에
소와 양에게 안수하면서
우리의 허물과 죄는 물론, 우리 자신을 제물에게 이전시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매우 세심했습니다.
제물을 직접 죽이고 (죽음은 꼭 필요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결됨)
가죽을 벗기고, 제물을 정성껏 분리해서 제사장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예배자의 마음과 자세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소, 양과 염소, 새,
그리고 곡식까지 다양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대가족이나 부족의 경우나 가능했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 서민은 새나 곡식을 갖고 왔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제물을 드리든지
레위기에서 알려주는 절차를 지켜서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가 됩니다.
제물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화목제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내장의 기름(당시는 최상의 것)과
콩팥(고대 사회에서는 마음의 자리라고 생각함),
그리고 제사장 몫을 제외하고
화목 제사를 드린 당사자들이 나눠 먹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린 후에
거룩한 제물을 갖고
다 함께 모여서 기쁨의 식탁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4.
레위기의 제사법들은
우리 신앙이 과하거나,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임을 알려줍니다.

 

신앙을 지나치게 신비롭고 특별한 것으로 만들다가
상식과 합리성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것은 자연스럽고 상식적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2:2)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자연스러우면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향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0 이-메일 목회 서신)

재난 가운데

1.
지난 주말,
조국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참사가 있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마스크를 벗고 맞이한 핼러윈 주말에
150명이 넘는 아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핼러윈 날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독교인들은
감정이입 없이 나름 냉철하게(?) 이태원 참사를 판단했을 것입니다:
“왜 핼러윈을 지킬까? 왜 그곳에 갔을까? 쯧쯧”

 

물론, 내 자식이, 형제자매가, 친구가 그곳에 가서 희생되었다면
참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180도 바뀌었겠지요.
조금 미숙하고 이기적 관점입니다.

 

사고 전체를 관망하듯이 보지 말고
사고 속으로 들어가서
희생당한 분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세심함이 요청됩니다.

 

2.
하루는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난 특별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 피를 제물에 섞는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죽은 사람들이
그럴 만한 죄를 지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속단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비통한 일을 당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외의 답변을 하십니다:
“너희들, 죄가 작아서(없어서)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죽은 사람들에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나쁜 것이다.”
누구든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실로암 망대 사고를 아실 정도로
시사에 밝으셨고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커서 죽었겠냐고 반문하시면서
“No, 아니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와 상관없는 재난입니다.
일종의 사고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죽은 사람에게 죄인 프레임을 씌우고
살아있는 자신들이 의로운 척,
무엇보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멋쩍어서 자리를 떴을 것입니다.

 

3.
두 가지 사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단어가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누구도 회개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이같이 망하리라”)은
사고와 희생으로 죽은 특정한 죽음이 아니라
누구나 가는 죽음의 길을 가리킵니다.

 

재난 또는 사고를 보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길을 떠올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다시 조율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대명제 앞에 겸손하고
적극적으로 회개하라는 당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를 두고,
빌라도와 같은 악한 인물이 사라지는 것,
실로암 망대를 허술하게 지은 건축가들이 대가를 치르는 것,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확보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찍어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기억합니다(눅13:6-9).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임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4.
자연재해 또는 사고와 같은 참사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두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회개라는 커다란 의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유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 완전한 쾌유가 임해서
더욱 씩씩하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5)

 

하나님,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