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능력

지난 4주 동안 성령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가 되시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대변해 주시는 보증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고,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표지들(marks)이 여럿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에 대한 연속설교에서 나누었던 기쁨, 평안, 소망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통해서 얻은 구원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표지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것은 권세와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권세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같은 의미입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들도 하나님의 권세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권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미스는 말 그대로 능력 또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능력으로 임함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능력이 임한 것도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표지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하늘의 능력을 힘입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명예 또는 권력이 주는 힘과 능력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능력은 영원합니다. 우리 안에서 자체적으로 생기는 능력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들은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질그릇처럼 천하고 쉽게 부서지는 우리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강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와 능력을 무시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 깊이 잠겨있는 상태인데 우리는 늘 성령 충만하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을 날마다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자연스레 하늘의 권세와 능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제한 없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모든 악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능력의 근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힘겹고 거칠어도 하나님 자녀에게 주시는 하늘의 능력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합니다. 다음 한 주간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성령충만한 교회

강원도 예수원에 계셨던 토레이 신부님께서 아침마다 “주여, 성령 충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듯이 우리들도 매 순간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단순히 감정의 표출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기대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느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이 온전히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느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거룩한 성령께서 임재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부끄러운 죄와 교만을 날마다 씻어내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때에 선물로 주시는 성령의 은사도 받게 되고 무엇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멋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도들 개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공동체 속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하나님 나라가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 속에 세워지길 원하십니다. 성령 충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5장 19-20절에는 공동체적으로 임하는 성령 충만을 잘 설명해 줍니다. 교회 안에 임하는 성령 충만의 표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찬송입니다. 19절에는 찬송과 관련된 표현이 여섯 번 등장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는 구약성경의 시편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간증하는 찬양들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성도들 간에 거룩한 노래, 하늘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서로 찬양으로 화답하는 성령의 교제가 있습니다. 성도들 간에 찬송으로 화답함은 물론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주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교회는 찬양이 넘칩니다.

성령 충만의 표시 두 번째는 감사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가 넘칩니다. 불평을 하거나 원망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비난하거나 트집을 잡는 것도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면 서로 격려합니다.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모든 것에 감사가 넘칩니다. 이처럼 찬양과 감사는 성령 충만의 대표적인 외적표시입니다. 교회적으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성령 충만하면 찬양이 나옵니다. 불평과 원망이 그치고 범사에 감사가 시작됩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감사와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의 세 번째 표시는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이 좋아서 서로에게 잘해주거나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의 말을 듣는 세상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에서 비롯된 복종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서 기꺼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성도들에게 복종할 마음이 생깁니다. 여기서 복종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께서 성령 충만을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시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河-

성령의 충만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광범위하게 소개됩니다. 창세기 1장속의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했습니다. 사사시대의 유명한 사사였던 삼손은 하나님의 신이 충만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모세에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정복했던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신에 감동해서 승리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 속의 성령 하나님은 거대한 창조사역은 물론 하나님께서 부르신 인물들 속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이 비교적 정적인데 비해서 신약성경의 성령은 활동적입니다. 마리아가 성령 충만했을 때 복중의 아기가 뛰어놀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처럼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교회를 탄생시킬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초대교회가 굳게 서지 못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게“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성령께서 우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의 은사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깊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릇에 물을 붓는 것이 연상됩니다. 물을 지속적으로 부으면 그릇에서 넘쳐납니다. 하지만 작은 양의 물을 부으면 그릇 밑바닥에만 깔려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그릇이 깨져서 물이 밖으로 새나갈 수도 있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소멸을 조심하라는 말씀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활동이 아주 미미한 것을 뜻합니다. 성령의 불이 꺼져가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지만 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성령의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매우 안타까운 신앙입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기쁨이 샘솟습니다.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믿음에 확신이 있습니다. 조용하게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임합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은 거룩한 영이어서 정결한 신앙과 삶 속에 임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집이 세고 자아가 강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셋째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하듯이, 성령 충만도 간절히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을 사모합시다. 성령에 취할 만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 집중합시다.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기대합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세상 속에서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빛과 소금으로 예수님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河-

성령의 역사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기에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자라가도록 도와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하나님의 영)은 창조시부터 줄곧 존재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요엘서에서는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하였습니다(요엘 2:29). 에스겔서 37장에서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영이 불어넣어졌을 때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셨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면서 성자 하나님의 사역이 강조되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모두 한 분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간혹,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어도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한 한 두가지 사례를 두고 일반화시킨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두루 살폈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마음속에 주님으로 영접하였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부어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하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따라서 성령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과 동시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을 것을 명령하시고, 복음이 무엇인지 가르치신 후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들 마음속에 부어집니다. 따라서 그동안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따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이미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신앙생활이 단조롭고 때로는 낙심되고 힘이 없습니다. 마음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껏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육체와 세상을 쫓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일할 틈이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없고, 사모하는 마음이 적어서 성령의 역사가 무뎌진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등과 같은 성령의 은사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처럼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정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삶 속에서 자연스레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경에서 약속한 성령의 은사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체험들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거나 마음으로 느끼는 체험이 없어도 성령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연약하기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심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고 체험하면 신앙생활에 활력이 생깁니다. 성령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동행하심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과 능력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의 증거로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양선, 오래참음, 충성,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시길 바랍니다.-河-

성령의 임재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어떤 도(道)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을 요청하는 것과 달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이 임한다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갖고 구원을 이루시기에 복음(福音,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또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이래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세상 만물 속에도 하나님의 솜씨가 나타납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로 인해서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시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데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하지만 한번 반역한 인간은 하나님께로 쉽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고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죄인들을 찾아가셔서 고쳐주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죄를 홀로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악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사역의 완성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지상사역을 모두 마치신 후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령의 강림입니다.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기를 부탁하셨고,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기도에 힘쓰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 축제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많은 사람들이 성령 강림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니 3천명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공동체 위에 임했습니다. 성령 강림에 이은 복음 전파로 교회 공동체가 세워졌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과 기도,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알려줍니다. 첫째로 성령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는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의 길을 인도하고 위로해 주십니다. 둘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신앙과 삶이 비뚤어지지 않고 진리 가운데서 행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대신에 성령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변호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을 때 우리 안에 임합니다.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우리를 선하고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는 매우 친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임재와 역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펼쳐주시는 새로운 삶을 삽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는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河-

나의 어머니 나의 하나님

세상에 가장 강한 것은 어머니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손은 못하는 것이 업을 정도로 만능입니다. 음식을 만드는 것부터 아이를 키우는 것, 밖에서 일을 하실 때도 어머니의 손놀림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빠르고 정확합니다. 어머니의 손은 배가 아픈 것도 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넓은 것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못된 자식이라도 어머니 마음에 들어가면 착한 자식으로 변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능해도 어머님 품속에서는 가장 유능하고 뛰어난 자식입니다. 자식이 범한 그 어떤 잘못도 어머니 마음은 용광로처럼 녹여 버립니다. 어머니 – 언제 불러도 정겹고 그립고 때로는 말없이 희생하시는 모습에 안쓰러움이 밀려오는 단어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사랑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네 아버지는 말없이 자신의 길을 가시면서 가족을 책임지십니다. 어머니가 속상한 것을 표현하실 때, 아버지는 큰 기침 한번 하시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거인같이 보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보니 자기보다 작아지셨습니다.:“아버지 키가 이렇게 작았던가? 아버지 팔 다리가 이렇게 얇아 지셨나?” 흰머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정수리까지 훤하게 비어갑니다. 불도저처럼 강한 줄 알았던 아버지께서 언제부터인지 몸져누우시는 횟수가 늘어갑니다. 그래도 건강하신 척, 뭔가 있으신 척 하시는 것이 더 안쓰럽습니다.

부모님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들의 뿌리요 근원입니다. 십계명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라”가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 다음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내리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님께 잘해드려도 받은 사랑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네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해내지만 이미 부모님은 우리 곁을 떠나신 경우도 많습니다. 살아생전에 잘해 드리라는 옛 성현들의 말씀을 빨리 깨닫는 것이 그나마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입니다.

육신의 부모님 말고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멀게 느껴집니다. 하나님 다음에“아버지”라는 수식어가 있기에 하나님 앞으로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아바(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롬8:15).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음이 자녀된 그리스도인의 한없는 특권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십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십니다. 젖을 먹여서 키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라함”에는 긍휼하심외에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우리를 감싸주시는 어머니같은 분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십니다.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죄를 짓고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는 세심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이 세상에서 부모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큰 사랑을 누리면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어버이날에 낳아주신 부모님께 마음을 전해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할렐루야 -河-

복음의 능력 5 : 소망

“음식 없이 40일을 살 수 있고, 물 없이 8일을 살 수 있다. 공기 없이 4분을 견딜 수 있다. 그런데 소망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 표현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말처럼 꿈이 없으면 거친 인생의 파도를 견뎌내기 쉽지 않습니다. 꿈과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꿈을 꿉니다. 마음에 소원을 갖고 삽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도 소망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아름답고 선하게 에덴동산을 관리하길 꿈꾸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영역인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의 꿈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꿈을 꾸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꿈을 이루시길 기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란 듯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꿈을 깨우쳐주시지만 세상유혹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꿈은 이렇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비장의 무기를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꿈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복음에 깃든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손수 꿈을 이루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 안에 임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죽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환난과 유혹을 견뎌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는 절망과 낙심은 사라지고 오직 소망만 있을 뿐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임하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지난 3시간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음의 능력 세 가지 덕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원, 기쁨과 평강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복음의 능력이 바로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고, 예수님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흘러넘치도록 풍성한 소망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넘어서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누리는 소망입니다. 할렐루야!

복음의 능력이라는 주제의 연속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살펴본 로마서 본문을 갖고 참빛 교회 식구들을 축복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河-

복음의 능력 4 : 평강 (2)

히브리어 샬롬은 평강이라는 뜻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은 물론 마음과 영 그리고 삶 전반에 평강이 임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온 세상까지 퍼져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평화는 기쁨과 더불어 대표적인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가 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시기와 다툼, 증오와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들입니다. 그때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의 평화가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망가진 평화를 회복시켜주셨지만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세상은 그렇다 쳐도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글쎄요. 세상의 평화가 미움과 분쟁으로 인해서 망가졌다면, 우리 삶의 평화는 염려와 근심 때문에 망가집니다. 염려는 우리의 존재자체를 흔드는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염려가 우리들 삶 어느 곳에든지 슬며시 들어와서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질병에 대한 염려, 마음속에 찾아오는 갖가지 근심들, 삶의 불안함, 심지어 신앙의 회의까지 대부분 염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염려는 몰아내야 합니다. 염려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삶이 망가집니다. 염려를 몰아내는 방법으로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염려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지난 일의 아쉬움을 감사로 바꾸고, 현재의 어려움도 감사로 대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지 범사에 감사하기로 작정한 마음에 염려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둘째는 기도와 간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간구는 기도에 포함됩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는 소통이라면, 간구는 기도 가운데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간청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염려는 접근하지 못합니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슬그머니 나갈 것입니다. 염려가 불가피한 우리의 인생길이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염려와 근심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과 기도를 통해서 염려를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염려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수가 많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평강입니다.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강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그래서 평강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염려가 아닌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복음의 능력 3 : 평강 (1)

지난주에 살펴본“기쁨”정도는 아니지만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평강(peace)”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도와주시면 평화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평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샬롬(shalom)입니다. 샬롬은 달콤한 발음 이상으로 깊고 넓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샬롬은 단순히 평화로운 상태를 넘어서 모든 것이 온전한 상태를 뜻합니다. 육체의 건강, 마음의 평안,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임했습니다. 세상의 분쟁, 다툼, 갈등이 사라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세상 속에도 임합니다. 그런 점에서 평강은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세 가지 속성을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롬14:17). 세 가지 속성 한 가운데 평강이 들어있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음과 삶이 평온하고 얽힌 모든 관계에 화평이 임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을 빌리면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지냅니다.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안전합니다.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이처럼 평강은 현재 우리 안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자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천군천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눅 2:1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주기위해서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다툼과 갈등으로 인해서 분열된 세상에 평화를, 질병으로 아파하는 육신에 평화를,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평화를 전하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평안하뇨” 또는 “평안할지어다”라고 인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 복음인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안을 전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후에 가장 먼저 체험하는 것이 평안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할 때 마음속에 임하는 평안은 참된 예배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빼앗지 못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14:27).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기쁨을 두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는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빌 4:7,9).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안이 임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마음과 삶 깊은 곳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평강이 참빛 교회 성도님들의 삶 속에 잔잔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河-

복음의 능력 2 : 기쁨

복음을 다른 말로“기쁜 소식(good news)”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부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걷게 하셨으니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복음 속에는”기쁨”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했을 때 자연스레 기쁨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여러 번 약속하셨습니다.:“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마음에도 기쁨이 임했습니다. 성전 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걷게 됩니다. 그는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르면서 걷고 뛰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성경에는 기쁨과 관련된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기쁨이 얼마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임하고 동시에 우리가 누리는 기쁨의 풍성함을 잘 보여줍니다. 기쁨은 대부분 마음에 임하는 감정을 뜻합니다. 기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이 겉으로 표현됩니다. 표정과 행동으로 기쁨이 드러나고, 삶속에 기쁨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순간적인 기쁨이 아니라 환경과 마음의 상태에 상관없이 임하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시편기자는 주님께서 자신 안에 두신 기쁨은 포도주 농사가 잘 될 때 느끼는 기쁨보다 더 크다고 고백합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는 자신의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춤을 추듯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라고 선포합니다(시30:11).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 자체를 기뻐합니다. 성령의 열매에도 희락(기쁨)이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어려움이 닥치면 도리어 기뻐하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기쁨은 하나님 백성의 표지(marks)입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감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잘 간수했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모범적으로 자라갔습니다. 이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지만 도리어 기쁨으로 환난을 감당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성령의 기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임했음을 뜻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쁨의 영을 부어주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게 해 주심을 가르쳐줍니다.

기쁨은 마음속에 임하고 겉으로 표현된 복음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 우리들에게 기쁨은 필수적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기 원합니다. 기쁨으로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기 원합니다. 성령의 기쁨이 우리 안에 넘치길 간절히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