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발걸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요즘은 문둥병자라는 말 대신에 한센씨병이라고합니다. 한센은 노르웨이의 의사로서 나병환자의 치료제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통상 문둥병자라고 하겠습니다. 문둥병자라면 마을에서 격리되어서 따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염이 강했기에 구약시대부터 엄격하게 관리해 오던 질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서“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너희들의 문둥병이 나을 것이니 구약의 율법에 있는 대로 제사장에게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고 정상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그들의 병이 낫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병이 나아서 정상생활을 해도 된다는 판정을 받고 세상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님을 다시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그 사람은 유대인들이 천시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다시 와서 감사하는 것을 본 예수님께서도 조금 당황하신 것 같습니다. 아홉 명은 어디로 가고 한 명만 왔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한 명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온 그 사람은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이 비슷합니다. 좋지 않은 것은 오래 기억하지만 좋은 일이나 남에게 받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할 때는 “예수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막상 병이 나으니 예수님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잘나서 병이 나은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래도 한 명이 예수님께 왔으니 그 나마 다행입니다. 그 마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세어 보아야 합니다. 감사는 잠시 멈춰 서서 기억해 내야 합니다. 섭섭한 일이나 좋지 않은 일들은 저절로 마음에 새겨져있는데 감사는 잊혀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감사는 더 쉽게 잊혀지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마련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사가 우리 삶의 여정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한 가지씩 세어보고, 마음에 담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왔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열 가지 은혜 가운데 한 가지 정도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아홉 가지는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잊어버린 아홉 가지의 감사를 찾아내고 그것을 갖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감사를 빠짐없이 기억해내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들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길 원합니다. 할렐루야! -河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는 우선 하나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 즉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 그 다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나온 성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결과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거듭남(born-again)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성화, 곧 거룩함의 길이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의 삶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삶의 주인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고백하듯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에 속에 갈등이 생깁니다. 옛본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거듭 태어난 그리스도의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옛성품을 예수님 앞에 완전히 굴복시키면 이런 갈등이 없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순간순간 갈등하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갈등의 과정을 말씀과 기도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입니다. 그 과정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임하는 은혜를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쉽지 않지만 이 길이 영생으로 통하는 것임을 알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최선의 길임을 알기에 감사와 기쁨 가운데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을 지은 마태입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레위가 살던 가버나움에는 큰 세무서가 있었고, 레위는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동족의 재산을 포탈하는 행동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소외된 인생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혼자서 번민하는 인생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그대로 꼼짝없이 앉아 있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보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서 좇았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뒤로 한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동안 세금을 포탈하면서 돈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전 것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쫓는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서 잔치를 베풉니다. 죄인들과 자신과 같은 세리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먹고 마시면서 친구로 지내셨습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죄인들과 함께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부르십니다. 믿음의 자리로 부르시고, 작은 예수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기 원합니다. 친구로 맞아주시고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좇기 원합니다.-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8 : 기뻐함

인간과 새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성대를 사용해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필요할 때마다 소리를 내지만 새들은 끊임없이 재잘거립니다. 그러다보니 새들의 소리가 노래로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울음소리로 들립니다. 그동안 살펴본 까마귀, 올빼미 그리고 지난주의 비둘기는 노래한다기 보다 운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음산한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른 아침 전깃줄에 앉아서 노래하는 참새도 있습니다. 울새라고 하는 손가락보다 작은 새도 수풀 속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립니다.

새들의 노래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새는 종달새입니다. 종달새는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노래만은 일등입니다. 창공에 날아올라서 마음껏 노래하는 종달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유명한 시인들이 종달새를 노래하는 시를 쓰곤했습니다.그 가운데 대표적인 시가 영국의 시인 셸리가 쓴 “종달새에게 바친 송시”입니다.: “반가워라. 너 명랑한 영이여! 너는 결코 새는 아니었으리라. 하늘과 그 주변에서 가슴에 넘쳐흐르는 감정을 타고난 솜씨의 노랫가락으로 쏟아내는 너는!” 이처럼 종달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밝아집니다.

종달새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성가대가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주듯이 우리들은 다양한 음정과 박자에 맞춰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받으실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구약의 시편 말씀은 찬양과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탄식하면서, 외쳐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가 임하면 자연스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할렐루야”라는 말 자체가 주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넘칩니다. 감사와 기쁨을 찬양으로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온전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종달새가 하늘 높이 올라가서 노래하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높이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을 믿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임하는 은혜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95편 1-2절에서는 모든 백성들을 찬양의 자리로 초대합니다.:“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온 백성의 찬양소리가 우렁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늘 어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찬양했습니다. 시로 찬양하고, 새 노래로 찬양하고 소리 높여 찬양하고, 여러 가지 악기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구원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이 찬양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7 : 순결함

성경에 등장하는 새들 가운데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을 들라면 제일 먼저 비둘기가 떠오를 것입니다.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창문에도 비둘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현장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성화에 나오는 비둘기들은 대개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비둘기가 순결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령이 순결한 비둘기처럼 내려왔음을 뜻합니다.

비둘기는 성경에 나오는 두 번째 새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새는 연속설교 처음에 살펴보았던 까마귀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 비가 그치자 노아는 제일 먼저 까마귀를 내보내서 육지가 충분히 말랐는지 확인했습니다.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을 확인한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7일이 지났을 때 다시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이번에는 감람나무 새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7일을 기다렸다가 내보냈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육지가 드러났고 식물이 자라고 있음을 충성스럽게 노아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실제로 비둘기는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의 우편배달부로 활용되었습니다. 자기가 있는 자리로 돌아오는 귀소본능이 뛰어난 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서민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바쳐지는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양이나 소를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이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에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 많을 정도였습니다. 비둘기의 순결함은 물론 비교적 온순한 성격 때문에 제물로 드려졌던 것 같습니다.

아가서에서는 솔로몬의 연인이었던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에 비유합니다. 특별히 술람미 여인의 눈이 비둘기 눈처럼 예쁘다고 묘사합니다. 공원에 가서 비둘기 눈을 관찰해 보았습니다. 작은 눈인데 무척 예뻤습니다. 순해 보였습니다. 또한 비둘기는 바위틈 절벽에 집을 짓고 살곤 합니다. 아가서에서 자신의 여인이 숨은 것을 두고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는 비둘기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성경에서 연인을 묘사할 정도로 매력 있는 새입니다.

오늘날에도 비둘기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공원에 가면 비둘기가 떼를 지어서 다닙니다.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가가도 쉽게 도망가지 않을 정도로 인간과 친숙한 새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든지 비둘기는 서식합니다. 그러다보니 비둘기가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비둘기들의 오물이 거리를 더럽히기도 하고 비둘기가 울어대는 소리가 소음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우대받는 새가 비둘기입니다. 순결함과 충성스러움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노아의 방주에서 나뭇가지를 물고 올 정도로 충성스러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렸습니다.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와 신약성경의 첫 번째 마태복음에 비둘기가 등장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세대에 비둘기처럼 순결한 기독교인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비둘기처럼 내리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비둘기처럼 온유한 성령이 포근히 내려앉기를 기도합니다.-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6 : 신중함

성경에 나오는 새들은 당연히 팔레스타인 지역에 서식하는 새들입니다. 그 가운데 특이한 새가 오늘 함께 살펴볼 올빼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올빼미 또는 부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부엉이라는 우리말에는 올빼미 과에 속하는 모든 새들을 포함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올빼미보다는 부엉이가 어감이 더 좋은 듯 합니다. 레위기 11장 17절에 먹지 말아야 할 새들의 명단에 올빼미와 부엉이가 함께 나오는데 여기서 올빼미는 작은 부엉이, 뒤의 부엉이는 큰 올빼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올빼미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눈이 매섭고 서 있는 자세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눈꺼풀을 이용해서 눈을 껌뻑이는 능력도 갖추었습니다. 올빼미는 황폐한 곳에 살아서 까마귀처럼 섬뜩한 느낌을 줍니다. 야행성이라서 쉽게 눈에 띠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요. 반면에 올빼미 또는 부엉이는 학자와 같은 느낌도 갖고 있습니다. 큰 눈에 안경을 맞춰 쓴 만화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올빼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시력과 청력입니다. 올빼미는 낙엽 속에서 움직이는 쥐와 같은 동물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올빼미의 경우 머리 부분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감시 카메라가 360도를 회전하면서 사방을 살펴보듯이 올빼미의 머리도 180도는 물론 칡부엉이의 경우 270도까지 회전할 수 있답니다. 따라서 올빼미는 앞을 보고 있으면서도 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올빼미의 감지능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에게도 영적 민감성이 요청됩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우는 사자처럼 사방에서 달려들어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합니다. 자칫 서 있다고 생각한 채 잠시잠깐 방심하면 금방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촉수를 세우고 사방에서 밀려오는 시험과 유혹에 대비해야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올빼미가 사방을 두루 감찰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신앙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만 집착하면 우울해 지거나 필요 없는 영웅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현재만 생각하고 있으면 앞길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미래만 생각하면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올빼미가 사방을 관찰하듯이 우리들 인생길을 두루 살펴보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가지에만 몰두해서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일에만 몰두하다가 가족을 소홀히 하는 것, 취미생활에 집중하다가 정작 중요한 생업을 소홀히 하는 것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신앙만 중요하다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도 균형을 잃은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사방을 향해야하고 각각의 일들이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함을 올빼미를 통해서 배웁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의 눈이 먼저 하나님을 향할 때 영적인 촉수가 작동하고,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시편기자는 자신의 처지가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았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부르짖고 탄식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익히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사방을 두루 살펴주시고 보호해 주시길 구한 것입니다. 사방을 두루 살피는 올빼미처럼 우리들도 매사를 신중하게 살피고 기도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5 : 날아오름

새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독수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독수리는 새들 가운데서 왕으로 불릴 정도로 모습도 멋지고 성격과 행동도 남다릅니다. 독수리의 눈은 매의 눈만큼 날카롭습니다. 1미터 이상이나 되는 커다란 몸을 갖고 있는 독수리가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르는 모습은 참 근사합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지상에 있는 먹잇감을 낚아채는 능력도 있습니다. 까마귀와 마찬가지로 썩은 고기를 비롯한 육식을 가리지 않고 즐깁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 가운데 독수리야 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미국을 상징하는 새도 흰머리 독수리입니다. 몸통은 갈색인데 머리는 흰색입니다. 흰머리 독수리는 대부분 북아메리카에 서식합니다. 독립을 선언한 지 6년이 지났던1782년에 흰머리 독수리가 미국을 상징하는 국조(國鳥)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환경이 오염되면서 흰머리 독수리의 개체숫자가 줄고 있어서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답니다. 이처럼 독수리는 힘과 권력을 상징하기에 미국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를 상징하는 새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독수리는 종종 등장합니다. 독수리에 대한 언급은 출애굽기 19장 4절에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께로 인도한 것을 두고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인도했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시체를 먹는 독수리는 까마귀와 마찬가지로 먹어서는 안 될 조류에 속합니다. 독수리의 공격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사용하셨던 이방 민족을 빗대서 말하기도 합니다. 적군이 독수리처럼 밀려 올 것이라는 말씀이 대표적입니다(신28:49).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두고 독수리처럼 날아간다고 표현했습니다(욥9:26).나뭇가지 높은 곳에 집을 짓는 독수리의 특징을 비유한 말씀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49장 16절은 들사람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에 대한 심판예언입니다. 에돔은 용맹스런 민족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독수리처럼 아무리 높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도 하나님께서 끌어 내리신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성경 속에서 독수리는 모습, 특징, 습성을 근거로 비유적인 소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피곤하고 곤비합니다. 대부분의 삶은 기진맥진입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소년이라도 한참을 걷다보면 지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듯이 근사하게 비상(飛上)할 수 있다고 깨우쳐줍니다. 사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있는 자리에서 독수리처럼 멋지게 날갯짓하며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로 날아오르는 멋진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권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 사모하는 것,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님께 걸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파도가 밀려오고 폭풍우가 닥쳐도 주님과 함께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의 삶이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기 원합니다.-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4 : 자존감

세상에서 가장 흔한 새를 들라면 당연히 참새일 것입니다. 가을 아침 전깃줄에 앉아 있는 참새들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익숙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새들의 울음소리를 배울 때 제일 먼저 익히는 것이“참새는 짹짹”입니다. 실제로 참새는 세계 어디나 살고 있답니다. 몸집이 작아서 생존하기 쉽고 부지런히 먹이를 먹는 습성이 있어서 번식력도 뛰어납니다.

참새들의 모습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연고동색 깃털을 갖고 작은 머리에 눈은 초롱초롱합니다. 참새 소리는 약간 시끄러울 정도입니다. 새들에 대한 책을 쓴 팰로돈이라는 영국 분은 참새를 묘사하면서 “다른 새들은 노래하듯 지저귀는데 참새는 이른 아침부터 귀찮을 정도로 짹짹 거린다.”라고 했습니다. 참새의 번식력은 꽤 높아서 가을철 곡식이 익어갈 때 참새들을 쫓느라 허수아비를 세워놓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참새가 얼마에 팔리는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는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하셨고 누가복음 12장 6절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동전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페니에 해당하는 앗사리온에 두 마리가 팔릴 정도면 참새가 얼마나 하찮은 새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흔하고 작은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신 우리들은 얼마나 더욱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이것을 두고 마태복음 10장 31절에서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참새는 흔한 새였기에“많은 참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6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도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기억하시고, 참새가 얼마에 팔리는지도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자신의 백성을 기억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겠냐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인정해주고 귀하게 여겨줄 사람을 찾기도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열등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실패에 대한 불안함, 혼자라는 외로움 등에서 열등감이 생기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참새까지 기억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새까지 사랑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은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열등감에서 헤어 나오는 비결입니다. 열등감을 넘어서 자신의 귀함을 깨닫는 자존감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이 생기고 실제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새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참새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같은 연약한 존재를 사랑하시고 돌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주심으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들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동시에 자존감도 높아질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흔한 새인 참새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3 : 보호하심

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날개는 말 그대로 새들이 하늘을 날 때 필요한 신체기관입니다. 그런데 새, 즉 조류에 속하면서도 날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날더라도 멀리 또는 높이 날지 못하고 날개만 퍼덕거리는 수준의 조류들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북극에 살고 있는 펭귄입니다. 펭귄은 마치 신사들이 파티에 갈 때 입는 연미복처럼 멋진 날개를 갖고 있지만 날갯짓만 할 뿐 날지 못합니다. 날기는커녕 걷는 것도 기우뚱거립니다. 솔직히 펭귄을 새라고 부르기도 조금 민망합니다. 하지만 펭귄도 물고기를 사냥하거나 적에게 쫓길 때는 날개와 짧은 발을 사용해서 비상할 정도로 민첩하게 달릴 수 있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생태에 맞게 신체구조를 설계해 주신 셈입니다.

조류에 속하면서 거의 날지 못하는 또 다른 새가 바로 닭입니다. 닭은 푸드덕거릴 뿐 거의 날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닭도 엄연히 조류에 속하고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닭의 날개는 어디에 사용될까요? 닭은 날개로 알과 새끼를 품어 보호합니다. 알이 부화되기까지 어미닭은 자신의 체온을 사용합니다. 닭은 몸이 따뜻한 온혈동물이어서 알을 품고 부화하기에 적합하게 창조되었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어미닭은 알에서 부화한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어서 보호합니다. 닭뿐만 아닙니다. 대부분의 어미 새들은 날개를 사용해서 알을 품고 부화시킵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가 어느 정도 자랄 때 까지 어미 새는 날개아래 새끼를 품어서 보호합니다. 새들의 모성본능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을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탄식하실 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이처럼 새들의 날개는 새끼를 보호해 주는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새들이 날개로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품어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한 척 해도 누군가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함께 어울려 살면서 서로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미 간파한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날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시17:8-9).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숨기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길 원합니다.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홀로 있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의 날개 아래 품어 주시고 다가오는 모든 환난과 시련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2 : 돌아옴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물들이 자기의 처음 서식지나 알을 낳는 곳으로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귀소본능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어입니다. 태평양 바다에 있던 연어들이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을 잊지 못하고 마음 한편에 간직해 둡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일종의 귀소본능입니다.

새들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제비가 대표적입니다. 철새인 제비는 추녀 끝에 지푸라기와 진흙으로 지어 놓은 집을 이듬해에 와서 다시 사용하기도 합니다. 비둘기도 귀소본능이 뛰어난 새입니다. 노아가 홍수가 끝났을 때 까마귀를 먼저 내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비둘기는 두 번씩이나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2차 대전 때 영국 공군은 비둘기 우편제도를 활용할 정도입니다. 어떤 새는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서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니 새를 비롯한 동물들의 귀소본능이 대단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영적인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지만 인간에게는 절대자를 찾고 자신의 창조주에게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초월적인 신을 찾고 믿으려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믿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8장 4절 말씀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안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뜻대로 살면 좋을 것 같지만 끝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배하는 이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예레미야 8장 7절에는 철새들의 이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전 600여년 경에 철새의 이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대단해 보입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학(황새)는 정한 시기를 안다고 했습니다. 철새들이 정확한 시기에 맞춰서 이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황새뿐만 아니라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도 철새로 언급됩니다. 물론 히브리어 본문의 뜻이 꼭 똑같지는 않지만 세 가지 종류 모두 철새들입니다. 철새들은 계절에 맞게 옮겨 다니면서 서식합니다. 그들이 가야할 곳을 알기에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자신들의 살길을 찾습니다.

귀소본능을 가진 동물들과 철새를 보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늘에 철새가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절을 좇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제 멋대로 사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매 순간 철새들이 살길을 찾아서 날아가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살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성경에서는 회개라고 합니다. 죄악된 세상에 살지만 일주일에 한번 주님께 돌아와서 예배합니다.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합니다. 철새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품에 안겨서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들의 발걸음이 매 순간 주님께로 향하길 원합니다. -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1 : 도우심

지난 달 초에는 야외예배로 모였습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공중 나는 새들을 보면서 제가 평소에 존경하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새”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스토트 목사님은 영국 성공회 신부님으로 작년에 작고하셨는데 성경과 신학에 대한 저술은 물론 사역을 통해서 복음주의 교회를 이끌었던 훌륭한 지도자셨습니다. 스토트 목사님은 신학과 목회 외에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만물을 관찰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 가운데 새에 대한 관심이 특별하셔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는 새들을 관찰하기 위해서 비무장지대를 방문하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앞으로 스토트 목사님께서 저술하신 <새: 우리들의 선생님>이라는 책을 참고해서 새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9,000여종의 새들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약 10여종이 넘는 새들이 등장합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새는 노아의 홍수때 땅이 말랐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노아가 세상으로 내 보냈던 까마귀입니다(창6:7).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고 물이 마르기까지 공중을 날아다녔습니다. 두 번째로 내보낸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그릿시냇가에 숨었을 때 까마귀가 그에게 음식을 날라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말씀에도 하나님께서 까마귀 새끼를 먹이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를 길조(吉鳥)로 여기지 않습니다. 까만 색깔과 음산한 울음소리 때문입니다. 실제로 까마귀는 농산물을 해치기도 하고, 무엇보다 썩은 고기를 먹는 등 좋지 않은 행동을 한답니다. 까마귀들은 우두머리 없이 각자 생활하는데 여기서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반면에 까마귀는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수컷이 먹이를 공급해 줍니다. 거동하지 못하는 어미 새에게 먹이를 갖다 주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렇다고 까마귀가 결코 아름다운 새는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도 까마귀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레11:15,신14;14).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는 까마귀 새끼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욥기 38장 41절에서는 까마귀 새끼가 먹이를 찾는 모습을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처럼 묘사합니다:“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하나님께서 울부짖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예비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공중 나는 새들을 보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들도 먹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먹잇감을 예비해 놓으셨고 그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새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들이야말로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하늘을 날기 위해서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해야 합니다.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움직여야 합니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잽싸게 가로채야합니다. 때로는 자기보다 큰 맹수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 주의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함을 공중 나는 새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먹을 것을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도우심이 참빛 교회 성도님들 모두에게 매일같이 임하길 간절히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