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이 눈을 뜨다 (1)

요한복음 9장 전체가 소경이 눈을 뜨는 표적을 보도하고 표적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에 걸쳐서 요한복음9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 구걸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至心)이 발동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무엇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소외된 백성들,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뭇 백성들을 보실 때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동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기된 첫 번째 이슈는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냐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은 부모가 죄를 지은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모든 질병도 심지어 죽음도 죄를 지어서 생겼다는 인과응보의 신앙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기에 길에서 구걸하는 소경을 보고“누구의 죄로 인해서 소경으로 태어났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십니다.:“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예수님은 소경을 바라보시면서 그를 정죄하거나 가족의 죄를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소경을 보시면서 먼저 불쌍한 마음이 드셨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생각을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종종 자신 또는 남들이 겪는 고난을 죄와 연계시킬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시면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팩을 만드셨고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발라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전 고대에 종종 있던 치료법 가운데 하나였고, 마가복음 7:33과 8:23에 의하면 예수님도 침을 뱉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침”은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는데(레15:8) 예수님께서 침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어서 일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길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올바름입니다. 어떤 어두움의 세력이나 과거의 율법이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9:5). 그만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신 메시야이십니다.

또한 침을 사용하신 것은 소경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눈높이를 우리에게 맞추시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임을 본문 속에서 다시금 배웁니다.

진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까지 가는 소경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십시오. 우리들이라면 그렇게 했을까요? 생면부지의 사람이 와서 이상한 일을 자기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한다면 대부분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실로암 연못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눈을 씻었고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행동이 눈을 뜨게 만든 것입니다. -河-

오병이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표적은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가셨습니다. 어느덧 예수님께서는 유명인이 되셔서 어디를 가든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는 것은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려고 모였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말씀이 갈(渴)하던 시대였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이후로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보살피기보다 각기 자기의 길을 가기에 바빴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 정권과 결탁해서 자신의 배를 채웠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만을 지키면서 백성들을 무시했고, 어떤 사람들은 폭력을 통해서 로마 정권을 물리치려고 쿠데타를 도모했습니다. 그때 일반 백성들은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지쳐 있었고, 식민지하에서 하루하루 쪼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찾아가셨습니다. q백성들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 모여들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비록 하루하루의 삶이 먹을 양식도 없을 만큼 힘겨웠지만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복음은 이들에게 소망이 되었고 능력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큰 무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산에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오던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무리들을 보니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한 끼라도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으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충분히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무리들을 먹일 수 있을까?“라고 물으십니다. 빌립은 베드로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일찍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test)하신 것입니다. 빌립은 그 많은 무리를 먹이기 위해서 2백 데나리온이라는 큰돈이 필요하다고 펄쩍 뜁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표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았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돈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기대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던 빌립은 안타깝게도 세상적으로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한 아이가 도시락으로 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있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갖고 축사하시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어린 아이가 내놓은 작은 음식이 시발점이 되어서 오천 명이 먹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은 작고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작은 것도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커다란 표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됩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고 자신이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되심을 보여줍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체험한 백성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절)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시작이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키고 오천 명이 배불리 먹는 나눔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河-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지난주에 이어서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는 표적을 살펴봅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았다는 사실은 그의 절망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숫자적으로 표현해줍니다. 병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주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지금은 병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물이 동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설령 물이 동해도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이 사람은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처럼 38년 된 병자의 상황은 절망, 외로움, 막연한 기대, 고통으로 요약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들이 가지 않는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많은 병자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가엾어 보이는 38년된 병자를 보셨고, 그의 상황을 아셨고, 그에게“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38년 동안 이 사람을 괴롭혔던 병이 나았다고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38년 병자가 한 일이라고는 자신의 상황을 두고 예수님께 불평한 것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때 38년 된 병자는 오랫동안 괴롭히던 병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일어난 표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이 병자는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서 병이 사라졌고, 일어나졌고, 예수님 말씀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자리를 들고”라는 말은 환자가 누워있던 천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남겨두고 가도 좋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은혜로 병이 나았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자리를 들고 집에 갔을 때,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를 보면서 지난 38년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아픈 과거이지만, 과거를 잊지 않고 자신의 병이 나은 것과 병을 낫게 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과거를 잊기보다 생각해 내면서 감사하고 어려운 과거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이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병이 나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죄를 짓지 말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라는 부탁이십니다. 병이 낫는 것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의인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세상에서 간증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오랫동안 괴롭히던 병이 낫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병보다 훨씬 괴로운 죄로부터 해방되고 예수 안에서 새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을 누리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河-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동안 살펴본 두 번의 표적들은 모두 가나에서 일어났습니다.”가나“는 히브리어로“갈대마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대처럼 연약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말씀으로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들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 표적 가운데 오늘은 세 번째 표적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나는 ..이다”(예:“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또한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과 당당하게 논쟁을 벌이십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속의 예수님은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전능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자꾸만 부딪치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안식일 규정을 어기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등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두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마12:8).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으니 예수님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지키실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는, 안식일이라도 죽어가는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살리는 일들은 해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얽매여서 사람을 살리는 일까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산자의 하나님/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오늘 표적도 안식일에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곳에 행각 다섯 개가 있었고 행각 아래 병자들이 연못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연못의 물이 동(動)할 때가 있는데, 그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서 몸을 담그면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전설처럼 전해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다가가서 물으십니다.:“네가 낫고자 하느냐?”예수님은 이 병자가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진심에서 물어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병자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물이 동해도 자신을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병이 나을 수 없답니다. 자신의 병이 낫기를 바라지만 이 병자에게는 병이 나을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행각에 누워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린다면 이 병자는 요행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절망 가운데 단지 그곳에 누워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예수님의 말씀에 38년 된 병이 순식간에 나았습니다.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오늘 표적도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고,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들 역시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아멘 -河-

“네 아들이 살았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께서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표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일들을 단순히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속에 들어있는 심오한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표적(sign)”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가나에서 첫 번째 표적을 보이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십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이 은연중에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아직 자신의 때가 되지 않았기에 다시 갈릴리로 내려오십니다. 갈릴리에 와 보니,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다녀온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모두 알려놓았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과 더불어 예수님은 이미 이 지역에서 유명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일으키신 가나를 다시 방문하셨을 때, 왕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 사람에게 아들이 한명 있었는데 죽을병에 걸렸답니다. 16마일쯤 떨어진 자신의 집까지 오셔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초청에 선뜻 응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메시야로 세상에 오셨지 모든 병을 고치는 의사로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고쳐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은 표적을 베푸신 것이지 단순히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왕의 신하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가지 않으십니다. 대신에“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만하십니다. 왕의 하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갑니다. 집에 도착할 즈음 하인들이 나와서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전해 줍니다. 알아보니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시던 시간과 아들이 나은 시간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지 않으셔도 말씀으로 하인의 아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체험한 왕의 신하는 온 가족과 더불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단지 아들이 살아난 기적만 체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번째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하인의 아들을 살리신 표적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살았다(생명)”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네 아들이 살았다”(50절),“아이가 살았다”(51절),“네 아들이 살았다”(53절).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을 때(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아들이 낫는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신하의 집에 가지 않으셔도 먼 거리에서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표적이나 기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는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더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河-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다

서머나 성도님들과 더불어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가장 기쁘고 동시에 떨리기도 합니다. 목사로서 하나님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성도님들과 교회가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성도님들과 더불어 나누고, 그 말씀으로 교회와 성도님들이 변화되는 것을 목도할 때는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지난 4주에 걸쳐서 스바냐 3장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보면서 춤을 추실 정도로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남은 자의 신앙,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부터 축제의 삶을 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제 앞으로 7주에 걸쳐서 요한복음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한 두 본문은 예전에 설교했었는데, 이번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에 대한 본문들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기적(miracle)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표적(signs)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세이메이온”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기적(“두나미스” 권능)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사건을 보여주셨을 때 지칭하는 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병을 고치시거나,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거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지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이심을 보여주셨기에 표적(싸인)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의 전반부 (1-12장)에는 특별히 7가지 표적이 나옵니다. 표적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표적 뒤에는 꼭 예수님의 설교가 나와서, 표적이 설교를 위한 도입부처럼 생각될 정도입니다. 표적보다 그 이면에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과 함께 가나라는 동네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종들에게 손을 씻는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물을 갖다가 손님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고,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를 맛본 손님들은 하나 같이 기뻐했습니다.

결혼식은 축제의 자리입니다. 여섯 개의 항아리는 불완전한 세상을 상징하고 율법에 얽매인 유대교를 가리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유대교의 역할이 끝났다는 표시입니다. 그곳에 가득 채워진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늘나라의 복음이 구태의연한 유대교의 율법을 대신 할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를 먹고 기뻐하는 손님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천국잔치에 참여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속의 결혼 잔치와 스바냐 3장의 천국잔치가 일맥상통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표적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河-

기쁨의 축제

스바냐서 3장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루살렘의 패역과 더러움 그리고 포학을 지적하면서 시작된 스바냐 3장은 끝까지 신앙을 지킨 남은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집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패역과 배신을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 가운데서 끊임없이 바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이 닿는 곳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 – 이들은 가난하고 곤고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을 행치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고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신앙과 삶이 일치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고 두려움을 제하여 주십니다.(3:12-13).

지난 시간부터 살펴보는 스바냐 3장 14절 이하는 남은 자들, 즉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나팔을 불며 기뻐하고 마음에 기쁨이 샘솟는 천국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모든 형벌이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께서 구원받은 백성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구원받은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라면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손을 늘어뜨려서도 안 됩니다. 손을 늘어뜨리는 것은 절망, 실패, 낙심, 포기의 표시인데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밀려오는 두려움을 해결하였다면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17절은 끝까지 남아서 구원의 축제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고백입니다. 세상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 남은 자를 주복하시고 보호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이제 구원받은 백성들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마지막 축제의 자리에 온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십니다.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18절 이하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회복시켜주시는 치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축제가 벌어졌지만 마음이 슬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십니다. 다시는 이들이 모욕을 받지 않게 하시고, 그동안 당했던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을 약속하십니다. 흩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모으시고, 부끄러움을 겪었던 백성들이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십니다.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킨 주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의 말씀입니다.

스바냐 3장은 이렇게 전능자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구원, 자신의 백성을 향한 기쁨의 사랑고백, 그동안 신앙을 지키면서 겪었던 어려움과 부끄러움에 대한 회복과 치유, 마지막에 주의 백성들이 얻게 되는 명성과 칭찬으로 끝이 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온전히 누리게 될 구원의 기쁨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누려야 할 기쁨이요 축복이기도 합니다. 서머나 성도님들과 무엇보다 오늘 임원으로 취임하신 것을 축하받는 모든 임원들 위에 하늘의 기쁨과 구원의 축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河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스바냐서 3장을 살펴보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역사의 격동기에 살았던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관심을, 현미경을 통해서 관찰하듯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로 차츰차츰 좁혀 옵니다. 3장의 전반부에서(1-7절) 하나님께서는 패역과 더러움과 포학으로 대표되는 예루살렘에 거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아침마다 끊임없이 공의를 선포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두 번째 문단에서(8-13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남은 자들을 주목하십니다. 이들은 도시 전체가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범했음에도 남아서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곤고함과 가난함”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루살렘 가운데 남겨놓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은 죄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남들을 속이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서로 속고 속이는 패역한 예루살렘에서 이처럼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자들은 세상 한 복판에서 거룩함을 유지했습니다. 이것이 남은자의 신앙입니다.

이제 오늘과 다음 시간에 살펴볼 스바냐 3장의 마지막 부분은(14-20절)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찬양과 기쁨의 축제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거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을 목도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14절에 등장하는 명령형 동사들은 축제가 시작되었음을 가리킵니다.:“노래할찌어다”“기쁘게 부를찌어다”“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말씀을 읽고만 있어도 저절로 기쁨이 밀려오고 찬양하게 됩니다. 노래하고 기쁘게 부르는 것은 승리의 팡파르입니다. 승리의 종을 치고 승전가를 외쳐 부르는 것입니다. 반면에“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기쁨입니다. 그러고 보니 안과 밖이 모두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찬양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의 누리는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이렇게 소리쳐 외치며 마음으로 기뻐할 이유가 15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 가운데 계십니다. 형벌을 제해 주셨고 원수를 쫓아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음이라는 형벌을 면제받았고, 사망의 세력을 모두 이기신 것을 연상시킵니다. 다시는 화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들이 누려야 할 자유의 삶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들은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다시 한 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두려움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 삶에 대한 공포가 있고, 죽음이 임박하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삶에 의욕을 잃고 손을 늘어뜨리게 됩니다. 절망과 낙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백성들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손을 늘어뜨려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河-

남은 자의 하나님

므낫세라는 아주 못된 왕의 55년 통치는 이스라엘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우상숭배는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다른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와 신앙자체에 대한 무관심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스바냐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강력히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숨어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 모일찌어다.”(습2:1). 하지만 백성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깨닫지 못하는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스바냐 3장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3장 1절에 있는 “패역, 더러움, 포학”이 당시 예루살렘에 만연한 죄악이었습니다. 세상이 그토록 망가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 거하셨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더럽고 패역한 세상에서 아침마다 끊임없이 바른 길(공의)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 백성들의 영적감각을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예루살렘과 온 세상을 벌하기로 결정하십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질투의 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바냐와 다른 선지자를 보내셔서 어떻게든 죄에 빠진 세상을 구하려 애쓰셨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거룩한 백성들이 더럽고 패역한 악한 영에게 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갔을 때 느끼는 것이 질투심이듯이 하나님도 자신의 백성을 향해서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셨고 그것은 곧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목적은 새로운 세상을 다시 만드시려는 또 하나의 창조행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9절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들을 벌하셨습니다. 언어를 다르게 만드셨고 인류를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스바냐서에서는 바벨탑 심판과 반대되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세상 열국이 깨끗한 입술로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모입니다. 9절에 보면 지면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여듭니다. 옛 것이 모두 지나고 새로운 세상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 여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것입니다. 12절에는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될 사람들이 나옵니다.“곤고한 자들은 세상 삶에 지쳐서 몸과 마음이 낮아진 사람들입니다.“가난한 자들은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악에서 떠나고, 더 이상 속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먹고 누우면서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끝가지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만을 의지했던“남은 자”들에게 임하는 복입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남은자의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세상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라는 연속설교를 지난 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말씀은 틈틈이 계속 전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사명 두 가지는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우리들의 삶의 터전이요 보금자리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하늘나라의 모델하우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친교하고, 세상에 생수를 공급하는 영적 오아시스입니다.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공동체인 반면에, 세상에는 사람들이 세워놓고 운영하는 여러 가지 조직과 활동들이 있습니다. 직장, 학교, 정부, 그리고 여러 모임들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임도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모임도 있고, 더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요? 신약성경에 의하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동안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의 소예언서를 공부해왔습니다. 호세아로 시작된 공부가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라서 올 상반기 중에 소예언서 12권을 모두 마칠 것 같습니다. 구약의 소예언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회개와 소망의 메시지와 더불어 악한 권력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최근에는 스바냐서를 공부하면서, 마지막 3장을 남겨놓고 있는데 마지막 장은 앞으로 3번에 걸쳐서 주일예배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유다마저 멸망할 즈음이었습니다. 므낫세라는 왕이 55년 동안 통치하면서 신앙은 물론 나라가 모두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므낫세를 이어서 요시야가 어린나이에 왕이 됩니다. 요시야는 신앙을 바로세우는 개혁을 단행합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바로 그 즈음에 활동하면서 회개와 갱신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앞으로 스바냐 3장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꿈을 꾸시고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가진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과 교회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비슷합니다. 악하고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면 희망의 빛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스바냐 1장에서 지적한 우상숭배, 혼합주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속에 살아갑니다. 3장 1절의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은 당시 예루살렘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은 현재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세상 가운데 계십니다. 그곳에서 공의와 심판 그리고 사랑과 용서를 펼쳐 보이십니다. 진실로 자신을 찾는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십니다.

이번 설교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