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인내 (2007.8.19)

히브리서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될 무렵에 쓰였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로 인해서 로마제국이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개종했던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던 유대인들이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그 상황에서 기록된 말씀이 히브리서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합니다. 힘들수록 더 열심히 모이고 믿음위에 굳게 서 있으라고 합니다. 특히,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신앙의 열조들처럼 우리들 역시 “믿음으로”살 것을 교훈합니다.

편안할 때는 누구나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으면서 좋은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신앙 여정이 늘 장밋빛 융단이 깔린 아스팔트는 아닙니다. 힘겨울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피해도 입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고난이 찾아와서 마음과 몸이 지칠 때도 있습니다. 그때 꼭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집트 군인을 죽인 것이 탄로가 나자 미디안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40년은 모세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세월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양을 치면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면서 또 다시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그리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아쉽게도 하나님께 부름을 받습니다. 모세는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쓰인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믿으면서 끝까지 참았기 때문입니다. 인내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인내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신앙의 끈을 놓지 말고 끝까지 견뎌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지켜주시고 최후승리를 약속하십니다. 믿음가운데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河-

두려움 극복 (2007.8.12)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낍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지금은 사업이 잘되고 직장이 아무리 튼튼해도 미래는 늘 불확실합니다. 거기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요즘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두려워 말라!”

성경에서 많이 반복되는 말씀가운데 하나가 “두려워 말라”입니다. 실제로 신구약 성경에서“두려워 말라”는 명령은 개역성경에만 79번 나옵니다. 거기에 “무서워 말라”까지 합치면 90번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모두 명령형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무조건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뱅겔이라는 신학자는 두려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위의 말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이 나옵니다. 두려움을 물리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두렵습니다. 삶이 아슬아슬해지고 염려와 근심이 자꾸만 밀려옵니다. 두려움의 대상을 바꿔야 합니다. 세상의 일들이나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들 뜻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두려움은 모두 없어집니다.

모세의 부모님이 바로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길 수 있었던 것도 믿음 때문입니다. 바로를 두려워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왕보다 더 위대하신 전능자 하나님을 믿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믿음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河-

믿음의 조상 (2007.7.22)

창세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립니다. 창세기 12장 1-4절 말씀 속에서 그가 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당시는 이름이 아브람)에게“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가야할 목적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라고 목적지를 분명히 가르쳐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일단 본토와 친척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가야할 길을 보여주시겠다는 식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조카 롯의 가족까지 데리고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히브리서 11장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세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는 떠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과감히 현재 있는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편해도 세상의 자리를 놓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를 향하여 신앙의 순례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나 실패 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도 버려두고 떠나야합니다.

둘째로, 믿음은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춤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할 걸음씩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앞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실치 않아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셋째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에 거하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장막에 거했어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땅에 있을 때 아브라함은 복을 누렸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께서 있으라는 곳에 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인정하고 그 말씀에‘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앞길이 불확실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앙의 순례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河-

당대의 의인 노아 (2007.7.8)

노아가 살았던 세상은 죄악이 온 천지를 덮을 정도로 타락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고 후회하셨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리십니다.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노아는 그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창세기 6장 8절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하면“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눈에 쏙 들어서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고 9절에서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았을 때, 노아가 맨 앞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홍수의 심판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노아가 하나님 눈에 들고 당대의 의인이라고 칭찬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에녹과 마찬가지로 노아 역시 하나님과 늘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믿음의 순서대로 일렬로 세워놓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디쯤 있으실 것 같습니까? 까마득하게 뒷줄에 있으실 것 같습니까? 믿음에 욕심을 내고 믿음의 경주에서 1등을 차지하려고 노력해야하는데 우리들은 세상을 쫓아 삽니다. 세상에서 1등 하는 것을 최고로 압니다. 아침안개처럼 금방 없어질 것들을 얻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헛된 것에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활력을 잃었습니다. 적당히 믿으니 축복도 은혜도 적당히 임할 뿐입니다.

이제 노아의 믿음을 본받기로 결심합시다. 당장 눈앞에 펼쳐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고 앞으로 나갑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꼭 붙잡고 절대로 흔들리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고 주어진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려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우리들이 이와 같은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河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2007.7.1)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22:24)-이 말씀대로라면 하나님께서 에녹을 어느 날 갑자기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라고 아주 리얼하게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에녹이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셨음을 강조합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에녹이 유명한 사람이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을 것입니다. 군인들과 경찰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그를 찾으려고 수색작업을 펼쳤을 것입니다. 휴대폰 발신음을 추적하는 등 첨단장비도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행여나 그가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 같은 평범한 시민이었다고 해도 누군가 경찰에 실종신고를 내고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들이 아무런 소동도 벌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65세에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결심한 이래 300년 동안 한 치도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에녹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에녹의 모습을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했기에 에녹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고 자연스레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에녹은 하나님과 죽음의 길도 동행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홀로 건너야 하는 길인 죽음의 길에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없이 하늘나라로 직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행했던 에녹이 누린 최고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과 매 순간 동행하는 것입니다.

7월의 첫 날입니다. 특별히 이번 새달에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늘 동행하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2007.6.24)

지난주에는 병상에 계신 한 노권사님을 심방했습니다. 손을 꼭 잡아드리니 마음에 갖고 계시던 이야기보따리를 푸셨습니다. 여덟 살 때에 당시 동네의 대학생 오빠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셨답니다. 원래 총명하신 권사님이셨지만 그 옛날 예수님을 처음 만나던 얘기를 하실 때는 더욱 눈이 반짝이셨습니다. 권사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셨답니다. 어릴 적에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어린이가 되고 싶으셨고, 어른이 되어서도“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칭찬하실까?”를 늘 자문(自問)하시면서 평생을 지내셨답니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자”- 듣고 입으로 따라 하기만 해도 마음이 밝아지는 말입니다. 동시에 솔직히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려면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할까요? 얼마나 양심적으로 살아야 할까요?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점 투성이, 오점 투성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서 있으면 그것을 보시고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51편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는 에녹을“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부릅니다. 에녹은 평생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기에 그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에녹은 평생 동안 하나님과 늘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한시도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는 자,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서머나 식구들의 신앙의 표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인의 분노 (2007.6.17)

창세기 4장에는 아담과 이브의 가족에게 닥친 비극이 나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에게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나는 열매로, 아벨은 자신이 기르던 양 중에서 첫 번째 새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동생의 제사만 열납된 것을 본 가인의 마음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오셔서 분을 내는 이유를 물으십니다. 죄가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으니 죄를 다스리라는 경고도 잊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가인은 분을 못 이기고 들로 나가서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갖게 되는 순간입니다. 가인은 평생을 유리방황하면서 도망자로 살게됩니다.

창세기 본문은 제사가 열납된 아벨보다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타락한 인류의 모습을 액면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동생의 제물만 열납된 것을 보고 가인 마음속에서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분노로 발전했고 급기야 동생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게리 채프먼이라는 분은 “분노는 특정 문화 속 특정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누구나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가인의 후예가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큰일이지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분노를 다스리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1)그것은 무엇보다 시기와 질투를 우리 마음속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넉넉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2)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막대기는 몽둥이로 쓰일 수도 있지만 버팀목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버팀목은 서로를 세워주고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3) 억울한 일을 당해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거든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분한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십시오. 사랑의 하나님께서 분한 마음을 만져주실 것입니다.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분노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생수의 강 (2007.6.3)

저는 그동안 오늘까지 7주에 걸쳐서“물”과 관련된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선 물은 생명수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는 강이 네 줄길로 흘렀습니다. 에스겔서 47장에 나오는 성소에서 흘러나와서 온 세상을 살리는 물도 생명수입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눈 요한복음 7장에서는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천국의 모습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가 강처럼 흐른다고 했습니다. 생명수가 흐르는 강 양 옆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영원히 예수님과 더불어 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에서“물”은 심판과 고난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물은 심판의 수단이었습니다. 신약에서의 폭풍은 고난의 상징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임한 폭풍이 제자들을 심히 괴롭혔습니다. 불안하게 만들었고 죽을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믿음”으로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지중해의 폭풍우 속에서도 말씀을 꼭 붙잡았습니다. 어떤 폭풍우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안에서는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밖에서는 생명수가 넘쳐납니다. 삶 속에 폭풍이 일어도 믿음가운데 말씀을 붙잡으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큰 복을 받은 우리들은 매일 매일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큰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 속에서도 동일하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성소에서 은혜의 강물이 넘쳐나는데 왜 기뻐하지 않습니까?

바스커 빌이란 분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주일을 다음가 같이 표현했습니다.:“행복한 월요일, 복된 화요일, 즐거운 수요일, 유쾌한 목요일, 좋은 금요일, 영광스런 토요일,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주일.”

한 주간 힘차게 시작하십시오. -河-

능력의 통로 (2007.5.20)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눈에 보일만큼, 마음으로 느낄 만큼 체험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즉각 개입하셔서 기적적으로(?)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언제나 신비로운 방법으로 또는 극적인 방법으로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는 하나님 편에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하나님 입장에서 이해해야지 우리들 입장에서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상생활 속에 그대로 임합니다. 순간순간 숨을 쉬면서 살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건강을 주셔서 일터에 나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루를 마감하고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만도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일상생활에 터를 잡고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현재의 삶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까지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때때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경험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기적이 임할 때도 있습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그가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양을 칠 때 갖고 다니던 지팡이였습니다. 손때가 묻은 평범한 지팡이입니다. 그는 지팡이를 갖고 양들을 보호했습니다. 때로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서 계곡을 오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팡이는 모세의 분신처럼 늘 옆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십니다.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뱀으로 변했습니다. 지팡이를 들어서 홍해를 향해서 내뻗으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던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를 사용하십니다. 새로운 것이나 신기한 것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일상적인 것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작은 것들까지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능력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河-

경청 (2007.5.13)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아만 장군은 나무랄 데 없는 시리아의 장군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용감했고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나아만 장군에게 커다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당시에 문둥병을 앓는 환자는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멸시했습니다. 외모가 흉한 것은 물론이고 사회에서 격리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아마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은 아주 심한 상태는 아니었나봅니다. 그래도 그가 문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무척 창피했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어린 계집종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여종이 나아만 장군의 아내에게 “이스라엘에 가서 선지자를 만나면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하찮은 여종의 말이니 무시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과 그의 아내는 이스라엘 여종의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위대한 점은 이처럼 그가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듣는 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에 가서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게 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합니다. 나아만 장군에게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일입니다. 강물이야 어디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아주 신비로운 방법으로 문둥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강물에 몸을 씻으라니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때 그의 부하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우리식으로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몸을 씻어보라”고 권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그들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습니다. 그리고 문둥병이 모두 낫게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위대함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듣는 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줄 아는 듣는 귀를 갖고 계십니까?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참 복 받은 사람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