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케이다(cicada)

좋은 아침입니다.

 

1.
지금부터 17년 전인 2004년
인디애나에 있을 때입니다.

 

갑자기 온 세상이 매미 천지가 되었습니다.
창문에도, 자동차 위에도, 길에도, 나뭇가지에도
심지어 길을 갈 때 매미가 옷에 와서 붙을 정도입니다.
셀 수 없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씨케이다(cicada)라는 매미였습니다.
17년 동안 땅 밑에서 애벌레로 살다가
한꺼번에 성충으로 지상에 나타나서 짝짓기를 하고 한두 달 후에 사라집니다.
자연의 신비입니다.

 

2.
엊그제 신문에 보니
동부에 씨케이다가 나타나기 시작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2004년 인디애나에서 씨케이다를 본 후
정확히 17년이 지났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씨케이다를 보면
다음 씨케이다가 태어날 때 어떤 모습일지 상상한답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다음 씨케이다를 볼 수 있을지,
아이들은
다음 씨케이다가 나올 때 몇 살이 되고 무엇을 하고 있을지,
17년이 짧은 세월이 아니기에 막연한 소원부터
구체적인 계획까지 씨케이다 생애 주기를 보면서 꿈을 꾸는 것입니다.

 

저희도 2004년 씨케이다를 보면서
17년 후에는 저희 부부가 60 가까이 될 것이라며 놀라워했었습니다.
아이들은 서른을 넘거나 가까이 갈 것이라면서
그때가 오지 않을 것처럼 얘기했는데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니
올여름에도 동부와 중서부에는 매미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매미 철이 지나면,
앞으로 17년을 떠올리면서 각자 인생의 꿈을 꾸겠지요.

 

3.
씨케이다가 살아가는
17년이라는 주기(cycle)는 너무 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하루,
주일을 중심으로 한 주간, 한 달, 일 년을 삽니다.

 

각각의 주기에 맞게
삶을 준비하고, 펼치고,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17년 전, 씨케이다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는데
올해 다시 나온다는 보도에 갑자기 씨케이다가 그리워집니다.

 

어쩌면 펜데믹을 비롯한 지금 우리의 삶에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께름칙한 것들도 있지만,
훗날 돌아보면 그립고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음을 회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present)로 주신 오늘 현재(present)를
마음껏 누립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 3:11)
He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in its time. Also, he has put eternity into man’s heart. (Ecc 3:11)

 

하나님,
길고, 때로는 짧게 느껴지는 삶의 순간을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5. 20 이-메일 목회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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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로마서 1장 3-4절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절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을 주(主, Lord)라고 고백하는 것은
초대 교회의 매우 중요한 신앙이고 전통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불렀기에
제국의 황제가 아닌 나사렛 출신 예수를
“주”라고 부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자칫, 로마 당국에 끌려가서 감옥에 갇히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는 순교를 각오한 위험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래도 초대 교회는
예수님을 “주”라고 담대하게 고백하고 선포했습니다.

 

2.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주후69-155년)은
불에 타서 순교했습니다.

 

폴리갑은 당시 로마 총독과 친구였습니다.
친구를 잃는 것을 주저한 로마 총독이 폴리갑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이 주가 아니라 로마 황제를 주로 부르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폴리갑이 남겼다는 말이 유명합니다:
내가 86년간 예수님을 섬겼고,
그분이 나를 모른다고 한 적이 없으신데,
내가 어떻게 내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순교 사화에 의하면 폴리갑이 순교하기 위해서
원형 경기장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폴리갑이여, 강건하라! 대장부답게 싸워라!

 

폴리갑을 죽이기 위해서 불을 붙였을 때, 불꽃이 그를 둘러쌓고
신비로운 향기가 원형 경기장을 가득 채웠답니다.
폴리갑은 그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순교했습니다.

 

3.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초대 교회의 전통은
2천 년 교회사는 물론
오늘 우리 참빛 교회까지 변함없이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헷갈릴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을 여러 가지로 대답할 이유도 없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똑같이 예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면
더할 것도 감할 것도 없는 완벽한 신앙 고백입니다.
기독교에 입문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관문이요 첫 단추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모든 대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들어있습니다.

 

우리 참빛 식구들이 한마음으로 한 목소리로
그리고 삶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드러내기 원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4)

 

[He] was declared to be the Son of God in power according to the Spirit of holiness
by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Jesus Christ our Lord. (Rom 1:4)

 

하나님,
교회에서, 가정에서, 각자의 삶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한결같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5. 13 이-메일 목회 서신)

포모 증후군

좋은 아침입니다.

 

1.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예전 같으면 속속들이 알 수 없었던
개인의 삶과 친지들의 모임이 전부 알려지고 있습니다.

 

행여나 자기 삶이 남들보다 자랑스럽지 못하거나
친지들의 모임에 초대받지 못한 때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상하고, 소외된 느낌이 듭니다.

 

1990년 처음 소개된 포모 증후군입니다.
FOMO (Fear of Missing Out)
– 소외되었거나 자신만 배제된 듯한 두려움입니다.
우리 말로 “고립 공포감”이라고 옮기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행, 성취, 행복 등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데
자신은 행복한 사람들의 대열에 참여하지 못한 것 같을 때
고립 공포감이 찾아옵니다.

 

미국의 GameStop 신드롬에서 알 수 있듯이
주식투자를 통해서 큰돈을 벌려는 현상이 유행인 것 같습니다.
그때 자신은 주식투자를 하지 않고, 주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
자신만 대열에서 배제된 것 같은 고립 공포감(FOMO)을 느낍니다.

 
2.
자기만 고립되었다고 느끼는 포모(FOMO)는
현대인들이 겪는 커다란 심리적 부담입니다.

 

고립 공포감을 갖게 되면
자아 존중감이 떨어지고, 인간관계에 자신감을 잃고
심리적으로 무척 위축되게 마련인데
많은 현대인이 포모( FOMO)를 느낍니다.

 

그러니 무엇엔가 소속되고 싶어 합니다.
무슨 일이든 해야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나눴듯이
자칫 생산적이지 않은 일에 종으로 붙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립 공포감이 아니라
도리어 배제되었다는 기쁨(JOMO: Joy of Missing Out)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데
세상에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포모(FOMO)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되시고,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행여나, 세상일에 조금 배제되고 밀려나는 느낌이 들어도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행복을 느낍니다.

 

배제되었다는 공포가 아니라
배제되었어도 기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길을 함께 걷는 공동체 식구들이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가 되고, 개인의 삶이 속살까지 드러나고
자랑이 앞서는 시대가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고립 공포감(FOMO)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같은 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로 인해서
배제의 두려움이 배제의 기쁨으로 변하길 기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하나님,
참빛 식구들과 항상 함께 하소서.
행여나 외롭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5. 6 이-메일 목회 서신)

마스크 대란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CDC(질병관리본부)에서
백신을 맞은 경우 산책, 야외 소그룹 모임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습니다.
안심할 정도는 아니지만, 백신 이후에 상황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작년 이맘때
미국은 마스크 대란을 겪었습니다.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아니었던 미국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습니다.
대통령이 마스크를 하지 않고 버젓이 공식 석상에 등장하면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마스크 자체를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의료진들까지 마스크가 부족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마스크를 선물해주고 선물 받는 것이
생명줄을 얻는 것만큼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2
일 년이 지난 지금,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공공건물은 물론 작은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입장 불가입니다.

 

게다가, 이제 마스크가 남아돕니다.
웬만한 상점에 가면 쉽게 마스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격세지감입니다.

 

그러다 보니
생명줄처럼 귀했던 마스크가
조금씩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이 아쉽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마스크야말로 백신만큼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아준 최고의 무기였는데 말입니다.

 

3.
작년의 마스크 대란이 엊그제 같은데
일 년도 안 돼서 마스크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첫째로, 어떤 일이 닥쳐도 초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마스크뿐 아니라 물과 휴지, 손 세정제를 두고도 전쟁을 벌였는데
지금은 넘쳐난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지천입니다.

 

우리가 조급하고 초조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언젠가는 별것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차분하게 시간을 벌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둘째는,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들은 금세 사라짐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토록 귀하던 마스크도 공급이 늘어나면서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물품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마스크 업체들이 도산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도 읽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애지중지 여기고
온 힘을 다해서 추구하는 것들이
언젠가는 허무하게 사라지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4.
금세 사라질 것들에 마음을 쏟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눈앞에 닥친 문제 앞에서
초조해하고 조급해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큰 그림을 볼 줄 압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붙들고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추구할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깨닫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앞으로 주일 예배에서
로마서의 첫 일곱 구절을 차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흔들림 없이 꼭 붙들고 살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깊이 생각하고
믿음의 길에 견고히 서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1:16)

 

하나님,
진실로 귀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마음에 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 29 이-메일 목회 서신)

슈퍼리그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직은 섣부르지만
미국의 경우 백신 접종이 꾸준히 이뤄지면서
팬데믹이 조금씩 걷혀가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팬데믹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고 때로는 염려가 됩니다.

 

세상의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격차”가 아닐까 싶습니다.
빈부격차, 부자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 잘 나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 등등
세상이 하나가 되기보다 차이와 간격이 넓어지면서
더욱 치열한 경쟁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큽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엊그제 발표된 유럽의 “슈퍼 리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현재 세계 축구를 이끄는 유럽의 강팀들로 구성된
말 그대로 슈퍼 리그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슈퍼 리그에 참여하는 팀들은 최고의 선수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축구 팬들을 확보한 구단들입니다.

 

거기에 미국의 JP Morgan 금융 그룹이 6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고
슈퍼 리그에 참여하는 클럽들은 수백억 달러의 보너스를 받고 시작하기에
펜데믹 기간의 적자를 메울 수 있고,
앞으로도 TV 중계권료를 비롯한 상당한 자본이 슈퍼 리그에 투입되면서
참가한 클럽은 물론 선수들도 돈방석에 앉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자칫 축구판이 ‘자본(돈)’에 의해서 좌우될 가능성,
최고 구단들만의 리그가 되면서
풀뿌리 유럽 축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등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벌써 탈퇴하겠다는 팀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 축구연맹의 전횡과 부정부패가
새로운 리그를 탄생시켰다고 해도
슈퍼 리그가 슈퍼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께름칙합니다.

 

2.
어디 축구판만 그럴까요?
팬데믹 이후에 많은 경우, “돈”에 의해서 호불호가 정해질 가능성이 크고
잘 나가는 회사나 사람들은 슈퍼 리그로 올라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뒤처지는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산다는 말, 희생이라는 덕목,
룻기에서 배운 하나님 사랑 <헤세드>를 과연 세상에 찾아볼 수 있을는지요!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 희생, 내려감, 손해, 공정, 분배를 바라시는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함을 알지만,
워낙 세상 물결이 강해서 우리도 모르게 휩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쉽지 않고 고민이 깊어집니다.

 

3.
함께 대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 이 길을 걷기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을 것입니다.

 

세상 물결이 몰려오면 손에 손을 잡고 방어하고
더불어 주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근사한 공동체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 참빛 공동체 속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동지임을 확인하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살기로 격려하고 도전하고
‘하나님 나라 슈퍼 리그’를 만들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하나님,

오늘도 제국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 하시고 하늘의 지혜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 22 이-메일 목회 서신)

묻어가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마다 룻기를 읽어가면서
제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 가운데 하나는
룻기의 주인공들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꼭 붙어서
베들레헴에 돌아오고,
시어머니를 위해서 보리 이삭을 주으러 밭으로 나갑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행여나 자신이 죽은 후에 모압(이방)여인 룻이 홀로 사는 것이 염려되어서
그를 돌봐줄 안식처, 남편을 생각합니다.

 

나오미가 마음에 두고 있는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는
예수님을 닮은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보리밭에서 일하는 일꾼들까지 귀하게 여기고
일꾼들도 주인인 보아스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압 여인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
민족이나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
차별없이, 아니 더 세심하게 룻을 챙깁니다.

 

룻에게 베푼 보아스의 사랑을
시어머니 나오미는 “헤세드”라고 표현했습니다.
보아스 역시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본 룻의 사랑을 “헤세드”로 칭찬했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입니다.
신약의 헬라어 <아가페>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룻기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 축복하고, 헤세드(하나님 사랑)를 실천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섭리)을 경험했습니다.

 

2.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 시대는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때인데
룻기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매우 인격적이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룻기를 읽으면서
저 자신이 당시의 베들레헴에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아스 기업의 종업원이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모압 여인 룻을 도왔을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이 속한 친족이었다면
홀로 된 여성 룻과 나오미를 돌보는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탰을 것입니다.

 

이렇게 룻기 속에 들어가 있으면
선한 사람들의 배려와 격려를 통해서
저 역시 저절로 선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3.
공동체의 힘입니다.

 

좋은 공동체가 세워지면
그 속에 속한 구성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선한 길을 갑니다.
서로 ‘묻어가는 것’입니다.

 

흩어져서 예배한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도
힘든 시간을 함께 겪고 있는 참빛 식구들,
신앙의 동지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서로서로 묻어갈 정도로 힘 있는
주님의 공동체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그 길을 갑시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 4:12)

 

 

하나님,
서로에게 격려와 도전을 주는
참빛 공동체로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 15 이-메일 목회 서신)

염려와 불안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 성경 공부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공부할 주제 중에
두려움과 염려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두려움(fear)은 사람, 상황,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느끼는 말 그대로 공포입니다.
적당한 두려움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하지만
지나친 두려움은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듭니다.

 

꼭 필요한 두려움도 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敬畏 the fear of God)라고 부릅니다.

 

두려움과 달리
염려(worry)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황을 미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안이 없기에 두려움보다 강도가 작을 수 있지만
생각이나 삶을 어수선하게 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또 다른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우리 안에서 생기는 염려의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들임을 알면서도
연약한 우리 마음이 염려에 휩싸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부탁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두려움과 염려가 우리를 억누르고 신앙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가 “불안(anxiety)”입니다.

 

불안은
마음과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면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입니다.
불안하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2.
팬데믹이 길어지고
앞길에 대한 막막함, 맥락 없이 닥치는 어려움 등이 닥칠 때
두려움, 염려, 불안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우리가 진작 두려워할 대상이 하나님임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해야 합니다.
피난처와 방패 되시는 하나님 품으로 달려들어야 합니다.

 

소리 없이 침투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소리 없이 침묵하면서
깊은 기도에 들어가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염려를 물리치는 길은 기도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던지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훈련해서 습관이 되면 어느 정도 염려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불안과 염려는 비슷합니다.
대신 불안이 심해지면
상담을 받거나 의사의 안내를 받는 것도 좋습니다.

 

일상적인 불안이라면
그 순간에 소리 내서 기도하거나 찬양하실 것을 권합니다.
찬양은 어두운 세력을 쫓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이 밝아지고 가벼워질 때까지
한자리에 앉아서 찬양하면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번에 끝날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염려,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실천해야 할 신앙 훈련입니다.

 

3.
부활절 이후를 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 안팎에서 밀려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부활의 능력으로 극복하기 원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부활의 주님을 따라서 주어진 인생길, 신앙의 길,
일상을 살기 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부활을 살게 하소서.
찾아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이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8 이-메일 목회 서신)

나그네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 룻기를 읽고 있습니다.
룻기는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면서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간
엘리멜렉의 가족사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고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만 살아남았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꿈을 갖고 떠난 이민길에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와
10여년을 모압에서 이민자(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오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당시 홀로된 여성의 삶과 중첩되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모압 출신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옵니다.

 

어머니의 민족이 자기 민족이 되고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하고 떠난 여정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역이민을 했지만,
모압 출신 룻은 베들레헴의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언제나
“모압 출신” “모압 여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선민의식이 컸던 이스라엘에서 룻이 겪었을 나그네 서러움이 느껴집니다.

 

3.
룻과 나오미만 이민자로 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부터 나그네(이민자)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가나안 땅에 온 아브라함,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동네로 피난 갔던 야곱,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과 그의 후손들까지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함께 특별히 나그네를
환대하고 대접하라고 부탁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3년 공생애 동안 머리 둘 곳 없는 노숙자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대신, 당시에 나그네로 살았던 땅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나그네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도
나그네로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4.
요즘처럼 미국에서 나그네로 사는 심정이
복잡한 때도 별로 없었습니다.

 

인종 차별은 미국의 고질적 문제라고 생각했고
1992년 LA 폭동과 소소하게 일어나는 유사한 갈등으로 경각심을 가졌지만
팬데믹 이후 아시안 혐오가 미국의 큰 사회문제가 되고 보니
우리의 이민 생활이 나그네 삶인 것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조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도 내야 합니다.
타인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오길 기도해야 합니다.

 

룻기의 보아스가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돕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왔다가
본향인 하나님께로 가는 이민자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23: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걸어가는 나그네 길에
주께서 꼭 동행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1 이-메일 목회 서신)

숨은 보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미국 신문과 방송에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동부 코네티컷 뉴헤이븐 근처에서
어떤 사람이 연꽃 모양의 도자기 그릇을
거라지 세일(garage sale)에서 샀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도자기에 조예가 깊은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6 인치에 불과한 도자기 그릇 하나가 35불에 나왔으니
우리가 알다시피 거라지 세일치고는 비싼 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흥정하지 않고 35불에 도자기를 삽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진을 찍어서 진품 여부를 알아보았고
이 도자기는 세계에서 여섯 개밖에 없는
15세기 명나라 영락 황제 시대의 유물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소더비 경매에서 이 도자기 그릇 한 개가
무려 $721,800에 낙찰되었습니다.

 

소더비에서 중국 유물을 담당하는 맥카티어(McAteer)라는 분은
자기도 생전에 이런 고대 유물을 볼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서
고대 유물들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2.
중국 도자기를 야드 세일에서 산 사람은
귀한 유물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녀갔지만,
35불이나 주고 “연꽃 그릇 (lotus bowl)” 한 개를
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다른 물건에 눈길을 주었겠지요.

 

신앙에도 안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도
밭에서 일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서둘러 집에 와서는 모든 것을 팔아서
보화가 숨겨진 밭을 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숨은 보화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선입견,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가득 차서
진작 중요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3.
팬데믹이라고 하지만
어느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질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도/신앙도 내팽개칠 기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꼭 붙들고 삽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보화와 같은 복음을 살 수 있습니다.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오늘도 일상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 신앙의 보물을 찾아내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하나님,
예수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행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25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섭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갔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온 사건을 두고
예정과 섭리를 비교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찌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이나
보아스가 밭에 온 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만남을
운명적으로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룻이나 보아스의 행동은
하나님에 의해서 프로그램화된 것이 되고 맙니다.
룻이나 보아스의 의지가 사라집니다.

 

예정(predestination)이 갖고 있는 맹점입니다.
룻이나 보아스나 엄연히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서
보리밭에 왔고 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2.
섭리(providence)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허락을 받고
보리 이삭을 주으러 밭에 나왔습니다.
그것은 룻의 결단이고 룻이 스스로 행한 것입니다.

 

그 시간에 보아스도
베들레헴에서 밭에 나왔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보리밭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룻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때 마침 보아스를 보리밭에 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룻과 보아스에게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일어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 순간’에 임한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룻과 보아스가 각자 밭으로 왔을 때
하나님도 그들과 함께 하셨고
두 사람의 발걸음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섭리(providence)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 마음대로/욕심대로 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성경의 자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서로 섬기면서 세워줍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행하기에 자유입니다.

 

룻과 보아스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셔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3.
참새 한 마리가 얼마에 팔리는지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세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목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인생길을 걷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오늘 하루 참빛 식구들 위에
세심하게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마음과 삶에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1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