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점 찾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 살펴보는 시편 77편 말씀대로

하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삶은

하나님 손길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경이로움(His wonders),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깜짝 놀랄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그동안 함께 읽었듯이

시편 77편에서 시인의 삶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밤에도 손을 들고 기도하고

기도해도 안정은커녕 불안함과 한숨이 나오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사람의 위로까지 마다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질문하고 사정하면서

그 어려운 시간을 견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함과 슬픔을 인정하고

지존자의 오른손이 행하신 변화를 경험하면서

말 그대로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시편 77편은 10절을 중심으로

전과 후가 나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반부가 하나님과 씨름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면

후반부는 하나님의 경이와 하신 일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이전에는 옛일을 기억하면 불안했는데

이제는 옛일을 기억하니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이 생각납니다.

 

2.

저도

팬데믹 기간은 물론

그 이전의 옛날을 기억해 보았습니다.

 

힘들었던 일이 먼저 생각났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시간을 예상해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고

여전히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했습니다.

 

교회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온상지가 되었다는

조국의 뉴스에 한숨이 나왔습니다.

 

시편 77편의 터닝포인트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편 말씀처럼 전과 후가 완전히 갈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의 현실이 녹록지 않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옛일을 기억해 보았습니다.

 

예전의 행복했던 순간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던 날들

주의 경이로움이 넘쳤던 순간들

교인들, 이웃들, 가족들과 더불어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했습니다.

 

지나온 <행복점>들을 찾아서

지금 이곳으로 가지고 오니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찬송이 나왔습니다.

 

3.

주의 경이로움을 생각하는 주간입니다.

 

그 비결 가운데 하나가

예전의 행복했던 순간을 찾아내서

그 속에 깃든 주의 손길, 주님의 기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행복점 찾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때의 하나님께서 지금도 함께하시고

앞으로도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편77:11)

I will remember the deeds of the LORD;

yes, I will remember your wonders of old.(Ps 77:11)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마음 속에 기쁨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8. 20이-메일 목회 서신)

끊을 수 없느니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큐티 본문이

로마서 8장이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최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창조 세계와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모세 율법을 알고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신

이스라엘도 율법에 걸려 넘어가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내려 오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여전히 죄라는 악한 세력이 이곳 저곳에 침투해서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할 만큼

죄의 유혹이 큽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죄로 인해서 힘겨워하는 우리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모든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잠시 잠깐 죄에 넘어갈 수는 있어도

죄가 절대로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2.

그래도 우리는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그  뜻대로 기도하고 실천하는데 취약합니다.

 

그때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거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킬 세력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칼이나 전쟁도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도

벌거벗겨진다고 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을 것이 없습니다.

 

3.

분리불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완견의 경우 주인과 떨어지면

몹시 불안해하고 이상하게 행동합니다.

 

우리도 누군가 또는 어떤 상황에서 분리되면

안전의 욕구가 파괴되면서 불안에 휩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신 하나님 부재(absence)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숨어 버리신 하나님!

하나님과 단절이 가장 힘든 순간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존자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단절시킬

그 어떤 세력도 없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주의 임재(presence)를 매순간 느끼기 원합니다.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 (롬 8:39)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not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our Lord. (Rom 8:39)

 

하나님,

결단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시는 주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8. 13이-메일 목회 서신)

 

 

 

 

 

 

 

안누스 미라빌리스

좋은 아침입니다.

 

1.

“안누스 미라빌리스 (Annus Mirabilis)”라는 라틴어 표현이 있습니다.

<기적의 해(a year of miracle)>라는 뜻입니다.

놀라운 해(wonderful year)

경이로운 해(amazing year)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아이작 뉴턴에게

1666년이 바로 기적의 해였습니다.

 

그때도 런던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런던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우리처럼 자택 격리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뉴턴도 캐임브리지 대학이 문을 닫으면서

가족이 있는 시골로 내려갔는데,

전염병을 피해서 고향에서 지내던 2년이

그에게 <안누스 미라빌리스, 기적의 해>였습니다.

 

고향에 갇혀 지내는 동안

프리즘의 원리, 중력의 법칙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뉴턴이 고향집 자기 방에서 누워있을 때,

유리창의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서 반사되는 것을 보고

프리즘의 원리를 발견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답답하고 미래가 꽉- 막힌 팬데믹이

연구에 대한 뉴턴의 열정을 막지 못했습니다.

아니, 더 큰 업적을 내는 기적의 해가 되었습니다.

 

2.

<실락원(Paradise Lost)>이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긴

존 밀턴 역시 1626년 대학 1학년 때

가렛톳 패스트(bubonic plague)라고 불리는 전염병이 돌아서

학교가 문을 닫고 런던에 있는 자택에 격리되었습니다.

 

밀턴은 그때 친구를 위한 시를 썼는데

훗날 밀턴의 문학에 커다란 기초를 놓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밀턴의 인생은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최고 역작 <실락원>을 쓸 때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그의 딸에게 불러주며 대서사시를 완성했습니다.

 

밀턴은 실락원 속에서

비록 낙원은 잃었지만

힘을 합쳐서 다시 시작하려는 가능성의 문도 열어 두었습니다.

 

 

3.

팬데믹(pandemic)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all people”이라는 뜻의 그리스 말에서 왔습니다.

 

에피데믹(Epidemic)은

전염병 같은 재앙이 국지적으로 위로 솟아나듯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고

팬데믹은 모든 사람이 함께 겪는 재난을 가리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기약 없는 팬데믹을 살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빛이 없는 깜깜한 어둠입니다.

여행은 물론 예배와 모임의 자유까지 빼앗긴 포로 생활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의기소침하지 말고

<안누스 미라빌리스>를 살았던 선배들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뉴턴이나 밀턴에 비교할 수 없어도

각자 있는 자리에서 팬데믹 기간을

“기적의 해”로 만드는 것이지요.

 

갇혀 있지만 나름대로 창조적인 시간(카이로스)을 살고

훗날 교회와 세상이 다시 회복되었을 때

서로 나눌 각자의 이야기를 많이 만들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2020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요즘

하나님과의 이야기로

우리 신앙과 삶이 비옥해 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누스 미라빌리스 Annus Mirabilis!!!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 36:9)

For with you is the fountain of life; in your light do we see light.(Ps 36: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마음에 삶에 빛을 비추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8. 6이-메일 목회 서신)

 

세 가지 규칙

좋은 아침입니다.

 

1.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무려 70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동시에

예루살렘이 왜 멸망했는지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신앙을 다시 추스르면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 상당 부분의 편집을 마쳤습니다.

 

느헤미야 8장에 의하면

에스라가 율법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많은 학자들이 모세 오경이 정경으로 완성된 때라고 봅니다.

 

2.

우리는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지만

넉 달 이상을 집에서 격리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으니

기도에 깨어있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 원합니다.

 

또한 각자의 삶을 돌아보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고 설계할 수 있다면 더욱더 좋겠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세 가지 단순한 규칙(three-simple rules)을 제시했습니다.

 

가능하면 (if we could),

1)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면 안 됩니다 (No harm)

2) 선을 행해야 합니다 (Do good)

3)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Stay in love with God).

 

그리스도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방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훼방꾼이 되거나,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선하고 바르게 작동하는데 참여하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고, 그 사랑을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간단한 규칙이라고 했지만,

이 세 가지 규칙을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면,

팬데믹 기간은 물론 그 이후의 삶이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3.

집에 포로로 잡혀 있는 듯한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보내기 원합니다.

 

No harm, Do good, Stay in love with God.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And let us not grow weary of doing good,

for in due season we will reap, if we do not give up.(Gal 6:9)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닮고 선한 길을 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7. 30이-메일 목회 서신)

교회 앞

좋은 아침입니다.

 

1.

예배로 모이지 못한지

넉 달이 넘어갑니다.

 

교회는 잘 있습니다.

예배실은 물론

아래층 친교실도 상쾌하도록 가끔 청소하고,

뒤꼍 아이들 방에 먼지가 덮이지 않도록 걸레로 닦아 줍니다.

 

그래도 우리 교인들의 발길이 뜸하니

거미들이 이곳저곳에 줄을 치고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에클레시아 (부름받은 성도들의 모임)>라는 말 그대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임을 실감합니다.

 

2.

우리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를 강조했습니다.

 

교회 모임을 많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주일 공동체 예배에 집중하고

나머지 6일 동안은 가정과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로 약속했습니다.

 

대신,

주일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친교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상에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기를 기대했습니다.

 

코로나가 발생하면서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가 흩어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모임이 적은 우리 교회도 힘든데

일주일 내내 모임이 많던 교회들은 꽤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교회를 흩어 놓는 것에도 뜻이 있겠지요.

 

 

3.

교회에 흐뭇한 일도 생겼습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지 못하는 동안

교회 앞 정원에는 예전에 없던 과일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가지가 휠 정도로 사과가 열리고

우체통 옆에는 배, 자두, 사과가 다닥다닥 붙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정도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자연이 살아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우리 교회 앞 과일나무에도 임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 앞 도로가 한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거리에 서 있는 자동차들이 발진할 때 매연이 많이 나와서

길가 나무며 꽃이 죽곤 했는데 올해는 교통편이 훨씬 줄었습니다.

 

샌프란 공기도 좋아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침에 내리는 이슬이 맑은 공기와 합쳐서

나무들이 많은 열매를 맺도록 도운 것 같습니다.

 

4.

세상일이 모두 나쁠 수는 없습니다.

 

교회들이 너무 모임을 강조하니

팬데믹 기간 동안 저절로 흩어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공기가 맑아지면서

도심의 과일 나무도 신이 나서 열매를 맺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꾸 좋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되고

부정적인 뉴스나 소식에 민감하게 됩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세상 한 가운데서 여전히 선하고 진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포착하기 원합니다.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심을 믿고

오늘 하루도 감사로 시작합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Rejoice always, pray without ceasing,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for you.(1Thes 5:16-18)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에게 생명과 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7. 23이-메일 목회 서신)

기도로

좋은 아침입니다.

 

1.

3월 중순부터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우리는 집에서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넉 달 가까이 지났고

예전의 일상으로의 회복이 멀기만 하니 조바심이 납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집에서 지내다가

다른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날 것 같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초기에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그것을 듣고 보면서 웃으며 견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루하고,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아마, 사람들의 분노(스트레스)지수를 측정하면

꽤 높을 것 같습니다.

 

2.

우리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늦어도

6월에는 예배로 모일 줄 알았는데

8월 야외 예배는 물론 참빛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마음껏 찬양하고, 친교실에서 점심을 함께할 날이

과연 찾아올지 막연합니다.

 

엊그제 임원회에서

새로운 일상을 기정사실화하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을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교회가 모이지 못하면 반쪽짜리 사역이 되기 쉽습니다.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맞닥뜨린 상황을 선용하고 이것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기 원합니다.

 

3.

우리 교회 기도 시간은 밤 10시입니다.

 

초저녁잠이 많으신 권사님들은 8시나 9시에

그렇지 않으시면 10시를 구별하고 기도하십니다.

그 힘으로 우리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월요일 10시에

Zoom으로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10시에 <zoom 기도실>에 입장해서 채팅창에 띄운 기도 제목과

개인 기도 제목을 갖고 15분 기도하고

짧게 <센터링 침묵기도>를 갖는 식입니다.

 

30분 남짓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힘이 났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집에 있으면서도 기도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 시간이 줄어드니

삶의 호흡이 가빠지고, 영적으로 답답함을 느낍니다.

 

팬데믹으로 힘겨운 일상을 뚫고 나가는 힘은 기도라고 믿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갑시다. 다시 기본(베이직)을 챙깁시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고, 골방을 확보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 상황을 헤쳐 나갑시다.

 

기도에 힘이 있음을 경험하는 이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5:14)

This is the confidence that we have toward him,

that if we ask anything according to his will he hears us.(1John 5:1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각자의 소리로 기도할 때 꼭 들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7. 16이-메일 목회 서신)

 

 

 

 

 

 

피난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아침에 읽은 시편 142편이

계속 입술과 마음에서 맴돕니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시편이라는

표제어 때문입니다.

 

다윗은 10년 넘게

사울을 피해서 광야를 헤맸습니다.

자신이 죽인 골리앗 장수의 나라 블레셋까지 가서

침을 흘리고 미친 척하면서 살아남았습니다.

 

들로 산으로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 동굴이 다윗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2.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편 142:1:1).

 

“내가 소리 내어”라는 표현이

큰 소리로 다가옵니다.

다윗의 기도 소리가 동굴을 꽉- 채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팬데믹을 맞아서

집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렇게 거주와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할 줄 누가 알았을까요!

 

큰 소리 내서 기도하고

마음껏 찬양한 지가 까마득합니다.

주일 예배가 그리운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록 예배로 모이지 못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양하시면 어떨까요: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 도다.

 

3.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5절).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에게

동굴 만한 피난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굴은 피난처이자

자칫 적들에게 들킨다면 꼼짝없이 잡히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진정한 피난처임을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새로운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심을 믿습니다.

 

앞길이 불안한 상황 속에서

우리 마음이 심히 상합니다.

그때도 주님께서 우리의 위로가 되심을 믿습니다.

 

힘들수록 주님께 외쳐 기도하고

지칠수록 주님을 피난처 삼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 앞에서

마음껏 외쳐 기도하고 찬양하는 시간을 꼭 가집시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시편 142:6)

Attend to my cry,

for I am brought very low!  (Psalms 142:6)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을 주님 품에 안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7. 9 이-메일 목회 서신)

양선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을 살펴보았습니다.

 

양선(goodness)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그것을 선한 일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양선은 친절(kindness)로 번역할 수 있는 자비와

서로 사촌지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비와 양선은 이웃을 향하기에

세상에서 빛이 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한 주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은밀하게 양선을 실천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만 아는 선행입니다.

 

이 다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사연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 손을 잡고 춤을 출 수 있는 선행이길 바랬습니다.

 

2.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믿을지 고민할 때,

죄, 구속, 은혜, 화목 등등 교리적인 것들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 신앙을 튼튼하게 만드는 교리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교리적인 영역보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예수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고

이웃들에게 양선을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이 다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춤을 출 것을 꿈꾸는 삶입니다.

상상만 해도 신이 납니다.

 

이처럼 신나게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3.

2020년도 반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팬데믹으로 3개월 이상을 집에서 지낸 특별한 일상이었습니다.

 

여전히 남은 반년의 세상과 삶이 불확실하지만,

새로운 일상 속에서

먼 훗날 하나님과 더불어 나눌 이야기 보따리를

풍성하게 채우기 원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풀어놓을 <양선> 주머니가

차고 넘치는 참빛 식구들의 인생길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The LORD your God is in your midst, a mighty one who will sa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gladness; he will quiet you by his love;

he will exult over you with loud singing.(Zephania 3:17)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출 때를 상상하면서

오늘 하루도 양선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7.2 이-메일 목회 서신)

신명기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신명기 읽기를 마쳤습니다.

 

신명기의 주제는 어떤 면에서 매우 단순하고 단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면

모든 일에 형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면

예비된 복이 저주로 뒤바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지체 없이 곧바로 이뤄지니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은 시원하지만,

실제 생활로 돌아오면 말씀과 실제 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현실과 삶이

신명기 법칙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명기 말씀은

약속의 땅에서 새롭게 시작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100% 완전한 기대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야훼 종교와 달리

황금으로 만든 황소를 섬기고

도덕을 떠나서 쾌락을 즐기도록 허락하고

철저하게 신전을 찾는 손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세의 애끓는 부탁을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가나안 신앙, 제국의 신앙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2.

팬데믹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불확실성이 드리워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백신 개발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그만큼 백신 개발이 중요합니다.

 

반면, 교회는

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힘이 되거나

빛을 비추는 등대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팬데믹의 온상지라는 오명을 쓰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비롯한 신앙이 해야 할 기능이 분명히 있을텐데

그것을 찾아보기 힘드니 아쉽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생각과 삶은 어떠해야 할지요?

 

3.

다시 신명기 말씀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마음과 삶 한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팬데믹의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며

기쁨의 환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면 더 없이 감사한 일입니다.

 

불확실한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과 소망으로 이어진다는 말씀(롬5:4)을 붙잡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신명기 말씀처럼 그 효력이 곧바로 나타나지 않아도

조바심 내지 말고

끈기를 갖고 세상에 임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모세가 전해준 신명기 신앙을 마음에 품고

아무도 가지 않는 <뉴-노멀>을 사는 것입니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오늘의 일상을 살기 원합니다.

 

힘냅시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마음을 힘써 지키라 (신명기 4:9)

 

 

하나님 아버지

힘들수록

참빛 식구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6. 25이-메일 목회 서신)

 

 

기도 그 이후

좋은 아침입니다.

 

1.

팬데믹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기도하는 시간도 늘어납니다.

 

꼭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아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삶 속에서 드리는 기도, 항상 기도하는 좋은 예입니다.

 

기도하고 나면 (특별히 매우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곧바로 응답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생깁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공을 넘겨드렸으니

신속한 응답이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조바심을 내면서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대신에 자신의 힘으로 더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운이 없었다고 털털 털고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맡겼다는 생각에서 노력을 덜 하거나,

행여나 기도 응답이 안 되면 하나님은 물론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고

뒤끝이 오랫동안 지속되거나 더 크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는 우리가 조심할 부분입니다.

 

 

2.

기도한 후에 응답되기 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 = 응답> 이라는 공식에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정(情)이 깊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과 그 응답 여부에만 집착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비즈니스에서 보는 거래(deal)가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도 아니고 기도의 본뜻도 아닙니다.

 

기도 제목을 발판 삼아서

하나님과 친밀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대화하고 사귐의 시간을 갖는다면 더욱 좋습니다.

 

 

3.

누구나 기도하고 나면 응답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것도 빠른 응답을 원합니다. 솔직히 조바심이 납니다.

 

기도 후에 찾아오는 초조함은

신앙은 물론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할 점입니다.

 

기도 후 밀려오는

조급증을 극복하기 원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편 62:1)

For God alone my soul waits in silence;

from him comes my salvation. (Psalms 62:1)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기도가 깊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6. 18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