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땡스기빙

Happy Thanksgiving!!!

 

1.

단비와 함께 맞는

2018년 추수 감사절입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다음 주에도 비소식이 있으니

산불도 꺼지고, 덕분에 공기도 좋아지고,

우리 동네 산천초목이 푸르게 변할 것 같습니다.

 

여름철 교회 앞 정원(?)에 물을 줄 때마다

제가 아무리 정성껏 물을 줘도

아침마다 내리는 이슬과 밤새 내린 보슬비를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곤 하는데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추수감사절과 구약의 절기 (특히 가을의 초막절)을 연결해 보았지만

추수감사절 자체는 꽤 미국적인 절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추수감사절 전주에 늘 있는 교회에서의 터키를 곁들인 만찬,

추수감사절에 가족 친지들과 함께 나누는 만찬과 대화,

그리고 추수감사절 다음날(요즘은 상술이 발달해서 당일 저녁부터 시작하는데)

Black Friday shopping 등등 – 나름 추수감사절을 꽤 즐기고 있습니다.

 

원래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코스코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팔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이번 주부터 팔고 있어서 서둘러 트리 하나를 사다가 교회에 세워놓았습니다.

이번 주일에 청년들과 주일학교 아이들이 함께 트리를 장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2.

올해 우리 교회는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표어로 한 해를 살았습니다.

 

지나치기 쉬운 작은 일에도 마음을 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듣기 원했습니다.

 

미국 생활이 그렇듯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시라도 한눈을 팔면 금세 자리가 나는 것이 나그네로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 듯이,

한 해를 지켜주시고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곁에서 한 길을 걸어간 가족, 교우, 친지들께

무엇보다 한 해를 꿋꿋하게 살아준 자신에게 감사하기 원합니다.

 

찬송가 429장 가사 대로

받은 복을 세어보고, 그 복에 이름을 붙이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원합니다.

 

조금 부족하고 아쉬워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으니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감사절을 맞는 것입니다.

 

산불로 인해서 집과 가족을 잃은 이웃들과

명절이기에 더욱 마음이 힘들고 외로운 분들도 마음 한 켠에 두고

겸손한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는 것도 기독교인의 미덕입니다.

 

복된 추수감사절 맞으십시오

Happy Thanksgiving!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for you.(1thes 5:18)

 

하나님 아버지,

감사절을 맞는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

가정 가정을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22이-메일 목회 서신)

                   

산불

1.

캘리포니아 역사상 최악의 산불이

우리 지역에서 160여 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서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이 불에 탔고

목숨을 잃은 숫자가 40명이 넘어섰지만

실종자를 고려하면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산불 잡히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있는 데이비스는

산불로 인해서 공기가 나빠지니 어제 휴교령이 내렸답니다.

 

우리 지역도 지난주 내내 낙엽 타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셀폰으로 날씨를 검색하면 계속해서

“건강에 해로운 공기 (unhealthy air quality)”라고 나옵니다.

 

이번 산불로

파라다이스 마을은 주택 7,700여 채가 모두 불에 탔습니다.

마을 전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내년에 학교도 문을 열 수 없을 것 같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연일 보도되는 “캠프파이어” 산불 소식을 접하면서

안타까움만 더해 갑니다.

 

2.

그러고 보니

우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산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다음주 수요일에 비소식이 있는 것이 얼마인지요!

일기예보가 왔다갔다하는데 이번엔 꼭 맞추길 바랍니다.

 

사람이 그 큰 산불과 싸우는데 한계가 있으니

어서 비가 내려야 합니다.

 

신앙의 용어를 빌리면

하나님께서 캘리포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비로 산불을 끄시고, 갈색 산을 얼른 초록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3.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AI가 출현하고,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큰 산이 “자연”입니다.

 

이번과 같은 산불, 쓰나미, 태풍

요즘은 뜸하지만, 가끔 지축을 흔드는 지진까지

인간이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올리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겸허히 인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갑니다.

 

수요예배에서 살펴보는 창세기 말씀도

결국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공허를 채우시고,

어둠에 빛을 비추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렇게 커다란 자연재해 앞에서

그 옛날 성경의 인물들처럼 “비를 내려주시길” 기도하게 됩니다.

어쩌면 원초적인 기도입니다:

 

주님, 비를 주옵소서!

산불로 인해서 가족과 재산을 잃은 분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도다 (시편145:9)

The LORD is good to all,

and his mercy is over all that he has made. (Psalm 145:9)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15 이-메일 목회 서신)

로마서 3장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일부터 함께 나눌

설교 본문은 로마서 3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이나

철학과 도덕을 앞세운 헬라인들도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길을 가는 죄인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죄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보다

“하나님을 거역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 보면

파생적으로 도덕적인 죄들을 짓게 마련입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죄(거역)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면서 시작합니다.

 

2.

죄,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문제는

수요예배에서 살펴보는 창세기 2-3장 말씀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히브리어 “아바드”가 쓰였고, 경작하다, 일하다, 섬기다 특히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있음)

지키며 (“샤마르”라는 히브리어에는 듣다, 지키다, 순종하다는 의미)

각종 생물에 이름을 짓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과업(그때는 일이 곧 예배)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 자유를 사용하면서

세상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면

“악”은 조금 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죄를 야기시킨 창세기의 “뱀(사단)”이 대표적입니다.

 

이처럼 죄와 악의 문제는

창세기 3장 이후로 시작된 근본적이고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때부터 일이

예배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노동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3.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라는 책에서

악과 인간의 고통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을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죄를 짓고 고통스러워 하거나

악한 세상이 고통을 안겨줄 때가 있는데,

그 순간에 소리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루이스의 역설입니다.

 

로마서 3장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악(죄)의 본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결국에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지,

은혜가 임할 때 일이 노동이 아니라 예배가 될 수 있을지

그 가능성과 확실함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9)

What then? Are we Jews any better off? No, not at all.

For we have already charged that all, both Jews and Greeks, are under sin (Rom 3:9)

 

하나님 아버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주님을 바라보고

고통 속에서 소리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8 이-메일 목회 서신)

더불어 살기

1.

지난주 토요일에는

피츠버그에 있는 “생명 나무(three of life)” 유대인 회당에서

또 다시 총기 사건이 일어나서 경찰관 포함 열 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20년에 세워진 오랜 역사의 회당이었고

그날은 50-60명이 안식일 모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없애야 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던

40대 중반의 백인 남성이

자동소총을 들고 회당을 침입해서 총기를 난사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SNS에서 유대인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이제는 자신이 일을 치르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회당으로 향했답니다.

 

일종의 혐오 범죄입니다.

 

2.

미국과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혐오 범죄가 늘고 있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저지르는 범죄인데

이번 사건처럼 유대인을 혐오하는 사람이

무작정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입니다.

 

특정인을 미리 지정하지 않으니 미리 예방하기 힘들고

혐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미리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런 유형의 범죄가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지 않다는 표시입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복음서를 읽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예수님 역시 혐오 범죄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과 사역을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결국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들이 믿는 구약의 예언대로 메시아로 오셨으니

누구보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내쫓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쌓아놓은 세계에 들어와서는 안 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해야 할 인물로 본 것입니다.

 

3.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사자와 짐승이 함께 있고

심지어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칩니다(사11:6-8).

 

이처럼 더불어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모습인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다시 한번 총기규제를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 있는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기 원합니다.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Mat 6:10)

 

하나님 아버지,

행여나 우리 안에 미움, 시기, 질투가 있다면

주님 뜻대로 다스리게 하시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주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1 이-메일 목회 서신)

창조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 창세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는 창세기 1장의 전반부를 읽었는데,

1장 2절에서 창조 이전의 상태를 소개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over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face of the waters.(Gen 1:2)

 

첨부한 수요예배 핸드 아웃에서 설명했듯이

창조 이전에는 “혼돈(토우)” “공허(보우)” “어둠”이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1장 3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선한(아름답고 멋진) 창조는

2절의 문제를 바로잡는 과정입니다.

 

처음 3일 동안에는,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 빛을 창조하시고,

혼돈을 해결하기 위해서

땅과 궁창, 바다와 육지를 나누며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공간을 확보하고 골격을 세우신 창조입니다. 정적입니다.

 

다음3일은 공간을 채우시는 작업입니다. 동적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해와 달과 별을 궁창(하늘)에 붙이시고

궁창(하늘)은 날아다니는 새들, 바다는 물고기들

그리고 마지막 6일에 생물과 사람으로 육지를 채우셨습니다.

혼돈에 질서를, 공허에 충만을, 어둠에 빛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2.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의 선포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되시고,

주관자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도 믿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을 따르는

“창조 신앙”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심을 믿습니다.

 

우리 안에 어둠을 몰아내시며

참빛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빛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우리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혼란과 공허에 매여 있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과 삶에 질서가 잡혀야 합니다.

공허가 아니라 성령과 은혜의 충만을 경험해야 합니다.

 

어둡고 혼란한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빛으로 살아가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헤매는 세상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3.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일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합니다.

 

어둠과 혼란과 공허 아닌

빛과 질서와 충만으로 하루를 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1:31)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Gen 1:31)

 

하나님 아버지,

참되고 의롭고 선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25 이-메일 목회 서신)

깊은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극적인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던

어거스틴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청년 시절에

육체의 쾌락과 야욕에 빠졌던 자신을 돌아보며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정원 밖에서 들리는 “들고 읽으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들고 펼친 말씀이 로마서 13장 13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롬 13:13)

 

어거스틴은

자신에게 딱- 맞는 말씀을 마주 대하고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물론, 우연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말씀이니 덮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 순간 “확실성의 빛”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2.

터닝 포인트는

순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간이 인생 전체를 바꿔놓고

존재 자체가 180도 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지난날의 모든 경험이 응축되는 과정을 거쳤고

모아진 에너지가 한 순간에 폭발하면서

존재와 삶 전체를 완전히 바꿨을 가능성도 큽니다.

 

어거스틴 역시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는 종교와 학문을 섭렵했습니다.

집요한 추구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깊이 성찰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회심 후에도

성경, 신앙, 자신의 삶을 성찰했습니다.

어거스틴의 내적 곱씹기의 열매가 바로 “고백록”입니다.

 

3.

필요 없는 것을 끝까지 쫓는 것은

내려놓아야 할 집착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 진리, 하나님을 끝까지 추구하고 곱씹는 것은

신앙 여정에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대충 넘어가지 말고

한 가지라도 깊이 탐구해 봅시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곱씹으면서 하나님 마음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깊이”있는 신앙 –

곱씹고 읊조리면서 내면 깊이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올가을이 되길 바랍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 13:13-14)

Let us walk properly as in the daytime, not in orgies and drunkenness, not in sexual immorality and sensuality,

not in quarreling and jealousy. But put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make no provision for the flesh, to gratify its desires. (Rom 13:13-1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주님 안에서 깊이 깊이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18 이-메일 목회 서신)

무라드와 무퀘게

좋은 아침입니다.

 

1.

매년 이맘때가 되면

각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누구인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별히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두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라드는 2014년 ISIS에게 엄마를 잃고

자신은 성노예로 팔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25세 여성입니다.

 

이라크의 소수민족인 야지디족 출신인 무라드는

ISIS에서 탈출한 이후 여성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3개월 동안 성노예로 살았던 칠흑 같은 경험을 떠올리며

여전히 노예처럼 붙잡혀 있는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픈 경험을 극복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돕는 일에 나선 20대 중반의 여성

무라드가 대단해 보입니다.

 

올해 63세인 무퀘게는

아프리카 콩고의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20년동안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들의 치료와 재활을 도왔습니다.

그가 치료한 여성이 3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를 통해서

무퀘게 한 사람이 펼친 사랑의 의술이

얼마나 많은 여성에게 새 삶을 주었는 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무퀘게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 병원을 접고 콩고를 떠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여전히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돌아와 병원을 열었고,

그에게 치료받은 여성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면서

무퀘게와 그의 병원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일은

무퀘게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목숨을 건 그의 희생적 사랑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일 것입니다.

 

작은 자 하나에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무퀘게는 열악하고 위험천만한 곳에 병원을 열었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연약한 피해 여성들을 치료하고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노벨 평화상에 손색이 없습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악하고 험하지만

곳곳에서 말없이 희생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힘이 없어 보이지만,

그분들이 하는 일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회복됩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처음 시작은 미미했을 것입니다.

우연히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 너무 험해서 다시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지난달 우리 교회 <작은사랑나눔> 헌금도

일본 우토로 한인 마을에 찾아온 평화를 기념하는데

귀하게 사용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참빛 식구들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하는 데 자연스레 사용되는

주님의 손길/섭리가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Truly, I say to you, as you did it to one of the least of these my brothers, you did it to me. (Mat 25:40)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묵묵히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손길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11 이-메일 목회 서신)

염려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감사함으로…

[모든 염려 거리를] 하나님의 귀까지 배달하라”(빌4:6)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많은 분이 외우고 있을 정도로 익숙한 말씀인데

한 주간 설교에 할애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그만큼 염려하면서 살아가기에

빌립보서가 알려주는 <염려 관리법>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쉬지 않는] “기도”

모든 염려에 대한 구체적인 “간청”

그리고 “감사”였습니다.

 

특히, 쉬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염려가 습관이 되면, 기도가 무너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염려가 차지합니다.

염려한다면,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기도뿐만 아니라 기쁨과 감사도 잃어버립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그토록 염려하던 바로 그 내일입니다.

Today is the tomorrow we worried about yesterday. (Author unknown)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으면,

작년 이 맘때 우리가 무엇을 염려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이렇게 꿋꿋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그날의 염려는 그날로 족하니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마6:34).

 

염려가 생기는 그 자리, 그 순간에

주저말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기도가 염려를 다스리는 힘임을 우리 모두 경험합시다.

기도는 염려를 물리치는 하늘의 묘약입니다.

 

2.

염려는 나쁜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한 상상(imagination)입니다.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추한(ugly) 상상입니다. 소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기도와 감사 가운데 선하게 사용합시다.

 

산이 옮겨지는 것을 상상하고,

아기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늑대와 이리가 함께 지내는 세상을 상상하고

주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이뤄질 것을 상상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느끼는 영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간구로, 감사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히 염려를 다스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근심과 염려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살리는 선한 말을 건넴으로 주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임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12:25)

Anxiety in a man’s heart weighs him down, but a good word makes him glad.

 

하나님 아버지,

기도로 염려를 다스리고

염려 속에 있는 가족과 이웃을 격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9. 20 이-메일 목회 서신)

허리케인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샌프란과 베이 지역의 날씨는

말 그대로 쾌청입니다.

종종 산책을 하다 보면

우리가 사는 지역 날씨를 저절로 예찬하게 됩니다.

 

적당히 덥고, 적당히 선선하고

(물론 교회 근처는 조금 춥지만)

무엇보다 파란 하늘에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

자연 치유가 되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렇게 편안히 좋은 날씨를 즐기고 있는 동안

미국 동부 해안으로 허리케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플로렌스라는 3등급의 허리케인입니다.

카테고리 3은 2005년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를 강타한

태풍 카트리나와 같은 급입니다.

(원래 4등급으로 시작했는데, 현재 2로 강등되었습니다)

 

시속 120km정도의 강풍과 심하면 40인치의 비를 쏟아냅니다.

나사가 찍은 사진에 “태풍의 눈”이 명확히 나타날 정도입니다.

 

이제 곧 미국 동부 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태풍 영향권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사는

백만 명의 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습니다.

 

육지에 상륙함과 동시에 태풍의 위력이

더욱 약해지길 기도합니다.

 

2.

우리가 쾌청한 날씨를 즐기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동안

동부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허리케인을 피해서 대피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습니다.

 

어디 허리케인뿐일까요?

우리가 어울려 살고 있는 지구 어딘가에서는

가난, 재해, 질병, 전쟁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는 말씀을 나눴는데

우리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상관하지 않고

나만 잘살면 되고

우리 지역만 안전하면 된다는 생각은 정말 금물입니다.

 

나만 힘든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힘겹게 사는 분들이 무척 많습니다.

그분들을 생각하고 함께 울 수 있는 것이 관용입니다.

 

3.

동부에 상륙한다는 허리케인으로 인해서

인명이나 재산 등 피해가 최소화되길 바랍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고,

물론 우리 참빛 식구들 가운데서 홀로 속앓이를 하고 있을 분이 있을까도 헤아려보면서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

Let your reasonableness be known to everyone. The Lord is at hand. (Phil 4:5)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생각이 넓어지고

많은 것들을 참아내고 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9. 13이-메일 목회 서신)

                   

 

다름과 틀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설교에 등장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세웠던 여성들인데

무슨 연유인지 둘의 관계가 깨져서 교회에 해를 입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한없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하나 됨이 중요하기에

빌립보에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면서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여성 지도자들에게 신학적인 문제가 있었던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지적한 대로 “다툼과 허영(rivalry and conceit)”으로 인해서

주도권 다툼을 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세력과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하다가

두 여성이 부딪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올라갔지만

유오디아와 순두게 모두 성품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숙한 신앙 인격을 갖추지 못한 채 지도자가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2.

성숙한 신앙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할 줄 압니다.

 

내가 말한 것만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것은

어리숙하고 초보적인 사고요 신앙입니다.

매사를 자기 관점에서 옳고 그름으로 접근하면

당연히 관계는 깨지게 마련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바울의 권면대로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일 설교에서 같은 마음은

1) 상대방에 동의하고,

2) 공감대를 갖고

3) 조화와 일체감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컬러와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서로 존중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요!

 

3.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슈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름의 문제를 놓고

옳고 그름으로 접근하니 관계가 깨집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경청하며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면

다툼과 분열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복잡한 것만큼

다름의 문제도 쉽지 않고 까다롭지만

“주 안에서” 라는 말씀을 기억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입니다.

 

4.

실제로

옳고 그른 것을 다루기는 쉽습니다.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름의 문제를 갖고 동의와 조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애씀, 양보, 경청, 희생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더욱 값진 일입니다.

 

오늘 하루

다양한 삶의 환경,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이루고, 조화를 이루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

Let your reasonableness be known to everyone. The Lord is at hand. (Phil 4:5)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가는 곳에

그리스도의 평화(샬롬)가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9.5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