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꼭 붙들고…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을 보는 바라보는 관점을 안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은 그대로인데

눈앞에 있는 안경색깔이 바뀌면서

세상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부정적인 관점, 어두운 곳을 먼저 보다가

긍정적인 면 또는 밝은 곳을 놓치는 경우입니다.

요즘 세상은 말 그대로 뒤죽박죽입니다.

너무 혼란스럽고 복잡해서

어떤 한 가지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제 각각인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수십가지의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듯 합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것이 내가 맞는지 깜짝 놀랄 정도의

또 다른 내가 우리 안에 살고 있어서 당황스러울 때가 꽤 많습니다.

그때도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못난이, 실패자, 낙오자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정직한 사람, 소신있는 사람,

꿋꿋한 사람으로 자신을 치켜세울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관점의 차이입니다.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자신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결과들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고

여전히 예수님을 믿기 전의 안경이 신앙의 안경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삶이 어려워지면

어둡고 절망적인 면을 먼저 보게 마련입니다.

그때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망이란 단어입니다.

믿음은 소망으로 이어질 때 힘이 있습니다.

아니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줍니다.

목사인 저도 힘이 들고

때로는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묵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 하나님이 모든 기쁨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 ( 15:13)

Charles Swindoll목사님의 예화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습니다.

Someone has said, “We can live forty days without food, eight days without water, four minute without air, But only a few second without hope.

소망을 꼭 붙들고 오늘 하루를 시작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삶 속에 소망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15 메일 목회서신)

보혈을 지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사순절 한 가운데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사순절은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일년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시간입니다.

사순절을 맞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연속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다섯 번의 설교에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말씀도 나누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입니다.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과 교회 안에 깊이 임하는 것도

어쩌면 목사의 꿈일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설교 제목만 생각해도

은혜가 되고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여러 가지 이론들과 행사들이 난무하는 요즘 교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복음을

참빛 교회 식구들과 나눌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할 뿐입니다.

2.

지난 주일날은 보혈을 지나라는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보혈 (寶血) – 한자 뜻 그대로 보화처럼 귀한 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흘려 주셨기에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혈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신 것은

우리 때문에 그 생명을 버리신 것을 뜻합니다.

그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또한 구약시대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짐승의 피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피의 제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필수적인 절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처럼 구약성경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 한 번으로

죄사함의 은혜가 영원히 [영단번/once and for all]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참 크고 귀합니다.

때로는 너무 커서,

아니 이 은혜가 실제 우리들 세상살이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 같아서

무심코 지나가기 쉽습니다.

보혈을 지나서

아버지 품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순절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깊이 묵상하고 맛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지난 주에 불렀던 찬양 보혈을 지나를 부르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하시면 어떠실까요?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 한 가운데 자리잡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8 메일 목회서신)

“강영우 박사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수요일과 목요일은 정신 없이 바빴습니다.

어제는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그냥 잠자리에 들어서 이제 목요서신을 보냅니다.

제 30년 지기 친구인 국민일보 이태형 기자가

엊그제 강영우 박사님에 대한 글을 썼기에

오늘은 그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님이야 뭐- 말이 필요 없으신 대단하신 분이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이 더욱 아름답고 존경스러워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저런 신앙의 선배가 계시기에

구원의 기쁨과 하늘의 소망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고

이 아침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또 다시 새 달을 맞이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신앙과 삶이

더욱 깊어 지고 높아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목사 올림

강영우 박사 이야기

강영우 박사가 췌장암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해 말, 익명의 한 분으로부터 내게 전화가 왔다. “저, 강 박사님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아니, 왜 그러시죠?” “강 박사님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부족하지만 강 박사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요.” “어떤 방법이지요? 임상경험이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 한번도 써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차피 시한부라면 이 방법이라도 해 보면 좋을듯 해서요….”

그 분에게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강 박사가 힘겨운 상태지만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방법을시도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났다. 지난 23일 그 분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자신이 교장이라고 밝히면서 강 박사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청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다음날 연락드리겠다고약속했다. 24일 오전, 강 박사 소천 소식이 뉴스를 통해 흘러 나왔다.

나는 강 박사가 췌장암 진단 받기 한 달여 전 그와 부인 석은옥 여사를 서울 모 호텔에서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로서는 강 박사와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였다. 강 박사는 키는 작았지만 맑고깨끗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병색은 하나도 없었다. 속으로 ‘어떻게 하면 저렇게 곱게 늙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강 박사의 췌장암 발병과 연이은 소천 소식은 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유고집을 준비 중인 두란노 관계자에 따르면 강 박사 발병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강 박사를 살리기위해서 여러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 박사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집에서 마지막 인생 마무리를했다. 강 박사는 절대 긍정의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도 긍정으로 만든 긍정의 연금술사 였다. 그는 내게말했다. “실패의 순간이 인생 최대 행운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저는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난 장미꽃 이었습니다. 기적이지요. 인생에는 분명 무수한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 긍정의 사람, 강 박사가 어찌 췌장암의 공격은 그대로 순응하면서 받았을까? 그것이 나로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다. 불사조처럼 일어나서 다시 “우리에게 분명 기적이 있습니다. 저를 보세요!”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강 박사의 지난 인생과 걸맞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내 강 박사가 저항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가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충만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 안에서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기에 췌장암이 다가 왔을 때, “그래, 여기까지”라면서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음 너머의 더 좋은 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삶의 태도리라.

그와 만났을 때,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끝을 맺었다.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와 은혜의 사람 강영우 박사. 68년, 잠시 살았던 이 땅의 옷을 벗고 지금 주님과 함께 거하리라.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

고난중의 소망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서신은

새벽기도회와 관련된 말씀을 많이 쓰게 되는군요.

은근히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라는 압력일까요?

(esp. 젊은이들이여 새벽을 깨웁시다!)

예레미야서를 모두 끝내고

예레미야 애가서를 이번 주에 시작했습니다.

애가(lamentation)은 “슬프다”는 말로 시작되듯이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두고 슬픔의 노래를 기록한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조가”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애가가

슬픔의 노래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애가 한 가운데인 애가서 3장에

“소망”의 말씀이 나오기때문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가 3:19-22)

Remember my affliction and my wanderings, the wormwood and the gall! My soul continually remembers it and is bowed down within me.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Lam 3:19-22)

2.

예레미야 애가 3장은

제 감신대학원 졸업논문 본문입니다.

(서른일곱 살의 늦깎이 신학생이 논문상을 받고 졸업했었네요^^)

새벽기도회를 준비하면서

그때 논문 파일을 열어 보았습니다.

긴 논문이었지만 그 중의 한 문단을 옮겨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희망과 절망의 양극단으로 놓고 우리의 삶을 저울질 한다면 대부분 절망과 고통으로 기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대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의 경륜이나 환경을 막론하고 아픔이 있고 탄식이 있다. 아니 고통이 없는 인생은 마치 진공 속의 삶과 같아서 어떤 가치도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고통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요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형극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 고통의 문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민족도 국가도 그들이 어떤 역사를 갖고 있든지 고난이 없는 공동체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현실은 고통과 더불어 살면서 고통 저 너머의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 아닐까? –하시용, 감신대 석사학위논문(1998), “예레미야 애가 3장의 해석학적 재고찰”에서-

그렇습니다.

고통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임하시는

주님의 성실하심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그대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고통 저 너머에 숨겨진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23 이-메일 목회서신)

바룩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에서는

예레미야서를 한 장씩 읽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예언서이다 보니

지루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렇지만 중간 중간에

반짝 반짝 빛나는 주옥 같은 말씀과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2주 전에 소개했던

에벳멜렉도 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다섯 구절 밖에 되지 않는 예레미야 45장에

또 한 명의 귀한 인물이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 적었던

바룩이라는 사람입니다.

바룩의 이름 뜻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일찌감치

고난에 휩싸였습니다.

어려움에 슬픔까지 더했습니다.

나름대로 추측해보면,

바룩의 아버지는 그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는데

어느 날 홀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났다면

그것은 바룩에서 고통을 넘어선 커다란 슬픔입니다.

제가 예를 들었지만 성경이 암시하는 것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고난과 슬픔입니다.

그래서 바룩은 탄식했고, 평안을 잃어버렸고

결국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룩의 초년 고생이요 슬픔이었습니다.

바룩은 생활력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역한 백성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기에

바룩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예레미야 45:5)

And do you seek great things for yourself? Seek them not, for behold, I am bringing disaster upon all flesh.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바룩의 삶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바룩만을 위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너 만은 내가 보호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목숨만은 건져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45:5)

But I will give you your life as a prize of war in all places to which you may go.

2.

우리들의 인생길이 생각처럼

힘차게 펼쳐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룩처럼 축복을 받을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인생길이 고난에 슬픔이 더해서

지치고 힘겨울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이 순간순간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온 세상이 죄를 지어서 멸망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룩을 구해내십니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의 가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께서 바룩의 구원자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룩에게 임하신

하나님 구원의 은혜가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참빛 교회 식구들의 가는 모든 길 위에

주님의 생명이 임하길 바랍니다.

하나님,

어려운 세상 길을 걸어가는

주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생명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16 이-메일 목회서신)

연약함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

청년부 성경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목요서신을 쓰려는데

큰 아이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둘째가 친구 집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그만 어깨가 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왼쪽 어깨입니다.

오른 쪽 어깨는 이미 세 번이나 빠져서

의사가 수술을 권할 정도였는데

왼쪽 어깨마저 처음으로 빠졌으니

큰 아이가 데리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어깨 탈골(dislocation)

아주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흔히 있는 일이고

운동경기를 하다가도

자기 스스로 어깨를 맞추는 선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탈골이 되면 통증이 보통이 아닙니다.

두 어깨 모두 탈골이 되었으니

앞으로 운동은 물론 무거운 것을 드는 것까지

실생활에서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부모로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고린도후서 12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신지라. 그러므로 내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But he said to me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Therefore I will boast all the more gladly about my weakness, so that Christ’s power may rest on me.

우리들은 매우 연약합니다.

넘어졌을 뿐인데 어깨가 탈골될 만큼 육신도 연약하고,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상하고

힘겨워하는 우리의 마음도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도 예외가 아니어서

염려하고 의심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연약함에 임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하나님 편에서 읽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연약한 곳마다 찾아오셔서 그 곳에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도와주시려는 배려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오는 입구(entrance)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연약함을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들일 입구가 여럿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모두의 연약함 위에 임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9 메일 목회서신)

에벳멜렉

좋은 아침입니다.

1.

군중 심리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서 행동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일이라도

대중의 뜻이면 그것이 올바른 일로 둔갑할 때도 있습니다.

애꾸눈만 사는 원숭이 마을에 가면

두 눈을 가진 원숭이가 바보취급을 받고

특이한 원숭이로 왕따를 당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예레미야서를 한 장씩 살펴보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레미야가 마치

바보 또는 죄인취급을 받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잡혀서

진흙 구덩이에 던져지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평화와 형통을 위치는

가짜 예언자들의 말에 매료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싶은 말,

잠시라도 위안이 되는 말을 취사선택해서 들은 것입니다.

2.

모든 백성들이 치우쳐서

예레미야를 죽리려고 달려들 때,

에벳멜렉이라는 사람이 왕 앞에서 나가서 바른말을 합니다.: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예례미야 38:9)

에벳멜렉은 구스, 즉 이디오피아 출신이었으니

피부색깔이 검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왕 앞에 나갔고

혼자서 예레미야 편을 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을 행한 것입니다.

덕분에 예레미야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에벳 멜렉은 39장에서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그때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한 이후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예레미야 39:18)

For I will surely save you, and you shall not fall by the sword, but you shall have your life as a prize of war, because you have put your trust in me, declares the LORD.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이

신앙양심을 지키고,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변호한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멸망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3.

모든 사람들이 한 곳으로 치우칠 때도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운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에벳멜렉과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진실되고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아무리 위험한 순간이 닥쳐도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에벳멜렉처럼

바른 길에 서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2 이-메일 목회서신)

아름다운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자 중앙일보 본국지에 공혈견(供血犬)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공혈견 엣지(Edge)는 올해로 11살을 맞이하였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65세 정도이고

견공들의 세계에서는 노견(老犬)이라고 불린답니다.

엣지는 미국 동부에서 태어나서

한 살 때 마약탐지견으로

한국 관세청으로 팔려왔습니다.

뛰어난 후각을 가진 레브라도 레트리버(Labrador Retriever)”가문인

엣지는 인천공항에서 6년 동안

마약 탐지견으로 활약했습니다.

그가 찾아낸 마약사범이 8, 3 5천만원에 해당하는

마약을 적발해내는 공을 세웠답니다.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체력이나 후각이 약해졌습니다.

엣지는 서울대 동물병원에서

혈액이 필요한 동료 견공들에게

자신의 피를 뽑아주는 헌혈견으로 3년여를 보냈습니다.

그의 인생 2막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피를 보태는 귀중한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이제 11살을 맞은 엣지는

나이가 들면서 공혈견의 일도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기력만 있다면 피를 뽑는 주사바늘의 아픔을 뒤로 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고 싶지만,

이제는 공혈견의 사명도 내려놓고 인생 3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를 입양해 가야 한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락사할지도 모른다는 기사였습니다.

그와 함께 일을 한 수의사 한 분은

엣지를 차분한 종교인같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견공이지만

나라를 위해서,

동료 견공들을 살리는데 한 평생을 살았으니

수도사의 경지에 오를 만도 합니다.

누군가 엣지를 입양해가서

그가 수를 다 누리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분명히 새 주인에게도 충성을 다할테니까요.

2.

지난 주에는 한 권사님의 칠순 잔치가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전도사님의 생신잔치가 있습니다.

연거푸 생신잔치를 차려주는 자녀들과 교인들!

우리 교회는 가족 같은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요즘 권사님들을 보면

제가 처음 이곳에 왔던 7년 전에 비해서

기운이 없어지셨고, 세월을 피해가실 수 없음을 느낍니다.

물론 저도 어느덧 50줄에 접어들었고

요즘은 어디를 가도 동안이라는 말보다

조금 고생했는지 얼굴이 늙었다(?)는 말을 듣습니다.bb

지난 주에 점심을 먹으면서

저는 그냥 50에 있어도 괜찮으니

권사님들께서 10년씩만 젊어지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인줄 알지만

그만큼 살아오신 인생경륜과

교회를 섬기신 신앙의 궤적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한 견공의 인생이 제 3막을 향해서 가듯이

노권사님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도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곳에 있든지

지금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마음을 잃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조전도사님과 우리 교회 모든 권사님들께서

새로운 교회로 이전하시는 것을 보셨는데

이제는 주님의 부흥까지 목도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언 16 31)

하나님

우리 교회 기도의 어머님들이신

전도사님과 권사님들께서 올 한해도

주님 안에서 강건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26 메일 목회서신)

우리 집은 미용실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주룩주룩 오는 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비였습니다.

앞으로 비가 충분히 와야 여름을 거뜬히 날 수 있겠지요.

비가 오면서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샌프란의 겨울이 만만치 않게 추운데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오후에 집에 와서

그 동안 미뤄두었던 이발을 했습니다.

달리 미용실을 가는 것은 아니고

아내가 저의 전담 이발사이고  저희 집이 미용실입니다.

미국에 와서부터 아내가 우리 삼부자 이발을 책임졌으니

경력이 14년에 육박합니다.

처음에는 한 시간 넘어 걸리던 이발시간이

이제는 30분 정도면 거뜬히 끝나고

흰머리를 숨기는 염색까지 풀 코스를 책임져줍니다.

물론 무료입니다.

매번 이발을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한번 자르면 다시 붙일 수 없다

처음 이발을 하면 어색할 때도 있지만 일주일만 지나면 익숙해진다.

앉아서 잔소리는 할 수 있어도 스스로 내 머리를 깎을 수 없다.

어디 이발만 그럴까요?

우리 인생도 이발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라버린 머리카락을 다시 이을 수 없듯이

한번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심 조심 주어진 인생길을 가야 합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면 처음에는 어색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보고,

머리가 조금 자리를 잡으면 금새 편안해 집니다.

우리들 인생길도 어색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 시도하는 일이나, 요즘처럼 새해를 맞을 때

우리 모두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익숙해 지고 어색함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참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들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아도

자기 머리를 근사하게 자르기는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자신의 헤어 스타일을 맡겨야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리에 앉아서

거울을 보고 이것 저것 요청하는 일뿐입니다.

(저는 14년여 한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다 보니 별로 요구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홀로서기란 말이 의외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습니다.

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면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함께 더불어 인생길을 갑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미용사가 머리를 다듬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길을 다듬어주시고

멋지게 만들어 주시길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덧 2012년의 첫 달도 끝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입니다.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의미 있게 살기 원합니다.

또한 앞으로 펼쳐질 올 한 해의 인생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하나님 아버지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참빛 교회 식구들의 발걸음을 친히 인도해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19 메일 목회서신)

하나님과 눈 맞추기

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올해로 50이 되었습니다.

사실 50은 성경에서 희년에 해당합니다.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고, 돌려 놓으면서

세상을 다시 reset하는 해입니다.

저 역시 앞으로의 인생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새벽에는 강단에 엎드려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곤 합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갖게 된 소망은

예수님의 형상이

제 성품과 모습에 조금이라도 드러났으면 하는 것입니다.

저를 보는 이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눈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습니다.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저를 바라봐주시고

저 역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어진 인생을 살아간다면

더 없이 행복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눈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복임을 인생의 희년을 맞아서 다시금 묵상합니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라봐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올 한 해 저를 포함해서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 하나님과 눈을 맞추면서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위에

그리고 새해에 이메일 서신을 받으시는 모든 분들 위에

멈추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 16:9)

For the eyes of the Lord range throughout the earth

to strengthen those whose hearts are fully committed to him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눈이 멈출 만큼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우리의 눈이 마주쳤을 때

임하는 능력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12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