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

좋은 아침입니다.

 

1.
지금으로부터 560년 전인 1463년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은
아고스티노 두치오 라는 조각가에게
성단 바깥쪽 벽을 장식할 다윗상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했습니다.

 

아고스티노는
채석장을 직접 찾아가서 5.5미터 길이에
11톤이 넘는 돌을 선정했습니다.
이 돌을 피렌체까지 옮기는 데 자그마치 2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돌을 갖고 다윗상을 만들기로 한 아고스티노는
돌의 모양만 이상하게 만들어 놓고 중간에 해고됩니다.

 

11톤이 넘는 큰 돌은 애물단지가 되어서
1501년 스물여섯 살의 청년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나타나기까지
40년 가까이 성전 뜰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3년에 걸친 작업 끝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조각상 가운데 하나인
5미터가 넘은 다윗상을 완성합니다.

 

2.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에 나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외에 믿을 것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벌거벗은 다윗을 조각했을 것입니다.

 

왼손으로 물매를 어깨 뒤로 감추었고,
오른손에 물맷돌이 든 주머니를 꼭 쥐고 있습니다.
다리는 당시의 기법을 살려서
골리앗을 향해서 나가는 모습을 극대화했습니다.
긴장한 다윗의 표정에서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다윗이 준비한 물맷돌만 효력을 발휘한다면
다윗의 승리는 떼놓은 단상이었습니다.
칼을 들고 있는 골리앗이 근접 전투만 가능했다면,
다윗은 거인 골리앗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물맷돌을 던져서
커다란 과녁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기발한 전투 방식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골리앗은 다윗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골리앗을 향해서 나가는
다윗의 비장한 모습을 조각했습니다.

 

3.
채석장의 큰 돌이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다윗상으로 거듭나기까지
수십 년이 필요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산처럼 큰 돌을 보고 지나쳤을까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벌였다고 한마디씩 했을 것입니다.

 

그때 이십 대 중반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커다란 대리석 속에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다윗의 모습을 상상했고 그것을 작품으로 완성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부활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부활이라는 엄청난 자원이
피렌체의 큰 돌처럼 우리 신앙과 삶에 방치되어 있지는 않은지요?

 

말과 생각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고
그 꿈을 펼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부활 속에 숨겨진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부활을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2:32)

 

하나님,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6 이-메일 목회 서신)

일용할 양식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차례로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를 향한 첫 번째 기도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를 공부했습니다.

 

출애굽 할 당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같이
하루분 양식인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매일의 양식을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매일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로마 시대 군사들에게 지급된 하루분 식량에 해당하는
일용할 양식은 오늘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니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2.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시고
필요한 양식만 공급해 달라는 잠언 말씀도 나눴습니다.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잊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난은 ‘상대적’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가난한 것보다 마음이 가난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느끼는 상대적 빈곤이 더 큽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곧 가난이네요.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욕심껏 더 가지려다 보니 가난을 느낄 뿐입니다.

 

재물의 많고 적음도 ‘상대적’입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재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큰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만 필요합니다.
모자라는 것과 남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에 맞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지금 자리에서 “감사”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떡 한 덩어리를 놓고 감사기도를 드리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전혀 가난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많아도 감사가 없다면, 어리석고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사순절 막바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감사가 자리 잡고 있는지요!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한다면 최고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한 발짝 더 나가면, 조금이라도 나누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사순절은 금식해서 남은 양식을 갖고
절대적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는 기간임도 기억합시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실
하나님을 꼭 붙들고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잠언 30:8-9)

 

하나님,
오늘 하루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30 이-메일 목회 서신)

성숙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한국에서 IMF가 한창이던
1998년에 미국에 왔습니다.
환율이 올라서 7년간 열심히 저축했던
제 통장 잔고가 뚝 떨어졌습니다.

 

미국에 와서 10년이 지났을 때
2008년 금융위기도 경험했습니다.
은행에 저당 잡힌 주택들이 경매로 팔렸습니다.
무차별 해고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미국 자체가 흔들렸습니다.

 

또 10여 년이 지난 2020년,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이 발생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교회까지 문을 닫게 했습니다.

 

코로나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데
물가(inflation)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팬데믹 동안 4조달러에 육박한 돈을 풀었는데
그것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느끼듯이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과열된 경제를 식히려는 과정에서 정부가 돈줄을 쥐니
지난해 말부터는 기업들의 대량 해고가 시작되었습니다.

 

석 달도 지나지 않은 2023년 한 해 동안
테크 회사들의 해고 숫자가
작년 한 해 동안 해고한 16만여 명에 육박하는 14만여 명이랍니다.
다른 분야의 해고까지 합치면 새해에만 수십만 명이 해고를 경험했습니다.

 

2.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하지 않습니다.
출근하자마자 해고 통지를 받고 경비원이 감시하는 가운데
짐을 싸서 회사를 나와야 합니다. 그 심정이 어떨까요!

 

혹자는 해고되자마자 새로운 직장으로 취업이 되어서,
해고 수당을 고스란히 챙깁니다.
해고를 기회로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곁에서도 부러워합니다.
힘든 분들을 생각해서 조용히 계시면 좋으련만…

 

많은 경우는 해고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뿌립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더 힘이 들지요.
아무리 해고가 일상인 미국이라도
“레이 오프(lay-off)”라는 단어는 소화시키기 버겁습니다.

 

3.
우리 교회는 가족 같고 작아서
함께 웃고 함께 울어줄 수 있지만,
교회들이 소위 출세한 사람들, 승자의 편에 서곤 합니다.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시고 사랑하신 결과라고 간증하고
교회는 이들의 업적을 찬양합니다.
나만 살면 되고,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길 기대하는
이기적 신앙도 톡톡히 한몫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소위 잘나가지 못하면
교회에서도 기가 죽기 십상입니다. 교회에서 설 곳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매우 잘못된 교회의 모습이겠지요?

 

성숙한 신앙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세상과 다른 것, 불편한 것을 기쁨과 감사로 수용하는 것,
잘되었을 때 더욱 겸손하고, 힘들 때 기죽지 않고 신앙으로 견디고
외롭고 힘든 지체들을 찾아가서 손을 꼭 잡아주며 그들의 편이 되어 주는 것,
진리와 생명 가운데 거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

 

교회는 어렵고 약하고 외로운 분들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요 그리스도께서 계신 성전이라면
앞장서서 어려운 분들을 챙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가기 원합니다.

 

p.s 지난 20여 년 크고 작은 세상의 어려움을 지나오면서
“그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구태의연한 클리세이(cliché)가 아님을,
위기 속에서 일하시고 위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심을 봤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이웃들과 함께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23 이-메일 목회 서신)

뱅크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3월 10일
산타클라라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습니다.

 

순식간에 주가가 곤두박질쳤고
너도나도 예금을 빼는
뱅크런(bank run, 대량예금인출)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은행의 유동성 위기를 일반고객들이 알아채기 힘들었습니다.
신용평가회사들이 신용등급을 내리거나
은행이 어렵다는 내부정보가 언론을 통해서 흘러나와야
너도나도 은행으로 달려가는 뱅크런이 가능했습니다.

 

정보를 입수해도
일단 은행으로 달려가서 줄을 길게 서서
ATM이나 창구에서 예금 인출을 요청하는 식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은행도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해서 위기를 넘기곤 했습니다.

 

지금은
고객들이 손에 들고 있는 셀폰을 통해서
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하는 사태가 발생하니
은행으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오늘날의 뱅크런은
갑자기 닥치는 쓰나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16위에 해당하는 대형은행에 뱅크런이 발생하니
이틀도 되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지난 월요일에도 뉴욕의 한 은행이 파산하고
몇몇 금융기관들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미국 정부가 모든 예금을 보장한다고 서둘러 선언했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2.
세상이 너무 빨라졌습니다.
빠르게 치고 올라갈 수도 있지만,
조처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무서울 정도입니다.

 

갑자기 말세가 되면
세상이 빨라진다는 다니엘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다니엘 12:4).

 

성경 말씀 한 구절을
단순하게 종말과 연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종말을 두려워할 것도 아닙니다.
종말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승리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몰입하고
문명과 과학의 발달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인류의 교만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위기가 생겼을 때,
은행으로 달려가서 예금을 인출하는 뱅크런 못지않게
세상이 발달할수록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달려 나가서 그 뜻을 추구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습니다.

 

우리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 휘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화뇌동하지 않고,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무너지지 않을 예수 그리스도, 진리를 꼭 붙들고 오늘 하루 삽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마태6:9-10)

 

하나님,
흔들림 없는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16 이-메일 목회 서신)

애즈베리의 지난 한 달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 소개했듯이
컨터키주 윌모어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시작된 부흥 운동으로
미국은 물론 부흥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애즈베리라는 대학 이름은
영국에서 미국에 건너온 감리교 선교사로
훗날 미국 감리교를 세운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 1745-1816)에게서 왔습니다.
오하이오주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신학교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한 달 전인 2월 8일,
애즈베리 대학교 채플이 끝나고
함께 모여서 밤늦게까지 기도하던 20여 명 남짓의 학생들이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쏟아붓는(outpouring) 은혜였습니다.

 

캠퍼스에 있던 학생들이
마치 플래시 몹(flash mob)을 하듯이 채플로 모였고
이렇게 시작된 애즈베리 채플 모임은 수만 명이 찾아오는
캠퍼스 부흥으로 이어졌습니다.

 

애즈베리 현장을 찾은 분들과
참여한 학생들의 방송 인터뷰를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시작이었습니다.
특정 부흥강사나 리더가 의도한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현장 집회를 통해서
다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고, 설교를 듣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뜨거운 부흥의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일어난 영적 부흥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애즈베리 대학은 이름 그대로 크리스천 대학이고
일주일에 3번 이상을 채플 출석이 의무라고 합니다.
1970년에도 비슷한 영적 부흥이 일어나서
일주일 동안 예배와 기도회를 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요즘 시대에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부흥이니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자연스러운 시작과 진행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부흥을 사람이 계획하고 의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나치면 조작(manipulation)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번 애즈베리 부흥 운동은 수십 명이 남아서 기도하다가
경험한 말 그대로 주님께서 찾아오신 사건이었습니다.

 

2.
CNN을 비롯한 주류 언론이 보도할 정도로
애즈베리 부흥(Asbury Revival 2023)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펼쳐지고 지속될지 궁금합니다.

 

애즈베리 대학 당국과 많은 사람이 기대하듯이
영적 부흥이 각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뜨거운 냄비가 금세 식듯이 부흥이 삶으로 내면화되지 않으면
자칫 한 번의 뜨거운 경험으로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동안 17세기 영적 대각성을 비롯한 미국의 부흥 운동은
백인 중심의 복음주의권이 주도했습니다.
회개와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사회 정의와 같은 세상의 문제는 무시했습니다.

 

애즈베리 대학교도 공화당이 압도적인 켄터기주에 있습니다.
트럼프 시절 부통령이었던 마이클 펜스는 소셜 미디어에
자기도 켄터키 애즈베리에서 회심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자칫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도 안 됩니다.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
온 미국과 전 세계로 순수하고 온전하게 퍼져 나가길 기도합니다.

 

3.
사순절을 맞는
우리에게도 영적 부흥을 기대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주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집중하고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일하십니다!!!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시편 69:32)

 

하나님
주의 임재, 주의 부흥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9 이-메일 목회 서신)

새봄

좋은 아침입니다.

 

1.
2023년은 비가 많이 내리고
겨울 폭풍도 찾아오고
심지어 베이 지역의 높은 산에 하얀 눈이 쌓였습니다.
샌프란에 온 지 올해로 18년째인데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어쩌면 샌프란에도
약간의 눈이 내릴 수 있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우박으로 바뀌었지요.

 

찾아보니 샌프란에도 눈이 내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1882년과 1887년에는 3인치가 넘는 눈이 내렸고,
가장 최근 1976년에 약간의 눈이 내렸답니다.
눈이 내린 집 앞에서 썰매를 타는 사진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번 겨울 폭풍이
기후 위기의 맥락에서 진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민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눈이 온 적은 있으니까요!
단지 경각심을 갖고 지도자들이나 정부가
현명하게 대처하길 바랄 뿐입니다.

 

무엇보다
비가 많이 내리고 날씨가 추우면
집이 없는 분들이 염려됩니다.
물가가 오르니 춥고 배고픈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리 사회 음지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께
정책과 도움의 손길이 임하길 바랍니다.

 

2.
그래도 어느덧 3월을 맞았습니다.

 

우리 지역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 날씨가 차지만,
교회 앞에 자두나무에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봄입니다.

 

너무 움츠리지 말고
새봄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의 순례길, 함께 걷는 순례길,
푯대를 향해서 앞으로 나가는 길이 되길 바랍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3.
2023년 새봄을 맞아서
그리고 다시 못 올 2023년 사순절 길을 걸으면서
우리 모두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어 걷는 봄 길로 살기 원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4-6)

 

하나님
예수님을 따라
길을 만들고 길이 되는 참빛 식구들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2 이-메일 목회 서신)

순례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존 번연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중심으로
올해 표어인 <푯대를 향하여>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 모두 길을 걷는 순례자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말이 통하고 생각이 같은 길동무를 만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믿음과 소망이라는 진실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판치는
허영의 도시에서 믿음이 순교합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야 함을 친구 믿음이
크리스천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소망은 크리스천과 함께 천국에 들어갑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소망을 잃지 않고 푯대를 향해서 걸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친구로 삼은 크리스천은 행복한 순례자였습니다.

 

크리스천이 믿음과 소망 두 친구와 나눈
대화와 우정이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하고
그 가운데 사랑이 최고입니다.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2.
지난주 점심 친교 시간,
각 테이블을 돌면서 인사를 나누는데
한 집사님이 설교를 들으면서 느낀 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순례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섰을 때,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이 풀리고 은혜를 체험했으면
거기서 끝나거나 그 은혜가 쭉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유혹과 어려움이 계속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생명수 강가에서 쉼을 갖고 떠나는 크리스천과 소망에게
절망과 자포자기가 위력을 발휘하는
의심의 성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집사님께서 귀한 발견과 나눔을 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세심하게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3.
우리가 알다시피
신앙이나 인생이 말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이(1+1=2)처럼 공식화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위협이 이곳저곳에 숨어있고 계속 닥칩니다.
엉뚱한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도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많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순례길 곳곳에
쉼터, 해석자의 집, 아름다운 집(교회), 기쁨의 산
생명수 강가와 같은 ‘미리 보는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힘으로 순례길을 가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 각자의 순례길을 걷습니다.
누구도 걸어줄 수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길입니다.
“파라-클레토스(옆에서-부르시고 이야기 걸어 주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도 믿습니다.

 

올 한 해 근사하게 말 그대로 성공적으로
푯대를 향한 순례길을 걸어갑시다.

파이팅!!!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2)

 

하나님,
주님과 함께 걷는 순례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2. 23 이-메일 목회 서신)

이름짓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월 6일 튀르키예-시리아에 강도 7.8의 지진이 일어나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마켓 스트릿은 물론
샌프란시스코가 폐허가 되었는데, 그때 지진의 강도가 7.8이었습니다.
1836년부터 현재까지 베이지역에 7 이상의 지진은 4번 있었습니다.
최근의 지진은 권사님들도 기억하시는 1989년입니다.

 

기록만 보아도 이번 시리아-튀르키예 지진이
얼마나 큰 재난인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돕기 위해서 나섰습니다.
우리도 지난주에 구호품을 보내려고 하다가 일찍 마감되어서
다른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돕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작은 힘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2.
“튀르키예(Türkiye)”는
우리가 잘 아는 “터키(Turkey)”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튀르키예”는 “터키인의 땅” 이라는 뜻으로 이미 터키 국민들은
자신을 튀르키예라고 불렀고, “용맹한”이라는 의미도 있답니다.

 

반면, 터키는 영어 명칭으로 칠면조를 연상시킵니다.
게다가 어리석은, 겁 많은 등의 뜻을 갖이 있다니
터키 국민들이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합니다.

 

한국 언론은 대부분 “튀르키예”로 부르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영문 명칭 그대로
“터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국무부 홈페이지에도
<터키(튀르키예): Turkey(Türkiye)>”라고 표기해 놓았습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어려움을 당하는 튀르키예 분들이
미국의 언론을 접한다면 마음이 상할 것 같습니다.

 

3.
이름(Name)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럿 등장하는데
각각의 이름에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가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를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동산지기로 임명하신 후에
각종 짐승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짐승들에게
각각의 이름을 주어서 그들이 고유한 생명체임을 드러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하나님 말씀대로 짐승의 이름을 지으면서
에덴동산의 모든 동물과 어울려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아담이 대신했으니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조연으로 참여한 셈입니다.

 

이름을 짓는 것,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
– 특별한 사랑의 행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일을 위임받은 인간에게 주어진
계속되는 창조 사역입니다.

 

4.
재난을 당하면 희생자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그때 희생자의 이름을 바르게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름에는 고유함과 특별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언론이 <튀르키예>라고 부르지 않고
Turkey라고 보도할 때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종종 땅이 흔들리는 동네에 살아가기에
이번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이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가족과 친지를 잃은 분들께 하늘의 위로가
집과 삶의 터전을 잃은 분들께 실제적인 도움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하나님,
말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있는 분들의 위로와 힘이 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2. 16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편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시편 23편을 설명하면서
양의 시력이 -10에 가까워서 1미터(3ft) 정도 앞만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진으로 재난 가운데 있는 터키(튀르키예)에서
목자들이 한눈을 판 사이에 양 한 마리가 절벽으로 뛰어내리자
500여마리의 양들이 따라서 절벽으로 뛰어내렸다는 예전 외신 보도도 생각났습니다.

 

앞에 가는 양들의 궁둥이만 보고 가니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양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목자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양뿐만 아니라
우리도 한 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다지만,
예측불허의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앞서가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신앙의 길을 갑니다.
믿음이 주는 유익이고 힘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요,
믿음은 우리 속에서 생기는 ‘느낌’일 뿐이라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실재와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분들께
만족할 만한 답을 드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해 내는 통로가 되길 바랄 뿐이지요.

 

하나님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요일 4:12)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도 기억합니다(마5:16).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2.
“어떻게 살 것인가?”
–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도 우리 몫이니
더욱 고민이 깊어집니다.

 

억지로 할 것이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질 것도 아닙니다.
자칫 신앙이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이 지고 가던 어깨 위의 짐이 되거나
겉으로만 빛과 소금인 척하는 위선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계속 생각하고
예수님의 흔적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길 기도하고 노력할 뿐입니다.

 

3.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몸)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비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필요 없는 것, 예수님을 따라 사는데
거추장스러운 것을 비우고 덜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운 곳을 예수님 마음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고 자라가는 존재(being)의 채움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순간순간 많이 생각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매사에 던져야겠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세상에 펼쳐 보이기 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참빛 식구들의 발걸음을 응원합니다.ㅇ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2)

 

하나님,
우리 생각과 몸짓 어느 한 곳에라도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2. 9 이-메일 목회 서신)

그라운드호그 데이

좋은 아침입니다.

 

1.
2월 2일 오늘은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 hog day)입니다.
우리식 입춘(立春, 올해는 2월 4일)에 해당합니다.

 

그라운드호그는 다람쥣과에 속하는 설치류입니다.
봄이 되면 겨울잠에서 깨어나 땅 위로 올라오는데
그날이 바로 2월 2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라운드호그이 땅 위로 올라왔을 때,
날이 맑아서 그림자가 생기면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서 겨울잠을 청한답니다.
그러면 6주 후에 봄이 찾아온다고 믿었습니다.
날이 흐려서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면 곧바로 봄이 찾아왔다고 선언했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을 갖고 입춘, 봄이 찾아왔음을 가늠하는
독일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펜실베이니아에 이주한 네덜란드계 이민자들이 1800년 후반부터 지키기 시작해서
수만 명이 이름도 신기한 펜실베니아 작은 도시 펑수토니(Punxsutawney)에 모여서
봄 축제를 즐깁니다.

 

동물이 겨울잠에서 깨는 행동을 통해서
봄이 오는 것을 가늠하니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2.
그라운드호그 데이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1993년에 개봉되어서 백만 이상의 관객을 모았습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펜실베니아 펑수토니에서 열리는
그라운호그 데이를 취재하러 가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이직을 고려할 정도로 방송국 일에 싫증을 느낀 주인공이
여성 기자와 함께 억지로 취재를 나갔는데
매일 같이 2월 2일이 반복되는 시간 속(time loop)에 갇힙니다.

 

무슨 일을 해도 아침에 눈을 뜨면
2월 2일 그라운도호그 데이입니다.

 

처음에는 반복되는 일상에 싫증도 나고 짜증이 났지만
사랑하는 여성의 조언대로
반복되는 하루를 피아노를 배우고, 예술작품을 만들어서 자선행사에 참가하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두 알고 있으니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지루한 일상을 특별한 날로 만드는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결국 사랑까지 성공해서 아침을 맞았는데
드디어 2월 3일이 됩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어떻게 특별한 순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
알려주는 영화입니다.

 

3.
유독 베이지역에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지난 며칠은 기온이 많이 내려가서 꽤 추웠습니다.
그래도 봄은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전쟁, 사건, 사고로 혼란스럽습니다.
물가도 오르고 여기저기서 해고 소식도 들리니
우리 마음도 세상도 아직 겨울입니다.

 

하지만, 그라운호그가 땅을 뚫고 지상으로 나오듯이
봄은 찾아올 것입니다.

 

무엇보다 반복되는 일상, 지루한 일상을
영화 속 주인공처럼 특별한 순간,
사랑을 주고 베푸는 시간으로 채워가는
감사하고 기쁜 하루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편 3:5)

 

하나님,
새 달에도 하루하루가
삶의 기쁨과 경이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2.2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