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부른다

구약성경은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한 역사서, 지혜문학이라고 불리는 성문서와 예언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한가운데 성문서가 위치한 셈입니다. 욥기부터 시작해서 아가서로 끝나는 다섯 권의 성문서들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욥기는 선한 사람도 고난 받을 수 있는 세상의 현실을 고발합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 즉 하나님 백성의 예배입니다. 전통적으로 솔로몬이 기록했다고 전해지는 나머지 세 책은 하나님 백성들이 걸어가는 인생 여정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이 젊었을 때 기록했다는 아가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지 알려줍니다. 전도서는 노년의 솔로몬이 지나온 인생을 조망하면서 젊었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충고합니다. 아등바등 힘들게 살아봐야 인생사가 도찐개찐이고 헛될 뿐이니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을 누리면서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려다보면서 작은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툭툭 털고 일어나서 큰 걸음으로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가장 지혜로울 때 기록했다고 전해지는 잠언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입니다. 잠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크마’는 일반적인 의미의 지혜를 넘어서 삶 속에서 요청되는 재능 또는 기술까지 포함합니다. 잠언의 지혜가 매우 실용적임을 뜻합니다. 잠언 속에는 현실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손이 게으르면 가난이 밀려옵니다. 입술을 지키지 못하고 함부로 험담하거나 필요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속이는 저울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지만 공정한 추는 기뻐하십니다. 이처럼 잠언은 구절마다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한두 구절을 따로 떼어서 읽어도 말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원래 고대 근동의 잠언 또는 지혜 교육은 왕궁에서 이뤄졌습니다. 왕을 비롯해서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이 유명한 지혜 교사를 모셔서 과외를 받는 식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잠언은 교육의 자리를 가정으로 옮겨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잠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때로는 사람처럼 의인화된 지혜가 서민들이 사는 시장통에서 그들을 부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잠언의 마지막 장은 현숙한 여인으로 끝이 납니다. 가부장적인 고대시대에 여인의 삶을 높이 평가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잠언속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잠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크마’도 여성명사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의 잠언은 특정 계층을 향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지혜로 초대합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 잠언의 묘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잠언 말씀은 통쾌합니다. 욥기를 읽으면서 가졌던 애매함이 잠언에 오면 모두 풀어집니다.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면서 악인에게는 화가 임하고 의인에게는 복이 임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인과응보의 신앙입니다. 신앙의 길을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현재는 복잡해 보여도 끝이 있다는 종말론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잠언은 또한 세상의 삶을 긍정합니다. 재물을 갖고 친구를 사귀랍니다. 재물이 많으면 아무래도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고 그것 역시 복이라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지나친 부는 도리어 화가 됩니다. 말을 절제하고 좋은 사람을 사귀고, 부지런히 일하면 살맛 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라면 세상 속에서도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구약 성경 잠언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나 기도에 대한 교훈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 장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빗장을 단단히 걸어놓고 시작합니다. 잠언말씀이 실제적이고 때로는 현세적으로 보여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의 거룩한 삶입니다. 잠언의 지혜가 우리를 부릅니다. 올가을에는 잠언 말씀을 차근차근 묵상하면서 하늘의 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5년 9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기도할게요”

우리들 삶은 물론 신앙생활에서 형식에 치우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신앙이 형식화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랑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시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예로 드셨습니다.이들은 늘 따로 서서 기도했고 자신들이 행하는 신앙의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기도 가운데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서 기도했으니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도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로마를 위해서 일하는 민족의 반역자로서 백성들로부터 눈총을 받던 계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했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으로 뛰어났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신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무엇보다 신앙이 형식화되면 겉만 번드르할 뿐 핵심이 사라집니다. 위선적인 신앙은 겉과 속이 다르니 회칠한 무덤처럼 역겨움이 밀려옵니다. 동시에 신앙이 습관화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우리의 신앙은 무엇이든지 소중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진실성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대충 넘어가거나 겉으로만 잘하고 있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신앙이 형식으로 흐르고 습관이 되는 예 가운데 하나가 기도해 준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이웃사랑입니다. 당사자의 입장 속으로 들어가서 같은 심정으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수많은 훈련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쉽게 기도해 주겠다는 말을 남발합니다. 아마 교회 안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 “기도할게요”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듣고 나서 마지막에는 기도해 주겠다고 마무리합니다. 메일을 쓰거나 메시지를 보낼 때도 기도한다는 말을 관용구처럼 사용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도해 주고 있는 지는 하나님과 자신만이 알뿐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임에서는 기도제목을 나누는 일이 일상입니다. 어떤 분들은 남들의 기도제목을 꼼꼼히 적습니다. 어떤 분들은 적당히 듣고 넘깁니다. 최악의 경우는 모임에서 나눈 기도제목을 갖고 뒷공론을 하거나 구설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기도제목을 나누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모임에서 나눈 기도제목을 갖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주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이 교회 모임의 한 순서로 전락해서 형식화되지 않았는지 한번쯤 돌아볼 일입니다.

제가 만난 어떤 집사님은 이웃을 위한 기도제목을 두꺼운 파일로 만들어서 늘 갖고 다니셨습니다. 새벽마다 또는 자신의 기도시간에 손수 적어 내려간 또는 부탁 받은 기도제목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기도하셨습니다. 이달 초 한 모임에서 강사로 나선 목사님께서는 백여 명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되는지 간증하시면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서 실제로 기도할 수 있는 숫자가 곧 그가 섬길 수 있는 교회 숫자의 최대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만큼 이웃을 위한 기도가 고귀하고 “기도할게요”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가 크다는 것입니다.

“기도할게요”라고 말하고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커다란 위선입니다. 자신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함께 기도제목을 나눈 이웃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럴 것이면 기도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앙이 형식화되고 상투적으로 변하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합니다. 신앙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립니다. 무엇보다 “기도할게요”라는 말에 책임지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2015년 8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어지러운 세상 중에

요즘처럼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을 펼치기가 불안하던 때도 없을 것 같습니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매일같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정신을 쏙 빼놓습니다. 태평양 너머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6월 내내 메르스라는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중동호흡기증후군이라고 불리는데 중동을 빼고 코리아를 넣어서“코르스”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입니다. 본국지 일면 기사는 거의 한달 째 메르스에 대한 기사입니다. 수천 명이 격리 수용되고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들 가운데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초기대응만 잘 했으면 전염병의 확산이 그리 크지 않았을 텐데 병원에 온 환자들을 소홀히 관리하고, 정부가 전염병을 확산시킨 병원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한 여학생의 명문대 합격이 가짜였다는 해프닝도 일어났습니다. 최고의 명문 대학을 반반씩 다닐 수 있다는 인터뷰 자체에 의심이 생겼지만, 동부 명문대에서 논문을 발표했고 페이스북 창업자와 전화통화를 했다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학생이 꾸민 자작극이었습니다. 가짜 합격 소동을 벌인 학생을 보면서 명문대병과 출세지향에 빠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는 듯 했습니다. 여학생이 지목한 학교들이 동부와 서부의 최고 명문대학들이 아니었다면 언론은 물론 국민들이 그렇게까지 수선을 피웠을까 싶습니다.

그러더니 지난 주에는 베스트셀러 작가 한 분의 표절시비가 일었습니다. 영어로 번역되고 뉴욕 타임즈까지 극찬했던<엄마를 부탁해>라는 작품은 물론 그 동안 발표한 작품들이 일본 소설을 표절했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갖고 뉴스를 검색해 보니 본인은 대답을 유보하고 있지만 표절로 의심받아 마땅할 정도로 동일한 표현들이 겹쳐서 나타납니다. 하긴 대형교회 목사도 학위 논문을 표절하고 버젓이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와 개인의 도덕수준이 얼마나 낮은 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30여 년전 대학에 다닐 때는 리포트를 베껴서 숙제를 제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대단한 표절을 한 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양과목 교수님들은 과제물을 대충 읽고 점수를 주시는 듯 했습니다. 그때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교수님 한 분은 학생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일일이 읽고 코멘트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베낀 과제물이 발견되면 당사자 모두에게 F학점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그 교수님이 유별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표절이 얼마나 나쁜 행위인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표절은 남의 생각을 몰래 갖다가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도둑질입니다.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처럼 발표했으니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구약 성경의 십계명 가운데 두 개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전염병 공포로부터 유명 작가의 표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꽤 어지럽습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고 우리 같은 소시민의 입장에서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의 근원에 정직함의 실종이 자라잡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면 표절은 물론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지러운 일들에 질서가 잡힐 것 같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공유해야 할 상식도 사라졌습니다. 합격을 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상식 밖의 행동들입니다.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책임을 져야 할 정부가 늦장 대응을 한 것도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정직하고 상식에 맞게 행동한다면 막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잣대를 세워서 상식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지러운 세상에 질서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부터 정직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2015년 6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진정한 그리스도인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과 핍박이 일어나고 있을 때,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르 샹봉이라는 작은 마을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곳에는 안드레이 트로크메라는 개신교 목사가 있었는데, 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게 설교했고 교인들에게 복음대로 살기를 요청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마을로 피신해 오는 유대인들을 보호해 주고, 그들의 도피처가 되어 주자는 권면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트로크메 목사의 부탁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유대인 피난민들이 마을에 도착하면 각 가정이 한 명 또는 한 가구씩 맡아서 도와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등록시켜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도 나치 치하에 있었기에 유대인들을 돕는 것이 정부에 발각이 되면 감옥에 가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르 샹봉 마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인구에 버금가는 5천명의 유대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어려서 가족과 함께 르 샹봉 마을로 피난 갔다가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훗날 영화감독이 된 피에르 소바주라는 분이 30년 만에 마을을 찾았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70-80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해준 시대의 영웅들답지 않게 겸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종교도 아닌 유대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이유를 마을의 한 노인에게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했기에 도와주었을 따름입니다. 성경에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자를 돌보라고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했을 뿐입니다.”

마을을 방문했던 영화감독 소바주는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소바주가 만든 영화 제목을 <신앙의 무기들>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르 샹봉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유대인 자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신앙의 무기를 선하게 사용한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 속에서 힘과 용기를 얻었고, 아무 대가도 없이 위기에 처한 이웃을 도왔습니다. “성경대로 했을 뿐입니다”라는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줍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 르 샹봉 사람들이야말로 신앙을 선한 일에 사용할 줄 알았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값싸게 취급 받고 있습니다. 세속주의가 등장하면서 기독교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관심을 갖지 않고 심지어 구닥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은 과학 문명이 빠르게 발달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 빼앗아갑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삽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카톡’음은 조용하게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할 시간마저 훔쳐갑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신앙이 피상적이 되었습니다. 속은 텅 비었고 겉만 번드르르한 경건의 모양만 남았습니다. 신앙의 무기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진정한 복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상이나 이론, 신학적 논쟁이나 높은 학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는 순수한 의도와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거나 혼자서 축복받겠다는 식의 믿음은 이제 청산해야 합니다. 소외되고 힘없는 이웃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 편에 서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사람이 하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르 샹봉 마을 사람들처럼 성경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참된 신앙으로 무장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길 원합니다.(2015년 5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어머니

오늘은 9년 전에 하나님께 가신 어머니의 기일(忌日)입니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던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주일예배를 가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매우 화창했습니다. 어머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영주권 절차 때문에 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바로 전날 통화할 때 어머니 목소리에 힘이 남아 있어서 그래도 안심이 되던 차였습니다. 그날 따라 언덕 베기에 피어있는 갈대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머님의 영혼을 꼭 붙들어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집에 왔는데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머님께서 하나님께 가셨다는 것입니다. 막내가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을 알았기에 “시용이 오라고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가셨답니다. 끝까지 막내를 배려하신 것입니다.그날 저는 태평양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마흔 셋에 나셨습니다. 요즘은 결혼들을 늦게 해서 40대 이후에 아기를 갖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어머니께서 저를 낳으시던 60년대 초만 해도 꽤 노산(老産)이셨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무명 천으로 된 한복을 입고 머리에는 쪽을 찌고 계셨습니다. 친구들 가운데 어머니가 가장 연로해서, 어머니보다 큰 누님이 학교에 오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머리를 커트하고 파마도 하시면서 멋쟁이 신여성으로 변하셨지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다고 하지만 저 역시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늘 제 편이셨습니다. 학창시절 시험을 못 봐서 시무룩해 있으면 “그까짓 시험 못 보면 어떠냐?”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30대 후반에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여든이 되신 어머니가 사랑하는 막내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 발걸음도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출국하는 날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사내가 울면 안 된다. 어서 가서 공부하고 와라”며 한 치의 떨림도 없이 또박또박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희 가족이 떠난 후에 창문을 바라보면서 서럽게 우셨답니다. 그래도 전화를 걸 때마다 “타지에서 애들 데리고 밥 굶으면 안 된다. 쌀은 떨어지지 않았냐? 여긴 걱정하지 말아라”고 하시면서 저희를 염려하셨습니다. 정말 최고의 어머니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께 가신 어머니가 잊혀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워집니다. 어머니께서 베풀어주신 사랑들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어머니에 대한 감동적인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들에게 두 눈을 주셨지만 여섯 가지 기능을 탑재해 주셨답니다. 두 개의 눈은 “너 거기서 뭐하고 있니?”라고 물으면서 자식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눈입니다. 다른 두 개는 못난 자식들을 보면 한없이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자식을 가슴에 품은 채 무릎 꿇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나머지 두 개는 자식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을 때도 “엄마는 너를 이해해. 엄마가 너 사랑하는 것 알지?”라고 말하며 아이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물론 어머니들에게는 자식이 배가 아프다고 떼굴떼굴 구르면 무릎에 눕혀놓고 “엄마 손은 약손”하면서 배를 문질러 주는 기적 같은 손도 보너스로 장착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를 만드는 것을 지켜보던 천사가 물었답니다. “하나님 그런데 실패작이에요. 얼굴에서 물이 새고 있어요.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어서 새잖아요. 이제 어떡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그건 물은 물인데 특별히‘눈-물’이라는 거야. 엄마들이 낙심되거나 속이 상할 때, 종종 외로울 때 나오는 거란다. 참-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울 때도 나오는데 그때는 왜 나오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허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분은 어머니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엄마”라고 부를 때입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을 응원합니다. 특히 작년 이 맘 때 세월호 사고로 자식을 잃고 일 년 동안 눈물로 사신 어머니들께 주님의 위로와 힘이 임하길 바랍니다. 세상 어머니들의 눈에서 기쁨과 감격의 눈물만 나오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어머니 기일인 오늘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엄마”하고 불러봐야겠습니다. 어머니, 참 많이 그립습니다. (2015년 4월 30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듣는 마음

지난 주간에는 먼저 하나님께 가신 선배 목사님의 추도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홀로 남으신 사모님께서 꿋꿋하게 잘 지내시고 두 딸이 이제는 대학을 모두 졸업해서 사회인이 되었으니 하늘나라에 계신 목사님께서도 흐뭇하게 내려다보실 것 같습니다.

목사님과는 30여 년 전 군대에서 만났습니다. 직장은 서로 달랐지만 같은 건물에서 그것도 같은 금융 쪽에서 일했기에 종종 만나서 식사를 했고, 사회생활 선배로서 저에게 조언도 해 주셨습니다. 대학시절 목회자가 되기로 헌신했다는 얘기를 자주 하시더니 결국 좋은 직장을 뒤로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저도 2년 후에 같은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목사님의 뒤를 따라서 미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10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임지를 옮기면서 생각지도 않게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목회현장에서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배 목사님이 계시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커다란 힘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구약성경 가운데 욥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욥기는 구약성경에서 지혜문학에 속하는데 욥기를 좋아하시는 것에 걸맞게 현인(賢人)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여러 분야에 박식하셔서 어느 하나 막히는 곳이 없을 만큼 부지런히 공부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나름대로 정리해 놓으신 훌륭한 목회자셨습니다. 목사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가신 지 6년이 지났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생각이 나고 그립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일찍 데려가신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물론 하나님의 더욱 깊은 뜻이 있겠지요. 목사님을 추모하는 예배에서 저는 “듣는 마음”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거의 백지수표를 솔로몬 앞에 내미십니다. 그때 솔로몬은 모든 것을 제하고 단지 지혜로운 마음을 구합니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마다하고 지혜를 구한 것을 칭찬하시면서 다른 것들도 덤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마음”에 해당하는 말씀을 히브리어 본문 그대로 읽으면 “듣는 마음”이 됩니다. 그것도 현재 진행형이 쓰였으니 매 순간 듣고 있는 마음이라고 풀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듣다는 히브리어 동사에는 이해하다 또는 분별하다는 뜻도 있어서 지혜로운 마음 또는 분별하는 마음으로 읽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래도 히브리어 본문을 읽다 보면 제일먼저 “듣는 마음”이라는 의미가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지혜는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늘의 지혜를 얻습니다. 앞에 가신 선인들의 말씀이나 그들의 인생을 살피고 들으면서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세상에 많은 지혜로운 현인들의 글을 읽고 들을 때 우리들도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살면서 잘 듣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서둘러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지혜롭기 보다 어리석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말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SNS)가 발달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앞세우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인터넷 상의 댓글 문화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너도 나도 자기가 옳다고 말하니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차분하게 남의 얘기를 경청하고, 남의 사정을 마음으로 공감해 주는 “듣는 마음”을 가진 이웃들이 그립습니다. “지혜는 들음에서 나오고 후회는 말함에서 생긴다”는 영국속담이 있답니다. 성경에서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했듯이 듣는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같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말 가운데서 들을 것을 듣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하나님께 구합니다.(2015년 3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로봇 청소기

2주전 목사님들과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그 중에 한 목사님께서 어렸을 적 교회에 갈 때마다 사찰 집사님이 부러우셨답니다. 늘 교회에 계시면서 교회를 돌보시는 모습이 훌륭하게 느껴지셔서 한 때는 사찰 집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데 이민 목회를 하다 보니 그 꿈을 이루셨다고 허허 웃으면서 말씀하십니다. 교회 문을 열어주고, 쓰레기를 치우고, 교회를 청소하는 것이 목회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부터 교회 청소를 즐겼습니다. 예전 고향 교회는 마루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가서 주일학교 아이들이 오기 전에 교회 마루를 물걸레로 청소하곤 했습니다. 시골 아이들이 오면 흙 발자국이 나고 금방 더러워지지만,그래도 교회 마루를 깨끗이 청소해 놓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교회 청소를 즐깁니다. 토요일 아침에는 권사님 내외분과 함께 저희 부부가 이곳 저곳을 청소하면서 주일을 준비합니다. 주일 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친교실의 식탁들이 잘 정돈되어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가로 세로 줄을 맞춰서 정돈합니다. 반 지하에 있는 친교 실에 음식물 냄새가 배어있을까 염려되어서 환기를 시키고, 열심히 걸레질을 합니다. 설거지 당번들이 잘 정돈해 놓지만 목사가 맨 나중에 정리할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깔끔을 떨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올 해 들어서 저희 부부가 토요일에 청소하는 것이 내심 안타까우셨던 권사님께서 파격적인 제안을 하셨습니다. 로봇 청소기를 사서 교회 청소를 로봇에게 맡기자는 것입니다. 우선 권사님 댁에서 쓰시던 로봇 청소기를 갔다가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권사님들이 로봇이 얼마나 청소를 잘할 지 반신반의 했는데 생각보다 청소를 깨끗이 해주었습니다. 로봇청소기를 마련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로봇 청소기 한 대를 구입해서 교회에 풀어놓았습니다.

요즘은 로봇 청소기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청소하는 토요일까지 바닥에 자잘한 부스러기가 남아 있어서 눈에 거슬리곤 했는데, 평상시에도 로봇이 청소를 해주니 교회가 늘 깨끗합니다. 로봇이 지나간 길은 축구경기장의 잔디 처럼 카펫에 일렬로 줄이 납니다.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도 예배실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청소합니다. 저와 아내는 로봇을 따라다니면서 말도 걸고, 혼자 두고 나올 때는 ‘바이’하고 인사도 합니다. 이름도 “로비”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교회를 청소하는 로봇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도 얻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일은 말없이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봇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배터리가 있는 동안 쉬지 않고 일합니다. 교회 일 하면서 공치사하고 때로 불평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또한 로봇은 누가 보고 있지 않아도 열심히 청소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의식하거나 자랑하고 칭찬받기 위해서 일하는 우리네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로봇은 배터리에 힘이 다 소진되면 충전 스테이션을 찾아와서 차분하게 배터리를 충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지치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불평하거나, 심하면 상처받았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로봇은 말없이 제 발로 충전기를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도 그래야 합니다. 힘들고 지치면 말없이 하나님께 나와서 힘을 얻을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도리인 것을 로봇이 깨우쳐줍니다.

여기저기 의자와 벽에 부딪쳐서 이마가 벗겨지면서도 말없이 청소하는 로봇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겸연쩍어 집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일은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힘을 다해서 말없이 해야 함을 로봇을 통해서 다시금 배웁니다. 그나저나 교회를 청소하는 특권을 로봇에게 빼앗겼으니 가끔씩은 로봇을 쉬게 하고 제가 손수 청소기를 돌려야겠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주님의 성전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기쁨과 보람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2015년 2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스타트업(startup)

지금부터 150여년 전 수십만의 사람들이 미국전역에서 캘리포니아로 몰려왔습니다. 골드러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스타트업이라고 불리는 벤처회사를 세우거나 그곳에서 일하기 위한 젊은이들이 실리콘 밸리와 샌프란시스코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2만여개에 가까운 회사들이 새롭게 시동을 걸고 트윗터나 페이스북처럼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합니다. 너도나도 서부로 몰려왔던 그 옛날 골드러시때와 달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행보입니다. 그들의 꿈과 열정이 우리 지역에서 꽃을 피우기도 하고 또한 안타깝게도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엊그제는 20대 한인여성 세 명이 세운 스타트업 회사가 미국은 물론 한국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었습니다. 3천만 불에 회사를 팔라는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 세간에 주목을 받은 것입니다. 8억불 매출이 가능한 회사를 헐값에 팔 수 없다고 당차게 말하는 것을 보니 이들이야 말로 노다지 금광을 발견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들은 여느 스타트업 창업자들처럼 매의 눈을 갖고 시장을 들여다보고, 아이디어를 내고, 밤낮없이 일했을 것입니다. 20대 젊은 여성들이 엄청난 회사를 세워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뿐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기업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창업이 젊은이들의 로망이 되어서 자신의 꿈도 펼치고 실제로 많은 돈을 버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읽기보다 안이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응답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교회를 젊은이들은 외면합니다. 지난 10여년 이상 동성애 문제를 두고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지만 동성결혼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교회의 대패로 막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교인들이 고령화되면서 교회에서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가나안 성도라는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기존의 교회 행태에 식상해서 교회에 ‘안나가’는 젊은이들을 가리킵니다. 말 그대로 교회의 위기입니다.

작금의 미국과 한국 개신교의 위기는 1900년대 중반 영국교회가 경험한 것과 유사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부흥>이라는 책에서 당시 영국 사회를 다음과 같이 진단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평범한 책이 되었고, 여타의 책들과 똑 같은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거룩한 책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 하는데도 교회는 건물을 짓는 등 자기영역을 늘리는데 몰두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가 절제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한시가 급합니다”라고 교회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요즘 신문보도에서 보듯이 영국 교회는 거의 와해되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꿈꾸던 부흥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남 얘기가 아닙니다. 영국 교회을 비롯한 유럽 교회의 몰락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립니다. 초대교회 시절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할례와 안식일을 주장하다가 결국 세상에서 사라진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부르시고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이방인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변화하는 세상과 담을 쌓거나 안이하게 대처한다면 영국교회처럼 또한 유대교를 고집하던 예루살렘 교회처럼 무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에 교회가 반응해야 합니다. 복음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매력적인 복음을 세상에 제시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성도들을 교회에 묶어두지 말고 세상 속으로 파송해야 합니다. 누룩처럼 세상 속으로 파고드는 선교적 교회, 선교적 그리스도인들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교리를 주입하기 보다 섬김과 희생적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듯이 다시금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는 평판을 얻어야 합니다. 기업가들만 스타트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교회들도 다시 시동을 걸고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한시가 급할 수 있습니다. 2015년 새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은 신앙과 교회의 새로운 스타트업일 수 있습니다. (2015년 1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