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한 장씩 차례로 읽어가는 새벽기도회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유명한 누가복음 본문을 만났습니다. 공관복음서로 알려진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씨를 심기보다 옆구리에 망태기를 메고 손으로 휙휙 뿌리는 식이었답니다. 그러니 씨가 여기저기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읽다 보면, 씨를 뿌리는 농부보다 말씀을 뜻하는 씨와 씨가 뿌려진 밭이 강조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농부가 뿌린 씨는 길가, 바위,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에 각각 떨어졌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공중의 새가 와서 쪼아먹었습니다. 바위에 뿌려진 씨는 싹은 났지만, 습기가 없는 바위 위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말라버렸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강력한 가시나무가 기운을 막으니 크게 자라지 못했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이 백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길가는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갔습니다. 바위는 기쁨으로 말씀을 듣지만, 시련이 닥치니 말씀을 저버리고 배반했습니다. 가시덤불은 신앙의 성장을 막는 염려, 물질, 쾌락입니다. 가시덤불이 현대를 사는 우리의 상황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밀물처럼 몰려오고, 마음속에서 바이러스처럼 생기는 염려는 복음의 씨가 자라는 것을 막습니다. 염려를 완전히 떨칠 수 없지만, 염려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께 맡기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므로 염려를 몰아내야 합니다. 계속해서 염려가 몰려오니 쉬지 않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덤불의 두 번째 요소인 재물은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신앙 성장을 방해합니다. 재물이 없으면 그 자체가 시험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한지 우리 모두 잘 압니다. 재물이 많으면 대부분 하나님을 떠나거나, 재물에 노예가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대형교회의 문제들 대부분이 재물과 관련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염려와 재물에 이어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쾌락은 하나님을 향해야 할 우리의 마음을 홀딱 빼앗아갑니다. 쾌락만큼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어릴 적 꿀단지에서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다가 며칠 지나면 한 단지를 모두 훔쳐 먹듯이 쾌락은 슬며시 우리 안에 들어와서 마음과 삶을 소리소문없이 망가뜨립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기뻐하고 즐긴다면 그 모든 것이 쾌락에 속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이 등장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착한 것은 거리낌 없이 정직한 마음입니다. 좋은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원수까지 사랑하고 미운 자를 위해 기도하며, 약한 자를 돕는 말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성품입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서 인내로 결실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니 백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는 씨가 뿌려진 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도자의 책임은 단지 씨를 뿌리는 것임을 알려주고,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밭에 비유하면서 좋은 밭을 가진 성도가 되길 부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유 속의 밭을 우리 각자의 마음과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 안에는 네 가지 밭들이 모두 존재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한결같이 좋은 밭일 수 없습니다. 마음 한편에는 길가도 있고, 다른 편에는 바위는 물론 가시덤불이 넓게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우리의 마음을 좋은 밭으로 갈아엎는 훈련이고 과정입니다.
때로는 네 가지 밭이 차례로 또는 두서없이 나타납니다. 마음 전체가 길가와 같아서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속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염려와 재물 그리고 쾌락에 빠져서 가시덤불로 뒤덮일 때도 있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해서 우리 마음 전체가 좋은 밭일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좋은 밭이 오래가도록 신앙의 끈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여정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순례길입니다. 여기서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갖고 주어진 신앙과 인생의 여정을 감사와 기쁨으로 완주하기 원합니다. (2018년 8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