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낮춥시다

저는 그리 빨리 운전하는 편이 아닙니다. 제한속도를 지키거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한속도에서 10마일 이상을 넘기지 않습니다. 차선도 자주 바꾸지 않고 될 수 있으면 같은 차선을 달립니다. 옆에 있는 아내는 제 운전습관에 익숙하지만, 종종 운전을 아주(?) 잘하는 분께서 옆자리에 타시면 답답해하시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러면 장난기가 발동해서 슬쩍 액셀러레이터를 밟습니다. 차선도 바꿔봅니다. 운전을 못 해서 늦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안전운전을 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제한 속도를 지켜서 운전하는 것이 편합니다. 속도를 내면서 급하게 달려가도 나중에 보면 별 차이가 나지 않고 자칫 교통 티켓에 벌금 폭탄을 맞기 십상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에 익숙합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는 뜨거운 커피가 내려오는데도 손으로 종이컵을 잡고 기다립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몇 번씩이나 “닫힘” 버튼을 누릅니다. 일종의 조급증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길을 걸으면서도 서두를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뒤처졌다고 느끼거나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기 위해서 경쟁심이 발동할 때 서두르게 됩니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초조감도 한몫 합니다. 지나치게 서두르다 보면 실수하게 되고 자칫 서두른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때때로 속도를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적합한 속도로 주어진 인생길을 가는 것입니다. 곁눈질하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방향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오스 기니스라는 분은 그의 책 <소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쫓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부르심을 쫓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스 기니스의 말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람과 세상을 의식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은 사람의 칭찬처럼 귓전을 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뤄가는 소명을 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조급할 때 그렇습니다.

 

조급하게 세상을 쫓아가느라 애쓰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내적 성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말씀과 기도로 점검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의식적으로 삶의 속도를 낮춰보는 것입니다. 속도를 낮추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볼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인생의 엔진을 완전히 끄고 쉼을 가질 필요도 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자신만의 골방에 들어가서 삶을 돌아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깊은 침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힘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삶을 조율합니다. 침착하게 자신이 가야 할 인생길의 방향을 잡아가고 속도를 조절합니다. 속도를 낮추고 쉴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스 기니스는 그의 다른 책 <인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두 창조자이자, 예술가이자, 기업가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소명의 핵심이다.”

 

어느덧 올해도 석 달 남았습니다. 세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조급해집니다. 그동안 최고의 속도로 여기까지 달려왔다면, 남은 석 달은 속도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마음껏 즐기고 음미해 봅시다. 유일하신 청중이신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창의적이고 아름답고 알찬 인생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018년 9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