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요한복음은 21장으로 끝나지만, 마지막 21장은 에필로그와 같고 20장 마지막 절에서 요한복음이 마무리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절(3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 )( )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공부 시간에 괄호 안에 들어갈 두 글자를 맞추는 퀴즈를 내면 대부분 “구원” “은혜” “사랑” “능력” 등으로 답하십니다. 그런데 정답은 “생명”입니다.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리적인 용어들이 아니라 괄호 안에 “생명”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신 것과 예수님을 믿었을 때 생명이 임한다는 것은 지난주에 맞은 부활절과 관련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가는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인데, 예수님은 죄의 값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설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면서 많은 기적을 행한 특이한 인물, 또는 하나님 말씀을 잘 풀어낸 위대한 유대랍비 정도로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악한 세력을 이기고 “승리자 그리스도”로 다시 사셨습니다. 거기서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큰일을 하실 줄 알고 미리부터 인사청탁을 했던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증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스>에서 순교자에 해당하는 영어 martyr가 파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고 현장을 떠났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3년을 회고하면서 요한복음을 저술했고, 그 말미에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는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부활 이후에 일어난 변화들입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찾아왔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같은 고백을 하면서 사순절을 보냈고 지난주에 부활 주일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부활 이후의 삶입니다. 연중행사로 부활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은혜와 능력, 아니 부활에 깃든 생명을 부활 이후에도 줄곧 경험해야 합니다.
부활 이후의 삶을 생각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역과 명령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고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공의, 약한 자들이 공평하게 대우받는 정의,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생명을 전하고 행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임하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길 부탁하셨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힘을 다해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사순절과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특별기도회를 가졌고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부활절 이후의 기도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기다리면서 기도했던 제자들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절 이후는 사순절 동안 행했던 신앙 훈련을 각자의 성품과 삶에 내면화하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그랬듯이 세상 속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2019년 4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