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툰베리는 16세 스웨덴 소녀입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에 몰두해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에 집착하는 일종의 자폐증입니다. 툰베리는 작년 8월부터 스웨덴 의회 앞에서 파리기후협약의 약속대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라는 푯말을 들고 학교도 결석한 채 11월까지 1인시위를 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런던과 파리를 비롯한 유럽 전역을 돌면서 정치인들과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토론하고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노르웨이 의회의 추천으로 올해 노벨 평화상 후보까지 올랐고, 타임지가 선정한 2019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인사에 들었습니다.
툰베리는 “환경을 위한 학교 파업”이라는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온난화로 지구가 파국을 향하고 있으니 공부보다 일단 지구 온난화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학교에서 편하게 공부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툰베리의 뜻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서 올 3월부터 10대 학생들의 환경을 위한 학업중단 선언이 이어졌습니다. 어른들의 게으른 대처에 분노한 10대들이 직접 나선 것입니다.
지난 9월 20일에는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서 지구를 살리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뉴욕 타임즈 보도로는 전 세계적으로 4백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베이 지역에서도 각 지역 또는 학교별로 시위를 벌였고, 샌프란시스코에만 4만여 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됩니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은 기존 정치인들의 안일한 대처에 분노했습니다. 장차 자신들이 살아갈 지구를 안전하게 물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방탄소년단(BTS)을 인용해서 “지구가 BTS보다 더 뜨겁다”는 푯말을 들었습니다. 하루속히 온실가스를 줄이라는 요청입니다.
실제로 지구의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 내립니다. 세계 곳곳에 이상 기온 현상이 발생합니다. 겨울에는 한파가, 여름에는 폭염이 밀어닥칩니다. 한쪽에서는 홍수가 나고 어떤 지역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립니다. 북극곰이 한쪽 남은 빙하 위에 앉아 있는 사진이나, 심지어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사진이 지구 온난화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석탄이나 석유같은 화석 연료와 산업화에 따른 온실가스 때문으로 봅니다. 대기권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온실처럼 머무는 가스들로 인해서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온도가 섭씨 2도 상승하면 북극의 빙하 28%가 녹는 답니다. 해수면의 상승으로 물에 잠기는 도시가 생길 수 있고 생태계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합니다. 지금 같은 속도라면 2050년에 2도 상승이 예측되고 그 이상으로 기온이 상승한다면 지구에 큰 재앙이 찾아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합니다. 2도의 기온 상승이 실감나지 않을 때, 우리 몸의 체온이 2도 올라간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생각하면 지구 체온 2도의 심각성이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물론 지구 온난화를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그 가운데 속해서 미국은 2017년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했습니다. 온난화는 지구가 겪어온 일상적인 과정이라는 입장인데, 그동안의 연구와 기온 상승 속도를 고려하면 결코 낙관할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장차 지구에서 살아야 할 10대들이 나섰을까요!
또한, 지구를 지키는 것은 기독교인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들을 지구를 지키는 청지기로 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문명의 발달과 안이한 관리로 아름다운 지구가 망가진다면 그 책임은 인류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지구 살리기에 나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제 기성세대와 특별히 정책을 입안하는 지도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 10대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0대 청소년들을 학교로 돌려보내고 그들이 쾌적한 지구에서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전 세계가 힘을 합쳐 온실가스 배출을 확실히 줄여야 합니다. 적어도 파리기후협약에서 약속한 대로 섭씨 2도 이하의 기온 상승만은 꼭 지켜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의 문이 곧 닫힐 것입니다”는 툰베리의 외침에 귀 기울 때입니다.(2019년 9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