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새들은 당연히 팔레스타인 지역에 서식하는 새들입니다. 그 가운데 특이한 새가 오늘 함께 살펴볼 올빼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올빼미 또는 부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부엉이라는 우리말에는 올빼미 과에 속하는 모든 새들을 포함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올빼미보다는 부엉이가 어감이 더 좋은 듯 합니다. 레위기 11장 17절에 먹지 말아야 할 새들의 명단에 올빼미와 부엉이가 함께 나오는데 여기서 올빼미는 작은 부엉이, 뒤의 부엉이는 큰 올빼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올빼미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눈이 매섭고 서 있는 자세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눈꺼풀을 이용해서 눈을 껌뻑이는 능력도 갖추었습니다. 올빼미는 황폐한 곳에 살아서 까마귀처럼 섬뜩한 느낌을 줍니다. 야행성이라서 쉽게 눈에 띠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요. 반면에 올빼미 또는 부엉이는 학자와 같은 느낌도 갖고 있습니다. 큰 눈에 안경을 맞춰 쓴 만화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올빼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시력과 청력입니다. 올빼미는 낙엽 속에서 움직이는 쥐와 같은 동물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올빼미의 경우 머리 부분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감시 카메라가 360도를 회전하면서 사방을 살펴보듯이 올빼미의 머리도 180도는 물론 칡부엉이의 경우 270도까지 회전할 수 있답니다. 따라서 올빼미는 앞을 보고 있으면서도 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올빼미의 감지능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에게도 영적 민감성이 요청됩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우는 사자처럼 사방에서 달려들어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합니다. 자칫 서 있다고 생각한 채 잠시잠깐 방심하면 금방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촉수를 세우고 사방에서 밀려오는 시험과 유혹에 대비해야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올빼미가 사방을 두루 감찰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신앙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만 집착하면 우울해 지거나 필요 없는 영웅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현재만 생각하고 있으면 앞길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미래만 생각하면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올빼미가 사방을 관찰하듯이 우리들 인생길을 두루 살펴보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가지에만 몰두해서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일에만 몰두하다가 가족을 소홀히 하는 것, 취미생활에 집중하다가 정작 중요한 생업을 소홀히 하는 것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신앙만 중요하다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도 균형을 잃은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사방을 향해야하고 각각의 일들이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함을 올빼미를 통해서 배웁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의 눈이 먼저 하나님을 향할 때 영적인 촉수가 작동하고,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시편기자는 자신의 처지가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았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부르짖고 탄식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익히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사방을 두루 살펴주시고 보호해 주시길 구한 것입니다. 사방을 두루 살피는 올빼미처럼 우리들도 매사를 신중하게 살피고 기도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