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는 교회
올해 우리 교회 표어인 <돌보는 교회>에 맞춰서 지난 7월부터는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이 우리 안에 충분히 임했을 때 자연스레 교회와 세상을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정성껏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에서 아담의 돕는 배필 이브를 만드시는 모습 속에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당혹스럽고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면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은 양치기 목동 다윗을 찾아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카탄> 막내 다윗을 챙기고 돌보신 것입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큰 죄에 빠집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지만, 그가 치를 죗값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둘째 솔로몬을 주시고 “여디디야(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다윗을 위한 돌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계를 뛰어넘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악독한 왕비의 고향인 시돈으로 가서 한 과부의 돌봄을 받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시돈 땅 사르밧에 갔습니다. 마지막 음식을 만들고 생을 마감하려는 과부를 만나서 그의 돌봄으로 가뭄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를 돌보셔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시돈 땅 사르밧 과부를 찾으신 하나님의 돌봄이 특별했습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온 백성이 회개한 니느웨를 돌보신 하나님의 사랑도 성경 전체에서 특별했습니다. 아무리 니느웨가 회개해도 그곳 백성은 물론 짐승까지 하나님께서 돌보신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도 돌보셨습니다. 요나는 물론 우리의 선입관까지 뛰어넘은 돌봄입니다. 우리의 돌봄의 넓이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지 새롭게 느꼈습니다.
시편 142편 말씀은 돌봄을 실천하려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원통함과 상한 심령을 아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을 때,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주의 구원을 볼 수 있고, 주의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도 돌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을 교회는 물론 세상과 나누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