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북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평창 올림픽이 막을 올리는 날입니다.

미국의 모든 언론이 “Pyeongchang”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평창이 강원도에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서

구글에서 확인해 보니 원주와 강릉 사이에 있네요.

 

우리는 경기에 주목하는데

참가하는 국가나 선수들은 입장식에서 자기 나라 국기를

누가 들고 가느냐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미국 선수단의 기수선정에 대한 해프닝(?)이 기사화되었습니다.

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8종목의 대표들이 모여서

투표로 기수를 뽑았는데 4:4 동점이 되었고

규정에 따라 동전 던지기로 햄린이라는 여자 “루지(luge)”선수가 선정되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으로 은퇴를 계획하고 있던 햄린에게 최고의 행운이 임한 것입니다.

미국 국기를 들고 입장할 햄린을 보기 위해서

부모님과 동생이 평창으로 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햄린과 경쟁했던 셰니 데이비스라는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가

동전 던지기는 뭔가 좋은 방법이 아니고

게다가 2월은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생각하는

Black history month라고 해시태그를 달아서 트위터에 글을 올린 것입니다.

 

셰니는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 참가해서

개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던 최초의 아프리칸 아메리칸이었습니다.

기수로 선정된 햄린은 루지라는 비인기 종목의 백인 선수였고요.

탈락한 셰니는 흑인이고, 햄린이 백인이어서 더욱 이슈가 된 것입니다.

 

투표에서 동점이 나왔으면

화합의 상징으로 둘이 함께 성조기를 들고 입장했으면 하는 생각을 저 혼자 했습니다.

물론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따라야지요.

 

2.

반면, 우리나라 선수들은

Korea라는 국호와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남북이 공동 입장합니다.

 

국제 대회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입장하는 것은

2007년 중국에서 열린 동계 아시안 게임이래 11년 만이고

이번 평창 올림픽이 열 번째랍니다.

 

남북이 공동 입장할 때는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남녀 두 명의 기수를 세운답니다.

 

이번 평창 올림픽은 “남남북녀”차례여서

남쪽에서는 남자 봅슬레이 선수가 이미 선정되었고

북한에서는 여자 선수 가운데 한 명이 공동 기수로 나서게 됩니다.

공동 기수를 두고 이런 전통이 있었더니 흐뭇합니다.

 

아무쪼록 조국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동계 올림픽이

지나치게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온 세계가 스포츠 정신으로 하나가 되며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갈

남남북녀 기수의 모습처럼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고

우리의 소원인 “평화” 통일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 요셉과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막대기가 되게 한즉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에스겔 37:19)

Behold, I am about to take the stick of Joseph (that is in the hand of Ephraim) and the tribes of Israel associated with him.

And I will join with it the stick of Judah, and make them one stick, that they may be one in my hand. (Ezekiel 37:19)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과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고

온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이 속히 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2.8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한쪽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고, 다른 쪽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미루는 불가지론자들도 있지만, 결국 이분들도 신을 믿지 않으니 후자에 속할 수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거추장스럽게 여깁니다. 신을 믿는 것 대신에 양심, 자연법칙 또는 물질에 의존해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분들이 신을 믿지 않는 대표적인 이유는 신은 고대 이래로 연약한 인간이 만든 조작품 또는 생각을 띄워(투사)놓고 그것을 의지하는 방식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형태를 띱니다. 세상 곳곳을 다스리는 많은 신이 있다고 믿거나(다신론), 세상 자체가 신이라고 보거나(범신론), 오직 한 분이신 유일신을 믿습니다. 유일신을 믿는 대표적인 종교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로 아이로니컬 하게도 모두 구약 성경 창세기의 하나님 한분 만을 믿습니다. 매우 흥미롭지요.

 

유일신을 믿는 세 종교 가운데 우리 기독(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통해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없이 기독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역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하고, 이것이 곧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올바른 표현일 것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주현절이 지나고 곧 사순절을 맞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고 그 삶을 살아가는 기간입니다. 올해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성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주일설교에서 많은 내용을 나눌 수 없어도 꼭 필요한 교리를 소개하고,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을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변함없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을 거역한 백성들을 다시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시는 하늘 아버지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처럼 고백하기 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시편 18:1)-河-

다림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새벽에는 아모스 선지자가

“다림줄(a plumb line)”환상을 보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다림줄은

벽을 세우거나 건물을 지을 때,

수평과 수직을 똑바로 맞추기 위해서 위에서 아래로 드리우는

일종의 자(ruler)와 같은 줄을 가리킵니다.

 

예전 한국에 있을 때,

세탁기나 냉장고와 같은 전자기기를 구입하면

수직과 수평을 맞추는 흰색 실이 따라오곤 했는데

그것이 곧 다림줄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네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메뚜기와 불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는 환상인데

아모스가 간절히 구해서

(잘못은 왕과 지도자들이 범했는데, 메뚜기와 불의 심판은 힘없는 백성들까지 죽게 되니)

하나님의 재앙을 면합니다.

 

세 번째 환상이 다림줄입니다.

다림줄을 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의 행위를 측정하실 참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 왕과 지도자들은

가난한 백성들을 학대하고 무시했으며

저울을 속이는 등 부정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탐욕을 채웠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의 잘못을 낱낱이 세고 계시다가

결국에는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임할 것을

마지막 네 번째 여름 과일 광주리 환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름 과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끝”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부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림줄을 손에 드시고 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2.

다림줄 –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도전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게

수평/수직이 맞아야 합니다.

의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 길을 완벽히 걸을 수 없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하심으로

끊임없이 의로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과 삶에 다림줄을 내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

십자가의 은혜에 응답하는 의로운 길을 걷는

오늘 하루 그리고 새달이 되기 원합니다.

 

함께 그 길을 걸어갑시다!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아모스 7:7)

Behold, the Lord was standing beside a wall built with a plumb line, with a plumb line in his hand. (Amos 7:7)

 

하나님 아버지,

어그러지고 뒤틀린 세상 속에서

주님의 다림줄을 내리우고

의로운 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2.1이-메일 목회 서신)

여호와 우리 주여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올 한 해 열두 달이 지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때로는 달력이 없었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달력의 기원은 고대 이스라엘은 물론 인류 문명의 발상지에서 공통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하루, 보름달이 찾아오는 한 달, 계절이 바뀌고 밤과 낮의 길이가 변동하는 한 해까지 인류 최초의 과학자이자 현자들은 달력을 만들어서 자연의 이치와 더불어 살아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달력을 이용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달력에(시간에) 맞추는 아이러니가 발생했습니다. 햇수가 지나도 몸에 이상이 없다면 성경의 갈렙처럼 인생 팔십에도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80세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아파지는 것을 느끼고 의기소침해집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갈 때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심란합니다. 새해를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새해의 결심을 지키지도 못한 채 새달이 지나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를 줍니다. 편리를 위해서 시간을 만들어놓고 도리어 시간에 지배받는 식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작은 일에 충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세상 속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기 원합니다. 큰일을 생각하고 한 해를 통째로 생각하다 보면 조급할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충성하면서 하루를 살고 한 가지씩 주어진 일을 차근차근 해내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쫓기지 않고 시간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웠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마치 어떤 일에 몰두하면, 시간의 흐름을 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보내는 개인 경건의 시간, 골방 기도의 시간, 공동체 예배와 친교 시간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길 원합니다. 둘째로, 자기 일에 몰두하는 한 해가 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일을 돌아봄과 동시에 자기 일을 돌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한 달란트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변에 있는 지극히 작은 한 명의 이웃을 섬기기 원합니다. 자신보다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다가가서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가 고백하듯이 주의 손으로 지으신 하늘과 그곳에 베풀어 두신 해와 달을 보면서 주님을 만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창조세계를 세심하게 느끼고, 그곳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작은 것까지 포착하는 삶의 여유를 갖기 원합니다. 자고 일어나는 하루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 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 거룩한 시간으로 2018년을 장식하기 원합니다. -河-

성경통독

 아침에 일어나면 카톡 메시지가 수십 개 쌓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 단체 카톡방에 보낸 메시지들입니다. 카톡을 무음으로 해놓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카톡 카톡”하는 소리에 잠을 설칠뻔 했습니다. 카톡이 미국은 물론 한국과 전 세계를 이어주면서 우리 대부분 다반사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카톡에 일일이 답변해야 하고, 행여나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상대방이 읽고도 답변하지 않을 때는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등 귀찮고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카톡이 주는 유익이 꽤 많습니다. 저에게는 그중에 하나가 카톡을 통한 성경 통독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카톡방을 개설해서 자원하는 교인들과 성경을 읽었습니다. 일 년 통독 스케줄에 맞춰서 서로 격려하고 점검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질문하고 제가 답변합니다. 매주 읽을 분량을 알려드리면서 해당 본문에 대해서 간단히 안내해 드립니다. 카톡이 주는 혜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을 통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에 서너 장씩 읽으면 일 년에 성경을 통독할 수 있는데, 혼자서는 중간에 길을 잃고 포기하기 십상입니다. 곳곳에 성경 통독을 힘겹게 하는 복병들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새해 첫 달부터 맞게 되는 구약성경의 레위기가 대표적입니다. 지루하다 못해 그냥 건너뛰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읽다 보면 진도가 나갑니다. 성경 통독 한 가운데서 만나는 구약성경의 시편은 행여나 그동안 밀린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두 달 가까이 시편의 은혜로운 말씀에 푹- 잠겨서 여름을 보냅니다. 그다음에 만나는 가장 큰 복병은 이사야로 시작되는 대예언서입니다. 각각의 장이 꽤 길고 이스라엘의 죄악상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덩달아 화도 나지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우울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내용도 어렵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대예언서라는 큰 고비만 넘으면 그다음부터는 탄탄대로입니다. 완주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성경 통독이 주는 유익이 꽤 큽니다. 우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를 읽었다는 기쁨입니다. 성경 통독을 끝냈다는 표시로 요한계시록 마지막 구절을 카톡방에 올리면서 함께 느끼는 쾌감이 있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후에 찾아오는 감사와 보람은 통독하신 분들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둘째로, 성경 통독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펼쳐진 성경의 여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걷게 만듭니다. 설교나 성경공부는 성경의 일부만 다룹니다. 대개 은혜로운 본문들이 대상이 되곤 합니다. 이미 익숙한 말씀을 반복해서 듣고 공부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성경 통독은 불모지와 같은 성경의 숨은 본문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그 거친 말씀까지 읽고 묵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셋째로. 일 년에 한 번씩 성경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성경 전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성경의 줄거리가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펼쳐집니다. 지난주에는 3년째 성경 통독반에 참여한 노권사님께서 이제 성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경을 조각조각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묘사된 하나님의 큰 그림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통독 자체가 매우 좋은 신앙 훈련입니다. 하루에 서너 장씩 꾸준히 성경을 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잠시 한눈을 팔면 읽어야 할 분량이 눈덩이처럼 쌓여서 날을 잡아서 따라잡지 않으면 순식간에 뒤처지고 맙니다. 일 년에 성경을 통독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관리를 했다는 표시입니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함은 물론 규칙적으로 섭취했다는 뜻입니다.

 

어느덧 새해 첫 달이 지나갑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한 성경 일독은 그 힘들다는 레위기에 와 있습니다. 힘차게 새해를 시작했지만,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그랬듯이 우리의 삶도 금방 거친 광야 길에 접어들 수 있습니다. 레위기를 읽으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한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올 한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처럼 한해의 여정을 하나님 말씀과 더불어 걷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성경 통독을 권합니다. (2018년 1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서너 가지 죄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기도회 말씀 읽기는

아모스에 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12개의 소예언서는

하나의 책으로 묶을 수 읽을 정도로 분량이 적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대예언서 못지 않게 거칠고 엄격합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남유다 드고아 출신입니다.

양을 치다가 선지자로 부름받았고,

북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했는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번성한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백성들을 약탈하면서

더욱더 자신의 배를 채우고 불의를 일삼았습니다.

아모스는 바로 그때 선지자로 부름받아서

낯선 북이스라엘로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언서에는

남유다나 북 이스라엘외에도

그들을 둘러쌓고 있는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예언이 등장합니다.

대부분 예언서 마지막에 위치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의 죄악도 알고 계시고 그것을 심판하실 것을 알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까지 다스리시는 주권자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아모스에서는

이방민족에 대한 예언이 앞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쌓고 있는 작은 민족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당사자인 유다와 이스라엘로 좁혀오면서

결국에는 북이스라엘이 범한 죄들을 지적합니다.

긴장감이 감도는 말씀입니다.

 

2.

아모스는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서너 가지”는 정확한 죄의 숫자라기 보다는

그들이 지은 죄 몇 가지를 갖고도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서너 가지 죄까지 보고 계셨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다의 죄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된 것입니다 (2:4)

 

이스라엘의 죄는 서너가지를 넘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북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고 사고 팔거나, 상거래에서 정직하지 않거나,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탈취하고 압제하고,

왕궁의 지도자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 타락한 죄들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벌하실 것입니다.

죄에는 댓가가 따른다는 것이 구약 예언서의 메시지입니다.

 

2.

아모스를 처음 읽은 어제

“오늘 하루는 우리에게 있는 서너 가지 죄를 생각해보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 바랍니다”라는 적용으로

새벽 기도회를 마무리했습니다.

 

새해의 첫 달이 지나갑니다.

새해의 결심도 서서히 식게 마련입니다.

 

이쯤해서

우리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기 원합니다.

잠시 멈춰서 행여나 우리안팎에 있는 그릇됨(죄)을 생각해보고

가장 중요하고 큰 서너가지 죄를 골라서 주님께 내어놓기 원합니다.

 

회개는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우리가 해야할 도리이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서너 가지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됨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아모스 2:6)

Thus says the LORD: “For three transgressions of Israel, and for four, I will not revoke the punishment” (Amos 2:6)

 

하나님 아버지,

새해 첫 달을 보내면서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정한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5이-메일 목회 서신)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새해에는 연초부터 권사님들은 물론 아기들까지 강력한 독감으로 혼쭐이 나셨습니다. 독감 예방 주사와 상관없이 찾아온 이번 독감은 폐렴을 의심할 정도의 기침을 동반했습니다. 꼼짝 못하시고 며칠을 누워 계셔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독감 예방 주사에 포함된 백신이 이번 독감을 막아주지 못했답니다. 전문가들이 지구촌에서 이미 유행한 독감을 분석해서 예방 주사를 만들지만, 매사가 그렇듯이 앞 일에 적중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참빛 식구들께서 거의 회복단계로 접어드신 것 같아서 감사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올해 표어에 맞춰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배웠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매사에 충성을 다해야 할 이유입니다. 또한, 작은 일은 시시하고 하찮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작은 일도 귀하게 여기심을 배웠습니다.

 

첫 시간에는 시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작은 일은 “정한 마음” “정직한 영” “상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자신이 관심 가져야 할 작은 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한 달란트였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겨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하면 큰일입니다.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와 비교해서 한 달란트라고 소홀히 여겨서도 안 됩니다. 행여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다면 게으른 종이라는 비판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챙기고 한 달란트의 의미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세 번째 시간인 오늘은 이웃을 향한 작은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 이어서 등장하는 오늘 본문은 24장부터 시작된 종말에 대한 말씀의 결론부입니다. 달란트 비유가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교훈이라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성도들은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목마르실 때 마실 것을 주었고,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으며,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세상에서 아주 작은 한 사람에게 베푼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베푼 선행입니다. 반면, 악한 자들은 예수님을 모른 체했습니다. 선한 일을 한 성도들과 달리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어려운 이웃도 있고, 우리 자신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이웃도 있습니다. 올 한해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우리 주변의 작은 이웃을 섬기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