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되새기면서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말 그대로 고난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조롱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저항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하시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신 희생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6세기 일본에 복음이 전해지던 시대를 배경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이 목숨 걸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그렸습니다. 박해가 심해지면서 선교사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배교할 정도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핍박을 피해서 외딴섬을 옮겨 다니면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그래도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은혜와 하늘나라를 향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판명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위험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쉬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판자를 밟으면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살아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밟았지만, 십자가에 침을 뱉으라는 요구에 불복해서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금방 숨을 거두었지만, 며칠을 십자가에 매달려서 파도와 싸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나는 하나님 나라로 간다네” 찬송하면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서 장엄하게 순교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과연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살아남은 자들을 무조건 배신자라고 몰아칠 수 있는지, 핍박과 순교의 시대에 하나님의 침묵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등 수많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신앙을 어느 한 가지로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음도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우쳐줍니다.

 

소설의 제목 <침묵>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목숨을 잃는데도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보고만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 그 답을 줍니다:“나는 너희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을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쉽게 말하고 쉽게 결심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신앙과 동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자초한 어려움을 두고 자기 십자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멈춰서 생각해보면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은 어렵고 고민스러운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나서자마자 부딪치는 질문과 문제, 그리고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말을 섣불리 입 밖에 내기 어렵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결국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솔직한 고백이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대로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 같은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주의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진정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믿음과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2018년 3월 29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예수 그리스도 (5)

기독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 한가운데 모시고 신앙과 삶의 축으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세로 목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갑니다. 십자가의 가로 목을 통해서 이웃에게 나갑니다. 세로 목과 가로 목이 만나는 한 가운데 우리가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아담 이래 모든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깊이 뿌리내린 악의 속성을 해결해 주신 승리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얽어 매고 있는 죄의 속박을 풀어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갚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고 했으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막혀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이어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통로가 열렸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능해진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사소해 보이고,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신앙의 가치를 잊고 지낼 때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가 예수님의 목숨과 맞바꾼 값비싼 것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십자가 위에 우리의 교만한 자아와 집착하는 욕심, 시기와 질투를 못박고 예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매일같이 십자가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께 나갑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를 누립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잔재가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셨기에 우리의 악한 속성이 뿌리내렸던 죄에서 단절되었습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고리가 끊겼기에,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죽음의 세력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와 사랑을 세상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붙잡고 승리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하나님의 속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수요예배에서는

마가복음을 마치고 다시 예레미야로 돌아와서

후반부를 읽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크게 1-25장과

26-52장으로 나누어 집니다.

 

전반부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레미야의 예언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식이고 문체는 대개 시어체로 쓰였습니다.

후반부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선지자의 삶을 통해서 전합니다.

예레미야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정도입니다.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을 흠뻑 느낄 수 있습니다.

 

50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다윗 왕조가 막을 내리는 순간에

눈물로 예언한 말씀이기에 만만히 읽을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식이어서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2.

그런데 이번 수요일부터 읽기 시작한

예레미야 30-33장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무 조건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상한 곳에서 새로운 살이 돋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등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향해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망가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십니다.

 

다음 주에 살펴볼 31장에 가면

새로운 언약을 선포하시면서

모세 시대처럼 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새겨 주시겠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31:33)

But this is the covenant that I will make with the house of Israel after those days, declares the LORD:

I will put my law within them, and I will write it on their hearts. And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shall be my people.(Jer 31:33)

 

 

3.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죄의 고발과 심판의 말씀 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위로, 용서, 치유와 소망의 말씀이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저는 예레미야서의 구조를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속마음을 느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물으셨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속마음은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아무 조건 없이

다시금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속마음,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이 넘치길 원합니다.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렘30:19)

Out of them shall come songs of thanksgiving,

and the voices of those who celebrate.

I will multiply them, and they shall not be few;

I will make them honored, and they shall not be small. (Jer 30:19)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로 사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주의 은혜에 감사하는 참빛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22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 그리스도 (4)

부활절이 두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절기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셨기에 탄생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태양신의 생일로 섬기던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대체한 것이 성탄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에 비교해서 부활절은 유대인들이 지키던 유월절과 맞물린 정확한 시간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을 고려하면 부활절의 시간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독교의 역사성이 확증됩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는 부활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의 실명이 등장하는 것도,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했음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사람이 빌라도였기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지만, 빌라도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주후 26-36년까지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실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영적인 것으로 변질시키려는 그릇된 시도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변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빠진 세상을 구하러 오신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도 믿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죄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1장 22-23절에서는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을 저주받은 죽음으로 규정하고 그 날에 장례를 지낼 것을 명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로마 시대의 형틀이었습니다. 반역이나 중한 죄를 지은 죄인들을 처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전통에 의하면 저주받은 사람이 죽는 나무 위에서 그리고 로마 시대에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제물로 드려진 어린양처럼 세상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면서 예고하신 구원에 대한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사순절 막바지를 보내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 원합니다. -河-

보잘것 없더라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에서는

구약성경 학개서를 읽었습니다.

 

스가랴와 말라기만 읽으면

구약을 모두 통독하고 신약성경에 접어듭니다.

새벽에 한 장씩 읽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구약의 끝에 왔습니다.

지루한 예언서 읽기였지만, 쉼 없이 꾸준히 읽은 결과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우리식으로 하면

8월 말부터 12월까지 (성경에서는 여섯째 달부터 아홉째 달)

석 달 정도만 활동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자신의 집을 짓는 등

하나님보다 자기를 먼저 챙기고,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힘을 합쳐서 성전 건축을 끝낼 것을 권면 했습니다.

 

70년이라는 포로 생활을 경험하고 고향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 선지자의 예언에 감동받고 서둘러 성전건축을 마무리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이은 두 번째 성전입니다.

 

그런데 레바논산 수입 백향목과 금과 은으로 지은 솔로몬 성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백성들이 산에서 나무를 갖다가 지었으니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학개 선지자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을 불러내서

이제 막 완공된 두 번째 성전에 관해서 묻습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학개 2:3)

Who is left among you who saw this house in its former glory?

How do you see it now? Is it not as nothing in your eyes? (Haggai 2:3)

 

 

실제로 보잘것없는 성전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아예 “아무것도 아님(nothing)”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원로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스룹바벨 총독, 여호수아 대제사장, 그리고 모든 백성에게

스스로 강하게 할지어다 (Be strong)”라고 권면합니다.

아무것도 아닐 만큼 초라한 성전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2.

올해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표어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연초에 교회 표어를 설교하면서 작은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 말 그대로 하찮고 작은 일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

–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일.

 

실적주의, 자기 자랑, 겉치레 등이 중요한 시대에 살다 보니

작은 일에 충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무언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보잘것없을 수 있습니다.

또한,자신이 해놓은 일을 바라보면

아쉬움이 밀려오고 초라해 보이곤 합니다.

 

그때 학개 선지자의 위로와 권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 속에도 함께 하십니다.

행여나 보잘것없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이라 (학개 2:4)

Be strong, work, for I am with you (Haggai 2: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스스로 굳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15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 그리스도 (3)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을 확인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 전능하심, 창조주”로 정리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요약했습니다. 각각 세 가지 덕목으로 정리한 것을 보면서 사도신경이 우리 신앙의 첫단추요 시작점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사도신경을 시작으로 우리의 신앙이 더욱 풍성해 지고 삼위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깊어지길 바랍니다.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게 등장했고, 이단들도 생기면서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믿는 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구세주(그리스도, 메시아)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탄생부터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다시 오실 재림까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강조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됨으로 세상에 오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서 “전능하심”과 연결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전능하시고, 그의 아들에게 일어난 모든 사역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는지를 인간의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대신에 “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은 역설적이지만 죄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5장에서는 한 사람 아담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서 온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를 없애고 죽음에서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시면, 죄를 벗어날 수 없기에 성령으로 나심으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보혈로 우리의 죄를 없애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셨습니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죄가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을 회복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완벽한 사역에 참여하고, 우리 역시 죄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주님은 나의 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110번째 맞는

UN이 정한 여성의 날입니다.

지금은 여성의 인권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110년 전 여성의 날을 제정할 때는

여성의 노동 착취는 물론 투표권도 보장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동안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불이익,

미투(Me too)운동에서 보듯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

학창시절 햄릿을 배울 때,

교수님은 한 문단을 외워서 쓰는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대부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문단을 택했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햄릿에 유명한 구절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가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차별하기 위해서 그즈음을 외워볼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햄릿이

아버지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숙부의 품에 안긴 자기 어머니를 두고 한 말이기에 얼른 포기했습니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 햄릿이 세상에 끼친 영향이 꽤 큽니다.

마치 모든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처럼 “약하다”는 편견을 심어주었다면

여성의 날을 맞아서 셰익스피어도 사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많습니다.

중요한 사안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3.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창세기 1장에서 선포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여성(레헴)”으로 설명하고,

잠언의 지혜도 여성명사이고,

심지어 히브리어의 성령도 여성명사입니다.

 

사사 시대에는 여성 사사 드보라가 있었고,

예수님도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요셉의 역할은 없지요)

열두제자들이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현장과 무덤에 향료를 갖고 갔던 사람도 여성입니다.

 

종종 바울 서신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 등을 갖고

여성의 지위에 제동을 거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 본문을 문맥을 따라 자세히 읽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올바로 해석해야 합니다.

 

4.

미국에 와서 구약 성경의 <아가서>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교수님은 아가서에서 한 문단을 정해서

자기 사무실에 와서 암송하라고 했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피부 색깔이 검은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이 남녀의 사랑만큼

친밀하고 은밀해야 함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때 저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고백을 암송했습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가서 2:10-12)

 

여성의 날 110주년을 맞아서

그동안 여성들 위에 드리웠던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치고

꽃피는 봄날이 오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똑같이 봄날이 찾아오길 원하면서

오늘 새벽에 읽은 하박국 3장 19절 말씀을 나눕니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사슴” 역시 여성명사입니다.

 

하나님은 여성들을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3:19)

GOD, the Lord, is my strength; he makes my feet like the deer’s;

he makes me tread on my high places.(Habbakuk 3:19)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존중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8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