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 (4): 긍휼/ 누가복음 19장 41-44절
예수님의 마음 (4): 긍휼/ 누가복음 19장 41-44절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세 번 정도 우셨습니다. 첫 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나사로의 오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우십니다(요11:35). 조금 지나면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께서 나사로 친지들의 슬픔에 동참하신 모습이 의외입니다. 하지만,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성전과 도시를 보고 우셨습니다(눅19:41-44).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운 예루살렘의 망가진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평화의 일”을 언급하십니다. 단지 분열과 갈등, 다툼을 넘어서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찾아오는 진정한 샬롬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지만, 진정 종교를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인데,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입니다(눅22:43-44). 성경 본문에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눅22:42)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비탄에 젖어 있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우시면서 기도하셨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구약성경의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달되는 구절은 창세기 6장 6절입니다:”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한탄하신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함>은 후회하셨다는 뜻입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심은 애통에 가까운 비통한 마음입니다. 한탄하셨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자식을 보면서 어머니가 한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져 사는 인류를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소리는 내지 않으셨지만, 속으로 우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악함과 반역을 보면서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립니다:“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9:1). 예레미야의 마르지 않고 흐르는 눈물은 곧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함 앞에서, 사랑하는 자를 잃는 슬픔 앞에서, 하나님 백성의 그릇됨 앞에서 하나님도 우셨고,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10월 19일 주일 오전 9시 30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매해 8백만 명 이상이 방문합니다.
예약하지 않고는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문을 열자마자 수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곳입니다.
철저한 보안이나 경비는 필수입니다.
그런데, 박물관이 문을 열고 30분이 지난
휴일 아침 9시 30분에 도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네 명의 범인은
박물관을 보수 중인 인부처럼 형광색 조끼를 입고
사다리차를 이용해서 귀중품들이 전시된 아폴로관으로 침투해서
전시해 놓은 유리 진열장을 부수고
나폴레옹이 왕비에게 선물한 사파이어 목걸이를 비롯한
귀중품 아홉 점을 훔친 후,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스쿠터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들이 도난에 필요한 시간은 7분 내외였습니다.
도둑들이 훔친 귀중품들은 값을 매길 수 문화유산입니다.
대략 1억 달러로 추산합니다.
두 명은 잡혔는데, 훔쳐 간 귀중품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밤중이나 새벽도 아닌
대낮에 세계 최고의 루브르 박물관이 도난당한 것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이번만 도난 사건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1912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모나리자가 이탈리아 출신 인부에 의해서 도난당했다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 도난사건 후에
귀중품이 전시되어 있던 아폴로관에
더 많은 관람객들이 몰린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2.
세우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쉽습니다.
철저하게 대비하고 지키지 않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 때가 많습니다.
대낮에 발생한 루브르 박물관 도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도둑들의 박물관 침입, 탈취와 도주까지 모든 과정은
영화 같은 극적인 장면도 없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성능이 떨어진 CCTV가 설치되었다는
박물관 책임자의 변명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파숫군의 밤샘 지킴이 헛되다는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물론 철저히 준비해야 하지만,
마음먹고 달려드니 세계 최고의 박물관도 털리니 말입니다.
새달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 조심조심 새달을 시작합니다.
기도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낮의 해가 상하지 않고
밤의 달이 해치지 않도록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신실하게 새달을 살기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편 1절)
하나님,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6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마음(3): 긍휼/ 마가복음 8장 1-8절
이번주에도 헨리 나우웬의 책 <긍휼>에서 예수님의 긍휼을 설명한 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나우웬은 책 결론부에서 긍휼의 삶을 감사와 연결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때, 예수님의 긍휼을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 있는 악과 맞대결하는 것이든 선을 지지하는 것이든 간에, 훈련된 행동의 특징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분노는 우리를 적극적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우리 안에 많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1960년대 분노에 근거해서 열심히 활동했던 사회 활동가들은 곧 탈진하고 말았다. 종종 그들은 신체적 탈진과 정신적 탈진 상태에 이르는 바람에 심리 치료나 ‘새로운 영성’이 필요할 지경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성공이 없는 상황을 꾸준히 견뎌내기 위해서는 감사의 정신이 필요하다.
분노에 찬 행동은 상처받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반면, 감사에 찬 행동은 치유받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분노에 찬 행동은 취하고 싶어하나, 감사에 찬 행동은 나눠 주고 싶어 한다. 감사야말로 그 행동이 인내의 한 부분으로서 취해진 행동이라는 표시다. 그것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복하거나 파괴하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므로 긍휼 어린 삶이란 감사하는 삶이며,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은 강제적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음침하지 않고 즐거우며, 광신적이지 않고 자유케 해주는 것이다. 감사가 행동의 근거가 될 때, 우리가 주는 것은 받는 것이 되며, 우리가 사역하는 대상은 우리에게 사역자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가운데 우리를 돌보는 존재를 감지하고, 우리의 노력 가운데서 우리를 격려하는 후원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늘 즐겁고 평화로울 수 있다. 내세울 만한 성공담이 별로 없을 때조차 말이다.
요한, 베드로, 바울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가지고 당시 세계를 ‘정복했던’ 그 엄청난 에너지는 바로 그 만남[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자신이나 서로에게 굳이 확신시켜 줄 필요가 없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의 가치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이 없기 때문이며, 자기들의 행동의 적실성에 대해서도 주저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분을 칭송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일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보고 만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생명이요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요 그들의 진정한 사랑이 되셨기 때문에, 삶은 곧 행동이 되었고 삶의 모든 것은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성물에 대한 지속적인 감사의 표현이 되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에 살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가 ‘팁(tip)’입니다.
팁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하고
팁이 없는 한국에 가면 뭔가 허전할 정도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팁플레이션(tipflation)”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아진 팁입니다.
27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보통 감사의 표시로 5-10%의 팁을 주었기에
팁이 부담되지 않았습니다.
커피처럼 간단한 것을 살 때는
특별한 서비스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팁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즘 우리 동네에서는 18-25%의 팁이 계산기에 찍혀 나옵니다.
간단한 것을 사도 자동으로 팁을 줄 것인지 물어보니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큰 부담입니다.
2.
팁의 유래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팁이 미국의 유일한 전통인 줄 알고 있었는데
16-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었답니다.
귀족들이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이 시작이랍니다.
영국의 선술집에서
TIP(to insure promptitude)이라고 쓰인 통에 돈을 넣으면
빠른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전통에서
TIP이라는 용어가 나왔다고 봅니다.
유럽을 방문했던 미국인들이
팁을 주는 사람은 뭔가 있어 보이고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을 도왔다는 자부심도 들어서
미국에 도입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이 되면서
팁은 석방된 노예들의 임금을 보장해 주는 데 이용됩니다.
주인들이 따로 임금을 주지 않으니
종업원들은 팁으로 먹고살아야 했습니다.
약간 서글픈 미국식 팁의 역사입니다.
3.
미국 연방 정부에서는
팁을 받는 종업원의 최소 임금을 $2.13으로 규정하고
팁 수입이 적으면 고용주가 $5.15의 크레딧을 주어서
최소 임금 $7.25를 맞춰야 합니다. 그리 높지 않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연방 정부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습니다.
무조건 캘리포니아(또는 각 카운티나 시) 최소 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현재 $16.50입니다. 팁은 종업원들에게 그대로 돌아갑니다.
연방 정부 가이드라인에 비하면 꽤- 파격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법률이나 규정이 많이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좋은 전통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에게
따로 임금을 주지 않고 팁으로 먹고살게 했다는
팁의 역사가 씁쓸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많은 것에 특별한 역사가 있습니다.
힘없는 민초들의 서러움과 눈물이 베어 있기도 합니다.
불평하거나 무작정 반대하기보다
세심하게 살피고,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원합니다.
p.s.
요즘 팁의 비율이 너무 높습니다.
현실적으로 조정되거나,
팁에 걸맞은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받아서
팁이 아깝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Whatever you wish that others would do to you, do also to them (Mt 7:12)
하나님,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세상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30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마음 (2): 긍휼/ 마태 9장 27-31절
예수님의 마음을 대표하는 단어는 “긍휼(compassion)”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나인성 과부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는 시각 장애인 두 사람이 은혜와 치유를 경험한 사건을 배웁니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헨리 나우웬의 책에서 예수님의 긍휼을 설명한 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라는 헬라어 동사는 이 표현이 얼마나 심오하고 강력한 것인지 보여 준다. ‘스플랑크나(splangchna)는 몸의 내장, 오늘날 우리가 하는 말로 ‘뱃속(gut)’을 가리킨다. 이곳은 가장 친밀하고도 강렬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강렬한 사랑과 강렬한 미움이 커 가는 중심 장소이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긍휼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분의 뱃속(내장)이 움직였다고 표현할 때는 무언가 아주 깊고 신비스러운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느끼신 긍휼은 피상적이거나 스쳐 지나가듯이 느끼는 슬픔 혹은 동정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rachamim)’인데 이것은 야훼의 자궁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긍휼이 어찌나 깊고 중심적이며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모든 온유와 친절이 숨어 있으며, 바로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자 어머니가 되신다. 바로 여기서 모든 감정과 열정이 거룩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 예수님의 마음이 긍휼로 움직일 때,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하고 마르지 않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온유하심이 드러난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치유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긍휼을 눈으로 보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자신의 존재 중심으로부터 그들과 한가지로 느끼셨다(마9:36). 예수님은 눈먼 자들, 중풍 병자들, 귀머거리들이 사방에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떠셨고, 마음으로 그들의 고통을 함께 겪으셨다(마14:14). 며칠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천 명이 지치고 배고픈 것을 보시자,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다 (막8:2). 예수님을 부르며 따라갔던 소경 두 명에 대해서도(마9:27),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었던 나병 병자에 대해서도(막1:41) 그리고 외아들을 장사 지내던 나인 성 과부에 대해서도(눅7;13)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예수님은 친밀한 감성으로 그들의 슬픔의 깊이를 느끼셨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은혜 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목사 입장에서는 설교나 예배 후에
“은혜받았습니다”는 말을 들으면 내심 흐뭇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받았다는 것은
종종 감정이 움직였다는 의미로 쓰이곤 합니다.
설교를 비롯한 예배 시간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뜨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감정과 연결하다 보니
기복이 심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주관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 동하지 않거나 자기 확증이 되지 않으면,
좋은 말씀이나 예배조차 ‘은혜’로 느끼지 못합니다.
2.
저는 ‘은혜받았다’는 표현을
‘깨달음’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말씀에
커다란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예배나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감정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감정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입니다.
때로는 낯설거나 불편한 말씀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큰 깨달음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거듭 나게 하고,
세상을 보는 가치관을 바꿉니다.
새로운 세상에 들어서는 경험입니다.
3.
지난주에 제가 존경하던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이라는
여성 구약학자께서 92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90년 중반 신학교 시절, 트리블 교수님의 저서
<공포의 텍스트, Text and Terror>를 처음 읽었습니다.
100쪽 남짓한 작은 책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제가 무심코 지나쳤던
구약 성경의 네 여성(하갈, 다말, 사사기의 어떤 여성, 입다의 딸)에 관한
교수님의 해석에 무릎을 쳤습니다.
그동안 저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하찮은 네 명의 여성에게 얼마나 무관심했고
가부장적인 입장에서 또는 기독교 전통 속에서
이들의 아픔을 지나쳤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위해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을 새롭게 뜰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성경 본문 자체에 집중하면서,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가르쳐 준 ‘교과서(text)’였습니다.
트리블 교수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책꽂이에서 교수님의 책을 꺼내서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곳곳에 밑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흔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는
깨달음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창 21:19)
하나님,
눈을 밝히셔서 깨달음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23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생각에 이어서 오늘부터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마음 한 가운데 “긍휼(compassion, 불쌍히 여기심)”이 있습니다. 긍휼은 또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마음속에도 긍휼이 있습니다. 이처럼 긍휼은 삼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긍휼>이라는 책에서 옮겨온 글을 나누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긍휼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는 스스로를 긍휼 어린 사람,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선하고 온화하며 이해심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대체로 긍휼을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가난한 노인이나 굶주린 어린아이, 혹은 전신이 마비된 군인이나 겁에 질린 여자아이를 보고 긍휼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명백한 인간의 속성 중에서 긍휼을 제외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긍휼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우리는 마음 깊이 상처를 받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는 인간 답다는 것과 긍휼이 많다는 것을 즉각 동일시한다. 긍휼 없는 인간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 답다는 것과 긍휼이 많다는 것이 동일하다면, 왜 인류는 갈등과 전쟁, 미움과 억압으로 찢겨 있는가? 그리고 왜 우리들 가운데는 기아와 추위 때문에, 혹은 쉼터가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단 말인가? 또 왜 우리는 인종적, 종교적 차이로 인해서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는가?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소외와 분열 혹은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서로 상처 주고 괴롭히고 죽인단 말인가? 세상은 왜 이리도 혼란스럽단 말인가?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긍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긍휼을 뜻하는 영어 단어(compassion)는 라틴어 ‘파티’(pati 고통)와 ‘쿰’(cum 함께)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받다’라는 의미가 된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 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 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을 생각하면, 긍휼에는 평범한 친절이나 부드러운 마음씨 이상의 것이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