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명의 떡이라

에고 에이미 (1)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일곱 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나는…I am)”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소개하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표적(sign)과 함께 하나님에게서 오신 예수님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7주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설명하시는 요한복음의 “에고 에이미”를 한 가지씩 살펴볼 예정입니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출3:14)라고 하신 것과 맞물립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에고 에이미”는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 6:35)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71절이나 되는 매우 긴 말씀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부릅니다. 기적이 뜻하는 의미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기적에 이어서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말씀(해설)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빈 들에서 어린아이가 갖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니 모두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먹거리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신기한 물(magic water)을 구한 것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신기한 떡(magic bread)을 얻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리를 뜨십니다.

 

이튿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을 주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그리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백성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먹고 마시는 것, 즉 세상의 물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생각 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셔서 백성들을 살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그를 믿는 자를 위해서 내주시는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河-

진실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읽는 에스겔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고 쫓는 것)와

진실을 버린 모습을 질타합니다.

 

에스겔서뿐만 아니라

구약 예언서에서 알려주는 네 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진실(에메트), 정의(미쉬파트), 공의(차디카), 인애(헤세드)입니다.

 

진실은 거짓이 없는

솔직함입니다. 정직함입니다.

숨기는 것이 없고, 꾸미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솔직한 모습으로

심지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갑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이웃과 다른 사람 앞에서

숨김없이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진실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진실은

그 다음 세 가지 덕목의 기초가 됩니다.

정의는 거짓 재판을 없애고, 공평하게 판정하는 것입니다.

약자의 편에 서면 진실과 정의는 실천됩니다.

공의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똑바로 정돈된 상태입니다.

하늘 향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함이 곧 공의입니다.

진실이 빠진 인애(사랑)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 곧 참사랑입니다.

 

2.

요즘 세상은 진실이 많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가짜가 판을 칩니다. 거짓말이 진실을 덮고 있습니다.

유튜브 쇼트가 자꾸 올라오는데,

진짜 같은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자연재해도 가짜로 만들어서 올리는데

진짜 같아서 깜빡 속을 때도 있습니다.

 

가짜 정보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가짜일수록 화려하고 그럴듯하기에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귀를 속이고

심지어 마음과 생각을 속입니다.

 

AI가 발달하면서,

진짜 같은 가짜가 더욱 많아질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가 매의 눈을 갖고 살피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진실하길 원합니다.

참됨이 거짓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 없기를 바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흠과 티가 많아서 주름이 깊어도

솔직하길 원합니다.

 

생명과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목에 매며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3:3-4)

 

하나님,

진리가 승리하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21. 이-메일 목회 서신)

강하고 담대하라 (6)

시편 27편을 통해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정확한 확인은 어렵지만, 체로키 인디언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우리 마음에는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쁜 늑대는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열등감 좌절을 가져다주고, 선한 늑대는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겸손함 관대함 신뢰를 선물한다고 했습니다. 손자가 두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의 현명한 대답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틈틈이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지 점검했고,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오면 제가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었음을 반성했습니다. 매우 현실적인 지혜였습니다.

 

팔로 알토에서 목회했던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님의 <하나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계십니다(God is closer than you think)>는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느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여기서 목소리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일까지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재정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부자들을 질투하고 자신의 삶을 비관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어려운 중에도 감사를 잃지 않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냅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명예를 위해서 권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을 부려 먹습니다. 다른 사람은 동료들의 만족과 성장을 위해서 함께 노력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교훈입니다.

 

오트버그 목사님은 실존 인물이었던 존 내쉬(John Nash)의 인생을 소재로 삼은 “뷰티플 마인드(A Beautiful Mind)”라는 영화도 소개합니다. 피해망상증을 앓았던 주인공은 있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하고, 두려움에 떨며 살아갑니다. 수학자였던 내쉬가 국방부의 군사 작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데, 누군가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정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가운데서도, 좋은 말을 듣고 좋은 생각을 하면서 이뤄낸 업적이었습니다.

 

오트버그 목사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뷰티플 마인드가 꼭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경청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라고 답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 때 마음과 생각이 변화됩니다. 우리에게 “뷰티플 마인드”가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강을 누릴 때입니다(롬8:6).-河-

완벽함 넘어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11일 The New Yorker라는 잡지에

“완벽주의의 고통(The Pain of Perfectionism)”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완벽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완벽주의는 의기소침이나 절망감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소화불량이나 통증처럼 몸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심리학자 프렛(Frett)과 휴잇(Hewitt)은

완벽주의를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1) 자기 자신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

2) 타인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

3) 사회가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한다고 느끼는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는

완벽을 위해서 쉬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자기 안에 작은 단점이라도 발견되거나,

무심코 실수해도 자신을 탓하고 심한 우울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한시도 편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잔혹하고 지루한 독백자”라고 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완벽주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삽니다.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는 더 큰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완벽을 요구하고,

불완전함이 드러나면 참지 못하고 벌을 주거나 화를 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완벽을 요구하면,

결혼생활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을 자기 마음에 맞추려고 하니

스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는

소셜 미디어가 유행하고 서로를 비교하기 쉬운 요즘 세상에서,

자신만의 개성과 삶을 찾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세상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춰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2.

평생 완벽주의를 연구한 프렛과 휴잇은

완벽주의를 버리고 “존재의 가치(mattering)”에 집중할 것을 제안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완벽주의는 어떤 일을 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존재의 가치는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귀한 겁니다. 내가 자랑스러운 겁니다.

 

완벽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단순히 기준을 낮추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준만 낮췄을 뿐 여전히 완벽주의에 얽매일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 결함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부족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기사를 읽으면서,

요즘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했습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다가 42세에 생을 마감한 예도 있었거든요.

 

존재의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더욱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완벽주의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완벽주의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갑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Come to me, all who labo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Mat 11:28)

 

하나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14. 이-메일 목회 서신)

강하고 담대하라 (5)

시편 27편 14절

 

“강하고 담대하라”는 주제로 시편 27편을 공부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시편 27편은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을 생각하면서 시편 27편을 읽었습니다.

 

특별히 원수들과 대적들이 쳐들어와서 진을 치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2절)는 구절에서 다윗의 목숨이 위태로움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절)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처럼 시편 27편 속의 다윗은 강하고 담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적군들이 실족해서 넘어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군대가 전쟁을 일으켜도 두렵지 않고 차라리 태연했습니다. 자신감을 잃지 않고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전에 있는 것을 최고의 소원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두렵지 않고 도리어 평안하다는 확신입니다.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은밀히 숨겨 주시고, 적군들이 물러가면 바위 위에 세워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보다 다윗의 머리를 높이 드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도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소리 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긍휼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얼굴을 찾으라”(8절) 하실 때에 제일 먼저 달려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행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얼굴을 숨기시고, 다윗을 떠나시고 버릴 것이 두려워서 끝까지 함께 해 주시길 애원했습니다. 부모는 버려도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언제든지 자기를 맞아 주신다고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신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배울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태평양 바다만큼 크고 넓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늘 배우려는 마음가짐을 갖고 살았습니다. 수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평탄한 길로 인도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다윗의 믿음과 상관없이 그의 인생길이 어려우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3절)는 고백에 힘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행하시는 최후 승리를 믿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각자의 삶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시편 27편의 첫 구절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구절도 힘이 있습니다:“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河-

 

낯설게 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8월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여러 가지 특별한 일이 많았습니다.

한 달, 한 주간, 어떤 때는 하루의 삶이

우여곡절일 때도 있었습니다.

다이내믹한 우리의 삶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일상을 삽니다.

밋밋한 인생길의 반복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침 기도와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녁에 침대 앞에서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까지

매일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다이내믹한 인생길이거나

반복되는 일상이거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반복되고 예사로운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순간순간이 의미 있고 창의적인 “카이로스”를 삽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도서에서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도

특별한 시간, 카이로스를 살라는 부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억지로 새로운 일을 꾸며서 해보지만,

그것도 금세 식상하고 맙니다.

 

2.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문학 용어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작가는 지루한 일상의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문학 기법을 익혀야 하고,

독자들 역시 문학 작품 속에 깃든 낯선 요소들을 찾아내서

문학 작품을 만끽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문학 용어인 ‘낯설게 하기’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거나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새로움’을 발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삶의 ‘설렘’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새롭고 특별하고 낯설게 대하는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일을 “그냥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특별한 의미를 찾고,

때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진부한 것(cliché)이 아니라

그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으로 받고 읽는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족’이라는 말이

특별하지 않은 익숙한 사람이라는

밋밋한 의미로 쓰일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만나는 가족을(친한 이웃들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면

호기심도 생기고, 기대도 커지고

무엇보다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출 것입니다.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을

새롭게, 낯설게 만들면서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애가 3:23)

 

 

하나님,

다시 오지 않을 새날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강하고 담대하라 (4)

시편 27편 11-13절

 

과학 문명의 발달 덕분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편리해졌습니다. 수십 년 전 공상 과학 영화에서 보던 것들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운전자 없이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누비는 자율 자동차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을 닮은 로봇도 등장했습니다. 드론이 전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놀라운 발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과학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예전의 삶이 더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8년 연속 핀란드가 차지했습니다. 사회복지가 잘된 북유럽 국가들이 언제나 상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본 소득이 보장되니 미국이나 한국보다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2025년 조사에서 한국은 58위, 미국은 24위를 차지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나라의 국민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불안 지수도 높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달고 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베이 지역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처세에 대한 책들이나 유튜브 등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 정신 승리를 강조합니다. 비우는 것을 강조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야망을 내려놓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솔직한 고민입니다.

 

그동안 함께 나눈 시편 27편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절)로 시작해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절)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편 27편은 강하고 담대해지는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강하고 담대할 힘이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인정한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자연스레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시편 27편의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3절)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도 있습니다. 말씀대로 강하고 담대합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길에 서야 합니다. 그때 임하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의뢰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기를 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받아주신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시고, 결국에는 높은 바위 위에 세울 것이라는 믿음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