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담대하라 (5)

시편 27편 14절

 

“강하고 담대하라”는 주제로 시편 27편을 공부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시편 27편은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을 생각하면서 시편 27편을 읽었습니다.

 

특별히 원수들과 대적들이 쳐들어와서 진을 치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2절)는 구절에서 다윗의 목숨이 위태로움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절)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처럼 시편 27편 속의 다윗은 강하고 담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적군들이 실족해서 넘어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군대가 전쟁을 일으켜도 두렵지 않고 차라리 태연했습니다. 자신감을 잃지 않고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전에 있는 것을 최고의 소원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두렵지 않고 도리어 평안하다는 확신입니다.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은밀히 숨겨 주시고, 적군들이 물러가면 바위 위에 세워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보다 다윗의 머리를 높이 드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도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소리 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긍휼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얼굴을 찾으라”(8절) 하실 때에 제일 먼저 달려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행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얼굴을 숨기시고, 다윗을 떠나시고 버릴 것이 두려워서 끝까지 함께 해 주시길 애원했습니다. 부모는 버려도 하나님은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언제든지 자기를 맞아 주신다고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신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배울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태평양 바다만큼 크고 넓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늘 배우려는 마음가짐을 갖고 살았습니다. 수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평탄한 길로 인도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다윗의 믿음과 상관없이 그의 인생길이 어려우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3절)는 고백에 힘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행하시는 최후 승리를 믿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각자의 삶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시편 27편의 첫 구절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구절도 힘이 있습니다:“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河-

 

낯설게 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8월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여러 가지 특별한 일이 많았습니다.

한 달, 한 주간, 어떤 때는 하루의 삶이

우여곡절일 때도 있었습니다.

다이내믹한 우리의 삶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일상을 삽니다.

밋밋한 인생길의 반복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침 기도와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녁에 침대 앞에서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까지

매일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다이내믹한 인생길이거나

반복되는 일상이거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반복되고 예사로운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순간순간이 의미 있고 창의적인 “카이로스”를 삽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도서에서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도

특별한 시간, 카이로스를 살라는 부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억지로 새로운 일을 꾸며서 해보지만,

그것도 금세 식상하고 맙니다.

 

2.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문학 용어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작가는 지루한 일상의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문학 기법을 익혀야 하고,

독자들 역시 문학 작품 속에 깃든 낯선 요소들을 찾아내서

문학 작품을 만끽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문학 용어인 ‘낯설게 하기’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거나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새로움’을 발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삶의 ‘설렘’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새롭고 특별하고 낯설게 대하는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일을 “그냥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특별한 의미를 찾고,

때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진부한 것(cliché)이 아니라

그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으로 받고 읽는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족’이라는 말이

특별하지 않은 익숙한 사람이라는

밋밋한 의미로 쓰일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만나는 가족을(친한 이웃들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면

호기심도 생기고, 기대도 커지고

무엇보다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출 것입니다.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을

새롭게, 낯설게 만들면서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애가 3:23)

 

 

하나님,

다시 오지 않을 새날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강하고 담대하라 (4)

시편 27편 11-13절

 

과학 문명의 발달 덕분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편리해졌습니다. 수십 년 전 공상 과학 영화에서 보던 것들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운전자 없이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누비는 자율 자동차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을 닮은 로봇도 등장했습니다. 드론이 전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놀라운 발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과학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예전의 삶이 더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8년 연속 핀란드가 차지했습니다. 사회복지가 잘된 북유럽 국가들이 언제나 상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본 소득이 보장되니 미국이나 한국보다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2025년 조사에서 한국은 58위, 미국은 24위를 차지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나라의 국민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불안 지수도 높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달고 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베이 지역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처세에 대한 책들이나 유튜브 등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 정신 승리를 강조합니다. 비우는 것을 강조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야망을 내려놓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솔직한 고민입니다.

 

그동안 함께 나눈 시편 27편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절)로 시작해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절)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편 27편은 강하고 담대해지는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강하고 담대할 힘이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인정한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자연스레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시편 27편의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3절)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도 있습니다. 말씀대로 강하고 담대합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길에 서야 합니다. 그때 임하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의뢰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기를 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받아주신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시고, 결국에는 높은 바위 위에 세울 것이라는 믿음입니다.-河-

변화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월스트리트저널(The Wal Street Journal)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사용하는 교과서 가운데 열 개를 특정해서

30년 전과 거의 동일하다는 보도였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스콧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등입니다.

 

저자나 제목을 보면

30년 동안 교과서 목록에 들기에 손색이 없는

말 그대로 고전들입니다.

 

그런데 보도에 의하면,

시대가 바뀌었고 좋은 작품도 많이 있지만,

교과서를 바꾸는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까다롭답니다.

그래서 30년 동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신문 기사에서는 몇 가지 문제도 제기했습니다.

미국 공립 학교에서 백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44%로 떨어졌는데,

상위 10권의 교과서에 속한 저자들이 모두 백인이라고 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의 독서 참여율이 뚝-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2023년 기준으로 13세 이상 학생들의 일일 독서 참여율은 13%에 불과합니다.

2012년의 27%, 1984년의 35%에 비해서 현저히 줄었습니다.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책을 읽는 학생들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학생들이 30년 전에 교과서에 편입된 고전을

재미있게 읽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학생들의 독서를 위해서

유연한 도서 목록의 변화를 요청했습니다.

 

2.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고,

변해야 할 것은 멈춰 있는 아이러니도 발생합니다.

 

시대를 따라가는 것이 바른 것인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 대로

시대의 변화에 상관없이 옛것을 소중히 보관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헷갈릴 때도 많습니다.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분별력이 요청됩니다.

한 가지만 옳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고

옛것은 모두 틀렸다고 내다 버릴 것도 아닙니다.

이 사이에서, 적절한 긴장과 지혜로운 분별이 요청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름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것저것을 번갈아 채택하다 보면

자칫 누더기로 변한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바로 전에 배운 ‘십자가의 신앙(얼 spirit)’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하늘까지 높이 오르기를 원합니다.

이웃을 향해서 양팔을 무한정 뻗어서

많은 사람을 품기 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헷갈릴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잣대를 사용하면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현명하고 꿋꿋하게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시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119:66)

 

 

하나님,

것을 고집하다가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지혜를 지나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31. 이-메일 목회 서신)

 

강하고 담대하라 (3)

시편 27편 7-10절

 

시편 27편에는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지은 시라는 뜻도 있고, 다윗을 위한 시라는 뜻도 있습니다. 전자는 다윗이 직접 지은 시임을 강조하는 해석이고, 후자는 다윗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누군가 다윗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든지 시편 27편은 다윗의 신앙과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별명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다윗이 있고, 다윗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멋진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텐트에 있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게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삼하7:3).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음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시편 27편 속의 다윗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에 걸맞습니다. 원수들과 대적들이 군대처럼 쳐들어왔습니다. 다윗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자신을 숨겨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언젠가 자신을 원수들보다 더 높이 세워주실 것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구원이 되시고,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데 사람이 왜 무섭냐고 담대히 선포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마음에 모신 다윗의 고백이 아름답고 멋집니다. 닮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시편 7-10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넘어서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랑 고백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아이가 큰소리로 “엄마”하고 찾는 것이 생각납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찾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살아가는 공식이었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하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체험한 하나님 사랑에 근거해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7절)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8절)고 하실 때,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8절)라고 진심으로 응답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 일등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의지했습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다윗의 믿음이 부럽습니다. -河-

선지자 에스겔

좋은 아침입니다.

 

1.

<생명의 삶>의 순서에 따라서

아침마다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편의상 순서만 따를 뿐, 제가 묵상한 글을 보내고,

참빛 식구들도 본문을 읽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시길

제안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삶>에 실린 본문 해설이

마치 해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우리만의 성경 읽기입니다.

 

<생명의 삶>을 통한 성경 읽기의 유익은

아침마다 조금씩 읽다 보면

8-9년 마다 성경을 통독한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로 모이지 못했던 2018년부터

<생명의 삶>을 읽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2-3년 후면 우리 모두 성경을 통독하게 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가

모든 참빛 식구들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을 통독하는 것입니다.

이 꿈이 이뤄질 날이 멀지 않았네요!

 

2.

이번 달에 읽기 시작한 본문이

구약성경 에스겔서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읽기가 어렵습니다.

주로 심판 메시지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범한 비슷비슷한 죄들을 지적합니다.

우리와 매우 다른 시대적인 간격도 있고,

아무래도 심판 메시지를 읽는 것이 불편합니다.

에스겔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스겔 (“하나님이 강하게 하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0년 전인 주전 597년에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인 에스겔이

바빌론 그발 강가에서 신비로운 환상을 보면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로 준비하는 과정이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좌우로 누워서 420일을 지냈고,

심판의 말씀이 가득 쓰인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지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에스겔의 몸속에 임하고,

에스겔이 선지자로 완전히 거듭 태어났습니다.

 

3.

에스겔의 예언을 듣게 될 청중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가증하고 완악했습니다. 성전에서도 우상을 섬길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듣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길 부탁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끈질긴 열심입니다.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확률은 “제로(0)”에 가까웠지만,

하나님 말씀은 선포되어야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신앙이나 삶이

허공을 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는 순간입니다.

 

그때도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길을 가야 함을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배웁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몸으로 느끼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3:27)

 

 

하나님,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24. 이-메일 목회 서신)

강하고 담대하라 (2)

시편 27편 4-6절

 

시편 27편을 통해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시편 27편의 처음 세 구절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1절은 시편 27편의 마지막 14절과 함께 시편 27편의 샌드위치 구조를 형성하는 시작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절). 하나님께서 빛과 구원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대상이 없다는 강력한 고백입니다.

 

시편 27편의 상황은 깜깜한 어둠입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달려듭니다. 대적들과 원수들 그리고 진을 치고 있던 군대들도 달려듭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대적들이 스스로 실족해서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하심이 임했습니다. 그러니 시편 기자는 태연합니다. 평안합니다.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했습니다.

 

오늘은 시편 27편 4-6절을 공부하겠습니다. 4절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은 온데간데없고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23편 마지막 절이 생각납니다:“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는 하나님 백성이 누리는 평안이고 자신감입니다.

 

5절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미리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뒤에서 악한 사람이 쫓아오는데 막다른 길을 만났습니다. 꼼짝없이 잡혔는데, 하나님께서 초막 속에 숨겨 주셨습니다. 초막은 앞에서 나온 “여호와의 집”과 함께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광야에서 40년을 지낼 때, 이스라엘은 초막을 짓고 그곳에 법궤를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숨기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특별히 임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적들이 물러가면, 높은 바위 위에 세우실 것을 기대합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피합니다. 바위 위에 세워주실 하나님의 날도 찾아올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하나님 백성의 확신입니다.

 

6절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시편23:5). 원수의 머리보다 시편 기자의 머리가 더 높게 올려질 것입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장막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즐겁게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위 위에 굳게 서고, 원수들보다 높이 올려질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믿음의 힘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