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어둠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무너지고 6백 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70년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페르시아, 헬라, 로마에 이르기까지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중간에 마카비 가문이 독립전쟁에 승리해서 80여 년 동안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지만, 그때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권력다툼이 계속 되었고, 세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스모니안 왕조가 로마에 무너지면서, 이두매(에돔) 사람 헤롯이 로마의 지지 속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헤롯 대왕과 그의 자식들은 로마에 아부하면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세리들을 세워서 지나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 역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가운데 율법을 갖고 서로 다투고, 백성들을 정죄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했지만, 성경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설마’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권력에 취해서 메시아가 오는 것을 반기지 않은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므온과 안나라는 노인과 여자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어디나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둡고 거친 세대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던 백성들에게는 희망을 주었고, 메시아를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일한 왕이 되고 싶었던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어둡고 힘겨운 세상에 메시아가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던 학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서는 천사들이 내려와서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을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주로 오셨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들에 있던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찬양합니다:“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오랜 구원이 성취되는 순간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어지럽습니다. 지구상에는 전쟁에 휩싸인 나라와 민족, 부족이 많습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河-

궂은 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두 주 동안 주말마다

비행기를 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비행기가 3시간 이상 지연되고

엔진 고장으로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안전하게 다녀왔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행기에 승객들의 짐을 싣고,

비행 정비와 안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애틀 공항에는 주말마다 비가 내렸는데

빗속에서 그 궂은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뒤쪽에 있어서

차례를 기다려서 내리다 보면,

앞쪽 승객이 앉았던 곳을

청소하는 분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승객들이 남긴 쓰레기를 모으고

좌석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2.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K자형 모습을 띠고 있답니다.

 

위쪽에 있는 계층은 어려움을 모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반면, K자의 아래에 계신 분들은

예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선, 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미국에서 체류 신분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하루하루 살아내야 합니다.

 

K자의 위쪽 가지보다

아래쪽 가지에 속한 분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자기 의견을 말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히면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어쩌면, 공항에서 궂은일을 하고 계신 분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가는

소위 아래에 속한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3.

궂은일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 없다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예상도 못 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분들이야말로

말없이 세상을 바치고 있는 분들입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분들의 귀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도 한 해를 살면서,

궂은일을 도맡아서 한 적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때로는 직장에서도 말없이 궂은일을 담당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빛이 나지도 않고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참빛 식구들께

칭찬과 찬사를 보냅니다.

 

더불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 일에 종사하고 계신 모든 분을 응원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예수님도 3년 공생애를 사시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일을 하셨습니다.

섬김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인자가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하나님,

궂은 일을 하면서

섬김의 자리에 지키신 참빛 식구들을 축복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8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손과 발 (5)

지난번 안식년 여행에서 이스라엘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전쟁이 아니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33년을 인간의 몸으로 사셨던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서 걷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사역하셨던 갈릴리에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예수님을 깊이 느끼고 싶었는데 다음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갈릴리뿐 아니라 예루살렘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임이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길을 따라서 걸으면 큰 감동과 은혜가 임할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불리는 길이 있습니다. 라틴어 “비아”는 길이라는 뜻이고, “돌로로사”는 슬픔, 고난이라는 뜻이니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재현하였습니다. 14개의 지점을 정해서 순례객들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신 장소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장소까지 600미터에 이르는 길입니다. 18세기 이후에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점에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교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레사>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확정한 곳, 2)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채찍으로 때린 후에 십자가를 지게 한 곳, 3) 십자기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께서 처음 쓰러지신 곳, 4)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 5)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기 시작한 곳, 6)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피와 땀으로 얼룩진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준 곳, 7) 예수님께서 두 번째 쓰러진 곳으로 십자가에 달리실 골고다 언덕 입구로 알려집니다. 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만나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던 곳입니다(눅 23:26-28). 9)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쓰러지신 장소입니다. 나머지 다섯 장소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골고다와 예수님의 무덤에 세워진 “성묘 교회”안에 있습니다. 10)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옷을 벗긴 곳, 11)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눕히고 손과 발에 못을 박은 장소, 12)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 13)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곳, 마지막14)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당시 실제 무덤의 모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아도,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걸어가길 원합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여정(journey)

또는 그냥 ‘길’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한때는 동네를 산책하면서

제 앞에 있는 길들을 사진으로 남긴 적도 있습니다.

매일 보는 길인데 새롭게 보일 때가 있고,

갔던 길을 돌아올 때 새롭게 보이는 감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신앙의 길,

우리가 실제로 걷는 길까지

인생은 말 그대로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생로병사, 우여곡절, 희로애락 –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단어들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힘든 것에는 제외되고

좋은 것만 누리는 특혜를 얻고 싶지만,

마음처럼, 기도하는 것처럼 길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타락한 이후의 세계,

땀을 흘려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만물이 타락해서 신음하는 세상은 나름의 자연법이 존재합니다.

 

때때로 자연법의 창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여느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매번 일어나는 일상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예외입니다.

 

그러니 행여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로 자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실수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지요.

그것은 얼른 교정하면 되는데,

우리가 길을 걸으면서 닥치는 대부분의 문제와 어려움은

생각보다 복합적입니다. 인생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2.

주일에 ‘예수님의 발’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밟고 걷는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을 걸어 다니시면서

기쁨과 평화,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힘든 백성들을 만나시고 만져 주시고 치유와 회복을 선물하셨습니다.

부지런히 걸으셨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까지 걸어오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3년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걷습니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즘은 셀폰 앱이 있어서

우리가 걷는 곳을 다 표시해 줍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발길이 샬롬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이길 원합니다.

 

예외 없이 때로는 무작위로 어려움을 겪지만,

그것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함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리만 어려움에서 배제된다면

그야말로 욕심 아닐까요!

 

대신 인생의 희로애락 속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모든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순간순간 내려 주시는 힘, 지혜, 용기를 갖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진지한 발길입니다. 소중한 발길입니다.

 

남은 올 한 해도 예수님을 따라서

뚜벅뚜벅, 때로는 사뿐사뿐,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이 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1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손과 발 (4)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예수님의 손과 발 가운데, 예수님의 손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손길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하실 수 있었지만, 특별히 만지고 접촉하시면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세상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년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론 갈릴리 호수 건너편과 갈릴리 북쪽 두로와 시돈까지 두루 다니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꺼리던 사마리아 지역도 지나가셨고,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년 공생애 가운데 대부분은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기 직전에는 예루살렘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셨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는 것 외에는 모두 걸어서 다니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길 가운데 오늘은 특별히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삭개오에 관한 말씀은 누가복음에서 갈릴리를 떠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여정을 기록한 여행 보도(누가복음 9-19장) 마지막에  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길목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세무서장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전혀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명예도 얻었지만, 사람들은 뒤에서 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삭개오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마음에 상처를 갖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키가 하도 작아서 군중들 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길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늘 그랬듯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삭개오를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 앞에 멈추신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하루를 머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발길로 경계를 허무시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샬롬)가 임했습니다. 오늘은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가 예수님의 샬롬을 경험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河-

불가사리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작은 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가 드린 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시면서 생긴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번 연속 설교의 주제에 맞춰서
‘예수님의 손’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우리의 문제, 기도 제목, 염려, 불안,

계획 등등 모든 것을 올려 드리기로 다짐했습니다.

 

동시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린

어린아이의 손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배고픔을 잊고

예수님께 내어드린 어린아이의 마음이

신기하고 대견했습니다.

 

이름도 없이 “한 아이’라고 기록된 손이

오 천명이 배불리 먹는 기적의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2.

작은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막상 작은 것을 실천하거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자리에 있으면,

“이 작은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될까”하는

회의가 찾아오고 때로는 주눅이 듭니다.

 

그때, 우리가 배운 오병이어의 기적,

특히 자기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린

어린아이의 작은 손이 큰 힘이 됩니다.

 

제가 종종 인용하는 비슷한 예화도 생각납니다.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 노인이

큰 폭풍이 지나간 다음 날, 해변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폭풍우에 밀려온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가 해변가에 있었습니다.

 

저 멀리 한 아이가 불가사리를 한 마리씩 들어서

바다에 풀어주고 있습니다.

햇볕이 쨍쨍해서 금세 말라 죽을 상황입니다.

한 두 마리를 살려준다고 대세가 바뀔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의 행동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인이 아이에게 다가가서

그렇게 몇 마리를 살려준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기겠냐고 물으니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할아버지, 그래도 제가 바다에 던진 불가사리는 살아날 거예요.”

 

3.

그렇습니다.

작은 일이 소용없어 보여도,

오병이어의 작은 아이의 손처럼 큰 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해변가에서 죽어가는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그래도 바닷가에 들어간 불가사리는 생명을 유지할 겁니다.

 

작은 것에도 힘이 있습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듯이

한 걸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작은 아이가 드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받아 주신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는 작은 것에서 희망을 봅니다.

 

올 한 해,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신

참빛 식구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16:10)

 

 

하나님,

겨자씨 알에서

풍성한 열매를 아는 안목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4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