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을 돌려대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일 애가서 말씀 중에 까다로운 구절을 만났습니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애 3:30)

 

하나님 앞에서 큰 재앙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에 주신 말씀입니다.
앞 구절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통해서 예고하신 매우 큰 재앙이 찾아왔음을 알립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동안의 잘못을 조사하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아침마다 의지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애가서가 알려주는 깊은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이스라엘은
입을 땅의 티끌에 대면서 회개했습니다.
잘못했지만, “혹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소망을 구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를 치는 자들에게 뺨을 돌려대서
치욕으로 배부르게 하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에 재앙이 찾아오니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잘못한 것을 가볍게 피해가지 않고
충분히 죄의 값을 치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수요일에 살펴보는 사무엘하 말씀에서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이
연거푸 치욕스러운 일을 겪는 것도 생각납니다.
다윗은 묵묵히 자신이 감당할 멍에를 지고
어려운 기간을 견디고, 주어진 길을 갑니다.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는 죄값을 충분히 감당하는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의 본심을 발견하고
온전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오른편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5:39)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떠올리게 합니다.

 

비폭력 운동을 주창했던 월터 핑크는 그의 저서 <예수와 비폭력 저항>에서
당시 유대의 습관을 갖고 예수님 말씀을 풀어갑니다.

 

(상황을 눈에 그리면서 자세히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치려면 왼손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 관습에서 왼손 사용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른손 손등으로 상대의 오른편 뺨을
치욕스럽게 “찰싹찰싹” 때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인이 노예를,
또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치욕을 줄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애가서에서 첫 번째 뺨을 맞는 것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때 왼편 뺨을 돌려대면,
상급자는 왼편 손등을 사용해야 상대방에게 치욕을 줄 수 있는데
왼손은 사용 불가이니 할 수 없이 오른손을 들어서 왼편 뺨을 때려야 합니다.
오른손을 충분히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을 동등한 경쟁 상대로 여기는 행위이기에
상급자는 몹시 당황해서 더 이상 폭력을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군가 오른편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려대서
상대방을 어이없게 만드는 식으로
폭력에 저항하길 알려주셨다는 것이 월터 핑크의 해석입니다.
“치욕으로 배불릴 지어다”라는 애가서 말씀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니,
예레미야 애가에서 뺨을 돌려 대면서 치욕을 감수하는 것은
한편에서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뺨을 내리치는 사람에 저항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얘가서 3장 30절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모두 “그(he)”여서 누가 누구인지 헷갈립니다.

 

3.
때때로 어려운 성경 본문을 만납니다.
애가서처럼 재앙을 겪고,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벌로 여기는 말씀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에 모순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근차근 말씀을 곱씹으면
말씀에 담긴 새로운 의미와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본심을 발견합니다.
숨은 그림을 찾고 보물을 찾는 것과 같은 성경 읽기의 묘미입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지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경을 사랑하는 우리의 열정이 만나서
성경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가 3:33)

 
하나님,
아침마다 주시는 주의 말씀, 그 깊이에 스며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 27 이-메일 목회 서신)

새롭게 시작합시다 (4)

– 인자하심을 따라

 

예레미야 애가서를 읽으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대하시는 것이 너무 심하게 느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충분히 경고하셨고, 이스라엘의 죄악도 용서받기 힘들었지만,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멍에를 메우셨다고 말하니,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을 기업삼고 아침마다 새롭게 찾아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애가서 말씀이 대단하게 다가옵니다.

 

애가서 속의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구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정통 신학은 인과응보입니다. 그에 반기를 드는 욥기같은 말씀도 있지만, 대부분 구약성경은 죄와 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애가서 역시 이 같은 구약의 큰 흐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가서 처음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그리고 오늘 본문(33절)에도 알려 주듯이 백성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잠시 벌을 주어서 힘들게 하시지만, 결국에는 구원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악해서 보통 벌을 갖고는 뉘우칠 가능성이 없으니 하나님께서도 궁여지책으로 큰 재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역시 “인자와 긍휼”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에 따른 것입니다. 겉으로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지만, 하나님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제나 변치 않는 인자(헤세드)와 어머니 같은 긍휼(레헴)이 자리잡습니다. 그러니 재난으로 인해서 고난 받는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결국에는 구해 내실 것입니다.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이 여기실 것임이라”(32절)는 말씀이 당시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생하게 하시고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절대 아닙니다. 또한 여기서 “근심”은 힘든 일이 겹치면서 찾아오는 슬픔입니다. 애가서의 슬픔은 죽은 자를 애도할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우리가 마음에 품어야 할 신앙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입술을 땅에 대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소망을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河-

 

멍에를 메고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일 예레미야 애가 본문에서
“멍에(yoke)”라는 표현을 만났습니다.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고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메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일설교에서 의미를 설명했지만,
멍에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멍에는 고대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국들,
심지어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소나 나귀 같은 가축의 목에 걸어서 통제하고,
밧줄로 연결해서 농기구를 끌게 하는 기구입니다.

 

성경에서 멍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우선, 노예 상태 또는 억압의 의미입니다(레26:13).
멍에에서 풀려나는 것을 해방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멍에를 풀어주시는 해방자가 되십니다.

 

둘째로, 감당해야 할 짐입니다(렘27:2)
예레미야가 멍에를 매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것을 감당하는 것을 멍에로 설명했습니다.

 

셋째로, 멍에는 연결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멍에 하나로 두 마리의 소를 연결해서
밭을 갈거나 농사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멍에는 두 번째 감당할 짐에 해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멍에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벗겨 주실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참된 쉼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고 가던 율법의 멍에와 대비됩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과도한 멍에를 강요했습니다(마23:4)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자유가 없었고
신앙과 종교가 도리어 백성들을 억압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것을 “종의 멍에”라고 불렀습니다(갈5:1)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참된 은혜의 종교,
진정한 해방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들에게 새로운 멍에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계명입니다(마22:36)

 

게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죄의 짐도 모두 없애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쉼을 얻게 됩니다.

 

3.
주일 날 말씀드렸듯이
우리 모두 지고 가는 멍에가 있습니다.

 

행여나, 어떤 일이나 사람 또는 환경에 눌린 멍에가 있다면
하나님 안에서 자유케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한 가정이나 세상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감당해야 할 멍에는 기쁘게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마음에 쉼을 얻으면서
올 한 해 주어진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9-30)

 

하나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 20 이-메일 목회 서신)

새롭게 시작합시다 (3)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새롭게 시작합시다>라는 올해 우리 교회 표어에 맞춰서 예레미야 애가서를 읽고 있습니다. 여전히 팬데믹이 지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기다리는 애가서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애가서는 예루살렘의 멸망 앞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눈물로 기록한 슬픔의 노래입니다. 조가(弔歌)에 맞먹는 애가서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했음을 슬퍼합니다. 큰 재앙이 닥쳤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앞세워서 애통하고 부르짖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들의 행위를 조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께 돌아와서 다시 눈물로 회개합니다.

 

애가서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이 한 가운데 위치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애가서 3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벌을 내리신 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벌을 내리시지만, 그 끝에는 구원과 회복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야단치고 꾸짖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어머니의 마음이 들어있는 이유입니다.

 

쑥과 담즙과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이 눈물로 회개하면서 소망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이 겪는 모든 어려움이 결국에는 소망이 된다는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인데 하나님께 소망을 두니 아침이 기다려집니다. 힘든 삶 한 가운데서 아침마다 찾아오시는 성실하신 주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기업삼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애가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고난을 주신 것이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니 고난도 결국에는 소망이고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좋으신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움이 찾아올 때, 잠잠히 주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힘든 멍에를 지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듯이 우리도 자기 멍에를 지고 묵묵히 인생길을 가는 것입니다. 옛날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처럼 자기가 스스로 자초한 멍에라면 입을 땅의 티끌에 대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주님을 찾습니다. 그때 임하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떤 이유든지 인생길에 근심이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때 소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치욕을 당해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주의 백성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河-

지루함을 넘어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두세 문장의 <아침 기도>를 만들어서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아침 기도가 새날을 여는
아침 의식(morning ritual)이 되길 원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신앙의 위인들은
하루를 사는 기도문을 만들고
그것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아침 기도문을 다시 소개합니다:
하나님,
새날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저도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2.
특정한 일을 반복해서 실천하면 그 일이 습관이 되고,
결국에는 성품과 인격으로 승화됩니다.
반복이 주는 효과요 선물입니다.

 

물론,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싫증이 나고 지루함도 느낍니다.
그때부터 그 일을 소홀히 하게 되고
많은 경우 자기도 모르게 슬쩍 내려놓습니다.

 

별것 아닌 일이라면 괜찮지만,
중요한 일이었는데 지루해서 포기했다면 꽤 아쉽습니다.

 

우리 말로
<원자 습관/Atomic habits> 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책의 저자는
원자 알갱이같이 작은 일들이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 <딱 맞는 규칙 goldilocks rule>입니다.
어떤 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너무 쉬운 과제도, 너무 어려운 과제도 아닌 딱 맞는 일을 찾아서
규칙적으로 실천하라는 제안입니다.

 

테니스를 배운다면,
너무 쉬운 상대를 택해서 쉽게 이길 생각을 하거나
너무 잘하는 상대를 만나서 기죽지 말고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잘하는 “딱 맞는 상대”와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다 보면 실력이 일취월장한다는 것입니다.

 

지루해지거나 중간에 포기하기 쉬운 과제일수록
자신에게 딱 맞는 방식을 선택해서
끈기를 갖고 마지막까지 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아침마다 드리는 기도 역시
언젠가 지루해질 것입니다. 시들해질 것입니다.

 

그래도 쉼 없는 반복을 통해서
아침 기도가 의식/습관이 되고
아침 기도의 유익과 힘을 실제로 맛보았을 때,
아침 기도가 흥미진진한 딱 맞는 기도(goldilocks prayer)가 될 것입니다.

 

아침 기도뿐 아니라
세상에서 소중하고 귀한 일들은 지루한 반복이 많습니다.
눈을 크게 뜨게 만들 정도의 흥미/재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루함을 넘어서 신비로운 영역까지 꿋꿋하게 나가고
지루함을 예술로 발전시키는 카이로스를 살기 원합니다.

 

오늘 아침도 기도로 열고
힘차게, 열심히, 그리고 희망차게 시작합시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지루함을 극복할 신앙의 신비를 맛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 13이-메일 목회 서신)

새롭게 시작합시다 (2)

아침마다 새로우니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심한 것이 3일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새해가 되면 너도 나도 새해 결심을 정해서 노트하고 가족이나 이웃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새해 결심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새해 첫 달이 지나면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회자됩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예레미야 애가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반역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죽음을 맞이한 듯 폐허가 된 것을 애도한 슬픔의 노래입니다. 절망이요 깜깜한 어둠입니다. 전쟁으로 나라를 잃고 나니 그 재난이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들에게 옮겨와서 어린이까지 거리에 내팽개쳐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쑥과 담즙과 같은 고난이 밀어닥친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마음과 손을 들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낙심한 마음을 그대로 갖고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때 그 고난이 “오히려 소망”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그들이 하나님 백성의 자리를 지키도록 회복시켜 주시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헤세드)와 긍휼(라헴)의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침마다 성실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주의 성실”은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심입니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태양이 세상을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규칙적이시고, 일정하시고, 틀림없으신 분입니다. 이렇게 성실하신 주님께서 아침마다 함께 하시니, 매일 아침이 새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애3:23). 올해 우리 교회 표어 <새롭게 삽시다>에 해당하는 주제절입니다. 매일같이 주님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 맞이하는 아침이 아니라, 성실하신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는 새로운 아침입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내가 그를 바라리라.”(애3:24).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합니다. 기업(portion), 자신이 추구하고 갖고 싶은 몫입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올 한해 아침마다 새롭고 성실하신 주님과 동행합시다. -河-

아침마다 새로우니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새롭게 시작합시다>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새해는

달력이 알려주는 1월 1일입니다.

 

인류는 매우 지혜로워서

수천 년 전에 1년이 365일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밤에 뜨는 달의 변화를 보고 음력을 만들어서

농사를 비롯한 실제 삶에 적용했습니다.

 

4천여 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현재 우리가 쓰는

태양력을 발명해서, 1년 365일, 12개월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1년은 정확히 365.24219879일이어서

365일을 1년으로 하면 나중에 가서 차이가 생깁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 (1582년)>에서는

4년마다 찾아오는 윤달로 차이를 조정했습니다.

 

이처럼 달력을 따라서 1년, 12개월을 사는 것은

매우 오래전부터 인류가 발명하고 실천한 삶의 양식입니다.

 

2.

달력을 따라서 사는 것을

헬라어로 <크로노스>라고 부르고,

단지 찾아오는 달력의 날짜를 살기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를 찾으면서 창조적인 시간을 만드는 것을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6일에 걸쳐서 세상을 만드셨다고 알려주지만,

6일이라는 시간 크로노스보다

빛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신 창조 사건,

즉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중요합니다.

 

크로노스라는 시간에 떠밀려 살면,

가는 시간이 아쉽고 오는 시간이 두렵습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우리가 시간을 통제합니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스스로 의미 있는 시간으로 가득 채워보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의 흐름보다 시간에 채워 넣기(창조하기)에 집중하게 됩니다.

 

꿈 같은 휴가를 다녀오거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해내면

그 시간이 꽉 찬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허송세월을 보내면

하루는 물론 일주일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3.

새롭게 2022년을 맞았습니다.

올해도 우리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두려움과 기대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에

힘차게 그리고 담대하게 한 해를 시작합니다.

 

올해 주제 말씀처럼

아침마다 새롭게 찾아오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매일같이 성실하심을 보여주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2022년 한 해는 카이로스, 창조적인 순간들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주님과 더불어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6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