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9

타작 마당에서

 

4장으로 이뤄진 구약성경 룻기는 1장에서 모압으로 피난 간 나오미 가족에 닥친 재난을, 2장은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이 보아스라는 유력한 자를 만나서 살아남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서 룻이 우연히 간 곳이 보아스의 밭이었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왔습니다. <우연히 – 마침>이라는 공식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 즉 하나님의 섭리를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최대한 배려하면서 추수가 끝날 때까지 자기 밭에서 보리 이삭을 줍도록 허락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하는 보아스의 성품과 행동에서 예수님이 생각날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룻은 보리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 밭에서 보리 이삭을 주우면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3장은 룻기의 절정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을 불러서 안식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룻이 홀몸으로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있지만, 앞으로 이스라엘 태생도 아닌 모압 여인 룻이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매우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보아스가 밭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을 때, 보아스를 찾아가서 먼저 프러포즈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룻이 보리 이삭을 주워 올 때마다 보아스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전했고, 그때마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확신했기에 위험을 무릎 쓰고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시킨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밤중에 보아스가 보니 자기 발치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절)고 또박또박 이야기합니다. 옷자락을 덮는 것은 보아스가 룻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날개깃으로 룻을 덮어주실 것을 바라면서 축복했는데, 룻이 그 일을 지금 보아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친절하게 룻을 맞이합니다. 행여나 룻에게 피해가 생길까 염려되어서 아침까지 자신과 함께 있고,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줍니다. 보아스도 룻이 마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계획대로 일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렇게 룻과 보아스가 인연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두 사람 위에 매우 구체적으로 임했습니다. -河-

염려와 불안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 성경 공부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공부할 주제 중에
두려움과 염려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두려움(fear)은 사람, 상황,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느끼는 말 그대로 공포입니다.
적당한 두려움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하지만
지나친 두려움은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듭니다.

 

꼭 필요한 두려움도 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敬畏 the fear of God)라고 부릅니다.

 

두려움과 달리
염려(worry)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황을 미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안이 없기에 두려움보다 강도가 작을 수 있지만
생각이나 삶을 어수선하게 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또 다른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우리 안에서 생기는 염려의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들임을 알면서도
연약한 우리 마음이 염려에 휩싸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부탁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두려움과 염려가 우리를 억누르고 신앙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가 “불안(anxiety)”입니다.

 

불안은
마음과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면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입니다.
불안하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2.
팬데믹이 길어지고
앞길에 대한 막막함, 맥락 없이 닥치는 어려움 등이 닥칠 때
두려움, 염려, 불안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우리가 진작 두려워할 대상이 하나님임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해야 합니다.
피난처와 방패 되시는 하나님 품으로 달려들어야 합니다.

 

소리 없이 침투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소리 없이 침묵하면서
깊은 기도에 들어가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염려를 물리치는 길은 기도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던지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훈련해서 습관이 되면 어느 정도 염려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불안과 염려는 비슷합니다.
대신 불안이 심해지면
상담을 받거나 의사의 안내를 받는 것도 좋습니다.

 

일상적인 불안이라면
그 순간에 소리 내서 기도하거나 찬양하실 것을 권합니다.
찬양은 어두운 세력을 쫓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이 밝아지고 가벼워질 때까지
한자리에 앉아서 찬양하면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번에 끝날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염려,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실천해야 할 신앙 훈련입니다.

 

3.
부활절 이후를 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 안팎에서 밀려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부활의 능력으로 극복하기 원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부활의 주님을 따라서 주어진 인생길, 신앙의 길,
일상을 살기 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부활을 살게 하소서.
찾아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이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8 이-메일 목회 서신)

2021년 부활절에

올해 부활절도 교회에서 모이지 못하고 흩어져서 맞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서 특별한 부활절이 한 해 더 연장된 셈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물론, 한 해 동안 흩어져서 예배했기에 영상으로 예배하며 부활절을 맞는 것이 특별하지 않습니다. 일상이 된 느낌입니다. 그래도 함께 모여서 부활절을 맞고, 예배 후에 부활절 만찬을 나누던 때가 그립습니다. 내년을 기약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오합지졸이었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고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제자들 역시 흩어지고 기독교는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제일 먼저 보이시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연거푸 나타나셨습니다.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보낼 당시에 살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물론 바울 자신의 전도도 헛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경험과 당시 살아있던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본 제자들과 수백 명의 증인이 있었다는 것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논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은 진공 속에서 벌어지는 이론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일상과 세상 속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고백합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역사이며 삶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에 개입하셔서 생긴 사건입니다. 자연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속에 드러난 유일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능력입니다.

 

올해도 흩어져서 부활절을 맞지만, 부활만이 갖고 있는 생명, 사실, 능력이 참빛 식구들 위에 구체적으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나그네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 룻기를 읽고 있습니다.
룻기는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면서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간
엘리멜렉의 가족사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고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만 살아남았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꿈을 갖고 떠난 이민길에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와
10여년을 모압에서 이민자(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오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당시 홀로된 여성의 삶과 중첩되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모압 출신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옵니다.

 

어머니의 민족이 자기 민족이 되고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하고 떠난 여정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역이민을 했지만,
모압 출신 룻은 베들레헴의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언제나
“모압 출신” “모압 여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선민의식이 컸던 이스라엘에서 룻이 겪었을 나그네 서러움이 느껴집니다.

 

3.
룻과 나오미만 이민자로 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부터 나그네(이민자)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가나안 땅에 온 아브라함,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동네로 피난 갔던 야곱,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과 그의 후손들까지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함께 특별히 나그네를
환대하고 대접하라고 부탁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3년 공생애 동안 머리 둘 곳 없는 노숙자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대신, 당시에 나그네로 살았던 땅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나그네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도
나그네로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4.
요즘처럼 미국에서 나그네로 사는 심정이
복잡한 때도 별로 없었습니다.

 

인종 차별은 미국의 고질적 문제라고 생각했고
1992년 LA 폭동과 소소하게 일어나는 유사한 갈등으로 경각심을 가졌지만
팬데믹 이후 아시안 혐오가 미국의 큰 사회문제가 되고 보니
우리의 이민 생활이 나그네 삶인 것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조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도 내야 합니다.
타인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오길 기도해야 합니다.

 

룻기의 보아스가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돕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왔다가
본향인 하나님께로 가는 이민자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23: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걸어가는 나그네 길에
주께서 꼭 동행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1 이-메일 목회 서신)

룻기 8

룻기의 세 가지 주제

 

그동안 룻기를 함께 읽으면서, 룻기를 관통하는 세 가지 주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예정과 섭리를 소개했습니다.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이나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온 것은 미리 짜인 각본을 뜻하는 예정보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함께 하신 섭리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함께 하시고,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룻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두루 발견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헤세드>입니다. 오늘 본문 속 나오미의 말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0절)에서 “은혜”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입니다. 조건 없이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신약의 <아가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룻기에서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배려와 도움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압 여인 룻을 차별없이 존중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삭줍기를 돕고 넉넉한 마음으로 룻을 대접하면서 하나님 사랑, <헤세드>를 실천하였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는 보아스와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보아스의 성품과 행동에 예수님이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고 생계를 해결하는 룻의 모습도 하나님 사랑입니다. 나오미가 힘들어할 때 룻이 나섭니다. 모압을 떠날 때 나오미와 했던 약속을 룻이 모두 지킵니다. 나오미 역시 룻과 보아스 배후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이처럼 룻기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 즉 섭리가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름답고 특별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룻기의 중요한 주제는 “기업 무를 자 (고엘)”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친족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고 구합니다. 행여나 종으로 팔리면 돈을 지불하고 데려오는 등 친족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였습니다.

 

히브리어 <고엘>은 구원할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장차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삼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로 삼으신 것이 생각납니다. 룻과 보아스의 후손으로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난 것도 연결되니, 성경에서 룻기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세 가지 주제, 하나님의 섭리, 헤세드, 고엘을 기억하고 룻기를 읽어 나가면 룻기를 통한 말씀의 은혜가 더욱더 풍성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河-

숨은 보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미국 신문과 방송에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동부 코네티컷 뉴헤이븐 근처에서
어떤 사람이 연꽃 모양의 도자기 그릇을
거라지 세일(garage sale)에서 샀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도자기에 조예가 깊은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6 인치에 불과한 도자기 그릇 하나가 35불에 나왔으니
우리가 알다시피 거라지 세일치고는 비싼 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흥정하지 않고 35불에 도자기를 삽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진을 찍어서 진품 여부를 알아보았고
이 도자기는 세계에서 여섯 개밖에 없는
15세기 명나라 영락 황제 시대의 유물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소더비 경매에서 이 도자기 그릇 한 개가
무려 $721,800에 낙찰되었습니다.

 

소더비에서 중국 유물을 담당하는 맥카티어(McAteer)라는 분은
자기도 생전에 이런 고대 유물을 볼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서
고대 유물들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2.
중국 도자기를 야드 세일에서 산 사람은
귀한 유물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녀갔지만,
35불이나 주고 “연꽃 그릇 (lotus bowl)” 한 개를
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다른 물건에 눈길을 주었겠지요.

 

신앙에도 안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도
밭에서 일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서둘러 집에 와서는 모든 것을 팔아서
보화가 숨겨진 밭을 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숨은 보화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선입견,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가득 차서
진작 중요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3.
팬데믹이라고 하지만
어느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질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도/신앙도 내팽개칠 기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꼭 붙들고 삽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보화와 같은 복음을 살 수 있습니다.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오늘도 일상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 신앙의 보물을 찾아내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하나님,
예수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행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25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