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사랑

좋은 아침입니다.

 

1.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에 대한 말씀을 배우면서

하나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함임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행하는 것이고

그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뢰의 아들이라는 사도 요한의 별명대로

‘사랑은 행함’이라는 그의 외침이

천둥번개처럼 우리 마음에 울려 퍼집니다.

 

2.

지난 주일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4:18)

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본문의 두려움은

우리의 삶이나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세상 종말(또는 개인의 종말)의 순간 느끼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구원의 요건으로 믿음과

동시에 ‘사랑’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날에

창세 전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길은

가장 작은 형제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며

그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평생 요절로 삼자고 제안했습니다: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 (마태 25:40)

 

3.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도

마지막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 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때 꼭 필요한 것이

우리 가운데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행했던 사랑 여부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실천 여부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어도

내 욕심과 야망을 채우면서 이기적으로 살고

베풀고 나누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다면

훗날 두려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4.

요한일서 4장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욕심껏 사는 것의 끝을 생각하며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 필수적입니다.

그때,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가장 작은 사람, 가장 약한 자에게

주님의 사랑을 아낌없이 행하기 원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요일4:17)

By this is love perfected with us,

so that we may have confidence for the day of judgment (1John 4:17)

 

하나님,

담대함을 가질 정도로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29이-메일 목회 서신)

 

 

요한일서 (5)

–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사랑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요한일서 4장은 매우 세심하게 하나님 사랑과 우리의 사랑 그리고 믿음을 연결합니다. 첫 번째 문단(1-6절)에서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길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하늘에 속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두 번째 문단(7-10절)은 사도 요한의 교훈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 듯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임했는지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화목 제물로 드려지는 실천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세 번째 문단(11-16절)은 첫째와 둘째 말씀을 합쳐놓은 것 같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화목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시는 성령까지 삼위 하나님이 등장한 것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길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도 완성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일서 4장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분별하는 믿음과 실천하는 사랑은 마지막 때까지 효력이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온전히 이뤄지면, 마지막 심판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담대함의 반대말이 두려움입니다. 누구나 마지막 심판을 생각하면 두렵게 마련입니다. 심판과 형벌이 따를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선언합니다. 사랑이 마지막 심판의 두려움까지 극복할 수 있다면, 삶의 여정에서 마주치는 두려움 정도는 쉽게 이길 것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화목 제물로 드리시면서 자신의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도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형제 사랑 속에서 완성됩니다.

 

우리 믿음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헛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고, 세상에서 사랑의 파장을 만들기 원합니다. -河-

홀로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1.

팬데믹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밖에 나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닙니다.

마스크 없이는 공공건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팬데믹 전, 특히 미국에서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도 악수할 수 없습니다.

악수는 커녕 6피트 거리를 두고 얘기해야 합니다.

자칫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질까 염려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변화는

교회에서 예배로 모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대면예배 대신

영상으로 예배한 지 7개월이 넘었습니다.

 

팬데믹 전에는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필수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보수적인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중요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코로나바이러스가

길게는 수천 년 이어오던 주일 예배 개념을

단숨에 바꿔 놓았습니다.

 

이제는 유튜브 또는 zoom으로 드리는

예배와 모임이 일상화되었고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2.

팬데믹과 동시에

신앙생활의 모습이 바뀌다 보니

개인과 가정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졌습니다.

 

그동안 주일 예배 참석에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면,

이제는 교회에 오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관리하고, 세워가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 묻어가던 신앙에서

흩어진 자리에서 스스로 홀로서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그동안 안일했던 신앙을 되돌아보는 기회도 됩니다.

 

대신, 신앙의 홀로서기에 실패한다면

그동안 세워놓은 신앙의 집이 흔들흔들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가정의 역할도 중요해졌습니다.

2500여년 동안 각지에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가정교육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했듯이

우리도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에 힘을 써야 할 때가 왔습니다.

 

3.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심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도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속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자신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역사를 설계하며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회복을 꿈꾸었 듯이

우리도 팬데믹으로 집에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과거에 당연하게 여겼던 신앙을 되짚어 보고,

진정한 신앙,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팬데믹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답답함에 손발이 꽁꽁 묶인 듯 하지만,

팬데믹이 깨우치는 교훈과 팬데믹 기간에만 누리는 선물을 통해서

우리 신앙이 더 깊어지고, 어디에 있든지 흔들리지 않는

홀로서기 신앙을 갖추기 원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32:24)

And Jacob was left alone.

And a man wrestled with him until the breaking of the day. (Gen 32:24)

 

하나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홀로 설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22이-메일 목회 서신)

 

 

 

 

요한일서 (4)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을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4:1-6). 교회 안에 들어온 미혹의 영을 분리해 내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것을 추구하라는 요청입니다. 신앙에서 머리(교리, doctrine)에 해당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사도 요한의 교훈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습니다(4:7-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도착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화목 제물로 삼으시면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고 현명해도 거기에 사랑이 빠지면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오늘 본문은(4:11-16)은 지난 두 시간 동안 살펴본 말씀의 통합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의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그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1절). 여기서 “마땅하다”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적 요청, 즉 의무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 소개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화목 제물로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고 충분히 느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이 의무가 아니라 특권으로 다가옵니다. 분수가 흘러 넘쳐서 물이 아래로 떨어지듯이 저절로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는 신비주의자들도 있었고, 자신들만 하나님을 아는 비법을 갖고 있다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않았고, 하나님을 보면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에 일침을 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12절).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에 참여하는 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믿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처럼 사랑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갑니다. 믿음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느끼기 원합니다. -河-

아가페 사랑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에서 사랑장을 찾으라면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요즘 주일에 살펴보는 요한일서 4장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알려줍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의 시작점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사랑을 믿음과 연결시켰습니다.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말하기 쉬운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가짜가 판을 치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2.

사도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아가페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감정, 욕심, 서로 탐닉하는 에로스 사랑이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서 보내시고

화목 제물로 내어주신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만큼 숭고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길 부탁하십니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라는 책에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음은

특권이라고 강조합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전유물인데

남녀노소, 빈부 귀천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전유물인 아가페 사랑을 나눠 주시고

그 사랑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그 사람도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순간

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최고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16)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고,

그것을 세상에 나누기 원합니다.

 

비록 우리 사랑의 지경이 넓지 않고

사랑의 분량도 크지 않고

자랑할 만한 사랑도 아니지만,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받은

<아가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할 때나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아가페> 사랑임을 꼭 기억합시다.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1:5)

The aim of our charge is love that issues

from a pure heart and a good conscience and a sincere faith. (1Tim 1:5)

 

하나님,

<아가페>사랑을 나눌 특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15이-메일 목회 서신)

 

 

 

 

 

 

 

요한일서 (3)

서로 사랑하라

 

교회에 들어온 또는 밖에서 교회를 흔드는 그릇된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한 요한일서 4장은 7절로 오면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판을 치고 교회를 흔들어도 하나님께 속한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세력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일수록 교회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고 교회 안에 침투한 악한 세력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을 강조하는 커다란 이유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답게 요한일서 전반부에서도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을 밝히는 빛인데, 형제를 사랑하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면 어둠에 행하는 것입니다(요일2:9-11). 또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기를 부탁하면서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갖고 신앙은 물론 형제와의 관계와 세상의 삶을 풀어나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지향성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결정됩니다.

 

사랑에는 진실함과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성이 없는 사랑은 아무 힘이 없고 위선적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진실한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최고의 사랑을 직접 실천하신 것입니다 (요15:13).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사랑 그 자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요일4:8). 하나님께서 사랑의 근원이고 시작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만, 우리 안에서 생기는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나눠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전파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을 모르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먼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느끼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河-

소중한 하루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번 사도 요한을 소개하면서

100세 가까이 장수하면서

요한복음, 세 권의 요한 서신,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노년의 사도 요한은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100세 시대가 되었다지만

단지 100세를 사는 것보다

100년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웃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감사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꽉 채워진 100세를 산다면

그야말로 사도 요한에 버금가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비록 100세를 채우지 못하시고

9월 30일에 하나님께 가셨지만,

94년의 성상을 멋지게 사신 선배 그리스도인이 계십니다.

 

경기도 남양주 매그너스 요양병원에서

대한민국 현역 최고령 의사로 일하셨던 한원주 원장님이십니다.

실제 직책은 과장이지만, 사람들은 “원장님”으로 불렀답니다.

 

한 원장님은

구한말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전형적인 기독교 집안 출신입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의사가 되었고,

물리학을 전공한 남편과 함께 유학 길에 올라서

내과 전문의가 된 후에 미국에서 10년 동안 의사 생활을 하다가

1968년에 귀국해서 병원을 개업하셨습니다.

당시는 유학을 다녀온 의사가 드물어서 돈을 많이 버셨답니다.

 

그런데

병원을 개원한 지 10년 만인 1978년,

남편이 먼저 하나님께 가면서

한원주 원장님의 인생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하늘처럼 의지하던 남편이 없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그때 한 원장님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남편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십니다.

 

“뭘 그렇게 울고불고하느냐, 넌 누구보다도 부요하게 살아왔다.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았고,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미국 구경도 많이 했고

병원이 잘 돼서 돈도 많이 벌지 않았느냐.

너는 네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냐?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 차려라.” -신앙세계, 2019-

 

한 원장님은 월수입이 백여만 원밖에 안 되는

<우리들 의원>을 개원하고 의료선교를 시작해서

20년 동안 어려운 이웃을 치료하셨습니다.

 

82세로 우리들 의원에서 은퇴하신 후에도

의료 봉사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가시기 직전까지

남양주 요양병원에서 치매 환자를 돌보신 것입니다.

 

운동이 필요하다며

2시간 반 동안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고,

환자들의 병상을 몸소 방문하시고, 함께 걸으시면서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의사로 활동하셨습니다.

 

한원주 원장님께서 하나님께 가시면서

가족들과 직원들에게 다음의 세 마디를 남기셨답니다: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은

‘단 한 번”입니다.

 

매일 맞이하는

우리 인생의 한 날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입니다.

 

94세를 멋지게 사신 한원주 원장님의 삶도

하루하루가 모여서 94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안에서 멋지고, 근사하게 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도움이시라 (시편 46:1)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Ps 46:1)

 

하나님,

오늘 하루, 우리 모든 참빛 식구들께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을 살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8이-메일 목회 서신)